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트렌드

1990년대 시크한 벨지안 테일러링의 귀환

2023.03.31

by 황혜원

  • Sarah Harris

1990년대 시크한 벨지안 테일러링의 귀환

옷장 안에 꽃이 만발한 선 드레스를 용납한 역사가 없었다. 드레스 안으로 미끄러지듯 몸을 넣으면 끝이라고, 모두들 ‘쉬운 옷’이라 입 모아 말하지만 말이다. 도대체 무슨 신발을 신어야 할지, 스타킹은 신을지 맨발로 나서야 할지. 어떤 속옷을 입어야 하며 또 어떤 드레스가 과한 것인지 모르겠다. 드레스 위에 카디건은 진부하지 않나? 재킷을 입는다면 어떤 종류를 입어야 하는가. 수많은 난관을 넘어섰다고 끝이 아니다. 다리를 꼬고 반듯이 앉는 등 의식적으로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한다. 드레스를 입은 채로 의자에 구부정하게 앉거나 다리를 떡하니 벌린 채 앉을 수는 없지 않나. 솔직히 말해 드레스의 세계는 지뢰밭과 다름이 없다. 삐끗하면 촌스럽기 십상인 스타일링의 지뢰밭. 솔직히 <브리티시 보그>의 패션 피처 에디터로서, 드레스를 탐색하려는 의지도 발휘하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앤 드멀미스터(Ann Demeulemeester)의 셔츠와 워드로브.NYC(Wardrobe.NYC)의 와이드 레그 팬츠를 입은 ‘브리티시 보그’ 패션 피처 디렉터 사라 해리스(Sarah Harris).

그러나 ‘테일러링 수트’는 다르다. 유일하게 해야 할 결정이라곤 흰색 ‘티셔츠’와 흰색 ‘셔츠’(아무것도 입지 않는다는 선택지도 있다) 사이를 갈팡질팡하는 일뿐이다. 게다가 어느 계절이든 어디서든 완벽한 솔루션으로 작동한다. 나는 항상 앞주름이 선명한 매니시한 스타일의 넉넉한 오버사이즈 트라우저를 좋아했다. 바지 선이 유려하게 흘러내리는 로우 웨이스트 스타일로 발뒤꿈치를 덮을 만큼 긴 기장의 밑단이 뭉툭한 플랫 부츠 위에서 구겨지는 느낌! 블레이저는 어깨선이 넓어 방에 들어가기도 전에 어깨가 먼저 나의 도착을 알리는 그런 룩!

최근 아방가르드한 벨기에 디자이너들이 선호하던 에지 넘치는 단색 테일러링 수트의 부활을 목도하며 기쁨을 누리는 중이다. 특히 1990년대 앤 드멀미스터(Ann Demeulemeester)와 마르탱 마르지엘라(Martin Margiela)가 시도하던 스타일이다. 그들은 아름다움의 기준을 파괴했고, 럭셔리 패션부터 패션 그 자체의 의미를 재정의했다. 패션계가 날씬함에 집착하던 시절, 마르지엘라는 자이언틱한 오버사이즈 의상을 전면에 내세우며 비율을 어지럽혔다. 마르지엘라의 컬렉션에는 항상 여러 술책이 난무했고, 유쾌한 DIY 정신이 흘러넘쳤다. 그는 옷을 뒤집었고, 아주 영리하게 해체했다. 패턴 종이 형태로 재킷을 만들었으며, 시침 핀으로 고정한 레이어드 룩을 선보였다.

1997 Maison Martin Margiela F/W RTW
2000 Maison Martin Margiela F/W RTW

나도 당시에 마르지엘라 블레이저를 이베이에서 구입했다. 런던의 하비 니콜스 매장에서 토요일마다 판매 아르바이트를 하며 받은 첫 월급을 털었다. 안타깝게도 몇 년 후 동네 세탁소에서 잃어버린 바람에 여전히 리세일 사이트를 돌며 같은 블레이저를 찾아다니는 신세이긴 하지만 말이다.

기본적으로 앤 드멀미스터와 마르지엘라의 컬렉션에는 지독한 연관성이 있다. 두 사람이 선택한 모델 이야기다. 그들은 새로운 얼굴과 익숙한 얼굴을 모두 런웨이에 올렸다. 두 사람 모두 유능한 길거리 캐스터였으며, 한때 잘나가던 모델들을 재기용한 최초의 디자이너들이었다. 여기에 규정짓지 않는 디자인도 한몫했다. ‘우리 옷엔 정해진 착용 방식은 없다’는 듯 소비자에게 옷을 조합하고 스타일링할 수 있는 결정권을 부여했다.

1997 Ann Demeulemeester S/S RTW

드멀미스터의 흰 셔츠는 어깨에서부터 깔끔하게 떨어지는 스타일로 조였다 풀 수 있는 서스펜더가 있거나 허리를 묶을 수 있는 끈이 달려 있었다. 어떤 체형의 사람이 입더라도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도록 바이어스 컷도 넣었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모든 의상, 특히 몇 사이즈 업된 남성적인 테일러링의 경우 완벽한 핏을 찾을 때까지 자주 입어보는 것으로 유명했다. ‘할아버지의 옷을 훔쳐 입은 아이의 옷’이 디자인의 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2023 Victoria Beckham S/S RTW
2023 Dries Van Noten S/S RTW

그리고 2023년 S/S 컬렉션은 두 사람의 레퍼런스로 가득했다. 빅토리아 베컴을 위해 걸었던 지지 하디드는 등 부분이 해체된 멋진 수트를 입었다. 버버리의 분위기 있는 매니시한 테일러링도 있다. 드리스 반 노튼의 먹빛이 흐르는 올 블랙 수트, 미니멀하지만 거대한 사이즈의 더블 브레스트 블레이저에 산뜻한 화이트 셔츠를 매치한 스텔라 맥카트니도 있다. 심지어 발렌티노조차도 ‘어깨는 크면 클수록 좋다’는 메모를 받은 모양새였다.

2023 Stella McCartney S/S RTW
2023 Peter Do S/S RTW
2023 Valentino S/S RTW

지난 몇 년 동안에도 큰 어깨, 박시한 테일러링을 봐왔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좀 더 부드러우면서도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허리에 살짝 들어간 라인처럼 컨셉추얼한 피스에 부드러운 터치가 가미되었다. 몇 년 후에도 입을 수 있는 옷을 옷장에서 찾는다면, 이번 시즌의 접근 방식이 매우 긍정적으로 느껴진다.

이는 내가 최근에 구입한 워드로브.NYC(Wardrobe.NYC)의 블랙 수트를 입었을 때 느낌과 비슷하다. 이는 워드로브.NYC의 공동 설립자 중 한 명인 크리스틴 센테네라(Christine Centenera)가 헤일리 비버와 디자인한 캡슐 컬렉션 의상이었다. 파리 쇼룸에서 만난 크리스틴은 내게 XXXL 사이즈처럼 보이는 블레이저를 입혀주면서 “당신은 S나 XS를 입으면 되겠군요”라고 말했다. 내 몸무게가 아니라 순전히 수트 사이즈에 관한 이야기였겠지만, 듣는 즉시 안심이 되고 위안마저 느껴졌다.

크리스틴은 “저는 강한 어깨와 실루엣에 끌려요. 수트는 스스로를 강하게 느끼고, 통제력이 있으며, 자신감 있는 사람으로 만들죠”라고 말했다. 수트에 키는 중요하지 않다. 크리스틴의 작은 체구가 그 증거다. 과장된 비율을 감당하기 위해 모델처럼 키가 180cm나 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그날 컬렉션 축하 만찬 자리에서 헤일리 비버 옆에 서 있던 크리스틴을 본 순간 깨달았다. 그녀만큼 그녀의 옷이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난 그 자리에서 재킷과 외투를 주문하고, 네타포르테에서 그와 어울리는 바지를 샀다. 사무실, 패션쇼장, 결혼식 같은 이벤트에서까지 무엇을 입을지 결정할 수 없을 때 늘 그 수트를 입는다. 내 옷장에서 수트만큼 열심히 일하는 옷을 찾을 수 없을 정도다.

2023 Peter Do S/S RTW
2023 Peter Do S/S RTW

피터 도의 2023 S/S 컬렉션의 경우 원치 않는 피스가 거의 없을 정도로 대부분 마음에 들었다. 피터는 블랙과 화이트로 점철된 수트로 쇼를 구성했다. 샤프한 스타일링에 롱 라인의 블레이저, 우아한 허리 라인과 손가락까지 길게 뻗은 소매, 벌룬 팬츠까지! 뒷면은 더 놀라웠다. 피터는 원형 컷아웃으로 등을 완전히 노출시켰다. ‘해체’가 되풀이됐다. 안감, 해진 가장자리와 태그 스티치까지 모두 드러냈다. 마르지엘라의 열렬한 팬인 피터는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수트 만드는 법을 처음부터 배웠다고 알려졌다. 이에 대해 피터는 “저는 수트 만드는 과정에 푹 빠졌어요. 내면의 구조에 매료되었죠”라고 말했다.

또한 피터는 컬렉션 작업을 하며 남성과 여성 모델 모두에게 피팅 작업을 진행했다. 그는 “해당 작업을 통해 우리 디자인의 디테일을 수정할 수 있었다. 우리는 더 다양한 체형을 포용하기 위해 숫자 대신 XS에서 XL까지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주목할 만한 것은 드멀미스터풍의 화이트 오버사이즈 셔츠의 테일이었다. 여분의 긴 버클 벨트는 태연하게 바닥을 휩쓸며 모델의 뒤를 쫓았다. 옷을 입고 움직이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이건 일종의 패션계의 마이크 드롭에 다름없었다!

“앤 드멀미스터가 상징하거나 남긴 것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올 3월 파리 패션 위크 기간, 앤 드멀미스터의 새로운 수장 루도빅 드 생 세르냉(Ludovic de Saint Sernin)은 레이블의 첫 번째 컬렉션을 준비하며 “제 비전은 앤의 초기 시절로 돌아가는 거예요. 매우 유동적이었지만 강력하던 그때로. 좀 더 여성스럽고 시적인 느낌을 원하죠. 여성의 이름(앤)을 대표하는 하우스로서 할 수 있는 예우라고 생각하고요”라며 포부를 남겼다.

2023 Ann Demeulemeester F/W RTW
2023 Ann Demeulemeester F/W RTW

원조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찬성할 만한 이유는 많다. 최근 빈티지 마르지엘라 블레이저 하나를 닉 로얄의 아카이브에서 발견했다. 오래전부터 찾아 헤매던 그 블레이저는 물론 아니었다. 그렇지만 오트밀 컬러의 리넨 소재로 만든 블레이저는 긴 와이드 라펠에 스트롱 숄더가 눈에 띄고, 소매가 교묘히 구부러져 몸의 모든 라인과 움직임을 마법처럼 훑어주는 그런 재킷이었다. 무려 25년이 지났지만, 그때보다 지금이 더 멋져 보이는 그런 재킷. 지금 생각해보니 선 드레스 위에 입어도 될 정도의 훌륭한 재킷이었다.

Sarah Harris
사진
Buzz White, Courtesy Photos
출처
www.vogue.com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