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하우스가 밀라노 디자인 위크를 즐기는 법
패션 하우스가 밀라노 디자인 위크를 즐기는 방법은? 브랜드의 정체성과 장인 정신을 직접 보여주거나, 오브제 디자이너와 협업하거나, 이탈리아 문화에 대한 헌사로 카페를 열거나. 무엇이든 패셔너블하다.
HERMÈS

에르메스 전시장에 들어서면 늘 ‘콰이어트 럭셔리’가 떠오른다. 다들 어떻게 하면 시선을 사로잡을까 여러 장치를 덧대는 가운데 에르메스는 가장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며, 에르메스기에 가능한 간결하면서도 힘 있는 시노그래피를 구성한다. 에르메스 홈 유니버스 아티스틱 디렉터 샤를로트 마코 페렐만(Charlotte Macaux Perelman)이 설계한 공간은 그야말로 미니멀하다. 하얀 전시대 위에 에르메스 홈 컬렉션이 놓여 있다. 전시대는 섬처럼 흩뿌려진 것 같지만 섬세한 계산 아래 좌표처럼 배치했을 것이다. 홀 중앙에는 영국 출신 디자이너 듀오 에드워드 바버(Edward Barber)와 제이 오스거비(Jay Osgerby)가 디자인한 스타디움 데르메스(Stadium d’Hermès) 테이블이 자리한다. 옆에는 캐시미어와 리넨이 어우러진 플래드가 폭포수처럼 내려왔다. 개인적으로 팔라디온 데르메스(Palladion d’Hermès) 화병에 반했다. 팔라디온은 도시를 수호하는 그리스 여신 팔라스 아테나의 조각상을 뜻한다. 말총과 리저드 가죽으로 감싸 에르메스 투페(Toupet) 백이 연상된다. 지금도 눈에 아른거린다.
LORO PIANA


로로피아나의 프로젝트를 보니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 떠오른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로로피아나가 내건 24개 플래드는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자수, 아플리케, 니들 펀칭, 패치워크, 스크린 프린팅 등 각기 다른 기법과 구조, 패턴으로 완성한 플래드의 디테일에 점점 더 빠져든다. 소재 또한 로로피아나의 저력을 보여준다. 비쿠냐(Vicuña), 베이비 캐시미어(Baby Cashmere), 캐시미어(Cashmere), 더 기프트 오브 킹스®(The Gift of Kings®), 로로피아나 로얄 라이트니스®(Loro Piana Royal Lightness®) 등 메종을 대표하는 소재를 비롯해 리넨, 캐시퍼(Cashfur), 위시® 울(Wish® Wool), 페코라 네라® 울(Pecora Nera® Wool) 등 다양하다. 1980년대 중반, 메종에서 스카프와 함께 소개된 플래드는 초기부터 소재와 직조 기술을 정교하게 탐구해왔다. 이처럼 인테리어를 탐구하는 프로젝트 ‘Studies’의 첫 번째 장으로 전시 <Chapter I: On the Plaid>가 기획된 것이다. 처음엔 플래드가 유화 작품인 줄 알았으니 그 탐구는 성공했다.
DIOR


디올이 마련한 빛의 정원에 들어가자 감탄사부터 나왔다. 한 겹씩 손수 만들어낸 장미가 실내를 꽉 채우고, 그 안에 디올 메종과 노에 뒤쇼푸르 로랑스(Noé Duchaufour-Lawrance)가 협업한 코롤(Corolle) 램프가 불을 밝히고 있다. 이 램프의 최대 장점은 우아하고 고전적인 문양(까나쥬 패턴도 있다)의 빛 그림자다. 노에 뒤쇼푸르 로랑스는 이렇게 얘기했다. “빛의 투영은 그 현상을 만들어내는 소재 작업만큼 중요합니다. 그 자체로 하나의 고유한 언어로 확장되며, 실체가 없는 특성이 오히려 실체가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빛의 반영을 통해 빛은 결국 하나의 실체가 됩니다.” 이 램프는 크리스챤 디올의 아이코닉한 뉴 룩에 대한 오마주로, 특히 코롤 스커트의 시그니처 라인을 다양한 전통 장인 기술로 구현했다. 베네치아 무라노 유리 장인들의 전통 기법에 따라 입으로 불어 만들었으며, 교토 장인들이 마다케 대나무로 제작한 작품도 있다. 당신의 침실엔 어떤 빛을 들이고 싶은가.
BOTTEGA VENETA

보테가 베네타는 한국 아티스트 이광호와 세 번째 파트너십을 선보였다. 작가는 말총, 구리 선, 나무, 금속 등의 여러 재료를 탐구해왔으며, 한국 공예 기술로 현대적인 형태를 직조해왔다. 그렇기에 소재와 장인 기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보테가 베네타와의 만남은 자연스럽다. 이광호 작가는 몬테벨로 비첸티노에 자리한 보테가 베네타 아틀리에에서 장인들의 가죽공예 노하우를 경험하며 작품을 구상했다. 그렇게 나온 작품 ‘라이트풀(Lightful)’이 밀라노의 산탄드레아(Sant’Andrea) 매장에 설치됐다. 하우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루이스 트로터가 엄선한 블랙과 그린 색조의 보테가 베네타 가죽을 직조해 만든 조형물은 패션과 아트가 수공예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보여준다.
GUCCI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이슈가 된 전시는 아티스틱 디렉터 뎀나가 큐레이션한 <구찌 메모리아(Gucci Memoria)>였다. 산 심플리치아노 수도원(Chiostri di San Simpliciano)에 들어서자 하우스의 상징적인 플로라 모티브에서 영감을 받아 구찌가 재배한 계절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사람들은 이 압도적인 풍경에서부터 이 전시가 한동안 회자될 거라 예감했다. 진짜 하이라이트는 회랑을 따라 걸린 구찌 하우스의 105년 역사를 담은 태피스트리 12점이다. 언뜻 수백 년은 됐을 법한 문화유산처럼 보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찌의 역사적인 순간과 패션 스타일, 주요 인물을 수놓았다. 런던 사보이 호텔에서 보낸 구찌오 구찌의 청년 시절, 피렌체에 문을 연 첫 공방 풍경이 나오고, 재키 1961과 뱀부 1947 핸드백 같은 상징적인 디자인, 톰 포드와 프리다 지아니니, 알레산드로 미켈레, 사바토 데 사르노, 뎀나까지 역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이 등장한다. 구찌 역사에 경의를 표하고 싶을 만큼 웅장하고도 고전적인 태피스트리 연작이었다.
TOD’S




패션 하우스가 오브제 디자인에 바치는 가장 재기 발랄한 헌사였다. 토즈 시그니처인 고미노 로퍼를 이탈리아 디자인 거장들의 상징적인 제품으로 풀어내는 아이디어는 만점을 줄 만하다. 조 콜롬보의 엘다(Elda) 암체어, 가에타노 페셰의 크로스비(Crosby) 체어, 미켈레 데 루키가 멤피스 밀라노를 위해 디자인한 크리스탈(Kristall) 테이블, 그리고 아킬레 & 피에르 자코모 카스틸리오니의 브리온베가 RR226 라디오포노그라포(Brionvega RR226 Radiofonografo)의 디테일을 고미노 로퍼에 입혔다. 역시 디자인의 고향은 이탈리아라는 사실을 재확인했으며, 이미 작고한 디자이너도 많기에 그들의 유산을 되짚으며 경건해졌다. 한편에서는 10여 명의 장인이 토즈 로퍼를 실시간으로 제작했는데, 망치로 가죽을 두들기고 꿰매는 모습이 퍼포먼스 같기도 했다. 다른 어떤 브랜드보다 토즈의 다음 밀라노 디자인 위크 전시가 기대된다.
RALPH LAUREN

래셔널리즘과 클래시시즘이 결합된 아름다운 팔라초 랄프 로렌(Palazzo Ralph Lauren)에 들어서면 멋을 아는 귀족의 집에 초대받은 듯하다. 랄프 로렌은 밀라노 디자인 위크 기간이면 이곳에서 브랜드의 가을 홈 컬렉션을 공개해왔다. 올해는 랄프 로렌 홈 새들브룩(Saddlebrook) 컬렉션과 스털링 스퀘어(Sterling Square) 컬렉션을 선보였다. 새들 브룩 컬렉션으로 연출한 공간은 자연과 가족을 사랑하고 승마를 즐기는 모험가의 집 같았다. 특히 따뜻해 보이는 갖가지 태피스트리의 패브릭에 눈길이 간다. 브루탈리즘과 아르데코 요소를 결합한 오크우드 소재의 비콘 바 캐비닛(Beacon Bar Cabinet)은 모험을 끝낸 후 위스키 한잔을 즐기는 기분을 상상하게 만든다. 스털링 스퀘어 컬렉션으로 연출한 공간은 성공한 코스모폴리탄의 펜트하우스 같다. 영국의 유서 깊은 주석 제조사 잉글리시 퓨터 컴퍼니(English Pewter Company), 스코틀랜드의 전통 울 공장 존스톤스 오브 엘긴(Johnstons of Elgin)과 협업했으며, 전반적으로 모던하고 세련됐다. 무엇이 더 내게 맞을까 가늠했지만, 랄프 로렌은 양립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MIU MIU


미우치아 프라다는 패션을 잘하기 위해선 다양한 미술, 영화, 문학 작품을 섭렵해야 한다고 종종 말해왔다. 이 여성 리더는 2024년부터 미우미우 문학 클럽을 운영해왔다. 자기 목소리를 내온 여성 작가들의 책을 선정하고 낭독, 토론, 강연, 음악을 즐기는 프로그램이다. 미우미우는 이 지적인 프로젝트를 통해 성, 열망 등 여러 담론을 이어가고자 한다. 올해 주제는 ‘Politics of Desire’다. “문학에서 삶에 이르기까지 열망은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이자, 급진적인 저항 행위로 작용한다”고 미우미우는 설명한다. 밀라노의 유서 깊은 문화 공간인 치르콜로 필롤로지코 밀라네세(Circolo Filologico Milanese)에 들어서니 힙스터들은 모두 모인 듯하다. 다른 전시장에 비해 나이가 젊고 그만큼 분위기가 자유롭다. 미우미우가 준비한 공연에서 춤을 추는 이, 소란스러움을 배경음 삼아 독서하는 이, 선정 작가에 관해 진지하게 이야기 나누는 무리도 보였다. 올해는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아니 에르노, 아프리카 문학을 대표하는 아마 아타 아이두가 나섰다. 굵직한 연사들의 강연도 이어졌다.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메건 놀란, 여성주의 사상가이자 작가 레아 멜란드리, 영국의 작가이자 큐레이터 루 스토파드 등이다. 모든 대담과 강연은 이탈리아 문화, 언어, 문학을 연구하는 작가 올가 캄포프레다(Olga Campofreda)와 여성주의 철학자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가 함께 기획했다.
H&M

17세기 바로크 궁전인 팔라초 아체르비(Palazzo Acerbi)에서 열린 에이치앤엠 홈의 전시는 어느 곳보다 대기 줄이 길었다. 짜임새 있게 만든 에코 백 선물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친숙한 이 브랜드가 미국의 유명 인테리어 디자이너 켈리 웨어슬러(Kelly Wearstler)와 어떻게 협업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 참여했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켈리는 프레스코화와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는 앤티크한 방마다 한두 종류의 가구를 선택해 각기 다른 색감과 빛, 그림자로 표현했다. 특히 분리하거나 합칠 수 있는 모듈 소파의 특징을 완벽하게 보여준 방이 인상적이다. 에이치앤엠 홈 디자인 및 크리에이티브 책임자 에벨리나 크라바에브 쇠데르베리(Evelina Kravaev-Söderberg)는 “에이치앤엠 홈이 전 세계에 진출하고 있지만, 이번 이정표를 통해 고객과 디자인 업계 모두에 새로운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고자 한다”고 밝혔다. 기존 캐주얼한 이미지보다 고급스럽게 느껴졌으니 성공한 듯하다. 역시 제품 자체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보이느냐가 관건이다.
MARNI



에스프레소가 절실한 오후, 식전에 가볍게 술 한 잔을 걸치는 아페리티보 시간에는 마르니 카페로 향했다. 마르니와 밀라노의 유명 카페 파스티체리아 쿠키(Pasticceria Cucchi)가 이탈리아인의 사교와 휴식, 영감의 집결지인 카페 문화에 헌사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마르니 CEO 스테파노 로소는 “도시의 진정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상의 의식에서 출발해, 전통과 실험을 결합한 경험을 만들고 싶었다”고 전했다. 이 카페에선 빨강과 초록 물방울무늬의 빈티지한 접시부터, 특별 레시피로 만든 색색의 스프리츠까지 귀엽지 않은 것이 없었다.
JIL SANDER

질 샌더는 전시 주제로 책을 선택했다. <Reference Library-60개의 책, 60개의 시선>이다. 전시는 매거진 <아파르타멘토(Apartamento)>와 질 샌더의 협업으로 기획됐다. 전 세계 작가, 디자이너, 아티스트, 건축가, 영화감독 등이 선정한 책 60권이 홀을 가득 채웠다. 대구 간송미술관의 유물 전시관이 떠올랐다. 어두운 가운데 책 한 권 한 권을 국보급 문화재처럼 조명이 지그시 비추기 때문이다. 밀라노 기반 건축 스튜디오 스튜디오우테(Studioutte)가 디자인했다. 한국에서는 뮤지션 오혁이 이상의 시집을 추천했고, 영화감독 셀린 송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를 골랐다. 당신이라면 어떤 책을 선정할 텐가. VL
- 피처 디렉터
- 김나랑
- 포토
-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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