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스, 댄스, 댄스!
“그러니까 춤을 추는 수밖에 없는 거야. 그것도 남보다 멋지게, 다들 감탄할 만큼 능숙하게.” ─ Haruki Murakami <Dance, Dance, Dance>
잘 연출한 무브먼트는 패션쇼나 홍보 캠페인을 오랫동안 회자되는 바이럴 이벤트로 만든다. 이번 시즌 대규모 패션쇼 준비 작업이 한창인 무브먼트 디렉터를 〈보그 비즈니스〉가 만났다
지난 파리 패션 위크의 어느 밤에 열린 뮈글러 패션쇼에서 모나 투가드, 프레셔스 리, 이리나 샤크 같은 모델들은 독특한 방식으로 런웨이를 활보하며 베뉴 위를 붕붕거리며 날아다니는 드론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해 보였다. 그러다 아멜리아 그레이가 뛰어 들어와 커다란 커튼을 당겨 내리자, 그 뒤로 모델 조안 스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곧이어 떠오르는 스타 콜린 존스가 또 다른 커튼 앞에서 나른한 포즈를 취하는 동안 커튼이 떨어져 내리자 자욱한 연기가 굽이치며 피어올랐다. 관중은 환호했다. 이후 마지막 커튼이 떨어져 내리고 마침내 무대 전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무가 에릭 크리스티슨(Eric Christison)은 불과 며칠 만에 이 무대 연출을 완성해야 했다. “<드라큘라>나 <뱀파이어>, <플래시댄스>처럼 어두운 그림자의 움직임이 등장하는 옛날 영화를 많이 참고하면서 어떤 식으로 무대에 여러 레이어를 두고 모델들을 한 명씩 등장시킬지 고민했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케이시 캐드월라더(Casey Cadwallader)가 이번 시즌 표현하려고 했던 어둡고 불온한 뮈글러만의 코드를 압축해서 보여주고 싶었어요.” 크리스티슨의 말이다.
크리스티슨은 패션계에서 점차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아가는 새로운 세대의 연출가 혹은 무브먼트 디렉터 가운데 한 명이다. 이들은 브랜드가 진행하는 다양한 이벤트에서 바이럴한 순간을 만들어주며, 점점 더 많은 쇼와 캠페인에서 활동하느라 워킹이나 포즈를 완벽하게 가다듬을 시간이 없는 모델들이 스포트라이트 아래 서기 전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한다.
폴란드 출신의 무브먼트 디렉터 팻 보구슬라프스키(Pat Boguslawski)는 많은 관심이 집중된 메종 마르지엘라 꾸뛰르 쇼의 연극적인 움직임을 도맡아 작업했는데, 모델들에게 관능적인 런웨이 워킹을 선보이는 각기 다른 캐릭터를 부여함으로써 뇌리에 강하게 남는 초현실적인 느낌을 연출했다. “쇼가 끝난 다음 날 1,000개쯤 되는 메시지를 받았고, 15만 명의 팔로워가 생겼어요. 그리고 한 달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제게 다가와서 축하한다고 해요.” 보구슬라프스키가 말했다. 그는 무브먼트 디렉터가 수행하는 역할의 중요성이 패션계에서 점차 알려지는 단계라고 덧붙였다. “제가 이 일을 처음 시작한 2015년에는 상황이 참 어려웠어요. 첫 3년 동안은 ‘참 멋있긴 한데 우리에게 이런 게 꼭 필요할까요?’ 이런 말을 줄곧 들었죠. 하지만 지난 3년간 사람들이 이 일의 중요성을 더 잘 알게 됐어요.”
패션계 무브먼트 디렉션의 선구자는 안무가이자 댄서 스티븐 갤러웨이(Stephen Galloway)다. 그는 이 일이 하나의 직업으로 자리 잡기도 전인 1990년대에 생 로랑과 베르사체 같은 브랜드의 캠페인을 연출하고 런웨이 쇼 제작에 참여했다(그는 현재 마일 리 사이러스와 함께 일하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의 댄서들이 더 넓은 범위의 패션쇼와 캠페인 안무가로 전향한 지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이들은 쇼의 전반적인 연출과 준비, 모델이 런웨이로 걸어 나갔다가 돌아오는 독특한 방식의 기획을 통해 경쟁이 심한 쇼 시즌 동안, 그리고 어느 때보다 디자이너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 혈안이 된 지금, 브랜드가 주목받을 수 있게 돕는다.
퍼포먼스로 주목받은 마르지엘라 쇼처럼 퍼포먼스만 연출하는 것은 아니다. 보구슬라 프스키는 밀라노에서 열린 피터 호킹스의 두 번째 톰 포드 쇼도 맡아서 작업했는데, 거기서는 모델들에게 에너지를 불어넣으며 그들이 템포를 완벽하게 맞추는 데 중점을 뒀다. “움직임을 통해 브랜드에 딱 맞는 언어를 만들려고 해요. 결국 패션쇼에서는 옷이 주인공이고 어떻게 그 옷을 매력적으로 보여주느냐가 중요하니까요. 그래서 인물의 움직임에 따라 옷이 어떻게 움직일지도 고려하죠.” 보구슬라프스키의 말이다.
라이언 샤펠(Ryan Chappell)은 처음에는 댄서 겸 안무가로 경력을 시작했지만 셀린느의 피비 파일로 밑에서 얼마간 디자인 일을 한 뒤부터 무브먼트 디렉션의 길로 들어섰다. 이번 시즌 그는 런던에서 노울스(KNWLS)의 쇼를 작업했으며, 뒤이어 파리로 건너가 알렉산더 맥퀸과 마린 세르 쇼를 연출했다. 월요일에 열린 마린 세르의 카페 드 세르(Café de Serre) 쇼의 키워드는 일상생활이었다(모델들이 물병이나 피자 상자, 식물 같은 소품을 들고 등장했다). 샤펠은 모델들에게 일반적인 런웨이 쇼에서 볼 수 있는 딱딱한 워킹을 하는 대신 긴장을 풀고, 관중이나 마주 오는 모델들과 시선을 맞추며 자연스럽게 걸으라고 주문했다. “요즘은 모델들의 태도, 자세, 워킹을 포함해 쇼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잡아주는 일이 주가 됐어요. 우리는 꿈과 환상을 팔기 때문에 그 꿈과 환상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죠.”
크리스티슨은 뮈글러 외에도 시몬 로샤, 장 폴 고티에×시몬 로샤 꾸뛰르, 코페르니, 바퀘라 쇼의 연출을 담당했다. 그러는 와중에 로마로 넘어가 향수 광고를 연출하기도 했다. 무브먼트 디렉션이 점차 알려지고 있는 지금 그는 “역대 최고로 바쁘다”며 지난 월요일에 있었던 바퀘라 리허설 도중 잠시 짬을 내 말을 전했다. “1월부터 쭉 그런 상태예요.” 패션쇼가 소셜 미디어 콘텐츠의 요소, 더 나아가 실시간 방송의 대상으로 진화함에 따라 이런 ‘무브먼트’는 점차 화제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현재 수많은 패션 관련 홍보 자료가 소셜 미디어에 노출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으며, 특히 관련 영상을 퍼뜨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데이즈드>의 패션 부문 편집장 엠마 데이비슨(Emma Davidson) 이 말했다. “무브먼트는 디자이너로 하여금 판타지를 만들어낼 수 있게 해줍니다. 좀 더 가볍게 말하자면 그것을 통해 바이럴한 순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죠. 모델 캐스팅이나 관중석 맨 앞줄에 앉을 게스트 섭외 혹은 코페르니처럼 컬렉션의 독창성을 통해서도 입소문이 날 수 있지만, 런웨이에서의 특별한 무브먼트를 통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죠. 판매량 증가와 브랜드 인지도 향상이라는 효과는 같으니까요.”
“요즘은 실시간으로 너무 많은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고 있어요. 쇼 영상을 업로드하고 몇 초 내로 소셜 미디어 사용자들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면 알고리즘에서 제외되는 건 시간문제죠. 유행을 타지 못하고 기억에 남지 못하면 가망이 없어요. 사람들이 보고 싶게 만들고 흐름에 올라타게 만들어야 해요.” 크리스티슨의 말이다.
‘무브먼트’는 소셜 미디어에서 사람들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밈과 튜토리얼이라는 후광 효과를 일으켜 온라인 커뮤니티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사람들은 보구슬라프스키의 연출로 마르지엘라 쇼에서 선보인 레온 데임(Leon Dame)의 공격적인 워킹으로 수백 개 의 밈을 만들었어요. 2019년 바퀘라가 공격적인 워킹을 처음 보여준 뒤, 바퀘라나 발렌시아가 모델처럼 워킹하는 법에 대한 튜토리얼이 온라인에 우후죽순으로 올라왔죠. 특별한 무브먼트를 통해 패션쇼가 끝난 후에도 계속 화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영리하게 활용하는 브랜드가 점차 늘어나는 추세예요.”
바퀘라 모델들의 화가 난 듯한 거침없는 워킹은 브랜드의 트레이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바퀘라는 2024 F/W 쇼에서 이를 바꿔 사람들이 옷을 더 잘 볼 수 있게 했다. 리허설에서 크리스티슨은 바퀘라 쇼에 선 적 있는 모델들에게 걷는 속도를 줄이고 어깨를 뒤로 젖히라고 지시했다. 이번 쇼가 돈에 영감을 받은 것이니만큼, 크리스티슨은 관심을 받으려 뉴스 리포터 옆을 지나가는 사람이 나온 바이럴 영상과 1990년대 후반 미국 쇼핑몰에서 열린 패션쇼 영상을 참고해 그런 분위기에 어울리는 무브먼트를 고안했다. 과거에는 패션 화보 촬영에 최대 2주 정도가 걸렸고 브랜드는 1년에 한두 번 정도만 화보를 공개했기에 이를 준비하고 리허설할 시간이 넉넉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고작 며칠 혹은 몇 시간 만에 화보 촬영을 하는 게 일반적인 추세가 되어, 준비의 대부분이 하루 전날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변화한 환경 탓에 모델들이 무브먼트를 완벽하게 준비할 시간은 전보다 훨씬 부족하다. 이렇게 급박해진 상황에서 무브먼트 디렉터의 역할은 아주 중요하다. “캐스팅 디렉터는 모델의 얼굴을 보고 섭외하죠. 워킹할 줄 아는지를 기준으로 선택하는 게 아니라요.” 보구슬라프스키가 말했다. “과거에는 모델 스쿨이 있었지만 이제 에이전시에서 모델들에게 워킹법을 속성으로 가르쳐요.”
샤펠은 션 맥기르(Seán McGirr)의 알렉산더 맥퀸 데뷔 쇼 연출을 맡아 워킹의 타이밍과 에너지를 조율했다. “특히 힐을 신고 워킹을 잘하는 법에 사람들이 잘 모르는 미묘한 부분이 있어요.” 샤펠의 말이다. “골반을 어떻게 써야 하고, 팔은 어느 정도 흔들어야 하는지, 어깨는 어떻게 움직이고, 목을 고정하는 게 좋은지, 시선은 어디에 둬야 하는지 같은 것들이죠. 발은 교차해서 디뎌야 하나? 짝다리를 짚고 서야 하나? 제대로 해낸다면 이런 요소가 티가 나지 않아요. 그게 바로 핵심이죠.”
가끔은 쇼의 메커니즘 자체가 까다로운 경우도 있다. 몇 년 전 크리스티슨은 구찌 쇼를 맡아 작업했다. 입구만 8군데에 150명의 모델이 등장하고 백스테이지까지 있는 대규모 패션쇼였다. “그 많은 입구를 고려해서 동선을 짜야 했어요. 게다가 4개의 런웨이는 공항에 있는 무빙워크 같았죠. 리허설에만 이틀이 걸렸어요.” 보구슬라프스키는 점점 더 많은 브랜드가 무브먼트 디렉션의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마르지엘라 효과’만 원한다고 말한다. “다들 단시간 내에 모든 게 이루어지길 바라죠. 쇼 시작 4시간 전에 불러서 멋진 연출을 해달라는 식이에요. 마르지엘라 쇼는 하루 12~15시간씩 8일간 작업했어요. 아이코닉한 쇼를 만들려면 시간이 걸려요.”
무브먼트 디렉터들은 준비 시작 단계에서부터 창의적인 연출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홍보 캠페인이나 화보 촬영의 준비 과정에 좀 더 일찍 투입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또한 브랜드와 크리에이티브 팀 역시 내부에 제3의 목소리가 함께한다는 사실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분명 극복해야 할 부분이 있어요. 이미 포화 상태인 데다 우선순위와 각자의 역할이 명확하게 규정된 산업에 뛰어들어 활동하는 거니까요. 그 안에서 본인만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 참 흥미로웠어요.” (VK)
-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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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션 에디터
- 신은지
- 글
- Lucy Maguire
- 모델
- 양지연, 정주령(국립현대무용단)
- 헤어
- 최은영
- 메이크업
- 박혜령
- 로케이션
- 이함 캠퍼스
- SPONSORED BY
- DI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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