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민, 유연석, 이정은의 꿈속을 걷다
한낮에 꾼 꿈이 생생하다. <운수 오진 날>의 이성민, 유연석, 이정은을 마주한 기묘한 백주몽이 흩어지지 않고 마른 나뭇가지마다 걸려 맴돈다.
운명적 선택의 집합체, 이성민
뭔가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어떻게 표현하나요?
음… ‘좋은데’.
그 뒤에 느낌표가 서너 개쯤 찍혀요?
그것보다는 ‘우와’ 같은 반응이 먼저 나와요.
부산국제영화제에 공식 초청된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운수 오진 날>을 처음 보고는 필감성 감독에게 “재밌던데”라고 하셨다면서요. 그 얘기를 듣고 질문해봤습니다.
거기에도 뭔가 탄성이 붙었을 거예요. 재미있었어요. 재미있어서 한 말이고 이 작품을 하면서 누구보다 감독님에게 의지를 많이 했어요. 판단을 존중했고, 그걸 믿고 갔어요. 결과물을 보니 그러길 잘했구나 싶더라고요. “재밌던데”라고 했던 데는 그런 의미도 있었어요.
드라마를 스크린으로 본 감흥이 어땠나요?
처음에는 극장에서 본다고 해서 생경했어요. 그런데 이질감이 들지 않더군요. 영화처럼 집중해서 봤어요. 영화와 동일한 방식으로 찍어서 그런 것 같아요. 부산에서 상영된 1·2부는 영화처럼 콘티를 다 짰어요. 관객과의 대화에서도 다들 드라마라 하지 않고 영화라고 말하더라고요.
그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했죠. “연기하는 순간과 그렇지 않은 순간을 잘 구별하는 편인데 이 작품은 힘들었다.”
감정적으로 예민한 장면이 많았거든요. 이번에 연기한 ‘오택’은 평범한 택시 기사입니다. 안타까운 처지에 있지만 그걸 이겨내려고 밝게, 열심히 살아가요. 성격도 선하죠. 남의 말 잘 믿고 화도 낼 줄 몰라요. 적당히 이기적인 면도 있고. 그런 오택이 우연히 연쇄 살인마를 태우게 되면서 감정적으로 굉장한 압박을 받는데, 이걸 연기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왜 그랬죠?
오택에게 가해지는 스트레스를 제 양껏 표현하지 못해 힘들었어요. 나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면 내가 하고 싶은 충동대로 연기하면서 힘든 감정을 해소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일방적으로 계속 당하는 역할이었죠.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질 때마다 감독님이 브레이크를 걸어줬어요.
지금 마주한 표정에서도 그 힘듦이 느껴집니다.
전에는 캐릭터가 느끼는 감정이 일상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을 안 했어요. 그런데 요새 바뀌었어요. 영화 <리멤버>도 그랬고 최근 작품을 하면서 그런 걸 부쩍 느껴요. 이번에 그 경험을 세게 한 거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운수 오진 날>을 본 관객도 힘들었다고 했어요. 우리 작품이 엄청 폭력적이거나 피가 낭자하지는 않거든요. 내가 연기하며 겪은 스트레스와 고통을 관객도 같이 느끼지 않았나 싶어요.
그럼 성공한 거 아닌가요?
감독님이 성공했죠(웃음). 현장에서 감독님이 무엇을 원하고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늘 알아요. 연기해야 하는 장면이 대충 상상되고요.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은 스스로 찾아야 하는데 그 길이 모호할 때가 있어요. 연기라는 게 무의 상태를 구체화하는 과정이긴 하지만, 오택이 겪는 충격과 공포 같은 심리 상태가 가늠이 안 됐어요. 그럴 땐 방법이 없어요. 모든 걸 내려놓고 일단 부딪혀야 해요.
굉장히 외로운 작업이군요.
그런 상황일수록 더 외롭죠.
지독한 고됨과 별개로 이 작품에 임하게 된 목적은 무엇인가요?
대본이 재미있었어요. 이야기 전개가 장편영화를 보는 느낌이었고 택시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스릴러라는 게 새로웠어요. 캐릭터에 호기심도 있었고요. <재벌집 막내아들> <형사록>에서 연기한 날 선 인물과는 거의 정반대예요. 영화감독이 드라마를 연출한다는 것도 흥미로웠고, 여러 가지로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품을 만나는 건 필연인가요? 아니면 의지의 범주인가요?
이런 생각을 해요. ‘내가 저 역할을 했더라면’ 같은 가정은 성립될 수 없다고요. 저 역할이 나한테 왔었지, 내가 했다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 안 해요. 한 번도 한 적 없어요. 내가 어떤 역할을 맡는다, 그럼 그건 ‘저스트’예요. 저스트. 그러니까 배우가 역할을 만나는 건 운명이고 필연이라 할 수 있어요.
연기를 하게 된 건요?
팔자예요, 팔자. 그냥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아무도 이 일을 추천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하지 말라는 소릴 많이 들었지. 친구들이나 주위 사람들은 의아해했어요. 배우를 할 만한 사람처럼 전혀 안 보였으니까.
어떤 운명적인 계기가 있었겠죠?
글쎄요, 굳이 말하자면 아버지께서 영화를 좋아해서 많이 보여주셨어요. 정서적인 부분에서 영향이 있었겠죠. 그리고 아버지는 여러 가지로 탤런트가 많으신 분이었어요. 그 재능을 어느 정도 물려받았나 봐요.
실은 궁금했어요. 미술 선생님이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다고요.
아버지께서 그림도 잘 그리셨어요. 나도 어릴 땐 제법 그렸고요. 오래전 일이죠. 지금은 관심도 없고 안 그려요.
연기하는 게 팔자라고 하셨지만 용기를 내 그 길을 개척한 지점도 있었을 거라 봅니다.
아이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준 적 있어요. 살다 보면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선택의 순간이 필연적으로 찾아올 거라고. 스무 살 무렵 연극 하겠다고 작은 마을을 떠나 도시로 왔던 것이 저에게 그런 순간이었죠. 아는 사람도, 말을 걸어주는 사람도 없었어요. 연기로 나를 기억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었죠. 그다음은 어려웠던 시절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졌을 때예요. 서른 중반 배우로서 전환점을 갖기 위해 상경했을 때도 용기가 많이 필요했어요. 쭉 되새겨보니 참 잘한 선택이었죠.
배짱이랄까, 잘될 거라고 생각했나요?
그럴 리가요. 순전히 모험이었죠. 보장된 미래도 없고 뭐가 펼쳐질지 계산이 안 되는 상황이었어요. 선택에 대해서도 확신하지 못했고요. 대신 두렵지가 않았어요. 겁이 없었죠. 20대 초반에 특히 그랬어요. 잃을 것도 없고 책임질 것도 없었으니까. 가끔 그 시절이 그리워요. 나이가 들수록 어쩔 수 없이 겁나는 게 생기더라고요.
서른 중반 서울에 왔을 때는 또 달랐나요?
많이 불안했어요. 갈고닦은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소위 전국 실력자들이 모인 큰 무대에서 통할 수 있을지, 혹시라도 내가 옳다고 해왔던 연기가 잘못된 건 아닌지 자신감이 떨어졌어요. 그걸 티 내지 않으려고 애썼던 기억이 나요.
그렇게 시작해서 서울에 온 지 10년이 됐을 무렵 드라마 <골든 타임>으로 눈도장을 찍었고, 그로부터 10년 뒤 신드롬의 중심에 선 <재벌집 막내아들>을 맞이했단 말이죠.
그래요? 어느덧 20년이 됐군요.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요. 배우로 살면서 대표작 몇 편 남겼으니.
대학로 생활 10년과 이후의 10년을 비교하자면 많은 변화가 있겠지만, 지금까지도 고수하는 건 뭘까요?
그사이 생활이 나아졌고 처지도 입장도 달라졌어요. 책임감도 커졌고요. 전보다 더 잘해야 해요. 그리고 이걸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데 배우로서 자존감도 갖게 됐어요. 하지만 본성, 근본이랄까, 원래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나이가 들면서 성격이 조금 바뀐 것 말고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어요.
<운수 오진 날>에서 평소답지 않게 행동하는 오택은 “안 하던 짓 하면 탈나는 거예요”라는 동료의 경고를 듣게 되고, 이 말이 날카로운 복선으로 돌아오죠. 의식적으로 경계하는 부분이 있을까요?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으려고 해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늘 긴장 상태가 돼요. 끊임없이 나를 돌아보고 체크하는 게 있어요. 이제껏 스스로 연기를 잘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아무리 좋은 평가가 있어도 실제로 어땠는지는 배우 본인이 가장 잘 알아요.
오래 연기를 했어도 여전히 새롭게 깨닫는 것도 있겠죠?
전에는 혼자라는 느낌이 많았단 말이에요. ‘나만 잘하면 돼’ ‘내가 잘해야 해’ 이렇게 일했어요. 믿을 수 있는 건 나 자신뿐이었어요. 그런데 요새는 동료들과 다 같이 잘해야 되는 거라는 생각을 해요. 가령 스태프는 내 연기를 단순히 촬영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연기를 할 수 있게끔 도움을 주는 이들이에요. 생각을 바꾸니 촬영 현장이 전보다 편안하게 느껴져요. 외로움도 덜하고요. 너무 뒤늦게 깨달았어요.
자화상을 그린다면 어떻게 표현하고 싶나요?
중후하게 그릴 것 같아요.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에요. 적당히 주름지고 품격이 느껴지는 사람. 배우로서도 마찬가지고요.
아까 ‘10년 주기설’을 얘기했는데, 10년 뒤의 모습을 그려본다면요?
일단 살아 있어야겠죠. 어허허허. 저한테는 이 일밖에 없어요. 연기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고 다른 걸 해본 적도 없어요. 그런데 이렇게 살아온 삶이 재미있진 않아요. 제 아이한테 이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나처럼 인생을 하나로만 채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맘껏 여행도 하고 이 일 저 일 해보면서 다양한 경험과 삶의 여유를 즐기면서 살았으면 해요. 스스로에게도 여러 번 말했죠. 하지만 그러질 못했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배우가 아니라 목수였다고 해도 평생 나무를 끼고 살았겠죠. 그러니 10년 뒤에도 이러고 있을 거예요.
배우가 오롯이 연기만 했다는 건 행복한 삶에 닿아 있는 게 아닐까요?
나는 연기가 일이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해요. 내겐 일인 거죠. 마찬가지로 20년, 30년, 평생을 한 가지 일만 하신 분들이 많아요. 직업 특성상 달라 보이는 거지, 내 일도 특별하지 않아요. 촬영장 가는 게 재밌지 않느냐고 물어보는데, 절대요. 직장인과 똑같이 일하러 가는 기분이에요.
연기라는 일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무형의 것을 다루는 일입니다. 어떤 객체가 없어요. 배우를 예술가라고도 하는데 장르가 좀 다르다고 느껴요. 보통 예술가들이 그림, 조각, 악보라는 형식을 빌려 뭔가를 담는다면 배우는 순전히 자기 몸을 가지고 오롯이 표현해요. 그러기 위해선 정신적인 부분과 감성을 세심하게 다루는 게 중요하죠.
연기 외에 삶의 로망 같은 건 뭔가요?
세계 일주를 한 번 해보고 싶어요. 크루즈를 타고. 내가 지금 50대 중반인데 해외여행을 별로 못했어요. 같이 해외여행 가는 게 우리 가족 소원이죠. 미국 땅도 못 밟아봤어요. 칸영화제 참석이 한국에서 가장 멀리 간 거예요.
당장 해외여행 하기는 쉽지 않아 보이니 이건 어떠세요? 택시를 타고 어디든 갈 수 있다면요?
강원도 속초나 고성? 일할 땐 여유가 없다 보니 멍때리는 시간을 좋아해요. 집에서도 간간이 그러고 있어요. 오늘같이 맑은 날엔 바다를 보며 멍때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최고로 ‘운수 오진 날’은 언제였나요?
우리 아이가 태어났을 때죠.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어요. 우영현 프리랜스 에디터
독특한 일상의 파장, 이정은
아방가르드한 실루엣의 옷을 입고 화보 촬영 내내 음울하면서도 소녀 같은 분위기를 풍기더군요. 새로운 모습이었어요.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길>(1954)을 엄청나게 좋아해요. 주인공 젤소미나가 복수심에 칼을 들고 나타난 것 같은 장면을 상상하며 촬영에 임했죠. 옥상에 오르고, 유리 파편도 쥐면서요.
지금은 영화 <헤어질 결심>의 후드 티를 입고 있군요.
아, 이거요? 올 초 <헤어질 결심>의 아카데미 선전이 한창일 때 뭐 도와줄 방법이 없냐고 했더니 후드 티를 보내주더라고요. 한동안 잘 입고 다녔죠.
두 편의 작품을 시간차로 선보입니다. 박보영 배우와 함께한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와 <운수 오진 날>이죠. 지금 이 순간, 어떤 역할의 잔상이 더 깊게 남아 있나요?
촬영이 끝난 작품은 농사를 마친 거니 홍보에 주력하고요. 지금은 청주에서 촬영 중인 새로운 작품에 몰두하고 있어요. 연달아 작품을 선보이게 돼서 다행이고 감사하죠.
<운수 오진 날>에서 아들을 죽인 연쇄 살인마 ‘금혁수(유연석)’를 쫓는 ‘황순규’를 연기합니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서 연기한 인자한 수간호사 ‘송효신’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인물이죠. 작품을 고를 때 이왕이면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하는 편인가요?
역할보다는 스토리텔링에 이끌려 출연을 결심하는데 시기마다 작품 간에 묘한 연관성이 보여요. ‘멘탈’에 관한 작품을 하나 하면 그때 골몰한 것이 생각의 띠를 이뤄 다음에도 비슷한 화두를 품은 작품을 만나게 되는 식으로요.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정신 건강에 관심이 깊어지던 차에 만난 작품이에요. 평소 멘탈 관리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동료 배우들이 정말 많거든요. 공황장애까지는 아니지만 저 역시 촬영이 끝나면 확실히 후유증을 느끼고요.
건강하게 일하기 위해 세운 본인만의 원칙 같은 것도 있을까요?
모니터링은 열심히 하지만 그렇다고 지나간 일을 깊이 후회하지 않아요. 요즘엔 이왕이면 아침에 대본을 읽으려고 하죠. 밤에는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변하잖아요. 이야기를 깊이 들여다보는 것 같지만 다 착각이더라고요.
황순규를 그려내며 잊혀가는 딸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분투하는 영화 <쓰리 빌보드>의 주인공 ‘밀드레드(프랜시스 맥도먼드)’를 참고했다고요.
필감성 감독님을 처음 만나는 자리였는데 감독님이 그 영화 이야기를 꺼내시더라고요. 황순규가 밀드레드의 건조한 느낌을 갖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그랬죠. “어우, 그럼 말라야 되겠네요(웃음).”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주연한 <노매드랜드> 역시 인상 깊게 봤다고 들었어요. 좋아하는 배우인가요?
완전 팬이죠! 연기의 교과서 같으면서도 예측할 수 없는 표현력을 지닌 배우예요. 만나본 적은 없지만 왠지 모르게 괴짜일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시상식 자리에서 보여주는 돌발적인 제스처도 참 유쾌하고 좋아요.
영화 <기생충>으로 칸영화제에 참석했을 때 독특한 댄스를 보여준 것처럼 말이죠.
그건 제가 좀 주책이었고요(웃음).
황순규는 원작 웹툰에는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입니다. 살인자를 추격하는 새로운 역할의 필요성에 공감했나요? 다른 두 주인공과는 다른 접근법이 필요했을 것 같기도 해요.
상상을 많이 했어요. 아이를 키우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사라진다면? 타살의 정황이 보이고, 의심 가는 용의자가 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때, 엄마로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지? 상상을 초월한 빌런을 맞닥뜨렸을 때, ‘마블’ 영화 속 주인공은 히어로로 거듭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요. 아무리 큰 충격을 받았다 한들 한순간에 파괴적인 힘을 갖긴 어렵죠. 이런 이야기를 감독님과 많이 나눴어요. 담을 넘는 장면을 연기할 때 제 의욕과 체력은 충분했지만 감독님은 힘을 더 빼라고 하셨죠. 황순규가 그 담을 굉장히 힘겹게 넘었으면 좋겠다면서. 더 외롭고, 더 고단하게 표현해야 하는 지점이 힘들었어요.
<싸우자 귀신아> <타인은 지옥이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웹툰을 원작으로 한 출연작이죠. 원작을 어떻게 활용하는 배우인가요?
의상과 헤어스타일 등 비주얼 요소를 많이 반영하는 편이에요. 각색 과정에서 축약되는 감정선을 원작을 통해 유추하기도 하죠.
<운수 오진 날>의 원작자인 아포리아 작가는 취객으로 인한 난감한 상황과 폭행 사건 등 택시 기사의 고충에 집중해 이야기를 구상했어요.
말씀을 듣고 보니 운전석 부분을 막아놓은 택시와 버스가 떠오르는군요. 다 공포감 때문이겠죠. 아주 오래전인데 저도 길을 걷다가 의문의 20대에게 이유 없이 둔기로 맞아서 큰일 날 뻔한 적이 있어요. 그때 느꼈죠.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구나.’ <운수 오진 날>을 보고 사람들은 자기와는 무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거예요. 판타지로 느끼겠죠. 하지만 전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에요.
이성민 배우는 여태껏 촬영한 작품 중 가장 힘들게 연기했다고 하더군요.
힘들었을 것 같아요. 밀폐된 공간에서 살인자와 동행하는 상황은 기약 없는 고문이니까요. 때리고 싶을 때 때리지 못하면 그게 다 응어리로 남거든요. 일방적으로 당하는 상황은 아무리 연기라도 고통스럽죠.
유연석 배우와는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이후 오랜만에 호흡을 맞췄습니다.
연석 씨는 이번에 정말 날아다닙니다. 새로운 헤어스타일도 너무 웃기고, 현장을 정말 즐기더라고요. 아무리 힘들어도 허허 웃으니 스태프들도 참 좋아했죠. 유머가 있는 사람은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런 모습이 멋있었어요.
돼지꿈을 꾼 택시 기사는 그날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내려 했을 뿐인데 최악의 상황을 맞이합니다. 배우로서 겪기 싫은 최악의 상황은 뭘까요?
대사 못 외우는 거죠. 판사 역할을 맡은 드라마 <로스쿨>을 찍을 때 눈앞이 하얘지는 화이트아웃을 경험해본 적 있어요. 정말 괴롭더군요. 내뱉는 단어마다 계속 쪼개지니 미칠 노릇이었어요. 다행히 다 지나갔지만요. 최근에는 자주 가는 한의원 한의사 선생님께 뭘 자꾸 까먹는다고 털어놓으니 그러시더라고요. “세 배 정도 더 노력하시면 됩니다.” 너무 미웠어요.
이유 없는 행운, 노력보다 더 큰 성과 등 일상에서 경계하는 것이 있나요?
끝없는 칭찬을 경계해요.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대답은 하지만 사실 잘 안 믿죠. 그렇게 칭찬받을 일을 하진 않았다는 의심이 있거든요. 연극 했을 때부터 그랬어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인복이 좋아서 그렇지 스스로 일군 성과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고마운 사람들이 도와준 게 90%, 내 노력은 한 10% 정도일까요.
돌이켜봤을 때 배우로서 가장 운이 좋은 순간은 언제였나요?
누구나 한 번쯤은 대운이 찾아오는 것 같아요. <오 나의 귀신님>에서 ‘서빙고 보살’이란 역할을 준비하려고 점집을 찾았다가 인연을 맺게 된 무당이 있어요. 지나가는 말로 다음 작품이 고민이라고 하니 뭐든 좋으니 다 선택해도 된다고 했는데, 그때 찾아온 작품이 <기생충> <미스터 션샤인> <아는 와이프>예요. 다 아주 잘됐죠. 물론 대본이 정말 좋았기 때문에 들은 이야기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참여했을 거예요.
1987년 고 3 수험 생활의 답답함을 느끼고 연극영화학과 진로를 결심합니다. 연출로 시작했다가 연기가 하고 싶다고 선배를 졸라서 처음으로 맡게 된 역할이 ‘인신매매범’이었다고요.
소질이 있는지 없는지를 떠나서 연기가 그저 재미있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재미있게 오래 하고 싶었죠. 제가 좀 고집스러운 면이 있어요. 중요한 결정도 혼자 척척 잘 내리죠. 아무래도 유전자의 영향인 것 같아요. 어머니랑 아버지가 되게 성실한 분들인데 ‘한 고집’ 하시거든요.
연극 <한여름 밤의 꿈>으로 데뷔한 후 어느덧 단단한 배우가 됐습니다. “넌 배우가 될 상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던 어머니는 이제 어떤 말씀을 해주시나요?
더 많이 나오는 것 하래요(웃음). 일일 드라마나 주말 연속극을 제일 좋아하시거든요.
과거 인터뷰를 보면 청춘에게, 여성에게, 배우 지망생에게 ‘한마디’ 해달라는 질문을 자주 받더군요. 사람들은 왜 배우 이정은의 ‘한마디’를 듣고 싶어 할까요?
무명 기간이 길었어요. 긴 시간을 거치고 잘된 모습으로 서 있으니 거기에서 희망적인 기운을 얻는 것 같아요. 물론 제가 좀 진지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재미없다고 하는 사람도 많죠. 사람이 너무 반듯하다고.
배우로 살며 들은 이야기 중 오랫동안 가슴에 지니고 있는 말이 있나요?
연기 스승인 최형인 선생님께서 “사람들은 네 소리를 듣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너를 듣고 싶은 거야”라고 말씀하신 적 있어요. 그 말이 계속 남더라고요. 대학 때는 편하게 연기할 수 있도록 북돋워줬고, 이후에도 곱씹을 때마다 용기를 줬어요.
봉준호 감독은 당신을 ‘목소리의 마법사’라고 설명했죠.
그 전까지는 한 번도 목소리 좋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봉 감독님의 관점이 참 독특한 것 같아요. 제 목소리가 사실 자갈과 모래를 갈아 넣은 것 같은 서걱거림을 갖고 있거든요. 배우로서 아주 좋은 목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매력적으로 봐주시더라고요.
계산원, 부동산 아줌마, 보험공단 직원, 생선 가게 사장 등 정말 다양한 노동자를 연기해왔습니다. ‘노동은 삶의 예술’이라 이야기한 당신은 언제 노동의 희열을 느끼나요?
같은 시간과 노동을 쏟아붓는 배우, 스태프들과 함께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는 희열이 제일 커요. 문화의 생산을 위해 미친 듯이 몰두하는 사람들을 볼 때 현장에서 많은 힘을 얻죠. 감정 노동자이자 육체 노동자면서 공유 노동자인 우리가 만들어낸 결과물이 관객의 정신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보람도 커요.
동갑내기 친구 김혜수 배우와 달리 인스타그램 활동이 아주 뜸합니다. 평소 일상은 어떻게 흘러가는지 궁금해요.
아침에 밥 차려 먹고, 엄마랑 반려견 산책시키고, 인터넷으로 장도 보죠. 요리는 엄마가 다 하지만요(웃음). 운동은… 작품을 위해 꼭 필요한 정도만 몸을 쓰는 편이에요. 촬영이 한창인 작품 때문에 얼마 전 사격 연습을 했는데 확실히 PT를 받으니 손힘이 생겨서 총알이 잘 나가더군요. 오랜만에 ‘하면 된다’는 걸 실감했어요.
벌써 12월입니다. 올해 특히 고마웠던 사람이 있나요?
작품을 기다려주는 분이 많아요. 항상 저의 ‘다음’을 기다려주는 모든 분께 감사한 마음입니다. 건강하게 지내시는 부모님께도 감사하고요. 친한 사람들과 밥 한 끼 같이 먹는 것. 요즘 들어 그게 너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최근 몇 년 사이에 하늘나라로 간 동료들이 많아요. 만나서 요즘 뭐가 고민인지 서로 듣고 심심하게 웃는 것. 그런 보통의 삶이 참 중요한 것 같아요. 류가영 <보그> 피처 에디터
새로움의 민낯, 유연석
유튜브 채널 ‘주말연석극’에선 화보 현장을 종종 보여주더군요. 오늘도 촬영 팀이 동행했나요?
아뇨, 아뇨, 오늘은 같이 안 왔어요.
유튜브에서 팬들을 ‘우리 연덕이들’이라고 부르는데 연덕이의 기본 자질을 생각해보곤 하나요? 적어도 나에 대해 이 정도는 알아야 한다든가, 꼭 봐야 하는 출연작이라든가.
그런 게 어딨어요. 구독하기만 하면 돼요. 누구든 환영합니다. 대신 마음대로 나갈 수는 없어요.
연덕이들은 <운수 오진 날>에서 잔인한 연쇄 살인마로 변신한 유연석을 어떻게 볼까요?
예고편이 나오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일부가 공개됐을 때 팬들 반응이 뜨거웠어요. “얼굴을 갈아 끼웠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의외로 저의 센 모습을 좋게 봐주는 것 같아요. <미스터 션샤인>에서도 많은 분이 제가 연기한 구동매가 싸우다가 피범벅이 된 장면을 좋아해줬어요.
이번에는 광기로 점철된 악인 역할을 맡아 뜻밖의 얼굴을 예고했죠. 처음 대본을 읽을 때의 느낌은 어땠나요?
그 전에 원작 웹툰을 먼저 접했어요. 이야기 자체가 굉장히 독특했고 제가 맡은 ‘금혁수’라는 인물이 흥미롭게 다가왔어요. 고통을 못 느끼는 설정에다 과한 펌과 개구리처럼 생긴 괴이한 외모로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거든요.
첫 모니터링을 하면서는 어땠는지 궁금해요.
웹툰에 작화된 외모를 실제로 구현하기는 어려워요. 캐릭터를 잡으면서 외모적으로 여러 시도를 했어요. 그러다 최종적으로 통가발을 쓰고 얼굴에 주근깨를 더해 별난 분위기를 냈어요. 부자연스러워 보일까 봐 걱정도 했는데 첫 촬영 때 준비한 만큼 잘 나와 ‘이거다’ 했어요.
창조의 즐거움이 컸던 것 같군요.
쾌감의 정도가 0에서 10까지 있다고 하면 9단계쯤? 늘 안 해본 것을 시도해보고 싶은 마음이 커요. 그러면서도 내가 할 수 있을지, 나와 어울릴지를 생각해요. 이런 의구심으로 시작해 뭔가 맞아떨어지면, 그 느낌이 되게 좋아요. 그런 쾌감 때문에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계속 발동하는 것 같아요.
감정적 교류가 없는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처음 느낀 감정도 있어요?
감정이입이라는 표현이 있잖아요. 배역에 완전히 동기화해 연기를 한다거나. 그런데 이번에는 일부러 거리를 뒀어요. 예전에 했던 악역의 역할은 나름 연민이 가는 포인트가 있었는데 금혁수는 달라요. 인과관계 없이 무차별 살인을 저지르는 살인마이기 때문에 빠져서 연기하면 힘들더라고요.
그럴 수 있겠어요. 비정상적인 감정을 휘몰아치듯 연기하고 나면 어때요?
거리를 둬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이야기 흐름상 밤에 주로 촬영하고 센 장면이 많다 보니 촬영장 가는 게 힘든 날도 있었어요. 이성민 선배님하고도 이 작품이 쉽지 않다는 얘기를 나눴어요.
배우의 얼굴은 스크린에 관객의 시선을 가둬야 한다는 점에서 자기 얼굴이 가진 힘에 대해선 어떻게 여기나요?
제가 느끼기에는 캐릭터성이 강한 얼굴은 아닌 것 같아요. 연기를 시작할 때부터 무채색 같달까? 얼핏 평범한 듯하지만 선역, 악역을 다 흡수할 수 있는 얼굴을 이상적으로 여겼어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이미지, 그게 나한테 맞는 길이라고 느꼈죠. 지금껏 장르와 캐릭터를 다양하게 한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배우의 인상이란 건 한참 빠져 살던 캐릭터의 영향을 받기도 해요?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는데 센 역할을 맡고 나면 주변에서 눈빛이 좀 달라진 것 같다고 해요. 그럴 때면 ‘아차’ 싶죠. 본모습을 그대로 지키고 싶거든요.
숨기려 해도 얼굴로 금방 드러나는 감정도 있나요?
반려견 리타의 영상이나 사진을 보고 있으면 뭔가 얼굴에 티가 나는지 옆에서 “리타 보고 있지?” 이래요. 유기견을 입양해 키우는 게 처음은 아닌데 리타는 내 새끼 같은 느낌이 좀 더 강해요. 그 전에는 어머니와 같이 반려견을 키웠어요. 리타는 혼자 돌봐서 그런지 애정을 많이 느껴요.
연기한 지 올해로 20년이 됐습니다. 어떻게 자평하나요?
태국에서 가진 팬 미팅에서 고맙게도 팬들이 내가 했던 작품과 캐릭터를 모아 영상으로 만들어줬어요. 작품도 많고 장르도 다양하더군요. 진짜 열심히 살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20대, 30대 시절을 돌아보면 후회가 남지 않아요.
연기로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봤어요?
만족 못하죠. 이루지 못한 것도 있어요. 그렇지만 다양한 장르와 캐릭터를 시도했다고 자부해요. 그리고 영화, 드라마를 하면서 연극, 뮤지컬도 했어요. 그것만으로도 제가 기특해요.
이런 상상 어때요? 출연작으로 공간을 꾸민다면 어떤 분위기가 그려져요?
비슷한 맥락으로 작품이 끝날 때마다 팬분들이 챙겨주신 선물과 기념품을 모아놓은 방이 있어요. 들어가 보면 장난 아니에요. 여러 가지가 뒤섞여 어수선하고 정신이 없어요.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은데 엄두가 안 나요. 그래서 질문에 답하자면 아마 그 공간도 좋게 말해서 색깔도 구성도 다양하지, 상당히 어수선할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주말연석극’에서 맥시멀리스트의 면모를 보여줬죠.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는 어떤 작품을 두고 싶어요?
데뷔작 <올드보이>가 20주년을 맞아 미국에서 재개봉했어요. 이를 기념해 박찬욱 감독님과 같이 출연한 선배님들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 있던 주인공 피규어가 생각나요. 보자마자 갖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요. 돌이켜보면 <올드보이> 출연 당시 저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학생이었고, 소속사도 없었죠. 그러다 보니 기념이 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 점에서 <올드보이>를 눈에 띄는 자리에 딱 두면 좋겠어요. 제 출발점이자 현재까지도 명작으로 회자되는 작품이니 그만한 의미도 있어요.
데뷔 때의 각오 같은 거 기억나요?
앞으로 10년은 군말 없이 죽어라 연기만 하자고 다짐했어요. 친한 선배들이 그러더군요. 이 일은 언제 빛을 볼 수 있을지 모르니 조급해하지 말라고, 긴 호흡을 가져야 한다고. 그런 각오로 시작했는데 다행히 10년 차가 됐을 때쯤 사람들이 내 이름을 기억할 수 있는 작품을 만났어요.
<운수 오진 날>에는 금혁수가 로버트 드 니로 주연의 영화 <택시 드라이버> 속 대사를 외우다시피 인용하며 분위기를 서늘하게 만드는 장면이 나와요. 이처럼 신인 시절 버튼을 누르면 바로 나올 정도로 달달 외웠던 대사가 있을까요?
당시 박해일 선배님을 진짜 좋아했어요. 아까 말한 여러 가지 얼굴을 가졌잖아요. 뭐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선배님이 나온 작품과 대사로 연기 연습을 하고 오디션을 준비했어요.
이것도 궁금해요. <낭만닥터 김사부 3>에서 거의 6년 만에 ‘강동주’로 재등장한 것처럼 다시 연기하고 싶은 캐릭터가 또 있는지.
지금 <올드보이>를 연기하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최근에 하긴 했어요. <올드보이>를 만들 당시에 최민식 선배님은 저와 비슷한 나이였고 유지태 선배님은 무려 20대였어요. 박찬욱 감독님도 마흔 정도였고요. 그분들이 지금 내 나이에 역사적인 작품을 만든 거잖아요. 그래서 <올드보이> 같은 작품이 들어온다면 나도 잘해낼 수 있을지 궁금해요.
나아갈 방향도 어느 정도 잡았을 것 같은데 앞으로 뭐가 기대돼요?
오히려 더 모르겠어요. 다음 시기부터는 좀 더 신중하게 작품을 선택해야 한다는 조언을 많이 들었거든요. 그게 어렵게 느껴져요. 확신보다는 이런 연기를 했는데 뭘 해야 되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까? 그런 의문이 먼저 들어요. 20대에는 10년을 버텨보자는 파이팅이 있었고, 30대에는 내 욕심과 만족을 따랐다면, 앞으로는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가야 할 것 같아요.
웹예능에 출연해 “마흔이 되면서 사춘기가 처음 오는 것 같아요”라고도 했죠. 왜 그렇게 느꼈어요?
하하. 그건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 말씀을 잘 지키지 못해서 한 소리예요.
어떤 말인가요?
결혼 언제 할 거냐고… 어우, 그건 저도 모르잖아요.
없을 것 같아 물어보는 거예요. 큰 일탈이나 반항해본 적 있어요?
딱히… 그러게요. 어머니께서도 제가 특별한 사춘기가 없이 컸다고 말씀하세요. 이제는 나름대로 원하는 삶의 방향이 생겼고 제 선택을 밀어붙이기도 하니까 오히려 지금 사춘기가 찾아온 게 아닌가 싶어요.
잘 살고 있다, 이런 생각은 언제 들어요?
사실 잘 모르겠어요. 계속 촬영만 하고 있을 땐 이게 잘 살고 있는 걸까, 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스쳐요.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점차 줄어들고 주변을 살필 여유가 적어지니까 의구심이 들어요. 어릴 적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는데 자기가 꾸린 가족에 대한 애착이 크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사는 게 맞나? 너무 나 자신을 위해서만 달려왔나? 그런 고민을 했어요.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죠, 뭐. 자신과 똑 닮은 아이가 생기면 어떨 것 같아요?
쉽지 않겠죠(웃음). 쉽지 않겠지만 저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괜찮을 것 같아요. 아무튼 애교가 많거나 살가운 아들은 아니거든요. 그런 부분이 좀 아쉽군요. 부모님 입장이 되어보니 알겠어요.
<운수 오진 날>은 택시 기사 오택이 돼지꿈을 꾸면서 시작하죠. 깨고 싶지 않을 만큼 기막히게 좋았던 꿈 있어요?
신기할 정도로 꿈을 거의 안 꿔요. 꾸더라도 일어나면 잘 기억나지 않아요.
그럼 현실에서는 어떤 꿈을 꿔요?
언제까지고 현장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작업을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순재 선생님이 대학 은사님이세요. 여전히 연극 무대에 서는 선생님을 보면 존경심이 생기고 오랫동안 사랑받으며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한테는 꿈같은 장면이죠.
아까 이성민 배우도 인터뷰에서 비슷한 생각을 말하며 중요한 걸 하나 알려줬어요.
어? 선배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그때까지 살아 있어야 한다고요.
아하하하. 맞네요.
이성민 배우에게 했던 질문으로 마무리할게요. 택시를 타고 어디든 갈 수 있다면 뭘 하고 싶어요?
며칠 전 태국을 다녀왔는데 그 사이 굉장히 추워졌어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태국에 돌아가고 싶더라고요. 택시비가 얼마나 나올지 모르겠지만. 우영현 프리랜스 에디터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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