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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17’, 봉준호 영화라서 익숙한 것과 당황스러운 것들

2025.03.03

‘미키 17’, 봉준호 영화라서 익숙한 것과 당황스러운 것들

*이 글에는 <미키 17>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키 17’ 스틸 컷

전 세계에서 한국 관객만큼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이들은 없다. 당연히 언어의 문제다. 한강 작가 덕분에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을 번역 없이 읽게 되었다는 기쁨을 느낀 것과 같은 이유다. 한국 사회 특유의 공기를 감지하는 능력도 그렇다. 한국 관객은 봉준호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 송강호의 옅은 미소와 미세한 손동작에도 디테일한 공기를 감지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전 세계 관객이 함께 봉준호의 영화에 열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에너지’였다. 연쇄살인범을 미치도록 잡고 싶어 하는 사람의 에너지, 괴물로부터 딸을 구해내겠다는 아버지의 에너지, 금쪽같은 아들을 구하려는 엄마의 에너지, 어렵게 쟁취한 자리를 어떻게든 잃지 않으려는 안간힘의 에너지. 봉준호 감독은 이 에너지를 드러낼 때 가장 영화적인 순간을 만들어냈고, 그때의 힘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었다. 또 이 에너지를 끌어올릴 때 불합리한 세상을 바라보는 봉준호 감독의 시선도 드러났다. 그러니 한국 관객이라면 <미키 17>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에너지를 기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당혹스럽다. 봉준호의 시선은 어느 때보다 명확하게 드러나지만,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에너지는 상당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봉준호 감독의 전작을 보아온 관객이라면 <미키 17>에서 여러 작품이 떠오를 것이다. 인체 실험에 쓰이고 재생되는 주인공 미키 반스(로버트 패틴슨)의 운명은 <옥자>의 슈퍼돼지들과 닮았다(개인적으로는 <마더>의 그 여고생이 떠오르기도 했다). 미키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세상의 구조는 <기생충>이 상기된다(<기생충>의 기택은 대만 카스테라 사업을 하다 망했지만, 미키는 마카롱 가게를 하다가 망했다). 그런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미키의 투쟁은 <설국열차>를 연상시킨다. 덕분에 관객은 <미키 17>에서 많은 양의 메시지를 읽고 쓸 수 있다. 자발적으로 익스펜더블이 될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운명, 그런 사람들 덕분에 배를 불리는 자본주의 체제의 기득권층. 여기에 더해 봉준호 감독 자신이 좋아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주제 의식과 감수성까지. 봉준호 감독의 취향 또한 그런 메시지가 드러나는 장면에서 크게 돋보인다. 영화 초반부, 미키 1이 죽음을 반복해 미키 17이 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시퀀스를 보자. 재생되고 있는 미키 옆에는 게임에 열중한 사람들이 있다. 이때 미키 옆에 있던 한 실험자의 발이 케이블에 걸리고, 그 때문에 케이블이 빠지는 장면이 보인다. 이미 해외 관객에게도 ‘삑사리의 미학’으로 알려진 봉준호의 취향인 동시에 원작보다 미키를 더 가혹한 상황에 놓이게 만든 각색이다. 말 그대로 ‘소모품’인 미키를 이들이 존중하며 대했을까 싶은 상상력. 심지어 이들은 미키에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그를 실험에 활용한다. 미키는 단순히 인체 실험에 쓰이는 인간이 아니다. 영화에서 그는 존중받지 않아도 되는 인간이다.

‘미키 17’ 스틸 컷
‘미키 17’ 스틸 컷

그런 미키가 더 이상 익스펜더블로 살지 않겠다는 의지를 갖는 이야기였다면 어땠을까? 봉준호 감독이 전작에서 보여준 에너지도 자연스럽게 함께 들끓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미키 17>은 이 역할을 다른 이에게 맡긴다. 바로 미키 18이다. 18이 일종의 전복을 기도하게 되는 이유는 사실상 그의 성격 때문이다. 17과 달리 다혈질인 18은 개척단원들을 이끄는 마셜 부부(마크 러팔로, 토니 콜렛)가 17을 속이면서 자행한 실험을 알게 된 후 광분해서 총을 든다. 지금까지 17의 입장에서 그가 착취당해온 궤적을 함께한 관객 입장에서는 뜬금없다. 17의 입장처럼 관객에게도 18은 이미 난데없는 등장인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화 후반부, 이들의 결정적인 행동에는 또 다른 목적이 따라붙는다. 행성 원주민 격인 크리퍼들을 지켜야 한다는 목적이다. 인물이 분리되고 목적이 달라지면서 에너지도 옅어진다. 다시 봉준호 감독 전작이 떠오를 것이다. <기생충>의 기택이 칼을 들기까지의 상황에는 ‘홍수’와 ‘냄새’가 일으킨 분노가 있었다. <괴물>에서 가장 모자라 보였던 아빠가 괴물과 맞서기까지의 과정, <마더>에서 엄마가 돌을 들기까지의 과정에도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감정과 에너지가 있었다. 전작을 떠올릴수록 <미키 17>에는 봉준호 감독 영화가 가졌던 가장 강렬한 장점이 보이지 않는다. 당황스럽고 아쉬울 수밖에 없다.

‘미키 17’ 스틸 컷
‘미키 17’ 스틸 컷

물론 <미키 17>이 아쉬운 이유는 어디까지나 이 영화가 봉준호 감독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여러 사정을 고려하려 애쓰게 될 수도 있다. 약 1,700억원이라는 막대한 제작비, 할리우드 시스템, 무엇보다 한국뿐 아니라 세상의 기대치를 높여놓은 영화감독의 숙명 등등. 여기에 더해 봉준호 감독의 취향과 메시지를 발견하다 보면 <미키 17>을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감안한다고 해서 <미키 17>이 더 매력적인 영화가 되는 건 아니다. 그의 영화를 가장 온전히 즐겨온 한국 관객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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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17'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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