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기억의 향
코를 톡 쏘는 듯한 갓 베어낸 풀 내음, 모닥불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냄새, 다이아몬드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수선화 꽃다발… 인간의 코는 수천억 가지 이상의 냄새를 구별할 수 있다. 그중에는 특정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힘을 가진 ‘향’이 있다.
Tutti Twilly d’Hermès by Hermès
‘립스틱 효과’는 잊어라. 경제활동이 침체되는 시기에 소비자들이 선택하는 고급 제품으로 향수가 급부상한다. 향수가 립스틱 대신 소비자 심리를 나타내는 지표로 작용하는 것이다. 향수 효과의 서막을 알리는 에르메스의 신상은 일단 ‘투티 트윌리 데르메스’라는 이름부터 매력적이다. 향을 표현하는 방식 또한 출중한데, 단순한 하나의 향이 아니기에 특정 향기로 분류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역시 하나의 유형으로 규정할 수 없는 ‘에르메스 레이디’에게 딱 어울리는 향수다. 플로럴, 달콤함, 소녀스러움을 갖추었지만 동시에 강렬한 에지도 있다. 다시 말해 어떤 상황에서든 완벽하게 잘 어울리는, 아주 현대적이고 산뜻하면서도 깔끔한 향이다. 오버사이즈 플라워 헤드로 재해석한 화이트 보틀 캡은 유쾌한 관전 포인트.
Aqua Media Cologne Forte by Maison Francis Kurkdjian Paris
세계적인 조향사 프란시스 커정은 도시 정원을 창조해내길 원했다. 매우 신선하고 자연적이면서 이해하기 쉬운 그런 향 말이다. 2023년 그는 매일 손이 가면서도, 멋지고 아름다운 플로럴 향을 창조했다. 메종 프란시스 커정의 신작은 정원이라는 큰 그림에서 좀 더 ‘물’의 측면을 담는다. 온실, 물, 멋진 꽃, 그리고 그런 꽃과 초록 잎에서 느껴지는 에너지까지. ‘아쿠아 미디어 코롱 포르테’는 이런 아름다운 꽃의 꿈이라는 측면과 그 이면의 강렬함을 에메랄드 그린 한 병에 담았다. 머스키하며, 파촐리와 샌들우드를 가미해 더 치밀해진 반전 매력이 일품.
Carmina by Creed
1990년대를 기점으로 향수는 더 이상 어떤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는 듯했다. 너도나도 같은 향조와 규격의 천편일률적인 향수를 만들어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갈구한 것이다. 이런 매장의 니즈를 맞추기 위한 보급형 향수 제조에 급급했으며, 업계는 브랜드 이미지에만 관심을 두고 좋은 모델을 찾아 예쁘게 포장한 뒤 아주 성대한 행사를 기획해 소위 ‘팔리는’ 제품을 출시했다. 정작 사람들이 뿌리고 간직하게 될 향 자체는 뒷전이었다. 이런 흐름을 목도하며 크리드는 반기를 든다. 소장 가치 충만한 패키지, 순차적으로 이어지는 플로럴 우디 앰버의 관능미, 향수라는 매개체를 통해 감성을 향유하는 ‘카미나’가 그 방증이다. 여기 자줏빛 눈 화장을 한 모델의 눈두덩이 당신을 유혹한다. 그녀의 창조적인 모습에 당신이 함께하도록 도발하는 것이다.
Café Rose by Tom Ford
후각은 태어날 때 가장 먼저 발달하는 감각이다. 뇌보다 먼저 발달하기 때문에 코는 뇌의 가장 오래된 부분과 연결된다. 톰 포드 ‘카페 로즈 오 드 퍼퓸’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진한 커피 향이 스며든 한 송이 장미다. 완벽주의자 미스터 포드는 로즈 골드빛 유리병에 향기, 아방가르드, 장인 정신, 이 세 가지를 담아냈다. “터키산 장미와 다크 커피 에센스는 관능적인 깊이를 드리우며 불가리아산 장미와 일랑일랑은 카페 로즈의 플로럴 향을 발산합니다. ‘카페 로즈’만의 독보적인 플로럴 향은 샌들우드 어코드에 고수, 파촐리, 스파이시 카다멈으로 이어지죠.”
J’adore L’Or by Dior
중독은 아주 사적인 영역이다. 어떤 사람은 신선한 향에 중독되고 어떤 사람은 플로럴 향에 중독된다. 중독될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개념이 향수의 핵심이다. 원재료를 뛰어넘어 일종의 연금술을 성취했다는 느낌이 드는, 그런 마법의 순간에 도달하는 것. 이 가을, 오렌지 블로섬과 재스민 그랜디플로럼, 센티폴리아 로즈 앱솔루트가 어우러져 풍성한 꽃 향과 행복을 선사하는 퍼퓸 에센스 디올 ‘쟈도르 로르 에센스 드 퍼퓸’을 추천한다. 먼저 눈을 감은 후 첫 향을 충분히 음미해보시길. 연금술사가 금을 만드는 공식을 찾기 위해 실험하는 것처럼.
Ouranon by Aesop
‘아름다움’의 묘미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우리가 딛고 서 있는 바닥, 박물관, 곳곳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고대 그리스의 무언가, 다른 이에게는 달항아리가 아름답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세상에 한 종류의 아름다움만 존재할 순 없다. 아름다움이란 일종의 균형으로 퍼퓸 월드에서는 조향사가 찾아낸 균형 속에서 아름다움이 탄생한다. 곧 시작될 자유로운 순간과 아무 걱정 없는 모험의 시간. 이솝의 아더토피아 시리즈는 ‘영혼을 위한 약’이다. 최신작 ‘우라논 오 드 퍼퓸’은 별이 빛나는 밤에 흩어지는 불씨 속에 서 있는 모놀리스의 잔상을 재현한 향기로, 새 출발을 준비하는 설레는 기분과 맞닿는다.
Passeggiata by Bulgari
‘파세지아타 오 드 퍼퓸’은 보헤미안의 기운으로 숨 쉬는 향기다. 대담하고 예상할 수 없는 노트로 가득하며, 생기 넘치는 캐릭터는 당신을 매혹한다. 지금까지 맡아본 그 어떤 향기와도 같지 않으니. 주원료인 일랑일랑과 우디 머스크는 델마와 루이스 같다. 지극히 다르고, 매우 개인주의적이지만, 서로를 완벽하게 보완하는 단짝 친구. 오렌지와 네온 핑크의 대비가 돋보이는 향수병은 눈부신 로마의 노을 아래 황홀한 토스카나 혹은 시칠리아의 저녁을 떠올린다.
Blue Talisman by Ex Nihilo
‘블루 탈리스만’을 직역하면 파란 부적이다. 제2의 살처럼 여겨지는 향수를 곧 부적에 비유한 것이다. 톱 노트는 신선한 배의 독특한 향으로 시작한다. 이 신선함은 앰버 노트를 만나면서 더욱 강력해진다. 세상에, 이렇게 풍부하고 관능적인 향이라니! 베르가모트의 은은한 기운이 느껴지지만 조용히 다른 향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맡을 뿐이다. 베이스 노트를 가득 채우는 이 깊은 앰버와 특히 잘 어우러진다.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독창적인 향수를 완성한 엑스니힐로에 박수를 보낸다.
Rouge Chaotique by Byredo
벤 고햄은 퍼퓸 월드의 시끌벅적한 경쟁에서 멀리 떨어진 채 스칸디나비아 느낌이 물씬 나는 예술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아직도 성 고정관념이 팽배한 마케팅을 펼치는 대중 향수와 달리 유니섹스 제품을 선보인다. 그렇다면 이 작은 향수병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향수는 보이지 않는 매개체이고, 액세서리보다는 덜 직접적이에요. 저는 소비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기억을 향수로 담아내고, 실제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고자 해요. 그래서 바이레도의 이름도 ‘By Redolence(기억을 연상시키는)’의 준말이죠. 거대 명품 브랜드는 이런 미묘함을 구현할 수 없어요.” 밤의 이중성이란 심오한 테마로 사프란, 자두, 파촐리를 넘나드는 젠더벤딩 향수 바이레도 ‘루즈 카오티크’가 여러분을 찾아간다.
Heaven Can Wait by Editions de Parfums Frederic Malle
에디션 드 퍼퓸 프레데릭 말의 창립자 프레데릭 말은 향수를 대화의 중심으로 되돌린 선구자다. 그래서 소수의 조향사를 섭외하고 그들과 대화하며 완전한 창작의 자유를 보장했다. 향수병은 가장 간결한 형태로 디자인했으며, 향수 용기에서는 향의 품질 외에는 어떤 특징도 드러나지 않게 했다. 같은 맥락에서 마케팅이나 모델 선정, 대형 출시 행사도 진행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처럼 향수를 꾸며내기 위해 돈을 지출하는 대신, 병 안에 담긴 내용물에 투자한 것이다. 이런 노력 덕분에 향수를 예술품처럼 창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향수라는 작품을 앤디 워홀의 판화처럼 발행했다. 장 클로드 엘레나가 창조한 향기 애호가를 위한 작품 ‘헤븐 캔 웨이트’가 기대되는 이유다.
- 포토그래퍼
- 김희준, 김수진
- 모델
- 이정문, 에리
- 헤어
- 홍현승
- 메이크업
- 정연우
- 네일
- 최지숙
- 스타일리스트
- 시주희
- 소품
- 이다영
- 플로리스트
- 박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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