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웅, 차승원, 한효주, 오승훈, 이유 있는 ‘독전 2’
무엇을 왜 쫓는가. 그것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숨 가쁜 선택의 기로에 <독전 2>의 조진웅, 차승원, 한효주, 오승훈이 서 있다.
언 땅을 지피는 불씨, 조진웅
지친 기색의 한 남자가 차를 몰고 푸르스름한 설국을 가로지른다. 한참을 달리다 외딴 오두막 앞에 멈춰 선 그는 그곳에서 누군가를 마주한다. 이윽고 터져 나오는 총소리. 하지만 관객은 그 총알이 누구에게서 누구에게로 향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2018년 개봉한 <독전>은 그렇게 서늘한 여운을 남기며 끝을 맺는다. 조진웅은 그때 그 남자다. 그로부터 5년 뒤, 조진웅은 똑같은 길을 다시 걸었다. <독전 2>를 위해 다시금 추격자 ‘조원호’가 되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여정’이었죠. 한국에서 노르웨이까지 가는 길이 가까운 것도 아니고, 공항에서 로케이션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차로 5시간을 더 들어가야 했거든요. 그 길을 지나며 저 역시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게 되더군요. 난 뭘 위해 여기까지 온 거지? 다음엔 뭘 향해 달려가야 하지? 그건 역할에 대한 질문일 뿐 아니라 내 삶에 대한 물음이기도 했어요.”
영화는 끝이 났지만 의문은 여전했다. <독전>의 결말을 두고 수많은 사람이 갑론을박을 벌였다. <독전 2>는 그 빈틈을 채우는 영화다. 전작에서 베일에 싸인 ‘이 선생’을 필두로 한 거대 마약 조직과 그들을 쫓는 형사 조원호가 용산역에서 한바탕 혈투를 벌인 후 무대는 갑작스럽게 노르웨이로 옮겨가는데, <독전 2>는 그 간극을 다룬 국내 최초의 미드퀄 영화다. 두 영화의 연결 고리라는 중책을 맡은 조진웅은 지난 10월 열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독전 2>의 상영을 마치고 조원호를 다시 연기할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독전>에서 마지막 오두막 신이 개인적으로 좀 아쉬웠거든요. 조원호가 지닌 원초적 질문에 충분히 몰입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 반가움으로 다시금 이 친구를 만나게 됐는데 다행히 오래전 옷이 몸에 잘 맞더군요. 작품이 끝나면 금방 떠나보내고 곧바로 다음 미션에 집중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원호는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더라고요.”
사실 조진웅에게 형사는 꽤 익숙한 직분이다. 영화 <강적>(2006)의 ‘신 형사’를 시작으로 ‘최고 빌런’으로 활약하며 제35회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과 제51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을 거머쥔 <끝까지 간다>(2014)와 대표작 <시그널>에서도 그는 형사로 열연했다. 하지만 조원호는 어딘가 달랐다. “그렇게 정의감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집요하게 사건을 붙잡고 있어요. 브레이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심지어 내리막길로 향해가는데 ‘너무 무섭다. 이제 그만할래’가 아니라 ‘나도 알아’라고 말하는 듯이 앞으로만 전진하죠.” 마약 그 자체의 위험성과 주변인들의 죽음, 정체가 발각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끝없는 의심 등 신경이 잔뜩 곤두선 상황에서 거대한 마약 카르텔 속으로 점점 더 깊이 진입하며 조원호는 점점 더 위태로워진다. “마른 장작.” 조진웅은 조원호를 연기하며 마른 장작을 떠올렸다. “굉장히 건조하고 푸석푸석한 삶을 사는 인물이죠. 먼지도 좀 뒤집어썼고요. 그래서 작은 불씨에도 훨훨 타올라요.”
어느 겨울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간직한 광화문의 오래된 호텔 객실에서 마주한 조진웅은 자신을 향해 던지는 질문을 즐기는 듯 보였다. 풍성한 암체어에 기대앉은 그의 눈이 내내 반짝거렸다. 2004년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야생마 패거리’ 중 한 명으로 데뷔한 후 어느새 19년이 흐른 지금, 그는 <독전>을 통해 스스로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어 좋았다고 터놓았다.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연기가 재미없거든요. 재미없으면 흥분되지도 않고요. 사실 <독전 2>를 촬영한 후에는 계속 작품을 쉬고 있어요. 맨날 ‘내년에는 정말 은퇴할 거야’라고 말하고 다녔죠. 그러다 누가 ‘형, 좀 도와주세요’ 하면 새 작품 하고. 늘 그런 식이었어요. 에너지 넘치는 친구들이 항상 부러웠죠.”
누군가의 뜨거움을 부러워하는 것은 그에게도 뜨거운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 사나이’ 조진웅에겐 경성대학교 연극영화학과를 다니고 극단 ‘동녘’에 몸담았던 시절이 그랬다. “학교 수업 중에서는 워크숍이 제일 재미있었어요. 실제로 연기를 하니까요. 제가 대학 다닐 때 처음 복수 전공 제도가 생겼는데 호기롭게 철학과랑 커뮤니케이션과를 복수 전공 하겠다고 바쁘게 쏘다녔죠. 전부 2~3학점씩 모자라서 학위 수료증은 못 받았지만… 거기에 극단 작품도 만들어야지, 부산 연극제도 준비해야지, 항상 작품 네다섯 개씩은 하면서 정말 치열하게 살았어요.” 실험적인 작품을 자주 상연했던 ‘동녘’의 열정적인 토론 분위기는 학구열이 남다른 그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극단 단원이 여섯 명이면 여섯 명 모두가 에피소드를 하나씩 만들어와요. 총연출자는 그중 서너 개만 골라서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하죠. 그때 채택되지 않으면 연기할 기회를 잃는 거예요. 포스터에 얼굴도 안 나온다니까요? 그러니 목숨 걸고 준비할 수밖에요. 저 포함 배우 네 명, 연출자 한 명, 이렇게 다섯 명이서 <바리데기>라는 연극을 만들었는데 이후 정말 많은 극단에서 이 작품을 리메이크했어요. 다음으로 만든 실험극 <사랑, 첫 이미지 – 夢>(2001)도 아직까지 상연되고 있어요. 레퍼토리 세 개를 만들면 연극배우로서 성공한 삶이라고들 하는데 제 몫은 한 것 같아요. 뿌듯하죠.”
연극은 그에게 언제나 그리운 고향이다. “저 연극 진짜 잘하거든요. 그런데 완전히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면 섣불리 도전하고 싶지 않아요. 틈틈이 연극 무대에 오르는 황정민 선배님 같은 분들은 진짜 대단한 거예요. 저에게는 불가능입니다.”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기회와 자리를 위해 몇 번의 멀티캐스팅 제의를 거절한 그는 때때로 좋은 작품을 감상하러 다니며 무대로 돌아갈 기회를 엿보고 있다. “다들 어떻게 저렇게 연기를 잘할까, 싶어요. 술 한잔 사주면서 은근히 비결을 묻기도 하죠. 이 연기는 도대체 어떻게 한 거냐, 여기 장면은 어떻게 연출한 거냐, 이 대목은 어떤 작품을 오마주한 것 같은데 맞냐…”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명량> <암살> <아가씨> 등 언제나 천연덕스러우면서도 묵직한 존재감을 증명하며 신 스틸러로 꾸준히 사랑받아왔지만 조진웅은 여전히 목마르다. 존경하는 아버지의 이름을 내걸고 배우로 살아가는 그는 성실하고 뜨겁게 직업인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싶다. 디스커버리 채널 코리아에서 방영된 시리즈 <잠적>과 tvN에서 지난 3월 방영한 예능 프로그램 <텐트 밖은 유럽 스페인 편>에서 여행을 좋아하는 조진웅이 사색하는 순간마다 회상하고, 고민하며, 앞날을 가늠하며 되새기는 마음이었다.
한동안 작품을 쉬고 있지만 맥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법을 알지 못하는 그는 최신 콘텐츠를 발 빠르게 감상하고, 만화책을 읽거나, 좋아하는 라디오 채널 <배미향의 저녁스케치>에서 올드 팝을 들으며 풍성한 하루하루를 보내며 산다. 소싯적의 감을 갈고닦아 연출에도 도전했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완성한 <력사: 예고편>은 제25회 판타지아국제영화제와 제20회 뉴욕아시안영화제에서 관객과 소박한 만남을 가졌다. “1위가 되고 싶은, 1위보다 어쩌면 더 큰 열망으로 똘똘 뭉친 ‘2등’에 대한 10분짜리 단편영화예요. 히어로물이고요. 도와주겠다는 분이 많아 나름 열정적으로 고민해서 만들었죠. MT까지 다녀왔어요. 기회가 닿아서 한두 번 상영도 했는데 지금 보면 딸내미가 그린 그림처럼 엉성하고 웃겨요.”
짧은 이야기지만 여운은 강렬했다. 카메라 뒤에 서고 보니 ‘내 것’이라는 책임감으로 현장에 모인 모든 사람이 전부 히어로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독전 2>에 새로 합류한 배우 한효주와 오승훈의 존재감 역시 든든하게 느껴졌다. “김주혁, 진서연, 농아 남매로 열연한 김동영, 이주영 배우 등 전작에서도 느끼셨겠지만 이번에도 캐릭터들이 아주 좋아요. 너무 놀라운 변신이라 현장에서 못 알아본 (한)효주도 그렇고, 새로운 ‘락’을 연기하는 (오)승훈이에게도 세상에서 서영락을 제일 잘 아는 건 너니까 하고 싶은 대로 밀어붙이라고 말해줬죠.” 모두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만하다. 2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진웅은 그렇다고 믿는다.
연극영화학과 학도로 참석한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이후 조진웅은 다양한 작품과 역할을 들고 기쁘게 고향을 찾았다. 짙은 녹색 벨벳 수트를 입고 레드 카펫을 밟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독전 2>를 함께 만든 차승원, 한효주, 오승훈 배우와 백종열 감독이 그의 옆에 있었다. <독전>과 <독전 2> 사이의 5년이라는 간극은 긴 시간이었다. 많은 것이 달라졌다. 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류가영 <보그> 피처 에디터
9보다 중요한 1의 주관, 차승원
“자유로운 사람은 죽음보다 삶에 대한 명상을 하며, 죽음 이외의 것은 고려하지 않는다.”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의 말이다. 스피노자는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자신에게 큰 영향을 주지 않는 이상 큰 가치가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자신에게 큰 기쁨을 주는 일을 고민했고, 궁극의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능동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그런 능동적인 삶의 근간이 되는 건 결국 자신을 보존하려는 자유의지에 있다고 주장했다. 외부 요인이 아니라 주체적인 선택을 통해 궁극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정의했다.
모두 바라는 대로 살고 싶다고 말하지만 정작 자신이 바라는 삶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삶을 바랄까? 이 질문에 정확하게 답할 수 없다면 결국 내가 바라는 삶도 명확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당장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시간의 품을 들이고, 경험의 폭을 쌓고, 그렇게 숱한 시행착오의 허물을 벗은 후로, 나라고 여기던 나와 몇 차례 결별한 뒤에야 비로소 만나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좋으면 좋고, 안 좋으면 안 좋은 거지. 괜찮은 건 없는 거야.” 얼마 전 나영석 PD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 출연한 차승원이 한 말이다. 툭 던지듯 말하고 있었지만 툭 떨어진 생각처럼 들리지 않았다. 인상적이었다. 구체적으로 두 가지 면에서 인상적이었다. 내 삶을 내 의지대로 살아가겠다는 자유의지가 느껴진다는 점에서 하나, 내가 바라는 삶의 방향과 내게 가능한 삶의 방식을 스스로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에서 하나. 물론 이건 지금, 차승원이라 할 수 있는 말이고, 가능한 삶일 것이다.
“나는 회사 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가능한 부분이 있죠. 그런데 직업군에 따라 입장이 다 다르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관계라는 게 힘든 부분이 있잖아요. 그래서 제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도 있을 거예요. 다들 제각각 취향이나 주관대로 사는 거죠. 다만 저는 그렇게 여기고, 그럴 수 있다는 거죠. 저도 지금보다 젊을 때는 괜찮은 거 같다고 넘어가며 살았어요. 그런데 사실 그건 괜찮을 거 같다는 바람이었지, 괜찮은 게 아니었거든. 물론 인간관계는 개개인이 알아서 할 일이잖아요. 누군가는 괜찮으면 괜찮은 거겠지. 다만 나는 아닌 건 아니라고 보는 거예요. 어차피 모든 건 지극히 주관적이잖아요.”
그러니까 차승원도 지극히 주관적인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그의 주관은 온전히 자신의 삶으로 수렴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게 들린다. 타인의 삶을 향해 발화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렇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정의할 뿐이다. 이는 지나온 시간을 통해 만나고 경험한 자기 자신을 보다 정교하게 되짚고 반추하며 얻어낸 주관일 것이다. 이런 주관은 자연인의 일상과 함께 직업인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도 주요한 기준처럼 자리하는 것 같다. “예전에는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어떻게 볼지, 이런 걸 의식하며 연기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일단 제가 가진 생각을 먼저 표출해보고 반응을 보는 식이죠. 아니다 싶으면 다른 걸 또 해보는 거고. 그런 방식이 예전과는 달라진 점이죠. 상대적으로 훨씬 유연해졌어요.”
<독전 2>가 제작된다는 소식과 함께 일찍이 공개된 출연 배우의 이름 사이에서 차승원을 발견했을 때 의외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흥미로웠다. <독전>에서 차승원이 연기한 브라이언은 치명적인 부상을 당해서 기능적으로 큰 활약을 하기 어려운 존재처럼 보였다. 심지어 <독전 2>는 그 직후의 상황을 그린다고 하니 더더욱 그 쓸모가 궁금했다. “사실 의아하긴 했죠. 그걸 또 어떤 식으로 만들려는 걸까? 그런데 브라이언만 놓고 봤을 때 그가 등장하는 이유를 좀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다면 괜찮을 거라고 봤어요.” 그만큼 자신이 납득하고 연기할 수 있는 수준의 캐릭터를 만들고자 캐릭터를 두고 백종열 감독과 많은 의견을 나눴다. “일단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하는 캐릭터라 노쇠한 느낌일 수밖에 없죠. 그래서 오히려 더 무섭게 뿜어내는 살기 같은 기운을 드러내는 인물이기도 해요. 전작에서는 허세가 넘치는 면이 있었다면 속편에서는 그런 허세는 많이 빠졌고, 진짜 무서운 인물이 됐다고 할까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독전 2>에서 연기한 브라이언이 좀 더 재미있었어요.”
브라이언은 <독전>에서 사실상 만신창이가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독전 2>에 다시 등장한다는 건 필연적으로 자신을 그렇게 만든 대상에 대한 복수심을 기반에 둔 행동과 결정을 할 거라는 예감을 남긴다. 하지만 거동조차 불편한, 휠체어에 의존하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은 인물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신체적인 대미지를 입은 상태라 좀 느릿느릿한 면이 있어요. 그런데 그래서 오히려 대사에 집중력이 생겼어요. 다들 총 들고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혼자 휠체어를 타고 쓱 들어오면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잖아요. 상대방이 쉬지 않고 떠드는데 가만히 듣고 있다가 ‘그래요?’ 이렇게 한마디 하는 사람이 주의를 집중시키는 법이죠. 브라이언에게는 그런 면이 있어요.”
굵은 선을 가진 캐릭터가 크게 움직일 때 눈길을 끄는 건 인지상정이지만 무언가 꽉 찬 공간에 허락된 한 점의 여백이 있다면 그 역시 시선을 끄는 법이다. 무엇보다 캐릭터를 인식하게 만드는 방식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결국 디테일일 것이다.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게 배우들이 하는 일일 거예요. 예를 들어 물 먹는 거 하나만 봐도 캐릭터가 느껴지거든요. 생수병 뚜껑을 열고 물을 마신 뒤 누군가는 잘 돌려서 잠그고 탁자에 내려놓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뚜껑을 테이블에 대충 던져놓고 잠그지 않은 생수병을 들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게 다 캐릭터죠. 그런 디테일을 켜켜이 쌓아가다 보면 ‘앗!’ 하면서 공감하는 순간이 생기면서 사람들을 그 캐릭터에 확 빠져들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려면 제 행위를 스스로 관찰하고 기억해야 되는 거죠.” 요즘 말로 연기에도 ‘와우 포인트’ 같은 것이 있는 법이랄까.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지난 2022년에 방영한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1화에서 차승원의 연기를 보며 ‘와우 포인트’를 느꼈다. 서울에서 제주로 전근 간, 사실상 좌천된 것이나 다름없는 은행장 최한수는 기러기 아빠다. 딸을 프로 골퍼로 만들기 위해 막대한 유학비를 감당했지만 남은 건 쪼들리는 형편이다. 그는 고생스러운 삶을 묵묵히 견디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다. 미련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 됐건 그는 비좁은 방바닥을 구석구석 걸레질하고 청소하며 정리를 마친 뒤 비로소 커피 한 잔을 내려 허리를 펴고 창밖을 바라본다. 그 삶의 99.9할이 불행으로 점철돼가고 있다 하더라도 0.1할의 희망을 유지하는 건 어쩌면 그런 일상의 리듬을 놓지 않는 면모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활의 디테일을 만들어내는 배우가 차승원이라는 사실이 흥미롭고 생경했다.
“만약 이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저는 어디서든 열심히 했을 거예요. 그거 하나는 자신해요. 이 직업을 갖고 살지 않았다 해도 굶지는 않았을 거라고. 이거 아니면 아무것도 못했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거죠.” 저절로 수긍이 된다. 이미 나영석 PD의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할 줄 아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많은 ‘차줌마’로서 범상치 않은 생활 능력을 증명했으니까. 하지만 그에게 모델이, 배우가 아닌 삶을 세상이 허락했을까? 우연히 눈에 띄어 모델이 된 건 과연 우연이었을까? 그럴 리가. 적어도 차승원은 세상이 가만히 내버려둘 이목구비는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삶을 결정짓는 건 우연도, 운명도 아니다.
“보통 운칠기삼이라고 하잖아요. 운이 7이고, 재주가 3이라는 거지. 그런데 저는 운구기일이 맞는 거 같아요. 운이 훨씬 많이 따라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9의 운이 오려면 노력을 훨씬 많이 해야 돼요. 9의 운을 받으려면 1을 훨씬 공들여서 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거죠. 운은 느닷없이 저절로 굴러오는 게 아니에요. 절대 아니지. 저는 불가항력이라는 말을 믿지 않아요. 끝까지 해봐야 되는 거예요. 적어도 스스로 창피해지고 싶진 않거든.” 중요한 건 9가 아니라 1이라는 주관을 전하는 차승원의 언어는 주저하는 법이 없었다. 명확하고, 명쾌했다. 민용준 저널리스트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한효주
그녀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묵직한 발렌시아가 롱 코트를 걸치고 컬러 렌즈를 낀 채 낯선 아우라를 발산하며 앵글 안으로 훅 들어온 한효주를 보며 어쩐지 난 그녀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독전 2>의 메인 예고편을 봤을 때도 마찬가지다. 부스스한 헤어와 까무잡잡한 주근깨 피부, 차가운 시선과 나지막이 읊조리는 조선족 사투리. 아시아 최대 마약 조직의 보스 이 선생을 추앙하는 수하이자 걸림돌은 가차 없이 처단하는 냉혈한 ‘큰칼(소천)’로 변신한 한효주는 스치는 장면에서도 낯선 아우라를 발산하며 붙잡고 싶은 잔상을 남겼다. 2015년 개봉한 영화 <뷰티 인사이드>에서 한효주를 로맨스 퀸으로 만들었던 백종열 감독은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 쓰임으로 한효주를 기용했다. “제가 누군지 아무도 못 알아봤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커다란 금테 안경을 쓰고, 인조 치아도 꼈죠. 완벽하게 새로운 얼굴로 연기하는 희열이 있었어요. 후반부에 ‘락(오승훈)’ 위에 올라타서 싸우는 장면이 있는데 낮은 앵글에서 올려다본 서늘한 제 얼굴이 마음에 들더군요.”
새롭게 거듭나는 데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한효주는 정공법을 택했다. 깡말랐으나 탄탄한 몸을 원한 감독의 주문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아침부터 낮까지 몸을 만들고, 저녁마다 한강 변을 걸으며 중국어 대사를 외웠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원래 남자로 설정된 큰칼을 백종열 감독과 머리를 맞대고 여자로 재탄생시키는 과정에서 그녀는 정신과 전문의에게 자문까지 구하며 인물의 성격적 특성과 성장 과정을 집요하게 설계해나갔다. “경계선 성격장애를 지닌 사람처럼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모든 관계가 불안정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하죠. 거기서부터 시작해 상상을 더하며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들어갔어요.”
다소 작지만 명료하고 막힘없는 말투에서 부드러운 강단이 감지됐다. ‘충청도 사람’답게 평소에는 느긋하고 온화하지만 한효주는 때로 과감하고 대범하게 움직인다. “드문 일이지만 행동해야 하는 순간이라는 게 직감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어요. 드라마 <동이>를 마치고 완전히 지쳐 있었을 때 우연히 헤어 숍에서 잡지를 보다가 문숙 선배님의 이야기를 읽고 기사를 쓰신 기자분께 연락처를 받아내서 직접 연락을 드린 것처럼요.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어요. 우주의 끌림처럼 꼭 그래야만 한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하와이에서 보낸 2주는 엄청난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주연배우로 거듭난 20대 중반의 신인 배우에게 호흡을 되찾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 전까지 한효주는 때때로 겁 없는 척을 했다. 화제의 시트콤 <논스톱 5>(2005)로 데뷔한 후 일일 연속극 <하늘만큼 땅만큼>과 시청률 45.2%로 종영한 주말 드라마 <찬란한 유산>에서 주연으로 활약하며 나이와 지역을 불문하고 점점 더 많은 이목이 쏟아지던 때였다. “주어지는 역할에 걸맞게 성숙해 보이려고, 말도 조리 있게 잘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사실 <동이> 촬영할 때 겨우 스물네 살이었거든요. 엄마 역할이기도 했는데 말이죠.”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항상 더 큰일이 주어졌다. “혼나기도 많이 혼났어요. 못하는데 잘하고 싶으니까 분하고, 창피했죠. 원래 눈물이 없는 편인데 그땐 촬영 끝나고 차에만 타면 울었어요.” 그러나 주인공은 남다른 의지와 회복력으로 위기를 돌파하고, 끝내 해피 엔딩을 향해 전진한다. 한효주는 다행히도 건강한 선택을 했다. 자책하기보다 부딪치는 쪽을 택한 것이다. “20대 때 독립 영화를 많이 찾아봤어요. 다른 배우들의 날것 같은 연기를 관찰하면서 ‘저기서는 저렇게 연기할 수도 있구나’ 하나씩 배워갔죠. 힘들었지만 스스로 깨닫기 위해, 부끄럽지 않으려고 항상 눈앞에 주어진 기회에 집중했어요. 그렇게 20년 가까이 쉬지 않고 연기했어요. 이젠 돈 주고도 못 사는 소중한 자산이죠.”
할리우드 진출작 <트레드스톤>은 터닝 포인트가 돼준 고마운 작품이다. 한효주는 다시 신인으로 돌아가 오디션을 보고 비밀스러운 북한 국적의 피아니스트 ‘박소윤’ 역할을 따냈다. 액션 연기를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작하며 난생처음으로 몸을 쓰는 희열도 느꼈다. “그 전까지는 타인이 규정한 세상에 갇혀서 의기소침하게 살고 있었어요. 아무도 나를 모르는 환경에서 연기하며 해방감을 느꼈죠. ‘맞다. 나 이런 사람이었지’ 깨닫기도 했어요. 덩달아 겁이 없어졌어요. 최근 영화 <지배종>을 촬영하면서는 스태프를 따라 덜컥 프리 다이빙에 도전하기도 했죠.“
의미 있는 행보마다 값진 수확이 주어졌다. <오직 그대만>, <반창꼬>, <뷰티 인사이드> 등 로맨스 영화에서는 섬세한 여인의 향기를 풍기며 이야기에 힘을 더했다. “아주 눈에 띄게 예쁜 얼굴은 아닌데 전체적인 분위기가 조화로워서인지 어디든 잘 스며드는 것 같아요. 부드럽고 심심한 제 얼굴이 마음에 들어요. 덕분에 케미스트리도 잘 나오는 느낌이고요.” 올해 최고 화제작 <무빙>은 다소 얼떨떨한 성과다. “오랜만에 연기 칭찬을 많이 받아서 얼떨떨했죠. 고 3 아들을 둔 엄마 역할을 해냈다는 것에 후한 점수를 주신 것 같더라고요. 여느 때와 같이 새로운 도전을 반기는 마음으로 작품을 선택했을 뿐인데 이제 대중에게 받아들여지는 나이가 된 건가 싶기도 하고. 모르겠어요.” <무빙>은 다양한 세대와 경력의 출연진과 끈끈하게 교류한 현장이었기에 여운이 짙게 남은 작품이기도 하다. “너무 좋은 작품을 만나면 힘든데 역시 힘들더라고요. 시간 되는 사람끼리 밥이라도 먹으며 아쉬움을 달래고 있죠.”
실제 삶에서 한효주는 온화한 파장을 지닌 사람들과 궁합이 좋은 편이다. 최근 예능 프로그램 <어쩌다 사장 3>에 출연한 한효주가 애틋한 ‘부부 케미’를 선보인 조인성과 주고받는 대화가 보는 이들에게 편안한 에너지를 선사한 것처럼. 선한 사람과의 편안한 관계를 추구하는 ‘I’ 성향이지만 타인의 낯선 에너지에서 신선한 자극을 얻을 때도 많다. <독전 2>는 그런 환경이었다. “(차)승원 선배님은 항상 ‘빨리빨리’를 종용하시지만 뒤에서는 사람을 엄청 챙겨요. (오)승훈이에게는 묘한 매력이 있죠. 앞으로 역할에 따라 어떤 새로운 얼굴을 보여줄지 기대가 많이 돼요.” 차가운 열정 쪽에 가까운 자신과 달리 뜨거움을 지닌 배우 조진웅은 부러운 선배다. “사실 저는 뜨겁게 타오르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갖지 못한 색깔을 지닌 사람이 항상 부러운데 진웅 선배가 그랬어요.” 그러나 서로 다른 온도와 속도를 지닌 사람들이 결국 좋은 작품과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든다. 그런 환경을 믿고 즐길 수 있을 만큼 어느새 한효주는 지혜로운 배우가 됐다. “현장에서는 그래도 내가 도움이 되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반면 인간 한효주는 서툰 부분이 많죠. 완전히 허당이에요. 항상 주변에서 챙겨줘야 하고…”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 한효주는 최근 문숙의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이제는 일상의 소중함을 보다 절실하게 느끼는 시기”라고 고백했다. 조깅을 하고, 자전거를 타고, 미술관도 가고,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며 순간의 기쁨을 사수하기 위해 취향을 갈고닦는 한효주의 노력은 현재 진행 중이다. “20대에는 쉴 때 정말 잠만 잤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시간이 너무 아깝더라고요. 작품 빼면 인상적인 추억도 거의 없죠.” 여전히 앞날은 불투명하고, 흔들릴 때도 많다. 그러나 작은 여유를 누릴 줄 알게 됐으니 걱정은 적어진다. “<독전 2>를 사람들이 어떻게 봐줄지 궁금해요. 과연 좋게 봐줄까 걱정도 되죠. 하지만 뭐든 괜찮을 것 같아요. 다 이겨낼 수 있을 것 같거든요.” 프리 다이빙에서 숨을 오래 참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신체의 한계가 아니라 ‘버티지 못할 것 같다’는 심리적 압박이다. 그걸 이겨내는 순간, 새로운 지평이 펼쳐진다. 한효주는 요즘 낯선 신세계가 즐겁다. 류가영 <보그> 피처 에디터
100% 확실하게, 오승훈
누군가와 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뭉근한 궤적을 뒤쫓아 걷는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저 멀리 날아가는 비행기를 따라 그려지는 구름같이 먼 풍경을 막연히 따라 그리다 보니 어느새 그것을 내 삶으로 그리게 됐다는 신기한 이야기. 물론 삶은 영화처럼 점프 컷으로 연결되는 세계가 아니다. 우연일지라도 명백한 인과가 있고, 선택이 있고, 과정이 이어져 늘 지금으로 당도하는 법이다. “12년 전인데, 2주 동안 이 말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던 기억이 지금도 나요.” 배우 오승훈의 삶은 12년 전 부모님과 함께 탄 자동차 뒷좌석에서 비로소 고백할 결심으로부터 시작된 꿈이었다. 학창 시절부터 10년 넘게 농구 선수로 생활하며 대학까지 진학했지만 부상으로 끝내 그것이 자기 삶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과정에서 오승훈의 삶에 틈입한 건 뜻밖에 연기였다. 당연했던 길이 당연하지 않음을 알게 된 것처럼 생각지 못했던 길이 길처럼 열렸다는 경로 이탈의 고백은 분명 흥미진진한 일이다. 물론 제삼자 입장에서 듣기에는 그렇다.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마음 편히 발 디딜 사정이 아니었다.
“운동할 때 부모님께서 정말 많이 밀어주셨거든요. 고생도 많이 하셨죠. 그래서 농구를 그만둔 뒤 연기하겠다는 말을 하면 걱정만 끼칠까 봐 차마 못하겠더라고요.” 하지만 차돌처럼 단단해진 꿈은 끝내 뱉지 않고 배길 수 없는 법이었다. 다만 마주 보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자동차 앞좌석에 앉은 부모님 등 뒤에서 나직하게 뱉어냈다. “연기를 해보고 싶은데 학원 한번 가보면 안 될까?” 아들의 걱정은 기우였다. 부모님의 걱정은 정작 다른 데 있었으니까. 10여 년 동안 농구만 보고 살아온 아들의 상실감을 걱정했던 부모님은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낸 아들이 오히려 대견했다. 아들의 꿈을 지지해온 부모님은 다시 한번 아들의 새로운 꿈에 가장 가까이 탑승한 동반자가 됐다.
<독전>에서 류준열이 연기한 ‘서영락’은 미스터리한 인물이었다. 이 선생이라는 미지의 존재를 둘러싸고 마약 전쟁을 벌이는 살벌한 세계에서 낮게 웅크리듯 정체를 은신하고 기꺼이 아슬아슬한 사선을 건넌다. 결정적인 순간까지 자신의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극의 막바지에 다다라 극적 반전을 이루는 주요한 존재로 떠오른다. <독전 2>는 <독전>의 속편이지만 그 후의 서사를 다루지 않는다. <독전>은 용산역을 배경에 둔 클라이맥스 이후 에필로그에 가까운 노르웨이 배경의 결말부로 점프한다. 그 사이에는 가려진 30일의 서사가 있다. <독전 2>는 바로 그 30일간의 이야기다.
<독전 2>에 출연한 오승훈은 전편에서 류준열이 연기했던 서영락을 연기한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프랜차이즈 영화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리고 배우가 바뀐 이상 예전에 봤던 그 인물이 마냥 같은 인물로 보일 수도 없는 법이다. <독전 2>가 서영락이라는 이름 대신 ‘락’이라는 이름을 내건 것도 그런 상황을 의식한 결과처럼 보인다. 오승훈 역시 잘 알고 있다. “연기의 재료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같은 인물도 연기하는 배우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기존 인물과 다른 걸 보여줘야 한다고 여기진 않았어요. 어차피 다른 배우가 연기한 이상 다른 인물로 보일 테니까요. 오히려 그게 재미있는 거 같아요.”
오승훈이 <독전 2>에 출연할 자격을 얻은 건 4차에 걸친 긴 오디션을 통과한 덕분이었다. 만만치 않은 과정 끝에 얻은 기회. 장편영화 데뷔작인 <메소드> 이후 몇 편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했지만 여전히 증명이 필요한 배우이기에 오디션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했다. 그리고 모든 오디션이 <독전 2>처럼 늘 반가운 소식으로 수렴되는 건 아니었다. 그만큼 견디고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오승훈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신인 배우는 오디션도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 여겨야 해요. 작품 안에서 인물을 준비하는 것처럼 프라이드를 갖고 오디션에 임하고 집중해야죠. 물론 결과에 따라 서운하고 속상할 때도 있지만 그 순간의 감정도 당연한 과정으로 받아들이려 해요. 그리고 드디어 제 작품을 만나게 되면 그 모든 과정의 보상처럼 느끼는 거죠.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행복해져요.”
갑자기 물음표가 떠올랐다. 왜일까? 왜 연기가 하고 싶었을까? “고등학교 때 <뉴하트>라는 드라마를 보고 흉부외과 의사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어요. 사람 살리는 의사가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그런데 나중에 알았죠. 드라마는 가짜잖아요. 그런데 그 가짜가 이렇게 사람 마음을 건드릴 수 있다니, 배우라는 직업이 맹목적으로 멋있더라고요.” 당연했던 농구가 삶에서 멀어지면서 막연했던 연기가 삶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물론 흥미만으로 모든 것이 가능할 리 없는 법이다. 부모님께 허락을 받은 뒤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해 유명한 연기 학원을 찾아간 오승훈은 깜짝 놀랐다. “연기는 나를 표현하는 일이더라고요. 운동선수 시절에는 포커페이스가 중요했어요. 냉철한 승부를 벌이는 상황에서 늘 평정심을 유지해야 하니까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갖고 살아야 했죠. 그래서 충격을 받았어요. 내 감정을 타인도 느끼게 만들 수 있도록 나라는 사람을 게워내야 하는 일이더라고요.”
같은 인물을 연기해도 배우가 다르면 다른 인물로 보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은 결국 연기는 배우의 고유한 면면이 반영된 결과일 수밖에 없다는 이해로 다다랐다는 방증일 것이다. 결국 배우란 타인을 연기하기 전에 스스로를 닦는 직업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승훈도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연기하는 인물을 통해 저라는 사람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거 같아요. 그러니 저라는 사람을 잘 쌓아가야 앞으로 더 좋은 연기를 할 수 있겠죠. 요즘은 그런 생각으로 살고 있어요. 그래서 스스로를 이완시키려 노력하고 있죠. 가만히 TV를 보거나 책을 읽는 식으로요. 커피에 관심이 생겨서 커피 공부도 하고, 핸드 드립도 직접 내려요. 원래 그런 걸 잘 못하는 사람이었거든요. 자꾸 움직여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있잖아요. 그래서 요즘은 휴대폰 메모장도 잘 쓰고 있어요. 그렇게 정적인 시간을 보내면 평소 느끼지 못했던 감성이나 하지 못했던 생각이 찾아오는 듯해요. 알 수 없었던 영감이 밀려오더라고요. 그래서 차분한 취미를 찾기 시작했어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평소에 계획적으로 움직이는 편일까? 아니면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편일까? 자신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사실 요즘 고민거리가 하나 있어요. 나는 ‘P’일까? ‘J’일까?(웃음) MBTI 검사를 해보면 ESFP랑 ESFJ가 왔다 갔다 하는데 계획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가 굉장히 충동적으로 결정해서 행동할 때도 있거든요. 그런데 연기할 때 이런 게 도움이 되는 면이 있어요. 열심히 계획해서 현장에 가도 상대 배우의 리액션을 보고 충동적으로 함께 모험하듯 새롭게 가보기도 하고, 그럴 때 정말 연기가 재미있더라고요. 그런데 만약 아무 준비도 안 하고 현장에 간다면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판단 자체가 불가능하고, 그 상황에 갇혀서 연기하게 되지 않을까요? 결국 제 안에 둘 다 있다는 게 연기할 때는 편하고 재미있게 느껴져요.”
내가 아닌 남이 되기 때문에 되레 나를 잘 알게 된다는 것, 배우라는 직업은 그래서 내가 아닌 나로 살아간다는 것과 내가 몰랐던 나를 만난다는 것을 즐기는 자에게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한 삶을 선물한다. 오승훈은 확신에 차 있다. “무대에 서면 행복해요. 연극도, 영화도 정말 재미있고, 연기할 때 살아 있는 거 같아요. 상대 배우와 액션과 리액션을 하고, 스태프와 함께 한 작품을 완성하는 순간이 행복해요. 결과물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 보낸 시간이 모두 소중하죠. 지금 제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 느끼고요. 촬영장에 가는 게 가장 행복해요. 이 일을 선택하길 정말 잘했다고 매번 100% 확신하죠.” 지금 오승훈의 삶을 지배하는 건 바로 그 세 자리 숫자다.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100%의 오늘. 그거면 충분하다. 민용준 저널리스트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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