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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어서 고맙습니다

2024.02.17

by 김나랑

    여성이어서 고맙습니다

    여성을 존중하고 찬양하고 지지해온 〈보그〉가 그 마음을 봄 마당에 푼다. ‘보그 리더: 2024 우먼 나우’는 경계를 허물고 도전해온 여성, 우리가 좋아하고 닮고 싶은 여성, 존재만으로도 신뢰를 주는 여성들이 둘러앉아 이야기 나누고 연대하는 행사다. 당신을 위한 자리기도 하다.

    정희승, 무제, 2017,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70×50cm, Edition of 5 + 2AP
    정희승, 무제 #03 ‘Rose is a rose is a rose’ 시리즈, 2016,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08×78cm, Edition of 5 + 2AP
    정희승, 무제 #07 ‘Rose is a rose is a rose’ 시리즈, 2016,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08×78cm, Edition of 5 + 2AP

    “여자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1998년 3월 8일, 선생님이 정문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장미 한 송이씩을 나눠주며 이렇게 얘기했다. 난 어색하게 장미를 받아 들곤 “발렌타인데이는 지났어요, 로즈데이는 5월이라고요”라며 키득거렸다. 선생님이 사비를 들여 산 그 장미 덕분에 ‘국제 여성의 날’을 처음 알았다. 1908년 열악한 작업장에서 화재로 숨진 여성을 기리며 궐기한 이래, 여성들이 근로 여건 개선과 참정권을 요구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 당연한 권리를 상징하는 것이 빵과 장미였다. 유엔은 1977년, 3월 8일을 ‘국제 여성의 날’로 정했고, 여성의 사회·경제·문화 업적을 기념하면서 여성 평등을 위한 행동을 촉구하고 있다.

    올해 국제 여성의 날 표어는 ‘Inspire Inclusion’이다. ‘포용성에 영감을 불어넣으라’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내가 장미꽃을 받은 1998년, 처음으로 이메일 아이디를 만들었다. 갑자기 열린 인터넷 시대로 세계화가 될 거란 희망찬 문구가 쏟아졌다. 당시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린 실시간 소통의 시대를 살아간다. 하지만 이권과 가치관으로 결집한 그룹은 늘고 폐쇄성은 더 짙어졌다. 지금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소통하고 싶은 사람과만 소통하고, 나와 다른 의견에는 쉽게 비난과 가짜 뉴스를 쏟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기후변화, 전쟁, 에너지 고갈처럼 인류가 직면한 공통된 위기에 우린 통합되기보다 이를 회피하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사는 그룹에서 그 두려움을 잊고 싶어 한다. 이 고립성은 점점 강해져 나와 조금이라도 다른 것엔 곁을 내주지 않는다. ‘포용성’이 시급하다는 것은 지금 나만 봐도 그렇다. 나와 생각이 비슷한 콘텐츠를 소비하고 비슷한 사람들 속에서만 안정감을 느낀다. 포용성의 부재로 나와 친구, 선배, 어머니가 고충을 겪어왔음에도 말이다.

    이런 시대에 <보그>의 역할은 무엇일까. 한국에서는 1996년 창간 이래 <보그>는 여성을 존중하고 찬양하고 지지해왔다. 그들을 위해 또 한 번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간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서로를 포용하고 연대할 수 있음을 확인하는 자리를 만들자! ‘보그 리더(VOGUE LEADERS)’는 그런 고심으로 시작한 연례행사다. 첫 번째 주제는 ‘우먼 나우(WOMAN NOW)’다. 지금 우리, 당신에게 건네는 안부이자 초대장이다. 잘 지내고 있는지 묻고 느슨하지만 단단한 연대에 함께해달라는. ‘보그 리더: 2024 우먼 나우’는 3월에 열린다. 시기에 고민이 많았다. 패션 잡지가 전통적으로 3월호에 그해의 패션 포문을 강력히 열어오기도 했고, 추운 과거를 보내고 꽃 피는 봄이 그대 앞에 있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마침 그달에는 국제 여성의 날이라는, 우리 선배들이 투쟁해 일궈낸 역사도 자리했다.

    ‘보그 리더: 2024 우먼 나우’의 첫 번째 프로젝트는 동시대를 대표하는 여성 24인의 3월호 커버다. 매호가 그렇지만 특히 이번엔 어떤 여성을 커버에 내세울지 의견이 분분했다. 경계를 허물고 도전해온 여성, 사람들이 좋아하고 닮고 싶은 여성, 존재만으로도 신뢰를 주는 여성 등을 넘어 전제 조건은 이것이다. 모든 여성이 다 소중하며 <보그> 커버에 등장할 수 있다. 26년 전 한 학생이 여성으로 태어나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장미꽃을 받았듯이, <보그> 커버의 한 자리는 여전히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당신 몫이다. 나머지 커버는 당신처럼 자기 자리에서 목소리를 내며 ‘존재’하려고 힘쓰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배우, 뮤지션, 예술가, 스포츠인 등 분야는 다양하다. 이들은 가장 자기다운 혹은 색다른 모습으로 <보그> 커버와 지면에 등장한다. 그리고 진실한 언어(인터뷰)로 공감과 영감을 건넨다.

    무엇보다 ‘보그 리더: 2024 우먼 나우’의 가치는 서로 직접 만나 같은 공기를 호흡하고 온도를 느끼는 것이다. 3월 28일부터 30일까지 사흘 동안 휘겸재라는 한옥 공간에서 직접 교류한다. 이 자리에는 우리가 신뢰하고 궁금해하는 여성 6인이 연사로 등장해 함께 이야기 나눈다.

    이곳을 선택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마당’이었다. 마당의 어원은 맏+앙으로, 맏은 으뜸이란 뜻이고 앙은 장소를 일컫는 접미사다. 즉 마당이란 으뜸인 공간이다. 마당은 내부도 외부도 아니다. 내외부를 이어주는 절충의 세계다. 대문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펼쳐지는 마당에서 내외부 사람들이 만나고 일하고 잔치를 벌였다. 이전에는 집 안에 행랑마당, 사랑마당, 안마당, 샛마당, 중마당 등 여러 개의 마당이 있었다. 여성은 주로 안채나 안마당, 가사 노동 공간에 주로 머물러야 했다. <보그>는 여성들이 절충의 공간인 마당 한가운데 모여, 목소리가 담장을 뛰어넘는 잔치를 벌이고 싶었다.

    사흘간의 잔치에는 연사들과의 대화와 더불어 여성 현대미술 작가 9인의 전시도 열린다. 직접적으로 여권신장을 외치는 작품이 아니다. 우리가 사회를 살아가면서 겪는 갖가지 경험과 피치 못한 선택이 피부에 새겨졌듯이, 작가들이 치열하게 고민해 만든 작품에는 그 개인이 녹아 있을 수밖에 없다. 내 어머니의 삶, 친구의 삶이 그렇듯이, 이들 작품을 통해 공감하고 연대할 거라 믿는다. 1930년대부터 1980년대생까지 여러 연령대의 여성 작가들이 조각, 회화, 사진, 설치미술, 가구공예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으로 참여한다.

    우리는 각자의 길을 걸어간다. 결국 나만이 다음 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사흘간의 만남에서, 그리고 미처 오지 못하더라도 <보그>가 지면에 담은 마음을 통해 일종의 추진력을 얻길 바란다. 당신이 가는 길에 다른 여성들도 함께하고 있음을. 그리고 ‘보그 리더: 2024 우먼 나우’에서 만나는 누군가에겐 용기 내 이 말을 건넬지도 모른다. “여성으로 태어나줘서 고맙습니다.” (VK)

    사진
    정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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