휠체어 탄 모델, 로렌 와서
스물네 살이 되던 해, 로렌 와서의 세상이 무너졌다. 그러나 10년 후 그녀는 모델을 재정의한다.
빛나는 갑옷을 입은 기사 같은 모습. 지난 5월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루이 비통 크루즈 쇼를 마무리하면서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아름다운 브루탈리즘 양식의 소크 생명 과학 연구소(Salk Institute for Biological Studies) 뒤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며 콘크리트 런웨이에 긴 그림자를 드리울 때, 나는 바닥에 끌릴 듯한 은색 코트를 입고 메탈릭한 반바지 아래에서 초저녁 노을처럼 황금빛을 발하는 다리로 모델 군단을 이끌며 힘차게 걸어 나갔다. 의상과 무대, 피날레 행렬의 선두를 맡은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곳에 있다는 것 자체까지, 쇼와 관련된 모든 일은 온통 믿기지 않는 것뿐이었다. 10년 전쯤 독성 쇼크 증후군(Toxic Shock Syndrome, TSS)으로 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독성 쇼크 증후군은 체내에서 황색포도상구균 박테리아가 과도하게 생성되면서 발생하며, 주로 탐폰을 비롯한 여성 위생용품 사용과 관련이 있다. 나는 탐폰을 처방대로 사용했지만, 독성 쇼크 증후군으로 인해 처음에는 오른 다리, 4년 전에는 왼 다리마저 절단해야 했다. 24세의 내 삶이 정말 하룻밤 사이에 180도 바뀌고 말았다.
모델 부부 파멜라 쿡(Pamela Cook)과 로버트 와서버거(Robert Wasserburger) 사이에서 태어나 1990년대 초 캘리포니아에서 자란 내 세상은 그때까지 절세미인으로 정의되고 있었다. 스테파니 세이모어, 신디 크로포드, 나오미 캠벨 같은 당대 대표 미녀에 둘러싸여 지냈으니 오죽했겠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내 어린 시절이 평범하지 않았다는걸 깨달았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내가 아는 전부였다. 부모님의 전철을 밟기 시작한 것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첫 모델 작업이 생후 2개월에 엄마와 함께한 <보그 이탈리아> 화보 촬영이었으니 말이다. 나이가 들면서 운동에도 열정을 갖게 되었다. 특히 농구를 정말 좋아했다. 나는 늘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잘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왔다.
그리고 2012년 10월 초순의 어느 날, 샌타모니카의 한 병실에서 의학적으로 유도된 혼수상태로부터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깨어났다. 단순한 인지 불능 상태가 아니었다. 나는 내 정체성, 당시 나를 ‘나’답게 만든다고 생각한 아름다움과 신체를 강탈당했다. 집에서 무반응 상태로 발견된 나는 거의 42도에 이르는 고열에, 신부전을 일으킨 상태였다. 두 번의 심장마비를 겪었고, 생존 가능성은 겨우 1%였다. 생명 유지 장치를 연결한 후 거의 열흘 만에 의식을 찾았고, 복수가 가득 차 몸무게가 90kg에 육박했으며, 머리칼이 다 엉키는 바람에 빡빡 밀어야 했다. 괴사된 다리는 검게 변했다. 간호사들끼리 젊은 여자 한 명이 다리 절단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엿듣고는 내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3개월 뒤 휠체어에 앉은 채 병원 문을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어쩔 줄 모른 채 새로 맞닥뜨린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8개월 동안 혼자 휠체어를 타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 스툴에 앉아 어째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신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따졌다. 나는 다시 사랑받지도, 다시 필요한 사람이 되지도 못할 것 같았다. 패션 세계가 나를 절대 받아주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한동안은 인생 최고의 어두운 순간을 보내며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 아름다움이 단지 육체적인 것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들과 세상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기 위해 나 자신을 깊이 파헤쳐야 했다. 결국 나는 보조기가 더 독립적인 삶의 과정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뻣뻣한 의족을 보며, 그것을 어떻게 ‘나’로 만들어갈지 고민에 빠졌다.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위해, 정체성에 맞는 무언가를 만들기로 했다. 나는 늘 금을 좋아했다. 그래서 내 의족을 주얼리 작품으로 만들어, 사람들이 주목하고 매료되는 대상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 결과 거의 예술 작품 같은 의족이 탄생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통증에 시달렸다. 왼발이 심하게 손상되어 매주 상처를 치료하고, 결국 수술까지 여러 번 받아야 했다. 서른에 가까운 나이였고, 엄마가 될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 운동선수의 삶을 되찾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하지만 그 고통이 나를 옥죄었고, 일상을 싫어하게 만들었다. 나는 두 번째 절단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미래와 행복을 위한 최선의 결정이었다. 그것은 내가 통제권을 회복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커리어에서도 같은 노력을 기울였다. TSS에 걸린 후 지난 10년간, 나는 패션 산업이 서서히 포용성을 받아들이는 것을 지켜봤다. 나는 내가 설 자리를 위해 사투를 벌여야 했다. 나와 같은 모델을 위한 청사진은 없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런웨이에 오른 선례도 거의 없었다. 나는 나만의 길, 나만의 존재 계획을 수립해야 했다. 루이 비통 패션쇼에 서면서 원래 자리를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시에 나는 단순한 핵심 신념을 하나 고수하고 있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어떤 옷이든 입을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다리를 금으로 만들었다는 것뿐이다. 이 신념은 삶의 전반으로 확대된다. 동성애자인 나는 누구나 자신에게 적합한 사람을 만나야 하고,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모두 같은 인간이기에, 사랑하는 사람이나 겉모습 때문에 우리가 소외되지 않아야 한다. 우리를 본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사랑은 그저 사랑’이라는 걸 깨달았으며, 누구나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가 아직 그 수준에 완전히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행동한다. 그 점이 중요하다.
사실 시중에 안전한 여성용 위생용품은 없다. 탐폰을 사용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그 정보와 투명성을 더 제고해야 한다. 그 제품을 제조하는 기업에도 책임을 부과해야 한다. 탐폰 광고를 보면 해변에서 뛰어다니는 소녀가 등장한다. 하지만 그 제품이 유발할 수 있는 잠재적이고 치명적인 피해에 대한 경고 문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나는 항상 담배를 그 예로 든다. 담뱃갑을 보면 흡연 후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알 수 있다. 흡연 여부는 각자의 선택이다. 여성용 위생용품에도 마찬가지로 적용해야 한다. 여성 보건을 언제쯤 진지하게 고려할지 의문이다.
회복 초기부터의 내 경험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통해 일반 대중뿐 아니라 힘을 가진 사람들이 이런 일에 주목했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내가 겪은 암울한 현실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내 고통과 트라우마를 통해 변화를 촉구하기를 희망한다.
감사하게도, 나는 더 이상 신을 향한 고함으로 일상을 채우지 않는다. 나는 기동력을 되찾았다. 요즘은 뉴욕 마라톤에 도전하기 위해 굉장히 멋진 장비를 장착하고 맹훈련 중이다. 화창한 LA에서 살기, 반려견 세 마리와 산책하기, 멋진 여자 친구와 사랑하기. 이런 소소한 것들을 통해 가장 큰 기쁨을 얻는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 것을 다시 느낄 수 있다. 내 삶이 더없이 아름답다.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평생 이렇게 살아온 것 같다. 나는 전과 다름없이 행운과 축복이 넘치는 삶을 살고 있으니까.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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