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색이 일깨운 영감,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적 오브제
영화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어린 시절 강렬한 원색이 눈앞에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그의 예술적 영화 세계를 이루는 마법의 비밀이다. 영감을 얻기 위해 꾸준히 잡지를 탐닉해온 페드로와 그의 팀이, 그만의 영화 세계를 채우는 독보적 미학의 디자인 작품을 되짚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Pedro Almodóvar)는 색을 남다르게 인식합니다. 그가 회색이라 표현하는 것을 저는 파란색으로 보거든요.” 그의 미술감독 안촌 고메스(Antxón Gómez)는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세상을 관찰하고 분석하며 이해하는 그만의 고유한 방식에 대해 존경을 드러냈다. 안촌 고메스는 영화 <아임 소 익사이티드>의 비행기 세트부터 <그녀에게>에 삽입된 단편 속 작아진 남자의 초현실적 세계에 이르기까지 알모도바르의 독특한 세계를 구현해온 동료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역할이 바뀌었다. 이번 화보 촬영은 안촌 고메스가 연출하고, 라만차 출신의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디렉션을 따랐다. 검은 돌로 이루어진 반원에 서달라는 요청을 받는 일처럼 말이다. 그 돌은 3월 20일 스페인에서 개봉한 그의 최신작 <비터 크리스마스>의 일부를 촬영한 화산섬 란사로테의 화산석을 연상시킨다.

촬영 세트 배경은 감독 특유의 잿빛 파란색으로 가득하다. 금방이라도 모든 것이 폭발할 듯 보이는 납빛 하늘 같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소년기인 1960년대 무렵 테크니컬러(Technicolor)에서 영향을 받았어요. 그는 강렬한 원색을 만나면 감정이 생동한다는 것을 배웠죠. 그것이 바로 그의 마법의 비밀이에요.” 페드로 알모도바르와 긴 시간 함께 작업해온 세트 디자이너 카를로타 카사도(Carlota Casado)의 설명이다. 두 사람은 2009년 <브로큰 임브레이스> 촬영 당시 그녀가 인턴으로 들어오면서부터 함께 작업을 시작했다. “그때 막 열여덟 살이 되었고, 미디어 산업에 발을 디딘 시기였어요. 그해 여름, 모두 휴가를 떠나는 동안 저는 바라하스 스튜디오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존재조차 몰랐던 미술부에 배치되었죠. 일과가 끝나면 한구석에 앉아 페드로가 어떻게 일하는지 지켜보곤 했어요. 그와 나눈 첫 대화가 기억나요. 우리는 세고비아의 로스 앙헬레스 데 산 라파엘(Los Ángeles de San Rafael) 촬영장에 있었는데, 그가 ‘화장실이 어디니?’라고 물었죠. 저는 대답조차 할 수 없었어요.”

곧 카를로타 카사도는 ‘패브릭 걸’로 불리게 되었다. “늘 카탈로그 수백 장을 들고 그에게 갔거든요. 저도 그처럼 색깔 덕후예요.” 그녀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색채적 완벽주의를 잘 보여주는 일화를 하나 떠올렸다. “<아임 소 익사이티드> 촬영 중 페드로가 비행기 좌석을 덮을 천으로 이미 생산이 중단된 색상을 골랐어요. 우리는 그가 차이를 못 알아차리길 바라며 알아채기 어려운 다른 옵션을 가져갔죠. 재고가 없다는 걸 모르면 그가 당황할 일도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저를 보더니 ‘이 중에 내가 고른 것은 없잖아’라고 말하더군요. 결국 제가 이탈리아 제조사를 찾아냈고, 페드로를 위해 회사가 그 색상을 특별히 제작해주었어요.”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는 기업이 페드로 알모도바르 영화에 자사 제품 등장을 얼마나 원하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미우치아 프라다까지도 그녀의 1997 컬렉션을 영화 <줄리에타>에 맞춰 다시 제작했죠. 영화 배경이 그해를 배경으로 하거든요.”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자신의 작품에 등장했던 소품을 가지고 카메라 앞에서 장난기 가득한 포즈로 섰다. 영화 <룸 넥스트 도어>에 나온 팬톤(Pantone) 컵, <내가 사는 피부>에 등장했던 알레시(Alessi)의 ‘쥬시 살리프 시트러스 스퀴저’ 같은 것들이다. “이건 우리 집에도 있어요. 마사지기나 요상한 왕관처럼 머리에 써볼 수도 있죠”라고 페드로가 포토그래퍼에게 제안했다. 뒤편에는 그가 직접 가져온 애셔 리프틴(Asher Liftin)의 ‘Studio Window IV(Hot Winter Sun)’ 복제화가 놓여 있다. “정말 사진이 잘 받는 작품이에요.” 그가 그림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안촌 고메스는 “얼마 전 페드로가 미국에서 원작을 구입했는데, 영화 <비터 크리스마스> 속 라울(레오나르도 스바라글리아(Leonardo Sbaraglia) 분)의 집에 맞게 크기를 줄였죠”라고 설명했다. 그는 해당 작품의 서사적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덧붙였다. “이 그림은 창문을 점묘법으로 표현한 작품인데, 영화에서는 회색 콘크리트 벽 위에 배치했어요. 불가능한 공간을 열고자 하는 시도 같은 거였죠.”


카를로타 카사도는 작품 구성을 살펴보며 페드로와 언제 더 가까워졌는지 떠올렸다. “우리는 <페인 앤 글로리> 작업을 하며 더 가까워졌어요. 그의 집에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그건 그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거든요. 가서 소파를 재보거나 쿠션이나 가구 같은 것들을 가져왔죠. 그의 집은 골든 옐로의 ‘알베로(Albero)’ 컬러인데, 그가 아주 좋아해서 자주 사용해요. 감정적이면서 지극히 스페인다운 색이죠. 투우장의 모랫바닥이 떠오르는 색이거든요.” 그녀는 감독의 개인 소장품을 이미 다 꿰고 있다는 듯 그림을 유심히 살피며 말을 이어간다. “그가 가진 예술품의 크기를 전부 알고 있어요. 애셔 리프틴의 작품처럼 소장품을 재현할 때가 많거든요. <페인 앤 글로리>에서는 행방을 알 수 없는 그림도 몇 점 재현했죠. 시그프리도 마르틴 베게(Sigfrido Martín Begué)의 ‘Santa Casilda’나, 그가 갖고 싶어 했지만 결국 놓친 마루하 마요(Maruja Mallo)의 ‘El Racimo de Uvas’ 같은 작품이요.”


그 순간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지오 폰티(Gio Ponti)의 ‘슈퍼레제라(Superleggera) 의자’를 번쩍 들었고, 안촌 고메스가 환호하며 말했다. “보세요, 1957년에 이 모델이 처음 출시됐을 때 광고 속 어린아이와 똑같은 모습이군요. 이 의자는 그의 집에도 있고, 최근 영화에도 등장해요. 지오 폰티라면 그는 언제나 ‘예스’라고 답하거든요.” 안촌 고메스가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언어를 어떻게 체득했는지 이해하려면 약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안촌은 이미 업계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1970년대 바야돌리드에서 공산주의 비정기 간행물 <팬진(Fanzine)>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한 달간 수감 생활을 했고, 이후 도노스티아를 거쳐 바르셀로나로 옮겼다. 광고학을 전공한 뒤 그는 바르셀로나 최초의 디자인 바 ‘지그재그(ZigZag)’를 열었다. “덕분에 1980년 FAD 어워드를 수상했죠.” 이후 현재 운영 중인 클럽 ‘오토 주츠(Otto Zutz)’도 열었다. 1982년에는 마누엘 이보라(Manuel Iborra)와 함께 <3 x 4(Tres por Cuatro)>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1992년에는 비가스 루나(Bigas Luna) 감독의 요청으로 샤론 스톤과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함께한 프레시넷(Freixenet) 광고 촬영을 위해 퀸메리호의 선실을 재현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3년 뒤 그는 영화 제작사 ‘엘 데세오(El Deseo)’로부터 영화 <라이브 플래쉬>에 참여해달라는 전화를 받게 되었다. “제가 디자인 분야 출신이었다는 게 도움이 됐어요.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이전에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에서 바실리(Wassily) 의자나 마리아노 페레르(Mariano Ferrer)의 지라(Gira) 조명을 사용했고, <하이 힐>에서는 에토레 소트사스(Ettore Sottsass)의 칼톤(Carlton) 책장을 선보인 적 있었죠. 하지만 디자인이라는 언어가 그의 영화에 진정으로 반영되기 시작한 건 바로 이때부터였습니다. 제가 그에게 처음 보여준 것은 극 중 외교관의 딸로 나온 프란체스카 네리(Francesca Neri)가 사는 아파트 세트였어요. 그는 세트를 보고 ‘나쁘지 않군’이라고 읊조렸죠.” 두 사람은 하이메 트레세라(Jaime Tresserra)의 가구와 로이히텐(Leuchten) 조명으로 꾸민 그 방을 둘러보며 서로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때로는 시나리오의 필요에 따라 소품을 맞춤 제작해야 했다. “<라이브 플래쉬>를 계기로 알리칸테의 크레비옌테에 있는 한 공방과 협업을 시작했죠. 이곳에서는 카펫을 제작합니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 총격전 이후 하비에르 바르뎀이 카펫 위로 쓰러지는 장면이 있는데, 우리가 디자인한 그 색색의 나선형 카펫을 만들어줬어요. 이곳 장인들은 또 <내가 사는 피부>의 저택에 등장하는 거대한 카펫을 비롯해 <비터 크리스마스>에 나오는 두 점도 제작했습니다.” 또한 안촌은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 어울리는 바르셀로나의 현대적인 아파트와 <그녀에게>에 등장하는 고풍스럽고 전통적인 주택, 그리고 <나쁜 교육> 속 발렌시아의 깨진 도자기 파편을 이용한 외벽 장식 기법 트렌카디스(Trencadís)를 찾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또한 페드로의 머릿속에만 존재할 법한 장소를 찾지 못할 때, 직접 그 공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유압식 타일 바닥, 몰딩, 데다르(Dedar) 원단으로 덮인 맞춤 제작 가구, 까시나(Cassina)에서 출시한 카를로 스카르파(Carlo Scarpa) 소파 특별판 또는 플로렌스 놀(Florence Knoll)이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에서 만든 소파 등을 활용해서 말이다.

가에 아울렌티(Gae Aulenti)의 투어(Tour) 테이블과 피피스트렐로(Pipistrello) 조명, 톨로메오(Tolomeo) 스탠드 조명, 사르가델로스(Sargadelos)의 식기류, 스메그 가전제품도 작품에 활용된다. 이 중 많은 오브제가 그의 작품에 여러 번 등장한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뮤즈처럼 극의 흐름에 따라 매번 다른 색상, 크기, 비중을 지니며 각기 다른 방식으로 활용된다. “영화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는 놀라(Nolla)의 모자이크 바닥과 제 소장품인 빈티지 벽지로 색을 잘게 쪼개 표현했습니다. 새 작품 <비터 크리스마스>를 위해 페드로 감독은 다시 그런 벽지를 요청했지만, 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지금 그의 캐릭터들은 단색 배경에서 더 살아 움직이니까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회색으로 인지하는 파란색처럼 이는 곧 감정이 폭발하기 직전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VL
- 컨트리뷰팅 에디터
- 유승현
- 글
- Toni Torrecillas
- 사진
- Pablo Zamora
- 스타일리스트
- Ana Rojas
- 헤어 & 메이크업
- Miriam Hernández(Uno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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