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가지 가을의 향, 17인의 조향사
후각에 다채로운 감정과 상상력을 불어넣는 지휘자이자 기민한 감성의 예술가. <보그>는 현시대 가장 출중한 공감각자와 다름없는 조향사와 공명한다. 14가지 가을 신작과 이를 창조한 최고의 조향사 17인과 나눈 대화.
EDITIONS DE PARFUMS FREDERIC MALLE Jean-Claude Ellena
가장 단순한 접근 방식으로 우아한 향을 만들어내는 조향사. 전설적인 ‘코’, 장 클로드 엘레나가 또 한 번 프레데릭 말과 손을 잡았다.
향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디올의 ‘Diorella’. 에드몽 루드니츠카(Edmond Roudnitska)가 1972년 만든 향수였는데, 단순하면서도 유려한 조향 스타일이 놀라웠습니다. 당시 향수 월드에서 유행하던 스타일과는 반대로 가벼운 향이었지만 그 존재감은 강렬했죠. 제게 종교로 인도하는 ‘후각의 대성당’ 같은 존재였습니다. “Keep it simple!” 스승이었던 그에게 받은 최고의 조언이죠.
당신은 향수를 ‘기억의 시’라고 정의합니다.
시는 단어의 소리와 의미, 리듬을 결합해 인상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예술 장르입니다. 향수가 냄새와 물질의 감각, 리듬을 결합함으로써 시적 가치가 있는 후각적 조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여겼죠.
일상에서 즐기는 향은?
하루의 시작인 클렌징 단계에서부터 ‘무향’ 제품을 사용합니다.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평소 향수를 절대 뿌리지 않아요.
견딜 수 없는 향도 있나요?
좋은 향, 불쾌한 냄새 모두 포용합니다. 참을 수 없이 기분 나쁜 냄새가 있다면, 그 역시도 제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측면을 찾아내죠.
신작 ‘헤븐 캔 웨이트’의 아이디어는 어떻게 탄생했나요?
오랫동안 후추, 카다멈, 육두구, 핑크 페퍼와 같은 ‘차가운’ 향신료를 선호했습니다. 이런 노트는 향수에 추진력과 활력, 자발성을 부여했죠. 하지만 이번에는 ‘뜨거운’ 향신료를 사용하고 싶었습니다. 칠리 페퍼, 커민, 계피, 정향, 시간이 지나도 남는 향긋함과 같이요. 부드러운 화이트 머스크와 활석처럼 달콤한 향이 완벽하게 어울리는 아이리스를 곁들였습니다.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어우러지도록 만든 거죠.
새로운 향을 이미지로 표현해본다면?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 감각적이고 육욕적인 향이니까요.
프레데릭 말과는 어떤 방식으로 의견을 조율했나요?
2000년부터 우리는 매우 가까운 친구로 지내고 있습니다. 에르메스 조향사로 활동하던 시절에는 다른 누구와도 일할 수 없었지만 2018년 1월 5일 에르메스를 떠난 바로 다음 날, 프레데릭이 연락을 했어요. 그리고 ‘로즈 앤 뀌흐(Rose and Cuir)’가 탄생했죠.
조향 과정은 순탄했나요?
창조는 곧 ‘길이’라고 여깁니다. 그 길이는 다소 길며 때로는 며칠, 때로는 몇 년이 걸리기도 하죠. 이 직업에는 인내, 또 인내가 필수적입니다. 저는 자신이 원치 않는 것을 하나씩 제거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갑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매일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장인과는 달리, 작가는 나아가면서 쌓는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작업하죠.
에디션 드 퍼퓸 프레데릭 말이 특별한 이유는?
미식가가 있고, 그들에게는 항상 다르고, 까다롭고, 독특하고, 대담하고, 풍부한 향수가 있습니다. 향을 사랑하는 아티스트를 알고, 향수 에디터가 주도하는 프레데릭 말이 제안하는 방식이죠. 미식가에 비유한 이유는 향수 역시 요리와 같기 때문입니다. 특히 천연 성분의 경우 추출 기술의 발전으로 과거보다 오늘날 더 다양해지고 품질도 좋아졌지만, 무엇보다 고추와 바닐라, 과일 같은 새로운 맛과 향을 연구하고 찾아내는 스타 셰프들 덕분에 조향사 역시 새로운 성분을 향수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토록 다양한 성분을 활용하는 조향사를 적재적소에 등용하고요. 새로운 자연이 발견되고 세상이 열렸으니 사람들은 자유롭게 탐험을 즐기면 되죠.
몇 가지 단어로 스스로를 정의해본다면?
예민함, 단순함, 지능적. 감성이 없으면 지능을 필요로 합니다. 조향사의 노하우는 책뿐 아니라 일상의 실천과 겸손함을 통해 체득됩니다. 화가와 음악가, 작가, 무용가, 배우 등 모든 예술이 그렇듯이.
당신을 이 자리에 있게 만든 작품은?
보석 브랜드의 첫 번째 향수였던 반클리프 아펠 ‘퍼스트(First)’, 토마토 잎의 향을 처음으로 시도한 시슬리 ‘오 드 깡빠뉴(Eau de Campagne)’.
향을 창조하기 위해 당신이 감행하는 도전은?
본질적으로 각 창작물은 하나의 제품에 불과하지 않으며, 자신과 대면하는 ‘도전’입니다. 완성한 향수는 저에게서 벗어나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고, 생명력을 유지하죠. 엄격함과 단순함이 핵심인 조향 기술을 향상시키기 위해 늘 노력합니다. 평생이 걸리는 일이죠. 60년 동안 업계에 몸담아온 후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몇 가지가 있는 것처럼요.
즐겨 입는 작업복은?
트위드 재킷과 화이트 셔츠, 클래식한 팬츠. 타이는 매지 않고요.
좋아하는 예술 작품은?
폴 세잔과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의 회화.
HERMÈS Christine Nagel
에르메스의 향을 지휘하는 하우스 최초의 여성 마스터 조향사. 지난 3월 <보그 코리아>와 만난 크리스틴 나이젤이 이번에는 햇살에 반짝이는 무지개를 닮은 화사한 향으로 돌아왔다.
향에 처음 심취한 순간을 회상한다면?
할머니의 핸드백을 열었을 때 풍기던 파우더리하고 달콤한 향기. 그 당시 여성은 모두 파우더를 사용했죠. 에르메스에 합류한 뒤 브랜드 최초의 여성 향수 ‘깔레쉬(Calèche)’가 이와 똑같은 이야기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됐어요. 여성 핸드백 내부의 향을 모티브로 한 전설적인 향수죠.
‘트윌리 데르메스’ 라인에서 오랜만에 신작을 선보였습니다.
사실 계획된 작업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가 ‘투티 트윌리 데르메스’의 향을 창조하도록 거부할 수 없는 충동을 불러일으켰어요. 젊은 여성들의 끝없는 이야기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죠. 또한 새로운 세대의 싹트는 여성성이야말로 창의성, 독창성, 독특한 정신을 표현한다는 생각에서 순수한 기쁨이 가득한 향을 만들어내고 싶었어요. 그러던 중 우연히 진저의 새로운 표현 방식인 ‘진저 플라워’를 발견하게 됐고요.
진저 플라워요?
평소 각자 다른 분야의 재능 넘치는 사람들을 만나 서로 노하우를 교환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느 날 한 파티시에가 진저에 대한 열정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호기심이 발동했죠. 진저와 비슷하면서도 진저 플라워는 더 부드럽고 온화한 특성을 띱니다. 그 섬세하면서도 세련된 노트에 명랑한 터치를 더하기 위해 리치와 머스크가 진저를 감싸도록 표현했어요.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향에서 새로운 표현을 끌어낼 수 없었다면 이 매혹적인 향을 공개하지 않았을 거예요. 진저는 의심할 여지 없이 이 프로젝트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만드는 다면적 원료입니다. 스스로도 이 재료에 대한 모든 측면을 탐구했다고 자부했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꽃을 발견했죠.
새로운 향으로 여성의 어떤 감정을 전달하고 싶나요?
전염되는 쾌활함, 즐거움, 하지만 마냥 가볍지 않은 평온함.
당신과 에르메스의 공통 지향점은?
늘 친밀감을 느낍니다. ‘좋은 것’에 대한 취향, 진정성, 항상 탁월함을 추구하려는 열망. ‘투티 트윌리 데르메스’는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에르메스의 탄생 이래 이어진 젊음의 정신을 구현하는 단단한 틀입니다. 우리가 보여주는 대담한 자유와 젊음은 독특하고 창의적이며, 활기차면서도 예측할 수 없죠. 특히 이 향수는 자신만의 코드를 장난스럽게 뒤집는 하우스의 상징물이에요.
체감하는 향수 월드의 변화가 있다면?
전 세계의 격변은 향수 산업에도 영향을 미쳤어요.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하고, 새로운 개념이 떠오르죠. 특히 환경에 대한 우려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그 누구도 이 주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죠. 우리는 원료 조달과 산업 전반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책임져야 할 신중하고 절대적인 도덕적 의무가 있어요. 하지만 전 본래 매우 낙관적인 사람이에요. 금지와 제약의 증가는 장애물이 아니라 훌륭한 창의성을 발휘할 기회라고 봐요. 조향사들은 상상력을 더 발휘하게 될 것이고, 다른 길을 찾게 되겠죠.
바꾸고 싶은 고정관념은?
브랜드의 얼굴과 뮤즈가 향수 이미지를 만든다는 생각.
향의 본질이란?
즐거움을 느끼고, 감정을 경험하고, 그것을 공유하는 것.
PARFUMS CHRISTIAN DIOR Francis Kurkdjian
현시대의 가장 세련되고 대담한 향을 창조하는 디올 퍼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프란시스 커정. 디올의 역작 ‘쟈도르’에 새로운 금빛 터치를 더한다.
신작 ‘쟈도르 로르’의 영감의 원천은?
‘쟈도르’ 자체가 큰 아이디어였습니다. ‘쟈도르’의 플로럴 부케는 수많은 원료가 다양하게 얽혀 상호작용하죠. 그 풍성함을 파격적으로 간결하게 다듬고 싶었습니다. 꽃을 최대한 강조하고, 윤곽을 두드러지게 극대화해 전례 없는 풍부하고 강렬한 노트를 향수에 불어넣었죠. 포뮬러를 단순화하는 동시에 농도를 짙게 표현해야 하는 것이 관건이었습니다.
조향 작업을 금 채굴 과정에 비유했습니다.
향수를 구상하는 과정이 가장 순수하고, 가장 빛나며, 가장 아름다운 형태의 금을 좇는 것과 비슷했죠. 디올 하우스의 정수를 찾아낼 때까지 ‘채굴’하듯 탐구했으니까요. 순도 높은 물질만 남기기 위해 금속을 가열하듯, 기존 오 드 퍼퓸의 포뮬러를 ‘따뜻하게’ 만들었습니다. 재스민, 센티폴리아 로즈, 은방울꽃이 농축된 감미롭고 부드러운 향을 강조했죠.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기존 향기와 유산이 있기에 탄생했지만, 그렇기에 작업이 쉽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자신이 만들지 않은 향수를 재창조하는 일은 까다롭죠. 겸손한 태도지만 기존 작품에 저만의 터치를 더해야 하니까요. ‘쟈도르’에 제 시그니처를 남기는 일은 프란시스 커정이라는 사람을 소개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실상 디올 하우스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실제로 모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전설적인 ‘바 재킷’을 자신만의 언어로 해석해 선보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위대한 걸작에 경의를 담았지만 대담한 방식으로 저만의 흔적을 남겼죠.
디올 향수 하면 떠오르는 것은?
여러 이미지가 연상되는군요. 파리, 몽테뉴가, 메달리온, 디올 그레이, 베르사유, 트리아농. ‘보르비콩트’에서 공개한 향수 이미지와 크리스챤 디올의 어머니에게 헌정한 존 갈리아노의 쇼, 최초의 여성 컬렉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 1987년 도미니크 이세르만이 찍은 ‘소바쥬’ 향수의 광고, 조향사가 되기로 결심한 해에 샹젤리제 거리에 맴돌던 ‘디올 쁘와종’의 향기, 장 밥티스트 몬디노의 ‘쟈도르’ 광고 등이요. 에디 슬리먼을 위해 만든 작품인 ‘오 누와르’와 향수 제작을 위해 그와 만난 기억, 디올의 세 가지 향수를 조향하기 위해 몽테뉴가에서 존 갈리아노와 만난 개인적인 추억도 생각납니다.
당신과 디올의 관계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융화적.
최근 읽은 작품은?
클로드 아르노(Claude Arnaud)의 <Picasso tout contre Cocteau>. 파블로 피카소와 장 콕토, 그들의 특별한 우정에 대해 집필한 책이죠.
일상에서 즐기는 향은?
제 최신작. 그리고 쉴 때는 아무것도 뿌리지 않습니다. 휴식을 취하는 저만의 방법이죠.
좋아하는 미식은?
친구가 초대해서 직접 대접해주는 근사한 요리.
당신이 바꾸고 싶은 고정관념은?
조향사가 되기 위해 반드시 그라스 출신일 필요는 없다는 것.
미래의 향수는 어떤 모습일까요?
사람의 눈을 카메라와 뇌 속에 이식한 칩으로 대체하는 방식이지 않을까 싶군요. 언젠가 우리는 더 이상 향수를 사용하지 않게 될 거예요. 서로 감정을 공유하고 연결되기 위해 우리는 뇌에 후각적 데이터베이스를 다운로드하게 될 것입니다.
꽤 구체적이군요.
IT 엔지니어였던 아버지 덕에 기술에 익숙하죠. 가상 현실 및 증강 현실과 연결되는 후각 장치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향의 본질은?
숨을 쉰다는 것은 냄새를 맡는다는 것이고, 곧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부죠.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나요?
제가 아닌 창작물로 기억되길 원합니다. 향수가 사용되는 한, 제 존재는 잊히지 않을 테니까요.
AESOP Barnabé Fillion
사진과 식물학, 시각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조향사 바나베 피용. 현실과 상상의 경계, 미지의 영역을 탐구하는 이솝과의 한 챕터를 마무리한다.
향을 창조하는 그 복잡 미묘한 여정을 설명해주세요.
조향을 할 때 대부분 시각적 요소에서 출발합니다. 보통은 흐릿한 이미지로 시작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명확해지고 선명해집니다. 이 이미지 안에서 색상과 질감을 고려하는데 화가 또는 작곡가의 창작 과정과 유사한 부분이죠. 다양한 형태와 모양이 주는 연상을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다른 요소를 후각, 시각, 청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죠. 이솝에서는 이런 접근 방식을 자유롭게 여깁니다.
사진가로 일했죠? 향에 매료된 계기가 궁금하군요.
왁스가 타오르면서 퍼지는 향, 촛불을 끈 다음의 잔향처럼 늘 초와 관련된 향에 애착이 있었습니다. 특히 여행을 다니며 다양한 예배 공간에서 느껴지는 향에 이끌렸죠. 2004년에 식물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조향의 핵심을 깨우치는 기회였습니다. 그때부터 향수에 대해 연구하고 전통적인 장인 정신에 기반한 기법으로 향수에 몰두했죠. 돌로미테 알프스의 숲과 다양한 품종의 소나무, 파우더리한 아로마 꽃과 순수한 네롤리는 영감의 원천입니다.
‘우라논 오 드 퍼퓸’을 끝으로 마침내 여섯 가지 ‘아더토피아 컬렉션’이 완성됐습니다.
시리즈 연대기의 마지막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끝’이라고 부르는 것에 가장 가까운 향수면서 실제로는 ‘결말’이 아니라는 개념을 표현했습니다. 문명을 접하고, 폐허와 마주하고, 돌과 연결되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 서 있는 느낌. 그러다 페트라 같은 신전을 마주한 기분과 흥미진진한 퀘스트를 탐색하는 듯한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죠. 아주 광활한 느낌과 동시에 사라지는 듯 무한한 존재가 되는 감각입니다. 이렇듯 여섯 가지 향수의 의도는 사람들을 더욱 매혹적인 영역으로 이끌어 자신의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해방감을 선사하고, 감수성을 유도하고, 또 다른 인식의 영역을 탐구하도록 이끄는 것이 목표였어요. 호기심이 많고, 의외의 매력을 지닌 아로마를 찾는 사람들을 위한 향이죠. 향수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오랜 시간이 소요됐습니다. 멋진 작업 방식이면서도 업계에서 흔히 볼 수 없죠. 잊지 못할 추억이 정말 많아요.
향의 관전 포인트는 뭘까요?
수 세기에 걸쳐 그 자리를 지켜온, 파괴되지 않는 건축 조각 ‘모놀리스(Monolith)’가 컨셉입니다. 과거 문명을 상징하며 특정 시대의 문명과 우리를 이어주는 흥미로운 구조물이죠. 다양한 프랑킨센스 노트를 연구했고, 바위나 돌과 연결될 수 있는 재료를 추가한 뒤에는 사막, 화산에 가까운 이미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강렬한 이미지에 약간의 부드러움을 터치해 아름다운 것으로 승화시키도록요. 미르, 스타이랙스, 파촐리, 샌들우드, 시스투스, 통카, 시더, 베티베르가 주는 흙먼지를 연상시키는 정적인 아로마 노트에 라벤더 플라워, 페티그레인으로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향수와 어울리는 작품을 하나 추천한다면?
아누아르 브라헴(Anouar Brahem)의 혁신적이고 신비로운 음악.
당신이 이솝과 공유하는 가치는?
오랫동안 함께 일하면서 우리는 항상 과학과 자연에 대한 깊은 존중을 공유하고, 혁신과 전통의 조화로운 결합에 대한 신념을 나눕니다. 또한 미적 취향과 문화적 관심사도 일치해요. 일시적 유행보다는 지속 가능하고 깊이 있는 가치를 중요시합니다. 그리하여 신제품을 개발할 땐 모든 아이디어와 방법을 면밀히 검토하며, 장기적인 접근 방식을 선호하죠.
영감으로 가득 찬 하루의 풍경은?
감각이 가장 기민하고 정확한 오전 11시. 이 시간에는 가장 좋아하는 것들의 향을 맡습니다. 좋아하거나 새로운 음악을 듣고, 자연 속에 머뭅니다. 매일이 후각적 여정이에요.
향에 대해 새롭게 습득한 지식이 있다면?
현재 일본에 머물며 다양한 찻잎을 가공하는 방식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초임계 가스 추출법을 활용해 실내 공간의 향을 담아내고자 시도하고요. 여러 지역에서 자라는 산초 역시 연구 대상입니다. 독특한 향취를 지닌 재료라 흥미로운 무언가가 탄생할 것 같아요.
향의 존재 가치는?
제2의 피부나 다름없는 향은 매혹하기 위해 만들어진 예술 작품입니다. 이 후각적 감각이 자아 발견의 여정이라고 봅니다.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일 뿐 아니라 기억과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공간과 연결되는 방법이기도 하죠.
ARMANI PRIVÉ Fabrice Pellegrin
아르마니 프리베의 ‘베르 말라키트’, 딥티크 ‘도손’, 조 말론 런던 ‘블랙베리 앤 베이’. 몇 가지 대표작만으로도 파브리스 펠르그랭의 뛰어난 후각은 증명된다.
향에 조예가 깊은 집안이었습니다.
꽃과 향기의 표본에 둘러싸인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라스 주변의 산에서 나고 자랐고, 향수 제조사 아버지와 재스민을 따는 할머니, 천연물을 공급하던 할아버지에게서 아름다운 혜택을 받았죠. 특히 그라스의 꽃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센티폴리아 로즈와 재스민 그랜디플로럼은 늘 함께해온 두 가지의 멋진 꽃으로 오늘날 제게 필수적인 향료죠. 일상적으로 함께해온 자연을 저만의 창작물에서 승화시킬 수 있다니, 꿈처럼 멋진 일이에요.
‘베르 말라키트’는 첫 탄생 이후 꾸준히 사랑받는 향입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기념하는 ‘아르마니 프리베’ 컬렉션과 제 정체성은 일맥상통합니다. 우람하고 야생적인 자연의 심장에서 장엄하게 피어난 순백의 꽃을 상상했어요. 서로 대비되는 미네랄과 식물이 풍경에서 만나는 모습을 향으로 구현했죠.
창조자로서 느끼는 이 향의 감정은?
자유와 긍정.
아르마니 향수만의 특별함은 무엇인가요?
‘Privé.’ 럭셔리의 동의어입니다. ‘아르마니 프리베’는 강력하고, 아름다우며, 영감을 주는 정통한 향수 컬렉션이죠. 하우스의 패션처럼 모방할 수 없는 질감, 극도의 품질을 지닌 원료, 향을 독특한 방식으로 차별화하는 매우 냉철하고 정확한, 현대적인 우아함을 품고 있습니다.
몇 가지 단어로 스스로를 정의해본다면?
미식가, 아름다운 것들을 찬미하는 사람. 강한 감정을 이끌어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관심을 기울입니다. 향수에 대한 열정도 그로부터 기반하죠. 전달자라 부를 수도 있겠군요. 제 향수 노하우를 미래 세대가 이어가길 원하기에 가능한 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해주고 있죠.
요즘 관심을 기울이는 분야는?
소중한 천연자원을 고갈시키지 않는 대안을 찾는 것. 이 또한 우리 역할의 일부입니다. 조향사는 의식적으로 더 환경친화적이면서 창의적인 향 체제로 나아가야 해요.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끌어내는 동시에, 수많은 합성 분자가 효율성과 지속 가능성 두 가지 관점으로 개발되고 있습니다. 생명공학 기술 또한 유망한 대안이고요. 샌들우드도 멸종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천연 당을 발효시킨 대체 분자 등 재료의 팔레트가 진화하기 때문에 우리가 구성하는 방식도 진화하고, 그에 적응해야 하죠. 아름답고 깨끗한 재료로 향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새롭게 발견한 기술이 있나요?
최근 우리는 극미량의 자연을 조달하고, 천연 원료에 가장 가깝게 나타낼 수 있는 새로운 추출 방식인 ‘Firgood™’을 개발했습니다. 용매가 없고, 자연 친화적인 이 기술은 바이오매스 세포가 자연적으로 함유한 물만 사용해, 전자기 진동으로 가열함으로써 향 분자를 회수합니다. 특히 과일, 채소 또는 ‘향기로운’ 꽃에서 추출한 자연물을 사용한 새로운 후각의 가능성을 열었죠.
이토록 자연을 사랑하는 당신의 휴양지는?
지중해의 코르시카섬. 빛과 바닷바람, 흙과 관목이 주는 대지의 냄새는 영감을 주는 동시에 아늑한 요람이죠.
YSL BEAUTY Daniela Andrier & Christophe Raynaud & Antoine Maisondieu
보테가 베네타, 불가리, 프라다의 핵심 향수를 창조한 다니엘라 앤드리어를 중심으로 걸출한 조향사 크리스토프 레이노, 앙투안 메종듀가 입생로랑 뷰티의 새로운 남성 향수를 위해 뭉쳤다.
한 여자와 두 남자, 흥미로운 멤버 구성이군요.
신작 ‘마이셀프’는 현대적인 남성성을 미적, 시적으로 재현하는 여성 조향사 다니엘라의 초기 아이디어로 시작됐습니다. 파리에서 문학을 공부한 그녀의 창작물은 침착하면서도 섬세하고, 우아한 향조가 강점이죠. 신선하고 관능적인 텍스처의 우드, 부드럽고 깨끗한 플로럴 향이 남성 피부를 어루만져선 안 된다는 법칙은 없어요. 남성 향수라고 반드시 강렬하고 날카로워야 한다는 관념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향기는 오로지 스스로를 위해서만 입습니다. 향이 주는 미묘한 뉘앙스 속에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유혹적으로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이죠.
서로의 소통 방식은 어땠나요?
우리 셋은 일하는 방식이 매우 다릅니다. 그것이 장점으로 작용했죠. 앞으로 함께 나아가며 각자 다른 실을 당깁니다. 서로의 말을 듣고, 존중하고, 대화하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에너지가 10배로 증가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특히 눈여겨볼 향조가 있다면?
오렌지 블로섬이 두각을 나타냅니다. 신선한 향조를 지닌 이 원료는 조향사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빛깔을 냅니다. 신생아부터 예식을 앞둔 신부, 마초적인 성향이 강한 남자까지 모두 아우를 수 있죠. 우리는 입생로랑 뷰티만의 방식으로 튀니지에서 얻은 오렌지 블로섬을 다뤘습니다. 특유의 순수하고 선명한 향을 한층 섬세하고 독창적으로 만들었죠.
남성 향수의 주원료로 꽃을 제시한 것이 흥미로워요.
봄꽃이 남자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긴다면, 다시 고려해보라고 말해주고 싶군요. 아무도 루이 14세를 남자답지 않은 모습으로 상상할 수 없죠. 하지만 그는 가장 ‘달콤한 꽃을 피우는 왕’으로 불렸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기른 오렌지꽃을 증류시킨 향을 매우 좋아했죠. 이 꽃은 18세기 초에 발견된 이래 수많은 오 드 코롱에 활용됐고, 오늘날까지도 모든 성별이 공유하는 장르입니다.
이 시대의 남성성이란?
우리는 영화나 책에서처럼 진부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쉽고, 그다지 미묘하지 않죠. 이번 향수를 창조하며 우리는 ‘미묘함’이라는 개념에 대해 연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고리타분해지고 싶지 않고, 기존 체제를 해체하고, 진부함과 스스로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하는, 다재다능한 젊은 세대를 겨냥했어요. 성별에서 기반한 특성이 아니죠.
어떤 감정을 전달하고 싶나요?
자신감과 기쁨.
입생로랑 뷰티 향수만의 미학은?
가장 ‘프랑스다운’ 우아함.
향에 녹아든 추억을 공유한다면?
(Daniela)아버지가 수트케이스에서 돌돌 말린 형태의 스크린을 꺼냈을 때 퍼지던 아틀라스 삼나무의 향. (Christophe)비가 온 뒤, 해변에서 나는 소나무의 향. (Antoine)그라스의 향수 제조사 샤라보(Charabot)에서 일했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사무실에서 어릴 적 갖고 놀던, 불가리아 로즈가 가득 들어 있던 나무통. 집에는 늘 컵에 라벤더 꽃잎을 담아두었죠.
향수의 본질은?
감정을 부릅니다. 과거로부터, 미래로 향하는.
MAISON CRIVELLI Paul Guerlain
향수의 명가, 겔랑가(家) 태생이자 일류 여성 조향사의 제자. 이른바 ‘향 수저’의 운명을 타고났지만 착실히 조향사의 정석 과정을 밟아온 폴 겔랑은 향수 월드에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중이다.
향에 조예가 깊은 집안 덕에 실질적으로 얻은 혜택이 있다면?
거짓말처럼 느껴질 수 있겠지만 가족끼리 향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거의 전무합니다. 조향사라는 직업을 낯설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 외에 큰 혜택은 없었어요. 오히려 긴 여정이라고 여기며 인내심을 갖고, 차근차근 조향사가 되기 위해 준비했죠. 안 플리포(Anne Flipo)의 제자가 된 날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인생이 바뀔 거란 확신으로 흥분했죠.
그녀에게 받은 최고의 조언은?
주변에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흔들리지 않도록, 더없이 강력한 아이디어에 집중하라는 것.
향에 처음 매료된 순간은?
다섯 살 때 머물던 마요트(Mayotte)섬, 바람에 실려온 일랑일랑의 향. 누군가 제 안에 조명을 켠 느낌이었죠.
조향이란 복잡 미묘하고 전문적인 작업을 쉽게 설명한다면?
모든 직업이 복잡한 면을 띠지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들로 하나의 감각을 만들기에 더 복잡하게 느껴집니다. 시각적으로 해석한다면 요리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서로 다른 재료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 기본 접근 방식은 거의 비슷합니다. 완성된 요리의 맛과 모양을 상상하며 원료를 서로 조합한다는 점에서 말이죠.
메종 크리벨리와 ‘네롤리 나심바’라는 향수를 공개했습니다.
창립자 티보 크리벨리와는 사적인 이야기도 자주 나누는 매우 친밀한 사이입니다. 그가 아프리카로 떠난 사파리 여행을 실감 나게 설명했는데, 그 순간 어떤 이미지와 소재가 바로 떠올랐어요. 사바나의 일출을 그려보자는 생각으로 작업에 몰두했죠. 떠오르는 첫 태양 광선의 밝은 에너지를 네롤리로, 아직까지 남아 있는 신비로운 밤의 기운을 사피아노로 나타냈습니다. 오렌지 플라워의 신선한 노트와 사파리에서 출몰하듯 나타나는 동물적인 터치를 위해 가죽 소재의 대조로 감각적인 향조를 완성했죠.
과정에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유동적이면서도 관능적인 향을 제공하는 동시에,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두 노트의 이상적인 균형을 찾는 것이 큰 도전이었습니다. 마침내 완성했을 때 더없이 충족감을 느꼈죠.
아프리카에 대한 추억을 공유해주세요.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여행할 때가 기억나는군요. 아름다운 정원과 드넓은 바다, 포도밭, 쉽게 목격되는 동물과 함께 살아 숨 쉰다는 사실을 체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모든 요소가 중요한 영감의 원천으로 자리 잡았어요.
당신에게 안정감을 주는 것은?
자연과 나무, 녹색, 신선한 풀 또는 젖은 흙.
반대로, 견딜 수 없는 향은?
화이트 비니거.
욕실에선 어떤 향이 나나요?
아내의 향수와 오렌지꽃의 향기.
당신의 필수 작업복은?
흰 셔츠에 진한 색 청바지.
즐기는 미식은?
모든 음식! 그게 문제예요.
주목하는 향수 월드의 변화가 있다면?
팬데믹 이후 향수는 웰빙과 즐거움의 원천으로 정착했습니다. 소비자는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더 개인적이고 더 ‘말을 걸어주는’ 향수를 원하게 됐어요. 그들은 이제 향수에 관한 수많은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고, 지식 수준과 관여도가 높습니다. 자신이 사용하는 향수 재료, 비하인드 스토리에 깊이 파고들고 싶어 하고, 지속 가능성에 관한 진정한 약속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더 투명하게 일해야 해요.
향의 존재 가치란?
재료와 재료 사이, 재료와 나 사이, 그리고 향기를 사용하고 그것을 맡는 사람 사이의 대화.
JO LOVES Jo Malone CBE
이름 자체가 브랜드인 그녀. 조 말론 CBE 여사는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다채로운 영감을 얻는다. 이번에는 1920년대가 상징하는 영국의 풍요, 화려함, 우아함을 담은 향이다.
오늘 뿌린 향수는 뭔가요?
최신작 ‘앰버, 라임 & 베르가못’과 ‘코발트 파촐리 앤 시더’, ‘조 바이 조 러브스’ 세 가지 향수를 레이어드했어요. 이 셋의 조합은 혁신 그 자체예요.
새로운 향수는 어떻게 탄생했나요?
‘앰버, 라임 & 베르가못’은 17세기 프랑스에서 시작된 클래식 카 경연 대회, ‘콩쿠르 델레강스’에서 영감을 받은 향입니다. 믿을 수 없이 호화롭던 파티의 생생한 분위기를 향기로 재현하고 싶었어요. 런던의 헐링엄(Hurlingham) 클럽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한 적 있는데, 그날 저녁이 모티브가 됐습니다. 오래된 빈티지 자동차가 곳곳에 주차돼 있고, 모두 1920년대풍의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의상을 차려입었어요. 흐르는 샴페인, 별빛 아래 빛나는 샹들리에, 바구니에 담긴 음식을 보며 삶의 아름다움을 만끽했죠.
향의 관전 포인트는?
성숙하고 관능적인 향입니다. 가을의 쌀쌀한 공기와 더없이 어우러지죠. 베르가모트, 핑크 페퍼, 만다린의 톱 노트에 이어 화이트 앰버, 시더우드, 블랙 커런트에서 스웨이드와 파촐리, 베티베르의 잔향으로 마무리됩니다. 독특하면서도 깊이 있는 향기예요.
향을 맡았을 때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면?
오드리 헵번, 조지 클루니처럼 영예로운 할리우드 고전 영화 분위기의 배우들.
어떤 감정을 전달하고 싶나요?
특별한 이벤트로부터 출발한 향수지만 각자의 추억을 담으며 향을 온전히 즐길 수 있길 바랍니다. 스스로를 위해 고급스러운 소재의 옷을 선물하고, 우아한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보며 행복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두바이에 머물고 있죠.
중동의 매력에 푹 빠졌어요. 잊을 수 없는 인생의 한 페이지가 될 것 같아요. 그만큼 이곳에서는 창의력으로 가득 찬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몇 달 전에는 ‘에보니 & 카시스’ 향수 영감의 근원지였던 오만을 여행했는데, 너무도 환상적인 경험이었습니다. 몇 달간 이곳을 더 탐험하고, 새로운 향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을 계획이에요.
향을 창조하는 일의 매력은?
조향을 할 때 제 삶의 에피소드, 다채로운 색 등 영감을 주는 모든 것을 유심히 관찰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느낀 감정과 소중한 기억을 담아내고자 노력하죠. 향을 만드는 건 작곡과도 같아요. 음악가가 자신이 사랑하는 음을 모두 모아 음악을 완성하듯, 제가 사랑하는 삶의 시기를 떠올리며, 그 순간에 어떤 노트를 채우고 싶은지 고민하죠. 상반되는 노트가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제3의 향’을 찾고자 노력합니다. 두각을 나타내고, 기억에 남을 수 있는 그런 향기요.
여행을 사랑하는 당신이 추천하는 레스토랑은?
파리에 방문할 때마다 가는 ‘The Baccarat’ 레스토랑. 아름다운 크리스털로 가득한 공간이라 삶의 반짝이는 순간을 느끼죠. 런던 메이페어의 마운트 스트리트에 있는 ‘Scott’s’도 추천해요. 바에 앉아 와인을 마시며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적당한 적막감을 느끼며 바깥을 관조할 수 있죠.
당신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들은?
가족, 여행,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 창의력, 요리, 웃음, 동물, 음악 모두. 아들이 집에 친구들을 데려오는 것도 좋아해요. 음식을 만들고, 모두 함께 테이블에 둘러앉아 식사를 즐기죠. 잠에서 깰 때와 잠자리 들기 전, 환하게 미소 지으며 즐겁게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선 서두르지 않고, 삶의 순간들을 온전히 즐기는 데 집중해야 해요.
최근 읽은 책은?
인도 요리사가 프랑스로 가서 새로운 요리를 발굴하는 내용의 <The Hundred-Foot Journey>. 여러 번 읽어도 처음 읽는 것처럼 아주 흥미로워요.
요즘 빠진 분야는?
우디 계열 최고급 향료의 하나인 ‘오우드(Oud)’. 본래 지역별로 선호하는 향기가 달랐다면, 최근에는 이런 문화적 경계가 흐려지고 있어요. 기쁜 일입니다. 그래서 새롭고 낯선 향기를 탐구하죠.
당신에게 향은 어떤 의미인가요?
가장 좋은 액세서리. 하얀색 셔츠를 입었더라도 좋은 향기가 나면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게 되죠. 향기는 우리가 추억에 젖어들게 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그려나가도록 이끄는 힘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모두 향수를 원하고 사랑하죠. 삶을 윤택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줍니다.
GUERLAIN Delphine Jelk
겔랑의 수석 조향사 델핀 젤크는 마스터 조향사 티에리 바세(Thierry Wasser)의 명성을 잇는다. 그녀만의 예술적인 해석과 감정을 담아낸 ‘라르 & 라 마티에르 컬렉션’의 최신작을 공개한다.
언제 조향사가 되기로 결심했나요?
어릴 땐 약사가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파리에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패션을 공부하게 되더군요. 그러다 문득 섬유 소재를 향기와 연결 짓는 아이디어가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향에 대한 흥미가 커지기 시작하자 제 길이라는 확신이 들었죠. 그리하여 향수를 깊이 있게 공부하기 위해 그라스로 떠나게 됐죠.
겔랑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9년 전이었어요. 뉴욕과 파리를 오가며 일할 때로 영감으로 가득했습니다. 겔랑은 방대한 향의 역사가 있죠. 상상하던 향을 그들에게 프레젠테이션 한 적 있어요. 그것이 바로 ‘라 쁘띠 로브 느와르’ 향수로 탄생했죠. 지금 헤아려도 정말 동화 같은 일이에요.
신작의 이름은 ‘토바코 허니’입니다.
편안한 동시에 극도로 관능적인, 황금빛 시럽 같은 꿀과 중독성 있는 타바코의 대비로 중독적이고 강력한 향을 완성했습니다. 타바코로 조향하는 작업을 개인적으로 좋아해요. 가죽의 어코드와 초콜릿, 우드 노트를 조합해 꿀처럼 화려하고 달콤한 향을 이끌어냈죠.
새로운 향을 맡으면 연상되는 작품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의 랜드 아트를 떠올리게 될 겁니다. 소재가 가진 날것 그대로의 매력을 강조한 작품이죠. 수천 가지 음영을 지닌, 거대한 담뱃잎의 집합체를 상상해보세요.
가을에 어울리는 향을 추천해주세요.
여러분을 가장 아늑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향. 캐시미어처럼 부드럽게 감싸주는 특성으로 새로운 ‘토바코 허니’나 ‘머스크 우트르블랑’을 추천합니다. 매우 따뜻한 향조를 지녔죠.
수많은 신제품이 쏟아져 나오는 향수 월드에서 겔랑 향수가 지닌 강점은 무엇인가요?
‘라르 & 라 마티에르’는 진귀하고 아름다운 원료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승화되는, 향수를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여기는 겔랑만의 독보적인 컬렉션입니다. 이곳은 표현의 제한이 없는 창의적인 실험실이에요. 가장 진귀하고 뛰어난 품질의 재료로 작업하는 과정은 중독적이기에 과다 복용이라는 단어로 비유해보고 싶군요.
잊지 못할 유년 시절의 향은?
엄마와 할머니가 사용하던 살구 오일. 달콤한 그 향만 맡으면 모든 것이 치유되는 기분입니다.
향을 창조할 때 어떤 가치를 가장 우선시하나요?
조향을 할 때 가장 중요한 영역은 바로 ‘감정’입니다. 마음을 건드리는, 피부에 스미는, 그와 동시에 지속 가능한 ‘감정의 조각’을 향으로 재현하는 것이 매일의 도전입니다.
좋아하는 예술가가 있다면?
향과 빛, 공간에서 영감을 받으며 섬세한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 클로딘 드레(Claudine Drai).
KENZO PARFUMS Quentin Bisch
쿠엔틴 비쉬는 창의적이고 과감한 어코드 사용, 브랜드에 따라 유연하면서도 완성도 높은 향을 창조한다. 2021년 ‘겐조 옴므 인텐스 오 드 뚜왈렛’, 2022년 ‘겐조 옴므 오 드 퍼퓸’에 이어 세 번째 신작을 내놓았다.
이번 협업은 어땠나요?
1990년대의 상징적인 향수를 재해석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기존 겐조 옴므 향수가 표현하는 남성상을 유지하면서 이전에 없던 요소를 첨가해 경계를 넓혀야 했죠. 새로운 키워드는 ‘마린’ ‘짠맛’ ‘바다 향기’였습니다. 신선하고 소금기 있는 바다에서의 관능적인 피부를 표현하죠. 짭조름한 느낌의 칼립손과 샌들우드, 자연의 본질을 표현하기 위해 일랑일랑 추출물을 가미했습니다. 마지막은 화이트 머스크의 부드러움이 느껴지죠.
향을 이미지로 구현해본다면?
파란 바닷물에 잠긴 일랑일랑 꽃.
어려운 점은 없나요?
기존 ‘겐조 옴므 오 드 뚜왈렛’을 토대로 신선한 바다라는 느낌을 강조해줄 한 수를 찾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다 오히려 단순하게 사고를 하게 됐어요. 강렬하고 어두운 향수병의 색과 같은 향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이 향은 ‘청록색’에 관한 거예요. 바닷소금으로 뒤덮인 일랑 모노이 어코드가 맡는 사람을 인도양, 카리브해 같은 이국적인 대양으로 데려다주죠.
바다와 연관된 추억을 공유해줄래요?
꽤 많은 것 같군요. 저는 바다에 큰 애착이 있어요. 해방감이 느껴지는 무한한 지평선, 소금기 어린 바람… 특히 여름에 가족과 함께 떠난 프랑스 포르크롤(Porquerolles)섬은 평생 기억할 것 같아요. 배를 타고 섬에 접근하던 소리, 매미 소리, 소나무와 유칼립투스 냄새가 생생합니다.
언제 처음으로 향에 심취했나요?
어머니가 사용하던 겔랑 ‘아비 루즈’와 ‘더비’, 아버지가 사용하던 샤넬 ‘뿌르 무슈’. 계절에 따라 집 안을 향으로 가득 메운 꽃과 여름이면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바친 백합.
조향을 다른 일에 비유해본다면?
향수를 만드는 일은 그림을 그리는 일과 같습니다. 색과 패턴으로 내면의 감수성을 표현하죠. 화가가 사용하는 파란색을 예로 들어보죠. 저는 그 색을 향으로 표현하기 위해 시더우드 오일을 사용합니다. 바닷물을 표현하기 위해 푸른 물감에 물을 희석하겠죠? 전 바닷바람의 내음을 표현하기 위해 칼론이라는 원료를 사용하고요. 반짝이는 수면 위를 표현할 땐 베르가모트 오일로 빛을 표현합니다. 완성된 순간으로 존재하는 그림과는 다르게, 향수는 시간이 지나면서 증발하는 재료로 혼합되기에 그 자체로 생명력과 역동성을 지닌다는 점이 차이점이에요. 향수의 구조는 끊임없이 변하죠. 향기를 창조할 때 더 세심하게 고민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받은 최고의 조언은?
그라스에서 인턴십을 할 때, 로베르테 향수 수석 조향사였던 미셸 알마이락에게 전수받은 조향 노하우. 항상 반대되는 어코드의 긴장과 균형으로 향조의 대비를 깨우치란 것이었죠.
일상에서 즐기는 향은?
오스만투스 꽃의 향. 어두우면서도 다채로운 면모를 지녔습니다. 추출할 때 아름다운 스웨이드 가죽의 향이 나며, 살구와 과즙의 힌트도 살짝 있습니다. 풍부함, 깊이, 다양한 면면으로 제 창작물 어느 곳에나 존재하죠.
우리가 향에 대해 범하는 오류가 있다면?
합성향료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집어야 해요. 값싼 화학 물질이나 인공 물질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죠. 다수는 우리가 자연에서 찾을 수 있는 재료의 ‘복제’입니다. 유일한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합성’의 의미가 분리되었다가 다시 만들어졌을 뿐입니다. 천연 장미 역시 수백 분자의 혼합물이에요. 제가 장미 향을 창조한다면 장미 추출물을 사용할 수 있지만, 시트로넬라 같은 합성향료를 사용할 겁니다. 장미 추출물은 물과 땅, 수확, 증류 등 다양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죠. 아름다운 향수는 천연으로만 이뤄지는 것도 아니며, 합성만으로 만들어지지도 않습니다. 조향은 행복과 생태학적 의식의 조화입니다.
평소 작업복은?
청바지에 흰색 셔츠, 이세이 미야케의 블랙 플리츠 재킷. 단순하면서도 흐르는 듯한 느낌을 선호합니다.
소울 푸드는 뭔가요?
올리브 오일 두 방울과 완벽하게 익은 새빨간 토마토로 만든, 가장 기본적인 이탈리아 음식.
좋아하는 여행지는?
프랑스 페르슈(Perche)와 일레듀(L’ile d’Yeu). 자연을 그대로 온전히 느낄 수 있고, 사색할 수 있는 장소.
MILLER HARRIS Emilie Bouge
조향사 집안에서 태어나 향의 요람 그라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에밀리 부주는 향에 깊이 빠지지 않은 순간이 없다. 유명 조향사가 창립한 향수 브랜드, 밀러 해리스와 그녀의 조우는 필연적이다.
밀러 해리스 향수만의 매력은 뭔가요?
시장은 빠르게 변화하고 성장하고, 하루에도 수백, 수천 가지 제품이 쏟아지죠. 밀러 해리스의 모든 향수는 각각의 소설처럼 특별한 스토리를 담고 있습니다. 평범한 하루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죠. 트렌드와 마케팅의 힘에 이끌리지 않고, 사람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제품입니다. 향수가 지닌 최고의 가치죠.
신제품 ‘이드라 휘그’는 어떻게 탄생했나요?
지난해 여름, 그라스에서 밀러 해리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렉스 오프리(Alex Oprey)를 만나 며칠간 아이디어와 향조를 공유했어요. 그는 기존 과일 향의 예상을 뒤엎는, 브랜드만의 특별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의 무화과 향을 만들고 싶어 했죠. 우리는 그리스 이드라섬을 떠올렸고, 유명 예술가들이 수십 년 동안 그곳을 여행하며 어떤 영감을 받았는지 조사했습니다. 알렉스는 이곳에 대해 쓴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의 시와 함께 제가 좋아하는 색깔의 작은 배가 그려진 그림을 보여줬어요. 그 두 가지를 보는 순간, 새로운 향이 머릿속에 그려졌죠.
핵심 향료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무화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과일과는 다른 느낌이에요. 이드라섬에서 영감이 시작된 만큼 바다의 맑음과 짭조름함, 사프란의 향을 더해 그리너리한 무화과 향을 구현했습니다.
향을 비주얼로 표현해본다면?
초저녁 푸른 바다 위에 고요히 떠 있는 작은 배 하나. 그리고 무화과를 올려둔 테이블에 앉아 작은 창문을 통해 달의 은은한 실루엣을 바라보는 평온한 풍경.
사람들이 이 향수를 어떤 감정으로 사용하길 바라나요?
이드라섬의 한적하고 안정적인 기운을 충만하게 전달하고 싶군요. 시간의 압박을 전혀 느끼지 않는, 보헤미안의 삶처럼 느긋하고 평화로운 자유를 느꼈으면 합니다. 가을바람에 휘날리는 머릿결에서 느껴지도록, 헤어 퍼퓸으로 사용해보길 추천해요.
향에 언제 심취했나요?
조향사가 된 것은 운명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투베로즈의 향을 좋아했어요. 카프리섬에 머물던 어린 시절은 인생 최고의 후각적 경험으로 남아 있어요. 지중해 섬에서는 시트러스, 라벤더, 유칼립투스, 타임, 로즈메리의 향을 공기에서 맡을 수 있으니까요.
어떤 조향사는 작업할 때 외에는 향수를 일절 사용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어떤 편인가요?
정반대라고 할 수 있겠군요. 매일 밤낮으로 제가 만든 시트러스 향수를 샤워 직후 온몸에 뿌리는 특별한 의식을 갖습니다. 욕실에는 최대한 다양한 향의 제품을 두고 그날 기분과 컨디션에 따라 사용하고, 향초를 켜고 저만의 시간을 자주 가집니다. 제 삶의 모든 순간은 향과 결코 분리할 수 없어요.
한 단어로 자신을 정의해본다면?
여행가. 창작자로서 여행, 음식, 예술을 즐기며 일상의 모든 것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습니다. 이를 통해 저라는 사람의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이 완성되죠.
ELOREA Wonny Lee & Sumin Park
재미 교포 기업가 이원형과 뉴욕에서 10년간 사진가 및 아트 디렉터로 활동해온 박수민 부부는 ‘한국적인’ 향수 브랜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감해 한국의 역사와 유산을 모티브로 한 엘로리아를 창립했다. 뉴욕 소호에서 불어오는 가장 한국적인 향의 이야기.
‘Elements’와 ‘Korea’를 합성한 브랜드 이름입니다.
“아름다운 한국 문화와 아름다움을 일상에서 만난다.” 우리 부부가 창립한 엘로리아의 모토입니다. K-뷰티가 전 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있음에도 왜 한국을 대표하는 ‘K-향수’는 없을까라는 고민에서 시작됐어요. 한국의 정서와 아름다움을 기반으로 한 스토리텔링을 통해 우리 문화를 쉽고 향기롭게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마침내 2022년에 온라인으로 브랜드를 정식 론칭했고, 지난 6월에는 뉴욕 소호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게 됐죠.
태극기의 ‘건곤감리’를 표현한 향수가 이색적이에요.
하늘, 땅, 물, 불을 나타내는 ‘The Element’라는 컬렉션입니다. 첫 창작물로 ‘조화’를 중요시하는 한국의 정서를 표현했죠. 햇살 좋은 날, 푸르른 정원의 흩날리는 꽃잎을 연상시키는 플로럴 향의 ‘Heaven(건)’, 이슬 맺힌 아침 숲속에 쏟아지는 햇살을 담아낸 우디 향의 ‘Earth(곤)’, 상큼한 시트러스 향의 ‘Water(감)’, 모닥불 앞에서 보내는 시간을 모티브로 한 ‘Fire(리)’.
현지에서 가장 반응이 좋은 향은?
‘Hazy Blue: 이내’. 석양이 지는 순간의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을 뜻하는 우리말로 이름 지은 향수는 상쾌하면서도 은은한 잔향이 특징입니다.
조향 과정에 얼마나 관여하나요?
향에 얽힌 한국적인 스토리를 위해 첫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것에서부터 끊임없이 조향사와 소통합니다. 한국 향수 산업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 한국 원료를 사용하고자 노력하고, 미국계 한국인인 조향사 린다 송(Linda Song)과 함께 작업하죠. 그녀는 지보단에서 톰 포드, 레베카 밍코프의 조향 작업에도 참여했습니다. 한국의 풍부한 문화와 전통을 표현하되, ‘한국적’이라기보다는 한국 향수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함께 탐구하죠.
파격적으로 오미자, 깻잎을 향에 사용했어요.
특별하면서도 쉽지 않은 경험이었어요. 오미자는 열매과이지만 신선하면서도 쓴맛을 지녀 향에 매우 독특한 색을 더합니다. 플로럴 노트와의 균형이 가장 관건이었죠. ‘잠비(Gentle Shower)’라는 향은 깻잎을 중심으로 알싸한 생강, 향긋한 흙 내음의 참나무와 베티베르를 조율했어요. ‘뜻밖의 단비’라는 뜻으로 자연 속에서의 달콤한 휴식을 연상시키는 편안하고 생동감 있는 향기가 완성됐죠.
향을 통해 사람들이 느꼈으면 하는 감정은?
향은 무엇보다 강력한 언어입니다. 기억과 감정을 함께 불러일으키죠. 뉴욕 한복판, 엘로리아만의 독보적인 향으로 사람들에게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게 하고 싶어요. 타지에 사는 한국인에겐 고향에 대한 ‘향수’와 추억을 되살릴 수 있겠죠.
한국에 론칭할 계획은?
아직은 없어요. 오히려 한국에선 ‘한국적인’ 향수 브랜드가 유럽의 향수만큼 좋을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죠. 더 솔직히 말하자면 한국에서 만난 몇몇 사람은 왜 굳이 ‘한국스러움’을 강조해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한국에 진출하기보다는 먼저 해외에서 다른 브랜드와 동등하게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죠.
영감을 어디서 얻나요?
우리 부부는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열 살 때 이민을 오며 수도 없이 인종차별과 짙은 외로움을 겪었어요. 그때마다 한국의 책, 영화, 음악을 보고 들었죠. 성장하면서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모국을 더 사랑하게 되면서 더 많은 것들을 배우고 창의적으로 발전시킵니다. 최근에는 한국 현대미술에 매료됐어요.
궁극적인 목표는?
아직은 신생 브랜드로, 최대한 조급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뛰어난 품질의 향수를 만드는 것에 집중하고, 우리의 브랜드와 이야기, 제품이 가능한 한 다양한 나라와 인종의 사람들에게 도달하는 것이 꿈이에요. 조금 더 큰 목표를 이야기하자면, 향수 산업에서 다양성을 보편화하는 데 일조하고자 해요. 향수는 유럽에서 만든 것이 가장 좋다는 그런 고정관념과 진입 장벽을 낮추는 일이요.
<보그 코리아>에 가을 향수를 추천해주세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라는 뜻의 ‘흐노니’라는 순우리말에서 영감을 받은 ‘Be By My Side’. 우드와 앰버의 따스한 조화에 신선한 인삼 노트가 더해진 고혹적인 향입니다. 옷과 목도리, 외투에 뿌려서 길게 남는 잔향을 즐겨보길 추천해요.
EAU D’ITALIE & ALTAIA Sebastián Alvarez Murena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의 마리나 세르살레(Marina Sersale)와 그녀의 남편 세바스티안(Sebastián)은 둘만의 이야기로 오디딸리와 알타이아, 두 가지 브랜드의 향기로운 세계를 구축했다. <보그 코리아>는 국내 론칭 1주년을 기념해 서울을 찾은 세바스티안과 단독으로 만났다.
향수 브랜드를 론칭하게 된 계기는?
마리나의 가문은 포시타노 아말피 해안의 5성급 호텔 ‘Le Sirenuse’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호텔이 50주년을 맞았을 때 지인들과 기념할 무언가를 고민하게 됐죠. 우리 부부가 사랑해 마지않는 이탈리아의 다양한 풍경을 향으로 재현한 ‘오디딸리’를 먼저 론칭하고, 저와 아내의 이야기를 담은 ‘알타이아’를 이어 창립하게 됐습니다.
당신은 아로마 향을 공부했습니다.
인스타그램, 틱톡 등 지금은 시각 중심의 콘텐츠가 만연하고, 역사적으로는 기독교의 성경을 읽었듯 문자 위주의 문화였지만, 실상 인간의 저변, 무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후각입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할 뿐, 더없이 강렬한 인상을 남기죠.
조향 과정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죠.
오디딸리의 ‘오디딸리’는 호텔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우리의 첫 번째 향수였습니다. 호텔 테라스에서 우리가 느낀 감정과 경치를 향기로 풀어냈어요. 포시타노의 뜨거운 태양 빛에 테라스의 테라코타 타일이 데워지면 바닷바람과 함께 독특한 미네랄 향이 생성됩니다. 인센스와 베르가모트, 미네랄 노트, 앰버, 파촐리, 머스크를 조합했죠.
조향사는 어떤 방식으로 선정하나요?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첫 번째는 특정 향조를 잘 다루는 조향사를 선정합니다. 오디딸리의 ‘몬 투 더스크’는 바닐라를 주성분으로 했는데, 자칫 지나치게 느끼하거나 평범해질 수 있는 향을 고급스럽게 조성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바닐라를 현대적으로 다루는 전문가에게 직접 요청했죠. 두 번째는 블라인드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이탈리아 공주 비토리아 콜론나와 미래주의 예술가 움베르토 보치오니의 러브 스토리를 머스키한 플로럴 노트로 만들어보고자 했을 때는 정보를 차단한 채 여러 조향사에게 샘플을 받았어요. 완벽한 향을 찾아냈을 때, 그 창조자가 알베르토 모리야스(Alberto Morillas)라는 사실을 알게 됐죠. 그렇게 탄생한 것이 ‘오 라크’입니다.
당신에게 영감을 주는 것은?
사랑. 오디딸리와 알타이아의 모든 향수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시작됐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이탈리아의 경관, 함께 보내는 일상, 서로의 고향과 역사, 추억. 물론 매일이 행복할 수는 없죠. 서먹한 날도 있고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서로에 대한 신의와 사랑이 있다면 소소한 행복과 기쁨, 호기심, 긴장감 등의 감정을 다채롭게 느낄 수 있어요.
낭만적인 답변이군요.
여기에 와서 ‘사랑꾼’이라는 한국어를 배웠죠.
서울을 처음 방문했습니다.
해외 출장과 여행을 즐기는 아내와 저는 반대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도시에 완전히 매료됐어요. 유럽은 새로운 무언가를 기대하기 어렵죠. 하지만 이곳은 막 파티가 시작된 분위기입니다. 전 세계적인 파급력이 있어요.
서울에서 가장 강렬한 기억은?
어제 광장시장에 다녀왔습니다. 인천공항에 착륙한 시점부터 매 순간 한국 음식을 먹고 있는데, 정말 환상적입니다. 족발과 빈대떡, 순대. 평생 잊지 못할 미식이에요.
마지막으로 가을 향수를 추천해주세요.
오디딸리 ‘미스틱 선셋’. 스파이시한 구르망 노트로 따뜻한 캐시미어 숄을 온몸에 두른 듯한 포근함을 선사합니다. 또 하나는 알타이아 ‘아타카마’. 소금기 가득한 아르헨티나 사막에서 피어나는 꽃을 향기로 구현했습니다. 솔트 그레인과 재스민, 클라리세이지, 통카 빈까지 대비를 이루는 향을 독특한 구조로 완성했죠.
AKRO Olivier Cresp
입생로랑 뷰티 ‘몽 파리’와 ‘블랙 오피움’, 뮈글러의 ‘엔젤’ 등, 그의 코끝에서 탄생한 명작은 셀 수 없이 많다. 2018년, 직접 향수 브랜드를 론칭한 올리비에 크레스프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향기로운 중독.
조향사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는?
그라스 지역의 에센셜 오일 산업에 종사하는 가정에서 태어난 저에게 향은 필연과도 같았습니다. 어릴 적부터 베르가모트, 감귤, 레몬, 재스민, 장미, 투베로즈 등의 재료를 갖고 놀았죠.
유년 시절 향기로운 기억을 공유해주세요.
그때는 여름이었고, 우리 집 정원에는 두 개의 웅장한 재스민 덤불이 있었는데 그날 태양은 땅을 따뜻하게 데울 만큼 강렬했어요. 그래서 30m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땅에서 피어오르는 재스민의 강력하고 특별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래전임에도 또렷한 감각으로 남아 있어요.
가장 뜻깊은 순간은?
젊은 시절 창작한 뮈글러의 ‘엔젤’ 향수가 ‘The Fragrance Foundation’으로부터 수상했을 때. 구르망 계열의 노트를 최초로 만들었다는 것, 향수 월드의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이 매우 행복하고 환상적이었습니다.
‘아크로’는 어떻게 탄생했나요?
중독과 죄책감의 쾌락을 뜻하는 프랑스어 ‘Accro’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죠. 색다른 향으로 세상에 영향을 주고 싶었습니다. 때로는 행복하고, 때로는 관능적이고, 때로는 우아한 감각을 느끼며 제 향기에 ‘중독’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요.
최신작 ‘베이크’를 자랑해주세요.
레몬 컵케이크를 향으로 만들어 피부에 착용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향입니다. 럼, 휘핑크림, 바닐라, 레몬을 조합했습니다. 처음 맡는 순간 입안에 침이 고이고, 마지막은 달콤한 기운이 맴도는 것이 특징입니다. 절로 기쁨의 미소가 떠오르죠.
디저트를 즐기나요?
티라미수, 레몬 컵케이크, 코코아 가루를 듬뿍 올린 초콜릿. ‘다크’ 역시 아름다운 모양의 초콜릿에서 탄생한 직관적인 향수입니다.
선선한 가을과 어울리는 향수는?
아크로의 ‘어웨이크’. 향긋한 에스프레소 향으로 시작해, 점차 설탕을 넣은 것처럼 달짝지근하고 감미로워집니다. 셔츠 소매에 은은하게 배어 있을 때 매력적으로 느껴질 거예요.
개인적인 공간에 비치된 향은?
의도적으로 집 안에선 향을 배치하지 않습니다. 다만 향긋한 샴푸와 비누를 놓을 뿐이죠. 청결한 향이면 충분해요.
선호하지 않는 향도 있나요?
수선화, 히아신스 계열의 초록 향. 제겐 너무 거칠고 오래된 것처럼 느껴지는 노트입니다.
조향 작업이 어렵게 느껴질 때는 언제인가요?
오늘날 지나치게 범람한 향수 시장을 볼 때. 최상의 향수를 만들어야 한다는 다짐을 스스로 하게 되죠.
스스로를 정의해본다면?
환상을 꿈꾸는 현실적인 사람.
즐겨 찾는 여행지는?
휴가는 프랑스 남부로 떠나는 전형적인 파리지앵입니다. 칸은 제가 가장 많은 영감을 얻는 장소예요.
그곳의 미식을 하나 추천해주세요.
‘베수비오(Vesuvio)’라는 이탤리언 레스토랑을 추천해요.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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