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 부처가 웃지 않는 이유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본인의 그림 앞에서 안드레 부처는 웃어본 적이 ‘전혀’ 없다. 그저 인물의 눈동자만 따라갈 뿐이다.
더페이지갤러리에서 안드레 부처의 첫 한국 개인전 <André Butzer>가 열렸다. 30년 작가 활동 중 처음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이만큼 적절한 시기도 없다. 올해 50세인 그는 한국에 오기 직전 스페인 마드리드의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가졌다. 독일 슈반도르프, 베를린, 포르투갈에서도 동시에 전시가 열렸다. 한국 다음으로는 피렌체와 두바이에서 전시가 열린다. 안드레 부처는 반세기의 삶을 정리하고 자신의 모든 작품을 정리해야겠다는 다짐을 꽤 오랫동안 했다. 다짐의 결과가 10여 회의 세계 투어로 이어질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1990년대 후반 ‘공상과학 표현주의(Science-Fiction Expressionism)’라 작가가 직접 명명한 회화 스타일은 나사하임(Nasaheim)이라는 유토피아에 사는 인물을 화폭에 채우는 행위로 이어진다. 1999년부터 그의 그림에 등장한 방랑자는 작가의 분신으로도 읽히며, 모든 것이 평등하고 균형을 이루는 이상적 세계, 나사하임 속에서 작가는 진실을 탐구하고 인간 실존이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얼굴을 뒤덮을 만큼 큰 눈을 가진 여성, 불가사리 형태에 눈이 뻥 뚫린 방랑자 등 만화적 인물은 사랑스러우며 풍성하고 다채로운 컬러가 이를 극대화한다. 하지만 안드레 부처의 작품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초창기에는 임파스토 붓 터치로 파괴적이고 과격한 느낌의 작업이 주를 이뤘다. 2008년부터 2016년까지는 검정을 활용해 화폭을 채우는 추상 작업, N-페인팅을 이어갔다. 2017년 금발의 유토피아 여인이 등장하면서 검정은 컬러 스펙트럼에 대한 탐구로 이어지고, 나사하임 속 인물들은 더 대담하고 활기찬 힘으로 화폭을 채우기 시작했다. 전보다 더 순수하고 진실한 세상에 대한 갈망을 가득 품은 채였다.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에서 막 회고전을 끝냈다. 30년간 작품 활동을 하며 대중으로부터 숨기도 했다. 회고전이 끝난 뒤,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궁금하다.
내가 대중의 시선을 피해 숨었던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은 마음이다. 곧 ‘칩거’에 들어간다고 똑똑히 적어달라.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은 정말 아름답다. 프라도 미술관도 바로 옆에 있다. 전시가 끝날 때마다 무얼 하고, 하지 말아야 할지 깨닫는다. 그런 점에서 마드리드와 같은 전시는 다시 하지 않을 거다. 회고전을 마무리하고 기뻤지만, 조금 지쳤다. 다행히 오늘은 힘이 넘친다.
생각은 수시로 변하기 마련이다. 한 가지 생각에 깊이 매몰될 때는 얕아지고 싶고, 반대로 얕은 사고에는 깊어지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회고전을 보며, 당신도 생각의 변화를 느꼈나?
내 생각은 단 한 번도 바뀐 적 없다. 사실 변화란 허상에 불과하다. 만약 뭔가 변한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높은 건물이 들어서면, 어디선가 변화가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절대적 진실이란 변하지 않고, 언제나 숨어 있기에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당신은 진실을 찾았나?
진실을 정의하거나 찾는 건 불가능하다. 그저 진실과 관계를 쌓아가며 가까워질 뿐이다. 진실엔 늘 숨고 싶은 습성과 비은폐성(Unverborgenheit)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움직이기를 멈추지 않는 게 진실이다. 들숨과 날숨처럼 자신을 드러냈다가 숨기를 리드미컬하게 반복한다. 진실은 숨과 같다. 숨이란 곧 신이다.
실체를 온전히 파악할 순 없지만, 가까워질 순 있다는 뜻인가?
그렇다. 누구나 가까워질 순 있지만, 누구도 손에 쥘 순 없다.
10년 전 두바이 전시에 했던 인터뷰가 떠오른다. 단 한 번도 사각형을 그려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난 사각형이라는 것을 그려본 적 없다. 진실에 대한 이야기와 연결된다. 사각형이란 개념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며 이성주의의 일부다. 엔지니어, 건축가, 선생님, 특히 어린아이에겐 어느 한 시기에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올바른 측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사물도 고정된 상태로 있을 순 없다.
당신 그림엔 모든 회화적 요소가 융화되어 있다. 고전적인 그림이 연상되기도 하고,
평면적이기도 하며, 때로는 배경에서 입체파 화가의 붓 터치가 느껴진다. ‘공상과학 표현주의’라고 설명하는 본인의 그림이 우리의 설명과 얼마나 닮았는지 궁금하다.
전부 정확하다. 입체파 화가에 대한 부분만 빼고(웃음). 물론 내게 ‘그건 틀렸다’고 말할 권리는 없다. 입체파 화가들이 현실을 부수고 조각내고 싶어 했다면, 내게는 조각난 것을 다시 붙이려는 의지가 있다. 고전적(Classic)이라는 설명은 무척 마음에 든다. 궁극적으로 변하는 것은 없다고 말하지 않았나. 내 그림은 매우 고전적이며, 보수적이다. 전통 방식을 지키면서 보수적인 그림을 그리기는 너무 어렵다. 나는 과거의 화가와 같은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다. 즉 표현주의적 요소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잠시 돌아가보자. 사각형은 수직과 수평으로 고정돼 한정된 상황에 존재한다. 표현주의는 다르다. 선에 진동을 주어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공상과학 역시 표현주의와 맞닿아 있다. 소위 말하는 ‘컨템퍼러리’ 아트를 하기는 쉽다. 겉보기에 새롭고, 놀라움을 주기만 하면 되니까. 전통 방식을 깨지 않으며, 보수적인 그림을 그리는 편이 더 어렵다. 전통적인 가치는 위기에 처했다. 우리는 빨리, 새롭게 변화하는 데만 치중한다. 공상과학은 내게 역사와 같다. ‘지금’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에는 실체가 없다. 바로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림 속 인물들이 절대 정면을 보는 법이 없다.
잘 짚었다. 관객을 정면으로 보는 훌륭한 그림이 많지만, 나는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없다. ‘내 역량이 부족한가?’라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분명 이유가 있다. 그들은 다른 어떤 곳을 바라본다. 시선은 유토피아적이고 순수하다. 아까 말한 진실과도 연결된다. 그들의 눈이 닿은 곳을 따라가는 일은 즐겁다. 내가 그린 방랑자(눈이 비어 있고 이빨이 있는 외계인의 형상)는 정면을 응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눈이 멀었기 때문에 무얼 보는지는 알 길이 없다.
화려한 색감은 당신 그림에서 압도되는 영역이다. 안드레 부처가 생각하는 색깔의 힘이란 무엇이며, 색이 관객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여기나?
캔버스 위에는 오직 컬러뿐이다. 다만 홀로 있지 않고 다른 색과의 관계에서 의미를 지닌다. 다양한 컬러가 섞여 그림이 된다. 컬러가 풍부할수록 좋은 그림이 된다. 최대한 다양한 컬러를 활용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색과 색 간의 관계가 풍부할수록 좋다는 뜻이다. 그 관계가 끊기면 죽은 색이 되고, 죽은 그림이 된다. 그루브와 운율이 사라진다. 심장박동과도 비슷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가 몬드리안이다. 그의 그림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올곧다고 생각하던 선이 사실은 비뚤어져 있다는 걸 깨닫게 될 거다. 선이 천천히 움직이고, 또 춤추는 게 보인다. 몬드리안은 관계 속에 있는 컬러를 활용해 그루브를 만들어내는 거장이었다. 끊임없이 재생되지만, 절대 반복되진 않는 음악. 나 역시 마찬가지다.
맨 처음에 한 이야기와 상충하지만, ‘여인’을 보며 당신 안에 무언가 변한 것은 아닐지 생각했다. 한동안 흑백으로만 된 그림을 그리다가, 갑자기 그녀가 등장하지 않았나?
하나만 정정하겠다. 내 그림은 흑백으로 된 게 아니라, 그렇게 보인 것뿐이다. 모든 스펙트럼을 포괄하는 그림을 그린 것이다. 구성주의적 관점에서 내 그림을 봐선 안 된다. 여인(안드레 부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금발의 여성) 이야기를 했는데, 누구나 마음속에 그런 인물을 품고 있다. 생각의 변화 속에서 어느 순간 그녀가 튀어나왔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항상 내 안에 그녀가 살았다고 생각한다. 단지 내가 그녀를 보여줄 준비가 안 됐을 뿐이다.
당신 그림은 사람을 웃음 짓게 한다. 컬러도 화려하고, 인물에게서 귀여움마저 느껴진다. 그림을 그리며 행복한가? 당신도 자신의 그림을 보며 웃는지도 궁금하다.
전혀.
고갈되는 느낌이 들거나, 그림을 그릴 힘이 없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나?
단 한 번도.
그러면 왜 그림을 그리나?
사실 그림을 많이 그리는 편은 아니다. 그림을 그리며 보내는 시간을 줄이고 있다. 나는 스튜디오에서 8시간씩 머물며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다. 거실에서 잠시 그림을 그리다가 숲과 강, 호수를 보러 떠난다. 쓰레기를 주우러 나가기도 하고, 시를 쓰기도 하고, 아이들이 먹을 샌드위치를 만들기도 한다. 어느 일요일, 1시간 정도 시간이 남으면 그림을 그린다.
다음 생이 존재한다면, 그때도 그림을 그릴 것인가?
다음 생이란 존재한다. 하지만 다음 생에도 그림을 그릴 생각은 없다. 부활, 환생에 대한 이론은 반복에 관한 것이 아니다. 삶이라는 형식만 반복될 뿐, 모두 다른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게 될 것이다. 다음 생에는 산만 타면서 살지도 모른다. 아니면 프레첼을 만들 거다. 프레첼은 뫼비우스의 띠를 닮았으니까. (VK)
- 사진
- 이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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