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 끝나지 않은 이름
누군가의 위로보다 자기혐오에 가까운 자아 성찰을 통해서만 고통으로부터 온전히 탈출할 수 있다는 것. 삶의 지혜를 담은 애니메이션으로 다정한 위로를 건네온 미야자키 하야오가 최근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40년 만에 마주한 충격적인 진실이다.
어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나는 세 살 때부터 지브리 애니메이션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느 날 지루한 일상에 축 늘어져 있던 나와 여동생을 본 어머니가 홀로 씨름 중이던 악보를 잠시 옆으로 치우고(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는 나와 동생을 키우느라 잠시 음악가의 삶을 제쳐두고 있었다) <이웃집 토토로>(1988)의 주제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Hayao Miyazaki) 감독의 작품에서 불어오던 바람, 일상을 특별하게 물들이는 마법 같은 주문이 방 안을 가득 채우는 듯한 신비로운 느낌에 사로잡혔다.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 간 뒤로는 일본에 사시는 할머니가 보내준 VHS 테이프로 미야자키 감독의 영화를 감상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할머니가 보내주신 테이프는 점점 높이 쌓여 거대한 탑을 이뤘다. 영화가 끝나면 나는 항상 ‘멈춤’과 ‘되감기’ 버튼을 눌렀고, 조금만 기다리면 잠든 동생의 뺨처럼 따뜻해진 테이프가 비디오 플레이어 밖으로 ‘탁’ 하는 소리와 함께 튀어나왔다.
이런 추억이 오직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은 특유의 포근한 위안과 안식을 선사하는 ‘컴포트 존’으로서 수많은 이의 곁을 지켜왔다. 그의 작품을 떠올리면 항상 다음과 같은 광경이 떠오른다. 드넓게 펼쳐진 푸른 잔디밭, 귀여운 인물들이 마룻바닥을 조심스럽지만 경쾌하게 오가는 소리, 온기가 느껴지는 라멘과 죽, 반숙 달걀을 살포시 얹은 토스트 등 군침 도는 음식에서 엿보이는 정교한 디테일까지, 하야오가 쌓아 올린 세계에서는 곳곳에서 푸근한 위로가 배어난다. 또한 그의 작품에서는 언제나 비밀스러운 공간이 갑작스럽게 등장하곤 하는데, 대개 푹신한 쿠션(<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이나 부적(<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 손때 묻은 책(<귀를 기울이면>(1995)) 같은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물론 하야오의 작품에서 우리가 느낀 따뜻한 위로는 그런 공간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길길이 날뛰는 벌레를 달래거나, 늑대의 상처에서 주저 없이 피를 빨아내거나, 우는 아이에게 젖꼭지를 가져다주는 모습으로 극 중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온갖 캐릭터 역시 존재만으로 우리에게 따스한 위로를 건네곤 했다.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보살피는 일의 연속임을 설파하려는 듯 그들은 언제나 상냥하면서도 강단 있는 모습으로 우리의 마음을 든든하게 했다. 하야오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느껴지는 이런 일본 특유의 삶의 규범을 일본에서는 ‘도모니 이키루(共に生きる)’라고 일컫는데 이는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하야오의 작품에서 행복의 비결로 자주 암시되어왔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가 품은 핵심 가치인 ‘위로’는 현실에서는 이를 행하는 주체의 성별에 따라 달리 평가받는다. 이를테면 남성의 기사도 정신은 널리 추앙받는 반면, 여성의 ‘보살핌’은 티가 잘 나지도 않을뿐더러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기 일쑤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런 기존 인식을 즐겨 전복한다. 하야오의 영화 속에서 남성 캐릭터들은 자신의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보살피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로써 ‘보살핌’의 가치에 가정의 영역을 넘어서는 특별한 사회적 의미가 더해진다. 위로는 무한정 퍼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거기에는 대가가 따른다. 미야자키 하야오 역시 자신의 작품을 통해 위로란 희생을 감수하고 은혜를 베푸는 일임을 역설한다. <이웃집 토토로>를 떠올려보라. 갑작스러운 비에 머뭇거리는 두 자매에게 우산을 건네고 후다닥 달아난 소년은 퍼붓는 비에 온몸이 흠뻑 젖을 수밖에 없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의 공주는 독가스가 퍼진 숲에 들어서길 두려워하는 동료를 안심시키기 위해 특수 마스크를 벗어준다. 그러면서 의연한 미소를 지으며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지만, 타인의 시선이 자신을 벗어나자 남몰래 숨을 헐떡인다. 이처럼 누군가를 위로하려면 무언가를 희생해야만 한다.
몇 년 전 하야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적 있다. “사람들에게 위안을 전하고 우리 마음에 난 구멍 혹은 일상의 빈틈을 메운다는 사명을 갖고 영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1998년 진행한 어느 인터뷰에서는 완전히 다른 뉘앙스의 이야기를 건넸다. “어린이들은 제 영화를 50번씩 돌려 볼 게 아니라, 한 번 봤으면 나머지 49번을 볼 시간에 다른 걸 해야 해요. <모노노케 히메>를 49번 돌려 보는 동안 살면서 정말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게 될 테니까요. 그건 언젠가 되찾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아이들은 물론 부모들도 모르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최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2023)는 불길한 기운 속에서 위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장면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초토화된 도쿄, ‘마히토’라는 이름의 소년이 불타오르는 병원으로 허겁지겁 달려가지만 끝내 어머니는 죽음을 맞이한다. 곧바로 장면을 전환하는 영화는 그로부터 몇 년 후, 시골에 있는 저택으로 피란을 간 마히토를 비춘다. 예의를 과도하게 차린 딱딱한 모습으로 새어머니를 마주하는 마히토. 새어머니는 다름 아닌 마히토의 이모로, 벌써 배 속에 곧 태어날 아이까지 품고 있다. 깊은 상실감을 끌어안은 채 마히토는 속마음을 바득바득 감추고 살아간다. 이모와 재혼했을 뿐 아니라 군납용 전투기 공장을 운영하며 전쟁을 옹호하는 아버지처럼, 여전히 죽은 어머니 꿈을 꾸며 슬픔과 분노에 갇혀 지내는 자신과 달리 다른 사람들은 비극을 뒤로한 채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날 마히토는 하굣길에 돌멩이를 집어 들고 머리를 세게 쳐서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꾸미는 이상행동을 보인다. 피가 철철 흐르는 채로 집에 도착한 마히토가 밀려오는 아픔에 지브리 작품 특유의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지만 그 마음을 온전히 치유해주는 이는 없다.
지난 3월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 애니메이션 상을 수상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도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 전반에서 두드러지는 특정한 패턴이 눈에 띈다. 부모의 죽음 혹은 병환으로 하루아침에 인생이 바뀌어버린 어린이, 그리고 현자 같은 뉘앙스를 풍기며 난데없이 등장하는 초자연적 존재 등이 그렇다. 이 영화에서는 마히토가 사는 저택에 나타나 그에게 말을 거는 거대한 왜가리가 바로 그런 존재다. 그러나 하야오 감독의 다른 작품 주인공들과 달리 마히토는 누군가의 보살핌에도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는다. 어머니를 잃었다는 상실감에 깊이 잠식된 그는 어떤 위로에도 마음을 열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을 극진히 간호하는 나이 많은 하녀를 이유 없이 노려보기까지 한다. 그러다 수상한 왜가리가 다시 등장해 마히토에게 어머니가 아직 살아 있다고 말하며 외딴곳에 자리한 비밀스러운 탑으로 이끄는 순간, 우리는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펼쳐질 거라는 것을,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법이 비로소 시작될 거라는 것을 예감하게 된다.
이제까지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려낸 환상적인 세계를 떠올려보자. 그곳은 주인공에겐 배움의 터전이자 남몰래 방황하던 소년·소녀들을 따뜻한 보살핌의 세계로 인도하는 장소였다. 정교하게 쌓아 올린 비밀스러운 왕국에서 어린이들은 이방인 혹은 외부인의 신분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으며 공동체의 일원으로 성장한다. 대개 요리나 청소 등의 소일거리를 떠맡게 되는데 이때 ‘츤데레’ 같은 연장자가 일을 감독하며 새로운 삶을 이끌어주는 경우도 많다. <마녀 배달부 키키>(1989)의 임신한 제빵사,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온천장 종업원 등 비슷한 역할로 등장하는 언니 혹은 누나들은 가장 먼저 주인공의 성실한 근무 태도에 감명받는 사람들이자 주인공의 안위를 처음으로 따뜻하게 걱정해주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느껴지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교훈적인 메시지가 있다면 바로 타인의 보살핌과 위로를 받을 만한 사람이 되려면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것.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서 타인의 보살핌과 위로를 고마워할 줄 모르는 귀족이나 관료, 버릇없이 자란 청소년은 동정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낄 수 없도록 묘사된다.) 즉 지브리 스튜디오가 꿈꿔온 진정한 판타지는 움직이는 성이나 말하는 짐승 따위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위로를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당신도 친절의 수혜자가 된다’는 믿음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돌멩이로 자기 머리를 내려치는 소년보다 더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펼쳐진 초현실적 세상에서 타인의 위로는 소년이 지닌 마음의 벽을 허물지 못하고 허공으로 흩어진다. 엄마가 살아 있다는 왜가리의 말에 혹한 마히토가 비밀스러운 탑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이야기는 마히토의 꿈의 논리를 따라 전개되기 시작하는데, 그곳에서 목격하게 되는 모든 환상은 마히토의 고립감만 키울 뿐이다. 이어지는 여정에서 알고 보니 왜가리는 왜가리 탈을 쓴 키 작은 이상한 남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마히토는 ‘키리코’라는 낯선 여인을 마주하게 된다. 키리코는 난폭한 펠리컨 떼로부터 마히토를 구해주고, 그에게 물고기 껍질을 벗겨 손질하는 법도 알려준다. 또한 하늘에 떠다니는 마시멜로를 닮은 덩어리로, 앞으로 현실 세계에서 태어나게 될 영혼을 상징하는 한 무리의 ‘와라와라’에게 손질하고 남은 물고기 내장을 함께 먹이기도 한다. 마히토 역시 갑작스럽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내긴 하지만 이곳엔 그가 새롭게 합류할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마히토는 새 친구나 가족을 얻을 수 없고, 그가 일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끈질기게 신경 써주는 이도 나타나지 않는다. 어쨌거나 마히토는 맡은 일을 훌륭하게 해내며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다.
그러다 영화의 어느 시점에 눈에 띄는 이 수상한 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어쩐지 ‘마히토스러운’ 점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그러고 보니 키리코의 머리에도 마히토와 똑같은 상처가 있지 않은가! 자꾸만 등장하는 새 떼 역시 어쩐지 마히토만 기다리며 그의 걸음에 발을 맞춰 움직이는 듯 보인다. 수많은 잉꼬, 펠리컨, 왜가리들이 입을 모아 다음과 같은 말을 기계처럼 내뱉는 것 역시 의미심장하다. “와주시길 바라겠습니다”라든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또는 “자리해주시기 바랍니다” 등등. 그러나 의문은 쉽사리 해소되지 않고 우린 여전히 낯선 세계에서 느끼는 답답함 속에 갇혀 있을 뿐이다. 마히토도 마찬가지다. 이곳에서는 새로운 자아를 표출하거나 삶이 뒤바뀔 여지는 전혀 없어 보인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마히토의 캐릭터는 한결같이 일맥상통한다. 구원의 동아줄은 내려올 듯 내려오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나는 또 하나의 사실을 깨닫게 됐다.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초기 작품에 등장하던 멱따는 멧돼지 괴물, 요상한 덩어리, 거대한 곤충 같은 괴생물체는 등장인물에게 위로를 건네기 위한 존재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주인공이 겪는 성장 서사의 중요한 일부이며, 여정이 길어질수록 낯선 생물체에서 점점 친근한 ‘친구’가 되어갔다. 그리고 새로운 친구들과 합심하며 발동하던 소년·소녀들의 이타적인 마음씨와 위로는 작품 전반에 존재하는 뿌리 깊은 분열을 해소하는 기폭제 역할로 폭발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다르다. 이 영화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지금껏 설파해온 철학의 한계를 드러낸다. 수상한 탑에 당도한 마히토가 어떤 보살핌은 곪아터진 상처에 반창고를 붙이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처럼 말이다. 죽음을 앞둔 한 펠리컨이 마히토에게 탑은 사실 구원이 아니라 감옥이며, 다른 펠리컨들 또한 그곳을 탈출하려다 실패한 뒤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와라와라를 잡아먹으며 살게 됐다는 비밀을 들려준다. 마히토와 굶어 죽어가는 펠리컨은 서로를 온전히 돕거나 위로할 수 없다. 펠리컨은 살아남기 위해 사냥을 계속해야 하며 마히토는 다른 구원의 길을 찾아나서야 한다.
이후 마히토는 불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데다가 누군가의 보살핌 따위는 전혀 필요치 않아 보이는 ‘히미’라는 소녀도 만나게 된다. 둘은 힘을 합쳐 탑에 갇히게 된 마히토의 새어머니를 구하기도 하는데 이에 대한 새어머니의 반응이 사뭇 충격적이다. 출산이 임박한 그녀가 마히토를 증오한다고 소리치며 극도로 흥분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이에 대한 마히토의 반응 역시 충격적이긴 마찬가지다. 현실에서 새어머니의 따스한 손길을 줄곧 거부해온 마히토가 새어머니를 위로하며 처음으로 그녀를 ‘어머니’라 부른 것이다. 누군가의 위로 없이 마히토는 스스로 깨달으며 마침내 친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결말부에서 히미 또한 자신이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기로 하는데, 사실 그곳은 과거이며 히미는 마히토의 어머니였음이 밝혀진다. 그런 다음 영화는 다시 마히토의 어머니가 도쿄 공습에 의해 죽음을 앞두고 있던 첫 장면으로 회귀한다. 히미는 오직 죽음을 앞둔 과거로 돌아가는 선택을 통해서만 마히토의 위안이 될 수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처음으로 선언한다. 선의를 베풀더라도 반드시 보상이 따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오히려 선의를 베푼 대가가 더없이 가혹할 때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죽음처럼. 즉 위로는 비극을 딛고 세상을 다시 살아가게 하는 믿음직한 길잡이가 될 수 없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제목은 소년과 삼촌 간의 유대감을 바탕으로 교훈을 주기 위해 지은 요시노 겐자부로의 동명 소설에서 기인한다. 1937년 출간된 이 소설의 주요 장면에서 주인공 소년은 건달들에게 두들겨 맞는 친구들을 보고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나서지 못한다. 그대로 얼어붙은 채 친구들이 맞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이 사건은 소년이 이제껏 스스로에 대해 갖고 있던 자아상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그는 친구들이 자신의 비겁함을 비난할 거란 생각에 깊은 우울감에 빠진다. 희망적인 예감이 느껴지지 않는 요시노 겐자부로의 이 책은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마히토가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 중 하나로 등장하기도 한다. 마히토는 죽은 어머니가 책에 써놓은 글귀, ‘머지않아 어른이 될 마히토에게’라는 문장을 읽으며 엉엉 운다. 이로써 영화가 새롭게 정의하는 성장은 선의를 베푸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임이 드러난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성장을 꿈꾸는 이들에게 지금껏 꾸준히 건네온 위안과 위로가 아니라 다른 방법을 제시한다. 마히토가 탑 꼭대기에 올라갔을 때 위태롭게 쌓인 탑의 설계자인 은퇴한 마법사가 등장해 이야기한다. 기존 세계는 빠르게 무너지고 있고, 자신은 오랫동안 이곳저곳을 떠돌며 더 완벽한 세계를 재건할 수 있을 만큼 악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순수한’ 블록들을 모아뒀다고 말이다. 그러나 마히토는 마법사의 유혹적인 제안을 거절한다. 그리고 머리에 난 상처를 가리키며 자신은 이미 악으로 얼룩진 존재이며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선언한다. 하야오의 다른 작품 속에서 인간과 자연, 남자와 여자, 개인과 사회 등 세상을 구분하는 벽을 허무는 일에 요긴하게 쓰였던 힘, 더불어 살아가는 ‘도모니 이키루’가 오직 자기 자신에게 쓰인 것이다. 마히토는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과 더불어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새로운 세계가 약속하는 위안을 거절한 채 순수한 새 육체를 덧입는 대신 상처투성이인 자신을 마주하며 살기로 한다. 어쩌면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을, 결코 쉽지 않은 그 길을 말이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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