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연에겐 환희의 본능이 있다

2026.05.28

장서연에겐 환희의 본능이 있다

장서연은 거듭되는 좌절과 불안을 이겨내는 비밀을 안다. 묵묵히 성실히 나아가는 것. <성난 사람들 2>의 유니스도 그렇게 만났다.

커다란 리본 장식이 달린 플리츠 디테일 케이프 드레스는 발렌티노(Valentino).

어느 주말,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 2〉를 봤다. 지난 시즌을 즐겁게 봤기에 완전히 새로운 등장인물과 스토리로 진행되는 이번 시즌에 대한 기대가 컸다. 8회의 시리즈를 정주행한 직후 어딘가 불편함이 몰려왔다. 개인에서 확장한 계급, 세대의 분노 속에서 시선을 잡아끄는 건 박 회장(윤여정 분)의 비서 ‘유니스(장서연 분)’다. 박 회장의 비서로 통역까지 맡으며 불필요한 말은 걸러주고, 거친 박 회장의 말은 상대에게 부드럽게 필터링하는 것 역시 그의 몫이다. 유니스는 인간의 가장 사적인 순간인 식사 시간에도 긴장을 놓지 않았다. 단발머리의 단아한 차림은 태도로도 이어졌다. 욕망과 분노로 점철된 캐릭터들 속에서 그와 박 회장만큼은 언제나 온화했다. 그러나 그 뒤엔 예민한 사람이라면 알아챌 법한 긴장이 있었다. 어색한 순간엔 애써 웃고, 칭찬보다 실수가 없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읽혔다고 할까. 나 자신을 보는 듯한 기시감. 그래서 나는 불편했다.

트루퍼 햇은 큐 밀리너리(Q Millinery), 줄무늬 셔츠는 준지(Juun.J).
긴 시퀸 장식을 프린지처럼 연출한 상의와 스커트는 셀프 포트레이트(Self-Portrait).

유니스를 연기한 장서연과 새벽 기운이 막 가신 아침 7시, 촬영장에서 마주했다. 장서연은 영화 〈비상선언〉을 비롯해 〈닥터 로이어〉 〈개미가 타고 있어요〉 같은 한국 드라마에 참여했다. 최근에는 아마존 프라임 〈버터플라이〉, 넷플릭스 〈성난 사람들 2〉를 통해 세계적인 작품에 이름을 올렸다. 그럼에도 장서연은 한국 대중에게 아직 낯선 얼굴이다. 현장에 들어선 그녀는 모든 스태프에게 다정히 인사를 건넸다. 촬영 중간중간 흐름을 살피기도 했다. 현장 반응, 분위기, 이 자리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유니스처럼. 인터뷰 시작과 함께 장서연은 사실 자신도 그런 사람이라고 소탈하게 고백했다. “저도 그래요. 촬영장에서 모두 제 기량에 주목할 때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서 숨고 싶은 심정인데, 긴장하지 않은 척 으레 익숙하게 해온 것처럼 애쓰죠. 윤여정 선배님을 비롯해 할리우드에서 유명한 배우들과 합을 맞출 때도 그랬어요.” 사실 유니스는 장서연의 많은 부분이 반영된 캐릭터다. 미국식 영어를 구사하는 캐릭터들 사이에서 유니스만 국제 학교에서 쓰는 영국식 발음을 구사하는 것도 그렇다. 장서연은 세 살 무렵 가족과 영국으로 이민을 갔고, 오디션을 보면서 유학 경험을 살려 영국식 영어를 구사하는 캐릭터를 직접 제안했다. 이성진 감독은 대본 수정본을 보내올 때마다 그가 습관적으로 쓰는 표현을 대사에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이 역할은 정말 한국인만 할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한 걸음 뒤에서 살피고, 상황을 캐치하고, 유교적 위계질서를 자연스럽게 몸으로 표현하는 것. 그건 어떤 서구 배우도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라 그냥 살아온 삶에서 나오는 거니까. 박 회장과 등장한 첫 장면부터 저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죠. 박 회장에게 통역할 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며 불필요한 이야기의 통역을 거르거든요. 성인이 된 후 영국에 온 어머니가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누군가와 길게 소통할 때면 저와 오빠에게 많이 의지하셨어요. 이따금 이야기할 때면 ‘이건 필요 없는 얘기야’라며 통역하지 않을 때가 있죠. 교포라면 공감할 만한 장면일 거예요.”

목 옆으로 고정한 스트랩을 길게 내려뜨린 실크 미니 드레스는 막스마라(Max Mara), 메탈 반지는 안드로니코(Ahndronico), 자수 디테일 웨스턴 부츠는 마크공(Markgong).

영국에서 자란 장서연에게 한국은 드라마 속 세계였다. 주말마다 엄마와 〈옥탑방 고양이〉 〈황진이〉 〈궁〉을 정주행하며 그 세계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때부터 꿈이 생겼다. 한국 배우가 되겠다는 꽤 구체적인 꿈이었다. 할리우드는 처음부터 머릿속에 없었다. 그러나 꿈으로 가는 길은 직선 도로가 아니었다. 7년간 발레를 했고, 연습생 생활도 3년 하다 그만뒀다. 이후 고려대학교에 입학해 홀로 서울에서 생활하며 대학원까지 다녔다. 많은 것이 바뀌어도 배우가 되고 싶다는 마음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많은 것에 도전했지만 그 끝에 제가 먼저 그만두겠다고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발레를 하기엔 팔다리, 비율이 부족했고, 아이돌을 하기엔 끼가 부족했을까요. 매 순간 최선을 다했는데 포기해야 할 때면 아프기 그지없었죠. 그래도 뒤돌아보면 늘 더 큰 선물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한국에서의 배우 활동이 시원찮을 때 마주한 해외 에이전시와의 계약도, 아마존 프라임 시리즈 〈버터플라이〉 참여도 그렇게 찾아왔다. 누군가 “헤맨 만큼 모두 자기 땅이 된다”고 했던가. (현재 장서연은 미국, 영국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고 많은 해외 작품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입체적인 꽃 장식의 튜브 톱 상의와 바지는 조르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i), 오버사이즈 프레임 안경은 발렌티노(Valentino), 메탈 귀고리는 파나쉬 차선영(Panache Chasunyoung), 메탈 팔찌는 몽담(Mondam), 앞코가 날렵한 스트랩 샌들은 지안비토 로시(Gianvito Rossi).

장서연의 끝없는 도전과 성실함의 원천은 불안이다. 배우로 굵직한 역할을 맡지 못한 순간에도, 작품을 쉬는 동안에도 불안은 늘 함께했다. 그러나 장서연은 이것은 없애야 할 감정이 아니라 사이좋게 지내야 하는 동반자 같은 것임을 안다. “작품에 임할 때도 잘하고 싶은 마음에 불안하고, 일이 없으면 없어서 불안해요. 강도의 차이만 날 뿐이죠. 제 꿈이 <보그>와 인터뷰하는 거였는데, 꿈을 이룬 오늘도 불안했어요. 잘해낼 수 있을지 스스로 걱정이 컸거든요.” 그러나 그는 카메라 앞에서 당당히 포즈를 취했다. “요즘 제가 가장 열심히 연구하는 건 인터뷰예요. 〈성난 사람들 2〉 공개를 앞두고 미국에서 여러 번 인터뷰를 했는데, 한 번에 두세 가지 질문이 섞이다 보니 답하면서 ‘아, 근데 아까 뭘 물어보셨죠?’라고 되물을 만큼 미숙했어요. 선배들이 연습하면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장서연은 또 준비한 채 임한다. 거듭 반복한다, 또 성실하게. 숨고 싶은 순간에도 애쓰며 해내는 것이 어른의 일이다. 그게 유니스의 방식이자 장서연, 오늘도 애쓰는 우리의 방식이다. 불편할 것이 없다. VK

김다혜

김다혜

패션 에디터

예쁘고 귀여운 것을 사랑하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완성되는 모든 아름다움을 존중합니다. 패션을 관찰하고 즐기되, 휩쓸리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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