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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태그 시그네’ 관종이 그렇게 나쁩니까?

2023.01.18

by 민용준

    ‘해시태그 시그네’ 관종이 그렇게 나쁩니까?

    ‘좋아요’ 하나가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시대에 관한 병리학적 코미디, ‘해시태그 시그네’.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온라인이나 SNS에서 무리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비하하는 인터넷 용어로, ‘관심병 종자’의 준말. 혹은 ‘타인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병적인 수준에 이른 상태를 나타내는 신조어.’ 포털사이트에서 ‘관종’의 의미를 검색해보니 이런 정도의 의미가 나열된다. 대단히 부정적이다. 하지만 과연 작금의 시대에서 관종이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적어도 자기 명의의 SNS 계정 하나씩은 갖고 있는 이 시대에서, 자기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전시하건, 그렇지 않더라도 누군가의 사생활을 꾸준히 염탐하건, 다들 조금씩은 이미 관종일 것이다. 심지어 이제 대놓고 인정한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사회적 영향력을 숫자로 계량하기 시작했다. SNS 팔로워 숫자가 유명인의 척도가 된 지 오래다.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통용되는 ‘인플루언서’가 ‘셀러브리티’보다 영향력 있는 고유명사처럼 여겨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메시가 월드컵에서 넣은 골의 개수만큼이나 메시의 인스타그램에 찍힌 ‘좋아요’ 숫자가 경이로운 시대다. 다만 모든 관종이 늘 주목받는 건 아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관종이 있다.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관종과 관심을 끄는 데 실패한 관종. 바야흐로 관종의 시대다. 그런 시대에는 이런 영화도 나오는 법이다.

    <해시태그 시그네>는 한국 개봉명에 포함된 시그네(크리스틴 쿠야트 소프)라는 이름의 여성에 관한 영화다. 그녀는 남자 친구 토마스(아이릭 새더)와 함께 사는데, 토마스는 나름 유명세를 얻고 있는 행위 예술가다. 그는 뻔뻔한 방식으로 다양한 공간에 놓인 의자를 훔쳐 집 안 곳곳에 방치해두고 있다. 그러니까 그에게 도둑질은 일종의 행위 예술이고, 그렇게 훔친 의자는 그가 만든 예술적 산물이 된다. 사람들이 그가 주장하는 예술적 의미를 얼마나 존중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흥미롭게 여기는 것 같긴 하다. 시그네만 빼고 말이다. 토마스가 받는 관심을 의식하는 시그네의 심리가 부러움인지, 시기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시그네는 확실히 토마스를 향한 세간의 관심을 늘 의식한다. 그래서 곧잘 그 관심의 방향을 자신 쪽으로 돌리려 하고, 덕분에 종종 한심한 상황을 벌이기도 하는데, 그것이 점점 웃어넘길 수 없는 수준으로 발전한다.

    결과적으로 <해시태그 시그네>는 관종에 관한 영화지만 ‘관심병 종자’라는 부정적 의미에 집중하는 영화만은 아닌 것 같다. ‘스스로를 아프게 한다’는 의미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Sick of Myself>라는 원제는 그 의도를 정확하게 표현한, 창작자의 내면을 직접 꺼내 각인한 결과 같다. “‘인위성 장애(Münchausen Syndrome)’를 앓는 사람들은 종종 꾀병을 부린다. 하지만 시그네는 실제로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다. 끔찍할 정도로.” <해시태그 시그네>를 연출한 감독 크리스토퍼 보글리의 말처럼 <해시태그 시그네>의 시그네에게는 장애가 있다.

    인위성 장애는 20세기에 규정된 인격 장애로 자신의 육체에 가학적 고통을 유발하며 타인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장애를 의미한다. 20세기에 처음으로 규정됐지만 그 전에도 이런 질병을 앓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되며, 병명에 포함된 ‘뮌하우젠(Münchausen)’이라는 고유명사 역시 18세기 독일 관료의 이름에서 빌려온 것이다. 이렇듯 시그네의 병적인 행위는 실재하는 인격 장애를 참고해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해시태그 시그네>는 특정한 인격 장애를 널리 알리고자 만든 영화처럼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영화에서 해당 질환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니 관객 입장에서도 그런 인식을 갖지는 못할 것이다. 이는 감상 후에 얹어지는, 영화가 끝난 이후 영화적 이해를 더하고자 하는 마음이 동할 때 유효한 정보일 것이다.

    동시에 영화가 그리는 상황이 온전히 과장된 것만은 아니라는 현실적인 설득을 위해 마련한 창작자의 안전벨트 같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에서의 상황을 두고 이야기해보자면, 연인 관계로 등장하는 토마스와 시그네의 공통적 욕망과 그 욕망의 근원적 차이를 짚는 것이 <해시태그 시그네>라는 영화 자체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 보다 유효한 방법일 것이다.

    토마스는 자신의 일탈 행위를 예술적이라고 미화하는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다. 자기애가 지나치게 넘쳐서 타인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고, 타인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는 타인의 심리 또한 너무 잘 알고 있다. 결국 그의 대범한 행동은 자기애가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반대로 시그네는 관심은 받고 싶지만 관심을 끌 만한 재능도, 매력도 없다는 사실을 매일같이 체감한다. 그 누구도 자신을 대단하다고 평가하지 않기에 스스로 포장하려 들지만 잘 먹히지 않는다.

    그래서 괜히 옆에 있는 남자 친구가 주목받는 것이 싫기도 하고, 자신을 향한 관심을 독점하는 것 같다. 타인으로부터 관심을 받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주목을 끌 수 있을지 잘 모르겠고, 그만큼 타인의 욕망에도 무지하다. 결국 끊임없이 축적되는 열등감을 견디지 못하고 그게 무엇이든 타인의 눈길만 끌 수 있다면 행복한 기분을 느끼는 수준에 다다랐다. 사실상 자기혐오에 가까운 열등감으로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와 타인에 대한 인정 욕구를 맞교환해도 상관없다는 심리적 벼랑까지 내몰렸다.

    이처럼 토마스와 시그네는 동시대 관종 심리를 대변하는 양가적 은유의 대상으로 조형된 것처럼 보인다. 자기애와 열등감이라는 상반된 심리로 대비되면서도 타인의 관심을 바란다는 점에서 유사 욕구를 지닌 두 사람이 한 쌍의 연인으로 묶여서 등장한다는 점도 다분히 의도적이다. 자기애든, 열등감이든, 관종의 자질을 발현한다는 기이한 공통성이 동거하는 연인으로 구체화된 인상이랄까.

    이와 동시에 도둑질을 행위 예술이라 주장하는 토마스가 점차 명성을 얻게 되는 과정은 그럴듯한 의미만 부여하면 허풍도 철학으로 둔갑시키기 쉬워진 현대 예술의 허영을 꼬집는 것 같기도 하고, 부풀려진 재능을 유명세로 곧잘 치환해버리는 현대사회의 우스꽝스러운 야단법석을 비웃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끝내 특별한 트렌드를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세간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독특한 것에 탐닉하는 강박적인 패션 산업의 나르시시즘까지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런데 이런 허영과 야단법석과 강박으로 점철된 관종으로 그득한 시대에서 자기 파괴적 행위를 불사할 정도로 관심을 갈망하는 질병을 면밀하게 배려하고 진단할 수 있을까? 질병과 현상이 분리되지 않는 세계에서 통증을 돌볼 길을 찾지 못한 환자는 어떤 최후를 맞이하게 될까?

    <해시태그 시그네>는 이러한 물음표를 극단적인 상황까지 밀고 나가는 영화다. 웃음을 유발하는 해프닝 수준을 넘어 이게 정말 웃을 수 없는 일일지 모른다는 현실적 감각을 일깨운다. 사회현상을 반영한 블랙코미디의 범위를 넘어 사회에 만연한 심리적 갈망의 그림자에 허물어지는 개인의 심각한 상태를 진단하는 실험적 가설을 세워 작동시키고 관찰하는, 실제적인 가상 체험까지 도달한다.

    토마스를 향한 시그네의 시기 어린 심리는 토마스가 발휘하는 능력에 대한 폄하로 번질 뿐 자신에게는 그것을 압도할 능력이 없다는 인식으로 전진하지 못한다. 포기를 모른다. 결국 자기 파괴적 행위로 타인의 걱정을 살 수 있다는 데서 힌트를 얻은 시그네는 ‘리덱솔(Lidexol)’이라는 약이 피부 질환을 비롯해 외형적으로 눈에 띄는 부작용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결심한다. 세간의 관심을 얻을 수 있다면 자기 자신은 어느 정도 다쳐도 상관없을 것만 같다.

    영화에 등장하는 ‘리덱솔’은 실존하는 약이 아니다. 영화가 만들어낸 가상의 약품이다. 일종의 가설이다. 만약 이렇게 위험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는 약을 먹어서라도 관심을 끌고자 하는 이의 태도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볼까? 아마도 영화를 보는 관객 대부분은 그것이 혐오스러운 시그네의 욕망이라 단정했을 것이다. 그 지점에서 이 영화가 인위성 장애라는 질병이 실존한다는 것을 바탕에 두고 시그네라는 캐릭터를 조형했다는 사실이 중요해 보인다. 영화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시그네의 병리학적 근거를 관객에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시그네의 상황을 인위성 장애라는 영화적 모티브와 직접적으로 연결해서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그녀의 상태를 보다 보편적인 심리 문제로 인식하도록 만든다. 결국 시그네의 욕구와 행위에서 기시감을 느꼈다면 그건 스크린 밖에도 시그네와 유사한 풍경과 심리가 존재한다는 무언의 공감대가 형성되는 덕분일 것이다. 실재하는 질병을 참고해서 구체화한 캐릭터의 심리가 동시대에 전 세계적으로 만연한 병리적 현상에 대한 공감대를 부추긴다는 건 어딘가 섬뜩한 구석이 있다.

    “나는 유별난 캐릭터를 좋아한다. 도덕적 규범을 깨고 현실에서 허용되기 어려운 경계를 부수는 캐릭터들. 일반적으로 영화나 소설에서 그런 종류의 캐릭터를 보는 건 마치 악마를 쫓는 것처럼 스릴 있는 일이다. 소설처럼 안전한 허구에서 인류의 어두운 면을 탐구하는 건 그만큼 특별한 일이고, 내가 그것을 즐기는 편이라 이런 이야기에 도달할 수 있었다. 꼭 호감을 부를 필요까진 없지만 존재하는 것 같다고 여겨지는 캐릭터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크리스토퍼 보글리의 말처럼 시그네는 도통 애정을 갖기 힘든 인물이고, 되레 혐오하기가 더 쉬운 인물이지만 마냥 혐오할 수도 없을 것이다. 시그네의 욕구와 행위는 분명 특수하고 개인적인 범위에서나 이해될 만한 것이지만 이상한 감정에 시달린다는, 이상한 욕망에 흔들린다는 시대적 공감대 위에서 우화적 세계를 초월하는 현실적인 기시감을 획득한다.

    그렇기에 시그네를 이해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관객도 드물겠지만 시그네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관객도 드물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대체로 관종이다. 관종이 되길 요구하는 시대를 지나고 있는 만인의 현실에서 시그네는 기꺼이 사랑하거나 동정하거나 연민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닐지라도 마음껏 혐오할 수 있는, 온전히 타자화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닐 것이다.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할수록 처참한 몰골로 변해가는 시그네의 모습은 결국 일그러진 욕망으로 파괴되는 영혼이 방치되는 주변 세계를 상상하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해시태그 시그네>는 병적인 세태에서 무차별적으로 주입되는 욕망의 포로가 되는 이들의 처지를 그저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하는 세계의 무심함을 우습지만 결코 웃을 수 없는 방식으로 환기하는 진단의 무대처럼 보인다.

    <해시태그 시그네>는 예민한 관점을 독자적 화술과 과감한 표현 양식으로 특별하게 매만진 재능의 출현이라는 점에서도 반가운 작품이다. 광고와 뮤직비디오, 단편영화 연출 경력이 있는 크리스토퍼 보글리의 장편영화 연출 데뷔작이기도 한 <해시태그 시그네>는 <어나더 라운드>,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등 지난 몇 년 사이 동시대 사회와 인간 심리를 병리학적으로 기민하게 탐구해 반영한 코미디 기반의 북유럽 영화 계보를 잇는 최신작이기도 하다. 영화 말미에 광고 촬영 감독으로 출연하기도 하는 감독은 지난 경력을 통해 그 속내를 둘러볼 수 있었던 패션과 예술계를 비롯한 특수한 세계의 단면과 내면을 풍자적 소재의 주요 무대이자 심리로 삼고 영화의 현장감을 극대화한다.

    동시에 감독의 지인이자 조각가를 비롯한 예술가로 활동하는 아이릭 새더가 행위 예술가 토마스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도 허구와 현실적 경계를 허무는 흥미로운 캐스팅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좀처럼 호감을 가질 수 없지만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뒤틀린 마음의 주인공 시그네를 연기한 크리스틴 쿠야트 소프는 <해시태그 시그네> 첫 번째 해시태그의 주인이 되어야 마땅하다 여길 정도로 강력한 호연을 보여준다. 그야말로 발견의 영화라 할 수 있는 <해시태그 시그네>는 그래서 SNS에 영화 감상평을 포스팅하고 해시태그를 걸어보고 싶게 만든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관종의 폐부를 찌르면서도 관종의 행위를 부추기는 아이러니. 실로 영화적이지 않은가. 이 세계의 욕망이란.

    민용준(영화 저널리스트&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사진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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