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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 이렇게도 가족이 된다

2023.01.27

by 민용준

    ‘라인’ 이렇게도 가족이 된다

    ‘라인’은 가족이라는 관성에 선을 긋고, 선을 넘는 영화다.

    안토니오 비발디가 1715년에 작곡한 장중하고 우아한 찬송가 ‘니시 도미누스(Nisi Dominus)’가 흐르는 가운데 카메라 시선이 고정된 벽으로 갖은 물건이 날아들어 부서지고 박살 난다. 갖은 그릇과 식기와 꽃병과 술병과 LP판과 악보까지, 많은 물건이 벽으로 날아들어 본래의 형태를 잃거나 흩날리며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추락한다.

    아마도 이 모든 것을 던진 이로 추정되는 여자는 상대적으로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다른 여자에게 달려들고자 발악에 가까운 몸부림을 친다. 그런 그녀를 버겁게 제지하던 두 남자를 가까스로 떼어놓은 여자는 피아노를 사이에 두고 자신이 쫓던 여자와 비로소 마주한 뒤 잠시 진정된 듯 마주하지만 끝내 손을 날린다. 그렇게 벌어진 유혈 사태를 야기한 폭력적인 여자는 엉망이 된 얼굴로 내동댕이쳐지듯 집 밖으로 쫓겨난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격렬한 분노와 폭력으로 점철된 여자로부터 벌어진 난장판을 그리며 시작되는 <라인>은 어느 한 가족에 관한 이야기이고, 궁극적으로는 어떤 자매와 모녀에 관한 영화다. 좀처럼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자기 자신이 망가지는 것조차 불사하고 공격적인 성향을 보인 그 여자는 그 집안의 첫째 딸 마르가레트(스테파니 블렁슈)이고, 그녀가 쏟아낸 분노의 대상이 된 여자는 마르가레트의 엄마 크리스티나(발레리아 브루니 테데스키)다.

    그러니까 그 격렬한 폭력에 연관된 두 여자가 모녀 관계였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모녀 관계는 일시적인 파국을 맞이한다. 크리스티나는 딸을 폭행 가해자로 신고하고 마르가레트는 법원으로부터 공판 전까지 엄마와 100m 거리를 유지하는 접근 금지 명령을 받게 된다. 그야말로 남보다 못한 모녀 관계나 다름없다.

    <홈>(2008)과 <시스터>(2012)를 연출한 프랑스계 스위스 감독 위르실라 메이에의 최근 연출작 <라인>은 두 편의 전작과 마찬가지로 가족에 관한 영화이며 공간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면서도 다른 영화다. 두 편의 전작 <홈>과 <시스터>가 각각 버려진 고속도로와 외딴 산꼭대기라는 지리적 위치의 특성 자체를 영화적 은유의 원점이 되는 무대로 적극 활용하고 부각하는 작품이라면 <라인>은 캐릭터와 캐릭터 사이의 인력과 척력이 형성되는 인위적 거리감을 시각적으로 규정하고 설정함으로써 각각의 인물에게 초점을 맞추고, 겉으로 드러난 인상과 서서히 드러나는 내면으로 구체화되는 두 인물의 괴리에 주목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우리는 폭력적인 여성에 대해 탐구하고 싶었다.”

    위르실라 메이에의 말처럼 <라인>의 출발선은 기존에 보기 힘든 여성 캐릭터였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폭력은 대체로 남성 캐릭터에 의해 야기되고, 여성 캐릭터에게 허락된 경우는 대부분 반항적인 10대 소녀를 통해서만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위르실라 메이에는 분노로 가득한 여성 캐릭터가 자신의 육체를 휘두르길 불사하는 폭력적인 성향을 그려내는 영화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시나리오를 개발했다. 그 과정에서 실패한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착안했고, 폭력적인 기질을 가진 딸이 무심한 내면과 무례한 태도를 지닌 엄마에게 분개하는 구도의 가족 영화를 구상했다.

    마르가레트의 폭력성은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만신창이로 만든다. 덕분에 마르가레트를 잘 아는 가족을 비롯한 주변인들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폭탄처럼 그녀를 경계하면서도 언제나 염려한다. 엄마와 100m 거리를 유지하라는 법원의 명령으로 집을 떠나게 된 마르가레트를 받아주는 건 그녀와 한때 연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줄리앙(벤자민 비올레이)인데 그는 엉망진창의 신세로 자신을 찾아온 마르가레트가 못마땅하지만 내치지 않는다.

    동시에 가족과 거리를 두게 된 마르가레트를 가족과 연결하는 동아줄은 어린 동생 마리옹(엘리 스파그놀로)이다. 줄리앙과 마리옹이 마르가레트와 관계를 이어가는 건 각기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말 그대로 그녀를 아끼고 의지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아끼고 의지하는 건 바로 음악적 재능이다.

    <라인>은 결코 교감할 수 없는 모녀 관계를 중심에 둔 가족 영화라는 그릇에 음악 영화의 자질을 함께 담아낸 작품처럼 보인다. 크리스티나는 일찍이 피아노 솔리스트로서 촉망받던 자신의 경력이 마르가레트의 임신과 함께 꺾였다고 소회를 밝힌다. 그 뒤로 세 딸과 함께하는 삶을 음악적 자질로 건사해왔으나 결국 첫째 딸의 폭력적인 성향은 엄마의 재능이 완전히 소실되게 만드는 사태를 촉발한다.

    그런 딸을 원망하는 크리스티나는 그 전에 딸에 대한 근원적인 실망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이러니하지만 이는 줄리앙, 마리옹과 마찬가지로 딸이 가진 음악적 재능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크리스티나는 마르가레트가 음악적 재능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줄리앙은 마르가레트와 한때 함께 활동하던 밴드의 멤버였던 것으로 보인다. 마르가레트는 기타리스트이자 보컬로 활동하며 나름의 재능을 인정받았지만 그녀의 폭력적인 성향은 그녀의 재능을 발전시키는 것조차 가로막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 기질은 그녀의 삶을 자신의 재능과 동떨어진 곳으로 밀어냈고, 그녀의 재능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실망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 잦아지는 경험을 거듭한 줄리앙과 크리스티나는 기대를 갖기보다는 체념하는 데 익숙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능을 알아보는 탓에 그런 재능을 썩히는 딸에 대한 은근한 괄시를 드러내고 마는 크리스티나의 태도는 딸의 분노를 부추기고, 자신을 빛나게 만드는 재능보다 자신을 망가뜨리는 데 익숙한 마르가레트의 삶에 회의감을 느끼는 줄리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삶을 개선할 기회를 외면하지 않는다.

    음악적 재능을 펼칠 기회를 놓쳤다고 후회하는 엄마는 마지막으로 남겨진 음악적 능력마저 앗아간 딸이 원망스럽다. 반대로 자신은 물론 자식들의 안위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살아간다고 느껴지는 엄마는 자꾸 딸의 다혈질을 건드린다. 두 사람은 음악적 재능으로 한줄기를 이루는 가족이지만 다가갈수록 서로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체감해야 한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한 운명이다.

    그리고 모성애가 없는 엄마와 대화가 불가능한 딸은 성인이 돼서도 서로의 몸과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 선을 넘는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는 눈에 보이는 선명한 선이 그어진다. 크리스티나가 마르가레트와 유지해야 하는 100m 거리를 측정한 마리옹은 엄마가 머무는 집으로부터 100m 거리를 파란 페인트로 선을 그어 표시한다. 그럼으로써 엄마와 언니의 휴전을 선명한 표식으로 제안한다.

    크리스티나와 마르가레트에게 음악적 재능은 두 사람이 모녀 관계라는 운명으로 유대할 수 있는 관계임을 강력하게 드러내는 증표처럼 보여서 더욱 아이러니한 것이기도 하다. 딸을 잉태했기에 재능을 썩혀야 했다는 엄마와 엄마와 유사한 재능을 타고났다는 것에 되레 거부감을 느끼는 딸은 애초에 함께할 수 없는 사이처럼 보인다.

    그리고 크리스티나와 마르가레트의 어린 딸이자 동생인 마리옹은 그런 엄마와 언니의 무책임과 폭력성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이해한 관찰자로서 두 사람의 관계 개선을 누구보다 갈망하는 한 사람이기도 하다. 결국 집안의 연장자라 할 수 있는 두 어른의 반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건 그 집안의 가장 어린 구성원인 셈인데 그런 마리옹을 아끼는 마르가레트는 어린 동생의 음악적 자질을 돌보고 염려한다. 동시에 크리스티나는 마리옹을 통해 마르가레트에 대한 일말의 존재감을 인식한다. 그렇게 마리옹은 가족의 끊어진 연대를 부여잡는 마지막 끈이 되고자 한다.

    <라인>에서 선명하게 그어진 파란 선은 자연스러운 현실 배경의 영화를 거대한 연극 무대처럼 인식하게 만든다. 함께할 수 없는 모녀 관계의 심적 거리를 구체적인 형상으로 제시함으로써 쉽게 좁힐 수 없는 어떤 세월과 감정을 더 적극적으로 짐작하도록 만든다. 그 과정에서 모녀 관계의 회복을 바라는 이들도 있겠지만 영화는 대체로 그 기대에 쉽게 부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거리감이 쉽게 바래지 않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의 회복을 염원하는 가족 구성원의 노력과 헌신을 응원하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라인>은 비교적 명확한 운명으로 규정된 가족이라는 집단의 다양한 내면을 더욱 집중해 살피도록 권하는 영화 같다.

    강력하게 예속된 운명 같지만 각기 다른 심정과 감정이 쌓이고 엉켜 흐트러진 내면은 매 순간 손쉽게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가르고 그것이 끝내 제각각의 삶으로 구획될 수밖에 없는 것임을 직감하게 만든다. 가족의 보호가 필요한 어린 딸은 자라서 결국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일찍이 보호자로서 존재해야 할 부모의 한 축은 애초에 없었고, 다른 한 축은 자신의 삶을 탐닉하는 데 좀 더 열중할 뿐이다. 한 덩어리 같지만 보이지 않는 선이 서서히 선명해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의 총합일 수도 있는 가족의 어떤 형태가 선 하나로 예사롭지 않게 구체화된다.

    이처럼 난해하지 않은 은유를 동원한 가족 영화로서 실험적이면서도 지적인 면모를 제시하는 <라인>은 가족이라는 단어로 손쉽게 떠올릴 수 있는 온기보다 불가분의 갈등 관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가족의 파편화된 심리에 주목하는 영화에 가깝다. 마냥 애정하기에는 쌓인 것이 많고, 마냥 증오하기에는 쌓아온 것이 많아서 끝내 애증으로 서로를 돌보고 밀어낼 수밖에 없는 관계의 대척점에 자리한 모녀의 갈등은 결국 적당한 거리를 벌려야만 서로에게 안전해질 수밖에 없는 누군가의 삶을 떠올리게 만든다.

    가족이기에 마땅하다는 믿음이 적용되지 않는 삶 또한 가족이기에 그런 것이라는 인식으로 전환하길 권한다. 가볍게 선을 넘을 수 있는 사이가 아니라 서로 선명한 선 안에 자리하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지속될 수 있는 관계이기도 하다는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 삶이 함께할 수밖에 없는 운명 공동체라는 패러다임 안에서 당연하다는 아이러니를 함께 깨닫게 만든다. 가족이라는 관계로부터 삶의 회복을 꿈꾸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 관계로 인해 망가지는 개인의 삶도 존재할 것이다.

    폭력적인 여성을 그려보고자 한 인식처럼 가족이라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갈등과 화해의 서사에서 벗어나 새로운 전형성을 제시하는 <라인>은 결국 모종의 관성을 거부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엄마답지 않은 엄마와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는 딸은 결국 개개인으로서 자기 재능과 행복을 추구할 때 가장 행복해 보인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는 대체로 사회적인 관념이 요구하는 기준을 통해 무너지고, 그런 갈등에서 비롯된 심신의 상처는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각자의 세계에서 회복된다. 누군가는 선을 넘어서 서로의 유대감이 돈독해지기도 하겠지만 누군가는 선을 넘지 않음으로써 서로의 세계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끝내 다시 지워진 선을 넘어 마주하게 된 모녀는 오히려 선 안에서 재확인한 서로의 거리감을 선명하게 체감한다.

    <라인>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노래하는 ‘니시 도미누스’의 가사에 해당하는 시편 127편 1절의 내용은 이렇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결국 서로의 마음이 다른 이들은 한집을 세울 수도 없고, 하나의 성을 지킬 수도 없을 것이다. 한집에서 살아가는 가족의 운명이란 꼭 그 집에서만 완전해질 리 없을 것이다. 그것도 가족일 것이며, 오히려 그렇게 가족이 될 것이다.

    민용준(영화 저널리스트 &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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