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 "과거는 아주 가끔씩 돌아봐야 더 의미 있지 않을까요?"
서울의 아이유, 밀라노의 아이유. 그녀는 같을까, 다를까.
대한민국 여자 가수 최초로 올림픽주경기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치르고 구찌 글로벌 앰배서더로 밀라노에 다녀온 아이유가 그림이 가득한 방에서〈보그〉에 전한다. ‘좀 이러면 어때’라고 생각하니 더 즐거워졌다고 아이유는 말한다.
구찌 글로벌 앰배서더로서 2023 S/S 밀라노 컬렉션 쇼에 참석했어요. 이번 컬렉션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무엇인가요? 마음에 드는 룩, 아이템은 무엇인가요?
입장하자마자 쇼장이 아담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객석도 많지 않았고요. 그러다 쇼 중반부에 갑자기 무대 중앙에 있던 가벽이 올라가면서 반대편에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은 규모의 쇼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똑같은 피스를 입고 각자의 무대를 걷던 쌍둥이 모델들이 중앙으로 모여 손을 잡은 채로 워킹했어요. 시각적으로나, 의미로 보나 모든 부분에서 흥미로운 퍼포먼스였어요. 제가 멜빵바지를 좋아하는데 이번 시즌에 멜빵이 있더라고요! 내 사이즈도 있나? 흥분됐어요.
이번 구찌 ‘트윈스버그(Twinsburg)’ 컬렉션에선 쌍둥이 모델 68쌍이 등장했어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어머니가 쌍둥이 자매라는, 개인 경험에서 기인했죠. 아티스트는 스쳐가는 작은 경험, 익숙한 삶의 단면을 놓치지 않고 작품화하는 능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아이유 음악의 스토리텔링, 독특한 가사 표현도 그 예라고 생각합니다. 일상 경험을 작품화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나요? 관찰이나 메모를 많이 한다든가, 뒤집어 생각하려 한다든가…
오히려 예전에 비해 메모하는 습관은 많이 없어졌어요. 여전히 일기를 쓰긴 하지만 전처럼 강박적으로 쓰진 않고요. ‘남을 말이면 남고 아니면 까먹어라’ 하는 식이에요. 아이템이 될 만한 생각을 막 붙잡아두려고 노력하는 시기는 지난 지 꽤 됐어요. (하지만 트랙 수가 많은 정규 앨범을 작업할 때는 분명히 다시 연연하게 될 거예요.) 요즘 워낙 개성 있는 가사를 직접 쓰는 아티스트가 많잖아요. 저도 제가 잘할 수 있고 오래 매달릴 수 있는 주제 위주로 깃발을 꽂아두는 편이에요. 요즘은 ‘패턴’과 ‘규칙’에 꽂혔어요. 살면서 점점 더 느끼는데 저는 일상에 규칙을 꽤 많이 정해놓고 사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게 어긋날 때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요. 이런 생각을 다음 음악에 녹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어느 밀라노 컬렉터의 집에서 <보그> 커버 촬영을 했습니다. 그림, 고가구 등의 수집품이 가득한 집이었죠. 아이유의 집에는 무엇이 가득한가요? 지금 이 답변을 쓰는 중에도 그것들에 둘러싸여 있나요?
질문을 받고 둘러보니 의외로 집 안 곳곳에 그림이 많군요. 저는 주로 방에서만 생활하는데요, 특히 제 방에 지인들과 팬들이 직접 그려서 선물해준 그림이 많아요. 캔버스에 멋들어지게 그려진 그림도 있고 친구의 연습장에서 찢어온 습작품도 많고요. 제가 그림에 영 재주가 없어서 그런지 누군가가 의미 있는 그림을 그려서 선물하면 큰 감동을 받아요. 애정과 시간과 수고가 녹아 있잖아요. 정말 소중한 그림은 제 방 한쪽 곳간 같은 공간에 모아놓았어요. 이번 콘서트에서는 그 공간을 재현해 무대의 한 섹션으로 올리기도 했어요.
코로나19가 극심하던 2020~2021년을 빼면, 2012년 이래 매년 단독 콘서트를 열고 있어요. 팬을 직접 마주하는 공연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한 해 농사 잘 지어서 팬들과 함께 자축하는 파티. 콘서트만큼은 다른 이벤트로 대체하기 어렵잖아요. 공연에 오시는 팬들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아실 거예요.
2012년의 첫 단독 콘서트가 <Real Fantasy>였죠. 그때 첫 무대가 어땠는지 기억나요?
아주 생생하진 않지만 당연히 기억나죠. 첫 공연을 전국 투어로 했어요. 모객부터 컨디션 관리, 진행, 매주 이어지는 공연에 텐션이 느슨해지지 않게 긴장감을 유지하는 방법까지, 모든 게 막막하고 무서웠어요. 어떻게 하는 건지 가르쳐주지도 않고 처음부터 어찌 이리 큰일을 시키냐고 당시에는 프로듀서를 조금 원망하기도 했는데 이번 공연 끝나고 나서 “그때 강하게 키워줘서 감사하다”고 따로 연락도 드렸어요. 스스로 고무적인 점은 10년 전 첫 콘서트를 보러 오신 부모님이 “너 혼자 채우기에는 무대가 큰 것 같다”고 하셨는데 이번 공연 끝나고 나서는 두 분께서 그러시더라고요. “100m가 넘는 무대가 전혀 커 보이지 않더라”고.
지난 9월 공연은 정말이지 대단했어요. 잠실종합운동장 올림픽주경기장에서 ‘한국 여자 가수 최초’로 단독 콘서트를 열었죠. 무대에 오른 인원은 90여 명, 스태프까지 1,300여 명이 함께 준비했고, 이틀간 8만여 명의 팬이 관람했어요. 이번 공연에 대한 전반적인 소감이 궁금해요.
‘내가 생각보다 무대를 많이 좋아하는구나. 여러 사람의 마음이 한데 모이면 정말 되는구나. 내가 정말 멋진 사람들과 일하고 있구나. 진짜 좋은 인생이다’ 싶었습니다.
유튜브 채널 ‘이지금’에서 공개한 티저 영상에서 “공연계에 한 획을 긋고 싶다”고 말했는데요. 소망한 만큼 이뤄진 것 같나요?
네!
2017년 콘서트 <팔레트>부터 2019년 <Love, Poem>, 2022년 <The Golden Hour: 오렌지 태양 아래> 등의 연출을 맡은 조현우 감독과 ‘완벽한 공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 있죠. 보통 아이유가 노래를 시작하면 조용해지고 관객은 떼창 파트에서 적극 참여하는데요, 필리핀 콘서트에서는 인이어에 아무 소리도 안 들릴 만큼 함성으로 채워졌다죠. 이에 대해 “완벽한 공연은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죠. 그때 새로운 개념의 완벽한 공연을 한 것 같아요”라고 얘기했어요. 이번 공연은 어떤 개념에서 완벽했나요?
3년이라는 공백이 있었음에도 저를 포함해서 공연을 준비하는 모두가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느낌이었어요. 딱 그 자리에, 딱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이번 콘서트는 투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주어진 공연이 두 번뿐이었는데, 만약 다시 그날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온다고 해도 그보다 좋은 공연은 못해낼 것 같아요.
공연을 앞두고 전날 밤에 무엇을 했고, 어떤 마음으로 잠들었나요? 공연이 끝나고는요?
공연 전날 비가 많이 내리는 바람에 런 스루 리허설을 온전히 마치지 못한 채로 찝찝하게 퇴근했어요. 제 기분을 짐작한 코러스 동생이 웃으라는 의미로 ‘할 수 있다 능(能)’ 이미지를 보냈길래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쏟아부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 이미지를 인스타 스토리에 공유하고 냅다 침대에 누웠죠. 마지막 공연이 끝나고는 뒤풀이에 갔어요. 그동안 누구도 티는 안 냈지만 스태프 대부분이 큰 무대에 대한 부담감이 크게 있었는지 많이들 우시더라고요. 서로 잘했다, 최고였다, 같이 일해줘서 고맙다. 이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인류애가 샘솟는 밤을 보냈죠. 늦은 새벽에 집에 가서 공연 후기를 찾아보는데 꽤 오랜만에 벅찬 기분이 들었어요. 제가 했던 공연 중 관객 만족도가 가장 높은 공연이었던 것 같아요. 그것만으로 모든 게 보상되더라고요.
이번 공연은 “뮤지컬 혹은 올림픽 개막식 같다”고 할 만큼 다채로웠어요. 특히 하늘에 그림을 그리는 수백 대의 드론이 압권이었죠. 콘서트에서 가장 신경 쓴 무대장치나 효과는 무엇인가요? 반대로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무엇을 타협했나요?
연출 면에서는 아무래도 ‘스트로베리 문’을 부르며 띄운 열기구가 아닐까 해요. 연출 감독님께서 첫 회의부터 꼭 하고 싶다고 강력히 주장하신 연출이었어요. 공연 몇 개월 전에 저와 키 스태프들이 함께 부여로 출장 가서 미리 시승해볼 정도로 저 역시 열기구 연출에 거는 기대가 컸고요. 풍향을 이용해 띄우는 방식이라 날씨 영향을 많이 받았고, 고소공포증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10m 넘게 올라가니 노래는 고사하고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어요. 불기운을 가까이서 받으니 여름에 타기엔 아주 덥기도 했고요. 감독님께 조심스럽게 우려를 표했는데 (함께 일하던 몇 년간 한 번도 본 적 없던 단호한 표정으로) ‘믿.어.달.라’고 하시더라고요. 믿길 잘했어요. 관객들이 매우 좋아하셨어요. 타협한 부분은 시간이죠. ‘골든 아워’라는 타이틀이 확정될 때부터 ‘석양을 배경으로, 1분도 지체 없이 딱 7시 정각에 공연을 시작한다’는 조건을 정해놓았죠. 근데 야외 공연이다 보니 너무 늦은 시간까지 공연을 이어갈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평소 제가 해온 공연에 비해서는 비교적 짧은, 러닝 타임 3시간의 공연을 준비하게 됐습니다.
이번 콘서트에서 큰 난관은 무엇이었고, 어떻게 극복했나요? 반대로 가장 신난 부분은요?
가장 큰 난관은 저였어요. 1년 전부터 귀에 약간 이상이 생겼거든요. 땀을 많이 흘리거나 장시간 큰 소리를 내면 귀 안쪽 근육이 딸깍하고 열리면서 소리가 안에서 크게 울리듯이 들려요. 공연 준비하는 동안 잘 훈련하며 크게 호전되긴 했지만 너무 오랜만에 무대에 서는 데다 그 무대가 하필 제 가수 인생에서 가장 큰 무대이다 보니 머릿속이 더 복잡했던 것 같아요. 그냥 계속 연습했어요. 귀가 열리면 소리가 불분명하게 들려서 목소리를 크게 내는 게 조심스러워지고 겁나거든요. 소리가 이상하게 나오더라도 일단은 질러보고, 그걸 녹음해서 다시 듣고, 컨트롤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그걸 반복하면서 자신감을 조금씩 되찾았어요. 아직 크게 무리하면 컨디션에 따라 나빠지기도 하지만 이제는 안정권에 들어선 것 같아요. 그 증상과는 별개로 공연을 결정한 순간부터 ‘내가 그 큰 주경기장을 채울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걱정도 만만찮게 저를 괴롭혔어요. 약한 생각이 들 때마다 ‘야, 이건 주경기장이야, 못 먹어도 Go다’ 하면서 대범해지려고 애쓰던 기억이 나요.
앙코르곡 ‘Love Poem’ 무대를 마치고, “귀에 약간 문제가 있어서 조마조마하며 공연을 준비했다. 오늘 거의 잘 들리지 않았지만 응원의 마음이 느껴졌다”고 말했어요. 처음 ‘이관 개방증’ 진단을 받고 굉장히 놀랐을 거 같아요. 그때 어떤 심정이었고, 지금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요?
진단을 받고, 일단은 청력 자체에 생긴 문제가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다 싶었어요. 목을 많이 쓰는 직업이다 보니 막막하긴 했지만 건강에 대해서도, 제가 사랑하는 이 일에 대해서도 좀 더 겸손한 마음을 갖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걱정해온 어떤 최악의 상황이 단 하나도 벌어지지 않고 공연을 무사히 잘 마쳤을 때 느낀 그 감사한 기분을 절대 잊지 않으려고 해요. 기사가 나간 후 많은 분에게 연락을 받았어요. 평소 연락처를 모르던 선배님들 문자도 오고. 생각보다 제 주변에 이 증상으로 고생하시는 분이 꽤 계셨더라고요. 귀와 목을 많이 써서인지 유독 노래하시는 분들 중에 같은 증상으로 힘든 상황임을 밝히며 격려와 함께 본인만의 팁을 공유해주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도움을 요청하시는 분들에겐 제가 드릴 수 있는 정보는 다 드렸어요. 무대에 서는 사람으로서 서로 공감과 응원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뭔가 더 빨리 회복될 수 있을 것만 같은 든든한 기분이 들더군요. 이것 또한 최근에 인류애가 샘솟았던 에피소드예요.
올해 아이유 콘서트 <The Golden Hour: 오렌지 태양 아래>는 ‘에잇’을 무반주로 부르면서 시작했어요. “노을이 질 때 부르고 싶던 곡이고, 예전부터 기획했던 것”이라고 말한 적 있지만, 이런 오프닝을 기획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에잇’은 코로나 블루와 개인적인 무력감이 겹쳐 매우 권태로운 시간을 보내던 스물여덟에 발매한 곡이에요. 대면 공연이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관객에게 힘을 받을 수도 없었죠. 그래서 공연계가 다시 활발해지고 저도 공연을 재개하게 된다면 맨 첫 곡으로 힘차게 ‘에잇’을 불러 무력하던 시간의 종식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세트리스트를 구상하는 내내 단 한 번도 자리가 바뀌지 않은 유일한 곡이에요.
이날 콘서트에서 ‘팔레트’와 ‘좋은 날’을 열창한 뒤에 앞으로 세트리스트에서 제외한다고 밝혔어요. “어쩌다 보니 서른이 되어 그때만큼 좋은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굳이 이 곡을 붙잡고 있지 않아도 되지 싶다”고 했는데요. 그간 ‘마쉬멜로우’를 비롯해 일부 곡을 졸업시켰죠. 영광스러운 과거일수록 놓기 쉽지 않은데요, ‘곡을 졸업시키는 과정’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성장의 의미도 있을 거 같아요.
과거는 아주 가끔씩 돌아봐야 더 의미 있고 값지지 않을까요? 새로운 작업물을 부지런히 내놓으려고 노력하는 만큼 매년 비슷한 공연 구성은 피하고 싶었어요. 기사화되며 조금 와전된 부분이 있는데, 공연 전개의 주축이 되는 정규 세트리스트에서는 제외할 예정이지만 앙코르 무대라든지 좀 더 프리한 분위기에서 관객이 원하실 땐 종종 불러드릴 수 있어요. 졸업한 곡의 빈자리를 채울 새로운 곡을 꾸준히 만들어서 들려드리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니까 팬들이 많이 서운해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위의 선택에는 서른 살이라는 숫자가 영향을 미쳤을 거 같아요. 30대를 시작하면서 어떤 심경 변화가 있었나요?
‘꼭 이래야 해, 저래야 해’ 하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시기인 것 같아요. ‘좀 이러면 어때?’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니까 많은 것이 더 즐거워졌어요. 살기 좋아요, 요새.
콘서트가 끝나고, 이제 영화 <드림> 개봉이 남았군요! 지난봄에 크랭크업했죠. 이번 영화 <드림>을 비롯해 어떤 작품, 프로젝트를 준비 중인가요?
한층 편안해진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팬들에게 늘 “나는 유애나의 취미가 되고 싶다”고 얘기하거든요. 요즘 제 흐름도 그렇고, 앨범이든 작품이든 숨 가쁜 이야기보다는 마음의 휴식이 될 따뜻한 이야기로 이끌고 싶어요.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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