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 속에서: 2025년을 정의한 패션 이슈 5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디자이너의 결별 및 선임 소식, 그리고 굵직한 트렌드의 부재가 이어진 길거리. 2025년 패션계는 말 그대로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업계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킬 것으로 기대되던 2026 봄/여름 시즌부터 2025년을 지배한 아이템 라부부까지, 올해의 패션 이슈 다섯 가지를 선정했습니다.
대대적인 리셋
샤넬과 디올, 두 메가 브랜드가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맞이했습니다. 뎀나는 구찌로 거처를 옮겼고, 컬트적 위치에 오른 마르지엘라와 장 폴 고티에에도 ‘뉴 페이스’가 등장했죠. 업계 관계자들은 무수히 많은 데뷔 쇼가 예정되어 있던 2026 봄/여름 시즌을 앞두고 ‘대대적인 리셋(The Great Reset)’이 임박했다며 기대감을 드러냈습니다. 조나단 앤더슨, 마티유 블라지, 피엘파올로 피촐리, 마이클 라이더, 그리고 듀란 랜팅크 등 10명이 넘는 디자이너가 손을 모아 ‘리셋 버튼’을 누른 지도 벌써 두 달이 넘게 지났지만 모두가 고대하던 ‘커다란 변화’는 요원한 듯 보이죠.
우리가 잘못된 곳에 희망을 걸고 있었던 걸까요? 사실 샤넬이나 에르메스처럼 1년에만 20조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브랜드나 LVMH와 케어링 산하 브랜드 소속 디자이너가 ‘게임 체인저’ 역할을 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이들은 결국 하우스의 역사와 전통을 지켜야 하고, 실적(판매량)을 기준으로 평가받기 때문이죠. 마르탱 마르지엘라, 헬무트 랭, 질 샌더, 그리고 10년 전 난데없이 등장한 뎀나 등 우리가 옷 입는 방식을 바꿔놓은 이들을 떠올려보세요. 모두 20대 후반, 혹은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론칭한 디자이너들입니다. 변화를 애타게 기다리는 이들이 지켜봐야 할 것은 유명 디자이너의 성대한 데뷔 컬렉션이 아니라, 흡사 실험실 같은 아틀리에에서 손수 제작한 옷을 선보이는 젊은 디자이너의 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비 심리의 변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럭셔리 업계는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경영 컨설팅 기업 베인 & 컴퍼니(Bain & Company)는 올해 업계 전체 매출이 지난해 대비 2~5%가량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죠. 2년 연속 매출 감소는 2008년과 2009년 금융 위기 이후 처음 있는 일입니다. 지난해 매출 감소의 주원인으로 지목되었던 것이 판매가 상승인데요. 올해도 브랜드들은 가격표를 수정하느라 바빴습니다. HSBC는 지금 유럽 내 럭셔리 아이템의 평균 가격이 2019년과 비교해 약 52% 상승했다는 통계를 발표하기도 했죠.
패션을 사랑하는 소비자의 심리가 변하고 있습니다. 특히 ‘VIC’ 취급을 받는 극소수의 소비자(전체 소비자의 약 2%에 해당하는 이들은 업계 전체 매출의 40%를 책임집니다)가 아닌, 1년에 한두 번쯤 값비싼 아이템을 구매하는 ‘상향 지향 소비자’의 이탈이 이어지고 있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조금 전 언급했던, 지속된 가격 상승 탓이죠. 럭셔리 업계를 선망해왔던 이들은 더 이상 명품에 붙은 가격표가 정당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대신 마누 아틀리에나 누르 하무르처럼 저렴한 대안을 제시하는 브랜드로 시선을 돌리고 있죠. 합리적인 가격의 코치, 그리고 코스가 주목받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브랜드를 소유하고 싶은 이들의 차선책으로 빈티지 역시 덩달아 인기를 얻고 있고요.
디렉터의 시대
2025년만큼 패션 디자이너의 이름이 곳곳에서 들려온 해도 없을 겁니다. 지금은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의견을 전할 수 있는 채널이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시대거든요. 이제는 <보그> 같은 전통적인 패션 매거진뿐 아니라, 무수히 많은 디지털 매거진과 인플루언서 역시 디자이너들을 인터뷰합니다. 조나단 앤더슨, 안토니 바카렐로 등 우리 시대의 ‘스타 디자이너’들은 150만 명이 넘는 인스타그램 팔로어를 보유하고 있고요. 웬만한 대형 패션 인플루언서 부럽지 않은 숫자죠.
독창적 디자인 언어를 확립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브랜드를 경영하는 이들은 이름이 덜 알려진 디자이너를 선임하며 도박을 하기보다는, 검증된 스타 디자이너를 선호하죠. 디올과 샤넬, 그리고 구찌 등 규모가 큰 럭셔리 브랜드들이 일제히 업계의 ‘빅 네임’을 선택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모두 고유의 디자인 철학을 고집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로운데요. 최근 디올의 컬렉션에는 몇 년 전 로에베나 JW 앤더슨 쇼에서 봤던 것만 같은 데님 피스들이 등장하고, ‘뉴 샤넬’의 문법은 마티유 블라지가 보테가 베네타에서 정립했던 그것과 상당 부분 닮았습니다.
사실 이런 현상은 ‘양날의 검’이나 다름없습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패션을 바라보는 디자이너들이 활약하는 덕에 업계 내에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하고는 있지만, 그만큼 새로운 인물이 혜성처럼 등장할 여지도 줄어들기 때문이죠. 최근 <보그>가 주관한 연말 투표에서 78%의 업계 전문가들이 ‘가장 기대되는 데뷔 쇼’로 웨일즈 보너의 첫 에르메스 컬렉션을 꼽은 것만 봐도, 지금 패션 피플은 누군가 난데없이 나타나 모든 것을 바꿔주기만 기다리고 있는 듯합니다.
라부부와 백 참
이제 패션 피플은 무작정 유행을 좇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의 라이프스타일, 취향, 그리고 태도를 반영하는 ‘캐릭터’ 구축에 집중하고 있죠. 지금은 나만의 개성을 무엇으로든 표출하고 싶어 하는 시대입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패션 피플은 라부부와 백 참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이제 멋쟁이들은 물론, 평범한 초등학생과 중학생까지 가방에 인형을 달죠. 최근 몇 년간 라부부와 백 참만큼 광범위하게 유행한 아이템은 전무했습니다. 이제는 번화가도 모자라 지하철역 안까지 점령하고 있는 인형 뽑기 매장을 떠올려보세요.

백 참은 그 자체로 일종의 ‘치트 키’입니다. 흔한 검정 가방에 인형을 다는 것만으로도 남들과 다른 스타일링 포인트를 더할 수 있으니까요. 레이디 가가처럼 값비싼 가방에 참을 달며 ‘하이-로우 스타일링’을 연출하는 이들도 있었고요. 올해 불어온 ‘라부부 광풍’은 앞서 언급한 소비 심리의 변화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새로운 무언가를 갈망하는 패션 피플이 ‘사고 싶은 옷이 없다’는 문제에 직면하자 찾아낸 해결책이 저렴하고 누구나 쉽게 활용할 수 있는 백 참이니까요.
AI
AI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패션계를 바꿔놓고 있습니다. 특히 이커머스 브랜드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AI를 활용하고 있죠. 구글 쇼핑은 올해 몇몇 국가에서 사용자가 전신 사진을 업로드하면 온라인상의 옷을 시착해볼 수 있는 ‘트라이 온(Try-On)’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AI를 활용해 더욱 개인화된 온라인 쇼핑 경험을 선사하고, 반품률을 낮춘다는 계획이죠. 사용자의 과거 구매 이력 등을 분석해 다양한 아이템을 추천하는 알고리즘의 진화 역시 실시간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어도비 데이터는 올해 블랙 프라이데이 기간에 AI 챗 플랫폼을 통해 리테일 사이트로 유입된 소비자의 구매 전환 가능성이 38%가량 높았다는 통계를 발표하기도 했죠.
브랜드들 역시 AI를 활용할 방법을 궁리하고 있습니다. 발렌티노는 AI를 활용해 완성한 반스 협업 컬렉션 캠페인을 선보였고, 구찌는 AI 툴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아티스트에게 모의 캠페인 제작을 의뢰하기도 했습니다. 우려 섞인 목소리도 없지는 않은데요. AI로 복제한 ‘가상 모델’을 내세운 H&M 캠페인은 큰 반발에 부딪혔고, 지난 8월에는 미국 <보그>에 실린 게스 광고 속 모델이 AI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논란이 일었습니다. 포토그래퍼, 모델, 디렉터 등 ‘크리에이티브’ 부문을 총괄하는 이들이 설 자리가 좁아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죠. 결국 모두가 명심해야 할 것은, 패션에는 언제나 ‘인간적인 감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 사진
- Getty Images, Instagram, GoRunway,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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