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터가 된 디자이너, 사바토 데 사르노
헬무트 랭은 조각가가 되었고, 크리스 반 아쉐는 플로리스트와 공예가로 방향을 틀었다. 여기 큐레이터가 된 디자이너를 〈보그〉가 만났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에서 물러난 후의 삶은 일종의 유예 시간과도 같다. 어떤 이들은 우아한 은둔 속으로 사라져 상처를 달랜다. 또 어떤 이들은 가택 연금이나 다름없는 계약상 경업 금지 기간이 끝나기만 기다리며, 패션계가 다시 부를 때까지 자기 존재감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몇몇은 이제 막 산소를 발견한 사람처럼 새로운 에너지를 얻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이 모든 광경이 재미있다는 듯 바라본다. 사바토 데 사르노(Sabato De Sarno)는 나름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구찌에서 짧고도 논란이 많았던 19개월을 보낸 데 사르노는 런웨이의 눈부신 조명에서 시선을 거두고, 관대하고 어쩌면 더 흥미로운 예술과 디자인의 세계로 관심을 옮겼다. 올해 살로네 델 모빌레(Salone del Mobile)에서 그는 이탈리아어로 ‘함께’라는 뜻을 지닌 ‘인시에메(Insieme)’를 통해 다시 대화의 장에 들어섰다. 수공예 뒤에 자리한 지식과 아름다움을 다룬 야심 찬 프로젝트다. 이탈리아 <베니티 페어>와 협업해 만든 이 전시는 패션계에서 일어나는 퇴장과 복귀가 그저 잘 짜인 연출의 일부일 때가 있음을 보여준다. 데 사르노와 마주 앉아 구찌 이후의 삶, 소셜 미디어의 반발, 그의 새 프로젝트, 그리고 그가 왜 지금 레디 투 웨어가 딱히 좋은 상태가 아니라고 여기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구찌 이후 마주한 것은 해방인가요, 공허인가요? 안도감을 많이 느꼈는지, 혹은 방향 감각을 잃은 느낌이 더 컸는지 궁금합니다.
솔직히 구찌에서 나온 뒤 공허함을 느낀 적은 없습니다. 거의 23년 동안 일만 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오히려 시간을 되찾은 느낌이었죠. 다양한 프로젝트를 이어가다 보니 허전할 틈도 없었고요. 그렇게 크고 많은 것을 요구하는 조직을 떠났을 때 처음 든 감정은 안도감이었습니다. 굳이 꼽아야 한다면, 안도감이 맞을 거예요. 나는 관심사와 열정이 많은 사람이고, 그것들은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이전에 해온 일과는 꽤 다른 프로젝트에 몰두했고, 예술과 디자인에 한층 진지하게 접근했습니다. 여행도 많이 했고, 새로운 사람도 많이 만났어요. 어떤 주제에 대해서는 표면적인 관심을 넘어 제대로 파고들 수 있었죠. 마침내 공부할 시간이 생겼고, 흥미로운 것들과 더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구찌 이후의 1년은 새로운 길을 탐색하고, 정말 좋아하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쏟을 기회였습니다.
1년 동안 어떤 프로젝트에 임했나요?
구찌를 떠나고 몇 달 뒤, 6월 프라이드 먼스 기간에 밀라노 LGBTQIA+ 커뮤니티 협회 오르골리오 포르타 베네치아(Orgoglio Porta Venezia)와 협업해 나폴리 출신 감독 카밀라 살바토레(Camilla Salvatore)의 영화 <일 카피토네(Il Capitone)>를 선보였습니다. 당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대화의 장을 조성하는 일이었어요. 사람 사이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고 느꼈죠. 또한 22년 동안 일하며 쌓아온 관계와 경험을 바탕으로 소중한 프로젝트와 사람, 주제가 더 잘 보일 수 있도록 힘을 보탰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나폴리 인피니타(Napoli Infinita)’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나폴리 출신인 덕분에 고향에 관한 책을 만들어달라는 제안을 받아, 나폴리 예술가 35명을 한자리에 모았죠. 다양한 목소리가 어우러지는 다성적인 풍경, 다시 말해 익숙한 고정관념을 넘어서는 나폴리의 초상을 그리고자 했습니다. 이 도시는 종종 뻔한 클리셰 속에서 등장하기 때문에 사진가, 영화감독, 음악가, 시인 등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바라보는 폭넓은 관점을 부각하고 싶었거든요. 그다음에는 살로네 델 모빌레를 위한 ‘인시에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장인 정신과 만드는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췄죠. 겉보기에는 이전에 해온 일과 동떨어져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 경험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년 6월에는 밀라노 현대미술관(PAC)에서 사진가 암브로시아 포르투나(Ambrosia Fortuna)가 참여하는 새로운 전시 <We Were Night, Now We Are Day>가 열립니다. 한 공동체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탐구하는 사진 컬렉션으로, 그들이 전환 과정을 거치며 겪은 여러 단계를 추적하죠. 이번에는 정체성을 둘러싼 대화를 촉발하고 싶었어요. 반드시 다뤄야 하는 민감한 주제입니다. 특히 이런 문제가 종종 뒤로 밀려나는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는 더 관심을 받아야 해요. 스스로 큐레이터라고 정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떤 프로젝트든 내가 맡는다면 끝까지 파고들고, 깊이 이해하고, 표면 너머로 나아가고 싶어요. 그것을 큐레이팅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래요, 나는 이 전시의 큐레이터입니다.

‘인시에메’ 프로젝트는 장인 정신과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시간에 주목합니다. 패션의 주기가 점점 더 빨라지는 시대에 말이죠. 이것은 미학적 선택인가요, 아니면 오늘날 패션 산업이 움직이는 방식에 대한 입장인가요?
살로네 델 모빌레를 위해 하는 일은 패션 안에서 늘 해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완성된 결과물 뒤에 존재하는 과정, 표면에 머물지 않으려는 태도, 지식의 중요성, 그리고 많은 사람의 협업. 이 모든 것은 언제나 내 작업의 핵심이었으니까요. 따라서 이것은 정치적 입장이 아닙니다. 그저 내가 일을 대하는 방식일 뿐이죠. 우리는 이미지와 속도가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최종 결과만 보는 데 익숙하고, 그 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되돌아보기 위해 멈춰 서는 일은 드물죠. 이 프로젝트는 바로 그 과정, 완성된 작품에 이르는 여정으로 다시 시선을 옮기고자 합니다. 모든 오브제 뒤에는 사람이 있어요. 그들을 중심에 세우고 싶었습니다. ‘인시에메’는 이탈리아 장인 기업 12곳이 참여한 전시로, 각각 하나의 디자인 오브제를 선보입니다. 프랑스 아티스트 JR과 함께 우리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장인 79명을 사진으로 기록했고, 그들의 초상은 일종의 선언문처럼 유서 깊은 밀라노 시립 수영장 피시나 코치(Piscina Cozzi)의 파사드에 전시했습니다. 디자인을 대하는 나의 방식 역시 장인과 같습니다. 원단을 선택하고, 자수를 다루고, 실루엣을 만들고, 방향을 바꾸고, 더 강한 창의적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 돌아가는 길도 허용하죠. 이것은 내가 잘 알고 있고, 또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공통 영역입니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는 어떤 반응도, 선언도, 내 과거에 대한 답변도 아닙니다. 어쨌든 이것은 잠시 멈춰 있는 시간일 뿐이죠. 나는 패션으로 돌아갈 겁니다. 패션 디자이너니까요.
구찌를 떠난다는 것은 매우 눈에 띄는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실제 자신보다 그 역할이 당신을 더 규정한다고 느낀 적 있나요? 그리고 그 역할이 사라진 지금, 더 자유롭다고 느끼나요, 아니면 더 노출되어 있다고 느끼나요?
일은 내가 누구인지 이루는 일부지만, 전부를 정의하진 않습니다. 구찌는 내 이야기의 한 부분일 뿐이죠. 나는 마흔세 살이고,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19개월이었어요. 인생에서 짧은 삽입부 같은 시간이었어요. 내 열정과 삶은 내 직업보다 훨씬 더 흥미롭습니다.
비판과 공격에 대처하는 방식도 궁금합니다. 소셜 미디어에서 거친 표현을 종종 마주했는데, 그것을 더 이상 무시하기 어려운 순간이 있었나요?
당연히 비판을 읽고, 보고, 직접 겪어왔습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고, 그래서 상처도 받았어요.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신경 쓰지 않게 되더군요. 하지만 여전히 댓글을 읽습니다. 직접 읽지 않더라도, 누군가가 그 이야기를 전해주기 때문이죠. 사실상 무시하는 건 불가능해요. 안타깝게도 우리가 지금 소셜 미디어에서 보는 것은 비판이라기보다 괴롭힘에 가깝습니다. 누구나 댓글을 달 수 있으니까요. 물론 사물을 다른 시각에서 보게 해주는 건설적인 비평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저 혐오를 퍼뜨리기 위해 소셜 미디어를 이용하는 사람도 있죠. 그것을 마주하려면 단단해져야 합니다. 비판은 성장에 도움을 줄 정도로 유용할 수 있지만, 그것이 누구에게서 오는지가 중요해요. 내가 존중하는 사람이 하는 비판이라면 건설적일 수 있어요. 익명의 프로필이나 내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하는 것이라면, 대개 공허한 소음에 불과하죠. 주목받고 싶다는 열망에서 비롯되는 말이에요. 오늘날 부정적인 뉴스는 긍정적인 뉴스보다 더 빠르게 퍼지고, 비판은 칭찬보다 더 쉽게 사람들의 관심을 끄니까요. 어떤 비판이 상처가 된 건 사실이지만, 인스타그램을 열어보면 누구에게나 꽤 많은 가혹함이 쏟아집니다. 이런 잔인한 비판은 이제 거의 기본 반응이 되어버렸어요. 그것을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옳다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이 패션에 대한 사랑을 잃게 만드는 데 기여할 뿐이죠. 잘못된 메시지를 퍼뜨리니까요.
왜 이런 현상이 패션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린다고 보나요?
패션을 비판하는 방식은 너무 쉽고, 거의 자동적으로 작동합니다. 그런 비판은 종종 패션이라는 전체 시스템을 피상적인 것으로 축소해버려요. 패션계 밖의 사람들이 소셜 미디어에서 이런 이야기를 접하면, 결국 패션을 아주 단순한 용어로 인식하게 되는 거죠. 좋거나 나쁘거나, 맞거나 틀리거나, ‘최고’의 쇼 순위, 가장 화려한 장소, 누가 가장 많은 조회 수를 기록했는지, 어떤 셀러브리티가 초대받고 비행기를 타고 왔는지 같은 식으로요. 성공이 오직 그런 기준으로만 설명될 때, 그것은 실제 작업과 많이 멀어지게 됩니다. 나는 패션 디자이너입니다. 대화의 중심은 언제나 옷, 작업 그 자체, 그리고 한 브랜드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여야 해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잦은 교체는 쇄신인가요, 아니면 만성적인 불안정인가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순환을 활력의 신호로 보는지 혹은 시스템적 혼란의 징후로 보는지 궁금합니다. 인터뷰를 통해 당신은 레디 투 웨어는 죽었다고 말했죠.
다소 모순적인 감정입니다. 한편으로 이 교체는 분명 활력을 시사합니다. 이 모든 변화가 변혁에 대한 기대를 만들어낸 것은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변혁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고, 시스템은 여전히 전과 같은 방식을 이어가죠.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본 적은 있지만, 프로젝트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나는 유행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뭔가를 쌓아 올리는 작업을 선호하죠. 제대로 구축하려면 연구와 깊이, 지속성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한두 시즌 만에 이루어질 수 없어요. 사람들, 그리고 시장과 계속 관계를 맺어야 하죠. 레디 투 웨어의 ‘죽음’에 대해 언급한 것은 맥락이 필요한 강한 발언입니다. 나는 오뜨 꾸뛰르가 아니라 레디 투 웨어 디자이너입니다. 레디 투 웨어는 원래 사람들에게 옷을 입히고, 패션과 스타일을 일상으로 가져오기 위해 탄생했어요. 그런데 오늘날 코트 한 벌이 1만1,000유로(약 1,640만원)일 순 없는 거죠. 그건 더 이상 레디 투 웨어 가격이 아니에요. 경험상 아름다운 원단과 정교한 마감을 갖춘 훌륭한 메이드 인 이탈리아 의류를 합리적인 가격에 생산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렴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장인 정신을 발휘하는 데는 당연히 비용이 들기 때문이죠. 하지만 대부분은 가격이 과도하게 높아졌어요. 그 정도 가격대에 이르면 본래 의미의 레디 투 웨어는 사라진 겁니다.
패션 시스템은 기억이 짧습니다. 가치(Value)는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치는 트렌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요. 가치라는 건 고작 한두 시즌만 지속될 수 없습니다. 어떤 가치를 진심으로 믿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라는 사람의 일부여야 해요. 다시 말해 디자이너인 자신이나 일하고 있는 브랜드와 그 가치를 연결한다면, 그것은 시간이 지나도 일관되게 남아 있어야 한다는 거죠. 내가 말하는 것은 신체 다양성이나 젠더 포용 같은 가치입니다. 최근 몇 년 동안 패션쇼의 서사를 강하게 이끌었지만, 갑자기 사라져버렸죠. 윤리적 가치는 미학적 서사의 일부로 선택하는 순간부터 진정성을 가져야 합니다. 더 이상 멋지지 않다는 이유로, 혹은 사실은 처음부터 진심으로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쉽게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예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한때 런웨이에서 트랜스젠더 모델의 등장이 매우 두드러진 순간이 있었어요. 젠더에 관한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 아름다운 시기였죠. 그런데 지금은 사라졌습니다. 플러스 사이즈 모델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졌고요.
미래를 어떻게 그리고 있나요? 자신만의 뭔가를 만드는 쪽인가요, 아니면 대형 패션 하우스로 돌아가는 쪽인가요? 다시 돌아가려면 뭐가 바뀌어야 할까요?
거대 하우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돌아가는 데 관심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규모가 크든 작든, 진심으로 마음을 쏟고 싶습니다. 내가 그 일을 믿을 수 있는지, 그리고 내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지가 중요해요. 팀워크를 믿고 장인, 패턴 제작자, 재봉사, 디자이너를 믿습니다. 나를 지지해주는 회사 경영진도 포함해서요. 미래에 바라는 것은 비전과 전략, 여정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 함께 내리는 결정 속에서 서로를 지지하는 것입니다. 다시 혼자라고 느끼고 싶지 않아요. 나의 다음 장에는 누군가와 함께하고 있으며, 응원해준다고 느끼고 싶습니다. 올해는 패션에서 잠시 멀어진 시간이었지만, 매우 활발하게 움직였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올해 해온 일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곳을 찾고 싶습니다. 규모는 상관없어요. 나에게 맞는 자리를 찾는 거죠. 내게 맞는 장소는 결국 사람들로 결정됩니다. 그저 올바른 사람들을 만나길 바랄 뿐이에요. VK
- 글
- Tiziana Cardini
- 사진
- Federico Ciamei
- COURTESY OF
- SABATO DE SAR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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