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의 무한함처럼! 던의 넓게 보는 눈, 머무는 마음
“촬영 날도 똑같아요. 어렵지 않아요.” 던은 눈을 뜨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다. 환기하고, 차를 내리고, 강아지 햇님이와 산책하며 오늘의 할 일을 가늠한다. 멀리 떠나지 않아도 된다. 특별한 날을 기다리지도 않는다. 던의 ‘보는 눈’은 머문 자리에서도 초점을 바꾸며 세계를 넓힌다.

촬영이 끝나고 포토그래퍼를 배웅한 뒤, 다시 현관문을 두드렸다. 스태프나 매니저를 예상했지만 문을 연 사람은 던이었다. 문고리를 잡고 있는 그에게선 분주했던 촬영장의 여운이나 다음 일정으로 향하려는 조급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명상이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는다면, 던은 정확히 그 상태에 머물고 있었다. 촬영 중에도, 인터뷰할 때도, 문을 연 순간처럼 한결같았다.
그 차분함은 공간과 생활에서도 묻어난다. 어느덧 데뷔 10년 차를 맞은 가수. 강렬한 퍼포먼스와 비주얼로 알려진 던은 작년 8월 ‘마이 홈 투어’ 영상으로 담백하게 나타났다. 유튜브 채널 ‘던워리비햇님’ 속 일상은 빠른 컷 편집이나 자극적인 효과음 없이도 시선을 붙잡는다. 잔잔한 시네마틱 화면은 ‘내던내산’, ‘니던니산’, ‘던테이블’, ‘고던램지’ 등 자신의 이름을 넣은 시리즈로 엮어놓았다. 완성도 높은 영상미가 가벼운 산책처럼 느껴지는 건, 이런 여유와 재치 덕분이다.

던에게 본질적인 가치는 소유가 아니라 발견하는 시선이다. “알아보는 시선과 만들어내는 훈련을 늘 같은 선상에 둬요.” 그렇게 수집과 제작, 관찰과 표현은 선순환을 그린다. 용산구 집에서 그가 사는 모습을 보면 크리스챤 디올이 사랑한 컬러 그레이가 떠오른다. 자기주장을 내세우기보다 조화로운 상태로 남아 있는 컬러. 흑과 백, 명과 암 어느 상태로도 치우치지 않았기에 무엇이든 될 가능성은 던의 안목과 공조한다. 무슈 디올의 정신을 이어받은 그리 디올(GRIS DIOR) 오 드 퍼퓸의 시프레 노트가 잔잔히 퍼지는 던의 집에서 ‘보는 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집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보그 리빙> 영상까지 종일 촬영했어요. 사적인 공간인데 부담스럽지는 않았나요?
이 집을 구하며 제 경험, 제 공간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기 때문에 부담보다는 즐거움이 컸어요. 자기 생각을 가장 많이 담을 수 있는 매개가 공간이라고 믿거든요. 그래서 무리하면서까지 이곳을 선택했어요. 나중에 시간이 흘러 정반대의 삶을 살게 되더라도, 이 공간에 공들여 쌓은 ‘나’라는 데이터가 의미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오늘 촬영처럼요.
지난 8월부터 유튜브 채널 ‘던워리비햇님’에서 공간과 일상을 공유하고 있죠. 언제부터 준비하셨나요?
작년 3월에 이 집에 들어왔는데요. 이사하기 전부터 친구가 유튜브 해보라고 권했어요. 그땐 스튜디오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는데, 그 모습이 재밌었나 봐요. 주거에 최적화된 공간은 아니었지만, 사진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은 상태라 계획을 밀어붙였어요. 장비를 사두고 1년 동안 혼자 공부했죠. 그렇게 말만 하다가 스튜디오를 정리하고 집을 구하면서 구체화했어요. 스튜디오에 비해 집이 심심해 보일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그 과정에서 공간에 대한 가치관이 또렷해지고, 취향이 깊어져서 지금 모습을 만들게 됐어요.
집에 놓인 오브제가 예사롭지 않아요. 부채장 이광구 선생님의 부채, 고요손 작가의 조각처럼 존재감이 분명한 작품이 어우러져 있죠. 이렇게 존재감이 강한 작품들을 어떻게 조율하시나요?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네요. 가정집도 다양하니까, 만약 우리 부모님 집에 둔다고 치면 분명히 튈 작품이 많아요. 하지만 물건 각각의 가치를 따지기보다, 집 위에 얹어보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끊임없이 하거든요. 조화를 우선시하다 보니 강한 존재감도 저에겐 자연스럽게 다가왔어요.


그런 안목을 선망하는 이들에게 던의 방식은 꽤 유용한 가이드가 될 것 같습니다. ‘실패가 아닌 실수’라며 시행착오를 긍정하셨어요. 이 과정에서 얻은 팁이 있나요?
각자 상황이 다르다 보니 조심스럽지만, 이것저것 많이 시도해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 과정에서 중요한 건 타인의 취향을 평가하지 않는 태도가 아닐까 싶어요. 처음 접했을 때 잘 모르겠어도,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를 보려고 해요. 싫어하는 걸 솎아내기보다 좋아하는 범위를 넓히면, 어느덧 나만의 궤적이 그려지거든요. 평가를 거두는 게 결국 취향을 만드는 길이라고 여겨요. 확고한 상태도, 유연한 상태도 다 좋으니 너무 확고해지려 애쓰지 않아도 돼요.
그렇다면 실제 물건을 살 때 스스로 꼭 묻는 질문이 있나요? 특히 디올의 라 콜렉시옹 프리베 컬렉션처럼 기능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물건을 들일 때요.
“너 이거 평생 쓸 수 있어?”라고 열 번쯤 물어요. 이사하더라도 가져갈 건지, 아무에게도 팔지 않고 끝까지 사랑해줄 자신이 있는지. 예전엔 마음에 들면 바로 샀다가, 그다음에는 두세 번 고민해보고 눈에 밟히면 샀는데, 이젠 한 달 정도 지나서도 마음이 여전한지 확인하는 인내심이 생겼어요.

직접 조명도 만들고, 가구도 주문 제작하고, 예전에는 금형도 하셨다고요. 유튜브에서도 소재를 유심히 관찰하거나 설명하는 모습이 눈에 띕니다. 물성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시작됐나요?
제 기억으로는 옷에 관심이 생기면서부터예요. ‘이 둘은 색깔도, 치수도 똑같은데 왜 다르지?’ 만져보니 속성이 다르더라고요. ‘이게 내가 좋아하는 소재구나’ 느끼며 소재가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사진을 공부할 때는 사진집마다 종이 질감이 다른 게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컬러사진은 이 종이를 사용해야 예쁘고, 흑백사진은 이 종이가 더 예쁘고. 이런 디테일을 살펴보면서 저만의 취향이 생겼어요.
문화 전반을 다루는 비디오 매체 <나우니스(Nowness)>의 ‘인 레지던스(In Residence)’ 시리즈에서 건축가, 디자이너, 아티스트가 공간을 대하는 태도를 많이 참고하신다고요. 던은 어떤 태도로 집을 대하나요?
‘고요’라는 단어가 떠올라요. 정제된, 잔잔한 물결 같은. 그전에는 고요하고, 차분하고, 무던한 제가 재미없어 보였어요. 남들이 봤을 때 대단했으면 좋겠고, 남들과 다르게 살고 싶었어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직업이고,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도 빛나는 위치에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척을 많이 했는데, 여기 살면서부터 제가 어떤 사람인지 떠올랐어요. 그때부터 원래 제 모습을 되찾으려는 연습을 많이 했죠.

인터뷰를 하고 있는 1층 작업실에 퍼지는 ‘그리 디올’의 향기도 그런 안정감과 닮아 있습니다.
화려한 향이 아닐까 했는데, 무작정 퍼지는 화려함이 아니라 겹겹이 쌓인 섬세함이 느껴졌어요. 그 레이어를 통해 향 하나를 위해 고심했을 조향사들의 마음이 전해졌고요. 자연스러우면서도 안정감이 있는 향이라 편안했어요.
‘고요, 안정감, 편안함’이 던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된 것 같군요.
이제는 고요한 역할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요. 저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존재하는 것도요. 한 가지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장인들, 이를테면 셰프나 자연인을 존경하거든요. 이런 분들을 보면서 꾸준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 나가겠다는 태도를 지니게 됐어요.

긍정은 현재의 나를 똑바로 직시하는 것에서 시작하죠. 무조건 낙관하기보단요. 앨범 작업도 그런 맥락에서 재정비 중인가요?
80%까지 진행됐는데 다시 50%로 내려왔어요. 오브제를 살 때 던지는 질문처럼, ‘이 앨범, 평생 들을 수 있어?’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요. 완벽해지려고 하는 건 아니에요. 집에서 지낼 때도 뜯어진 벽지나 삐져나온 전선에서 애정을 발견하죠. 하지만 제 마음이 온전히 담겼는지는 엄격하게 따져요. 그 기준을 통과하면 일단 세상에 내놓고요. 완벽하지 않아도 분명히 그 속에 뭔가 있으니까요. 그렇게 시작되는 이야기를 좋아해요.
유튜브에서 ‘캐치력’이라는 표현을 쓰셨죠. 의외의 장소에서 물건을 발견하거나, 물건에서 의외의 쓰임을 발견하는 것이요. 그런 발견의 희열 때문에 다른 사람이 구하고 싶어 하는 물건을 대신 찾아주는 ‘트레저 헌터’ 같은 모임까지 꿈꾼다고요. 그런 발견과 창작이 서로 연결되나요?
완전히 연동돼 있어요. 발견과 창작을 따로 두지 않아요. 알아보는 시선과 만들어내는 훈련을 같은 선상에 둬요. 나의 경험, 시간을 응축한 곳을 통과해야 창작을 할 수 있다고 여겨요. ‘니던니산’ 시리즈로 친구 집에 방문했는데, 낚시찌를 조명 끝에 달아 포인트를 줬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다르게 활용해보는 시선이 나중에 본인의 작업, 오리지널을 표현할 때 분명히 들어갈 거예요. 알아보고, 바라보는 것도 작업 과정인 거죠.

크리스챤 디올이 좋아한 컬러 그레이는 ‘규정되지 않음’, 그래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걸 열어두다가도 어느 순간 방향이 분명해질 때가 있나요?
저도 아직 그 과정 안에 있어요. 언제쯤 사람들이 ‘우와’ 할 만한, 공감할 만한 뭔가가 나올지 궁금해요.
이미 앨범도 내시는데요?
완벽주의 성향의 아티스트가 작업하는 방식도 멋지지만, 저는 완전 반대예요. 조금 창피하더라도 제 진심이 담겼다면 일단 보여줘요. 물건이든, 작업이든 만든 사람이 애정을 가졌는지, 아닌지 사람들이 무조건 느끼거든요. AI 시대에 우리가 딱 하나 가진 건 마음이라고 믿어요. AI가 창작성이 있냐, 없냐에 대해 저는 있다고 보는 쪽이지만, 인간에게는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누군가 물어볼 때도, 마음을 담아서 겁먹지 말고, 일단 보여주라고 말해요.
마침 인스타그램 속 버추얼 휴먼 ‘이단(@edanmaverick)’으로 다양한 비주얼 작업을 하고 계시죠.
호기심에서 시작했어요. 저는 그런 버추얼 세계를 통틀어서 ‘메타’라고 부르거든요. 개개인이 인스타그램 속에 버추얼 휴먼을 가지고 있다고 느껴요. 친구를 처음 만나기 전부터 이미 인스타그램에서 알고 있잖아요. 인스타그램도 버추얼 휴먼이랑 별다를 게 없는데, 과연 사람들이 다르게 느낄지 궁금했어요. 가짜라고 공표하면 똑같이 만들어도 가짜라고 사람들이 느낄까? 근데 가짜라고 말하니까 가짜라고 느끼더라고요. 그것도 재밌어요. 이런 질문을 던지고, 그 반응을 관찰하고, 느낀 걸 공유하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을지로 ‘다이브 레코드’ 사장님처럼 언젠가 아티스트를 소개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하셨고, 중고 거래하다가 만난 분과 친구가 되기도 하고, 인연을 귀하게 여기죠. 친구들 집 한 채씩 지어주고 싶다고도 했고요. 그렇게 장성한 ‘던의 마을’은 어떤 모습일까요?
우선 머릿속에 입주민이 떠올라요. 조용하지만 사랑이 넘치는 사람들이 모인 동네일 거예요. 정자 앞에 모여 과일을 나눠 먹고, 서로 질투하기보다 “나 요즘 이런 생각이 들어”라며 둥그스름한 대화를 나누는 풍경. 예술을 하는 사람이 많으니 각자 작업실도 있겠죠. 마을로 초대하고 싶은 사람들이 늘어나는 걸 보며 잊었던 꿈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됐어요. 그렇게 살면 여한이 없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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