캣워크와 스타일리스트 짝짓기

몇몇 브랜드가 인기 절정으로 치닫는 것은 전적으로 디자이너의 공로 덕분이다. 하지만 디자이너 곁에서 젊은 감각과 객관적 시선을 더해 캣워크의 질서를 새로 쓰는 스타일리스트가 없었다면? 어느 때보다 활발해진 캣워크와 스타일리스트 짝짓기.



카린 로이펠트의 새 잡지 창간 과정을 다룬 <마드모아젤 C>가 개봉됐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을 꼽자면 팬들마다 여러 가지를 언급하겠지만, 뭐니 뭐니 해도 구찌와 파리 <보그> 이력 중에서도 가장 눈부신 ‘스타일리스트’ 시절이 아닐까? 특히 화보 진행 과정은 물론, 칸 영화제 기간에 열리는 ‘amfAR’ 패션쇼 스타일링 장면을 들 수 있다(에이즈 기금 마련을 위해 ‘블랙’이나 ‘골드’를 주제로 톱 디자이너들에게 의상을 주문, 전 세계 고위층 앞에서 패션쇼를 열고 경매에 부치는 행사). 54년 생인 그녀가 열여덟 살에 패션계에 입문해 일하는 동안 옷을 손수 디자인하는 일은 없었다. 디자이너들이 만든 것을 재창조하고 재조립하고 재해석하는 것뿐.

이렇듯 하나의 패션쇼를 위해 디자이너가 ‘creation’에 집중한다면, 스타일리스트는 ‘re-creation’에 집중한다. 디자이너가 6개월 동안 영감을 얻고 옷감을 고르고 스케치하고 패턴을 뜨는 등의 절차를 거쳐 컬렉션을 구성할 때, 어쩔 수 없이 한곳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그들의 뇌를 환기시키며, 외부의 시선을 더하는 것(남자로서 여자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에겐 여자 스타일리스트가 절실하다). 또 예술가 기질이 다분한 디자이너들에겐 동시대 경향과 상업적 감각을 주입시킨다. 그런 뒤 고객과 기자와 바이어와 귀빈이 침을 꼴깍 삼킬 수 있도록 패션쇼장에서 캣워크라는 상차림을 선보이기 직전, 한 룩 한 룩의 최종 조립은 물론, 모델과 옷의 궁합을 맞춘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너무 아닌 옷’(그걸 만들어낸 디자이너는 마음이 약해 결코 뺄 수 없는)을 미련 없이 빼게 만드는 악역도 스타일리스트의 역할. 반대로 그게 빠지면 시대에 뒤떨어져 보일 수 있기에 쇼가 내일인데도 당장 오늘밤 만들어내라고 압박을 가하는 역할까지. 그런 뒤 최종 결과물을 놓고 룩과 룩의 배열과 편집에 있어 완성도를 높여(가방을 들지 말지, 든다면 어떻게 들어야 할지, 또 손은 주머니에 넣을지 말지, 넣는다면 몇 손가락만 어떻게 넣는지 등등), 런웨이에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게 패션쇼 스타일리스트의 임무다(물론 어떤 경우엔 디자이너와 스타일리스트가 함께 영감을 얻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때도 있다).

그렇다면 2014 S/S 패션 위크에서는 누가 어떤 디자이너와 의기투합했을까. <보그> 9월호 제작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셉템버 이슈>를 다시 보자. 편집장 안나 윈투어가 파리 패션 위크 중에 당시 이브 생로랑을 이끌던 스테파노 필라티의 작업실을 급습한다. 까만색만 죄다 걸린 쇼룸을 쓱 둘러보며 “컬러는 어디 있지?”라고 한마디 던진 그녀 앞에 필라티가 쩔쩔매는 장면에서 잠깐 정지! 편집장과 함께 들른 <보그> 기자들과 필라티 뒤쪽에서 어슬렁대는 깡마른 여자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카밀라 니커슨. 최강의 미국 <보그> 패션 군단에서 이름을 날리다 같은 출판사에서 발행되는 <더블유>에 날카로움을 더하기 위해 급파된 뒤, 요즘은 다시 미국 <보그>를 위해 일하는, 그야말로 평생 ‘안나 윈투어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 영화에서 필라티 곁을 지킨 이유는? 당시 그의 생로랑을 위한 스타일리스트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셀린의 대대적인 성공 뒤에도 그녀가 존재한다. 전에 없이 예술적인 컬렉션으로 작품성 점수까지 후하게 받은 이번 쇼가 끝난 후 백스테이지 입구는 피비 파일로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한 관객들로 인산인해. 그 아수라장을 비집고 들어가자 또 다른 백스테이지가 나왔다. 그곳에 카밀라 니커슨이 이번 쇼 스타일링의 핵심이었던 니트 스웨터를 허리에 비틀어 묶은 채 성공 뒤의 느긋한 휴식을 스태프들과 즐기고 있었다. 그녀는 피비 파일로의 잡지 인터뷰 스타일링을 전담하는 건 물론(지난달 본지에 실린, 터틀넥 스웨터를 턱까지 치켜 올리고 찍은 피비 인터뷰 사진이나 <젠틀 우먼> 표지와 화보에 게재된 피비 특집 기사 등등), 그녀의 이런저런 공식 행사에 동행한다(피비가 2011 CFDA 어워드에서 올해의 인터내셔널 디자이너 상을 탈 때도 함께 리무진을 타고 행사장에 등장했고, 마크 제이콥스와 셋이 신나게 어울려 노는 광경이 파파라치 사진에 찍혔다). 셀린을 위해 동시대적 세련된 스타일링을 구사했다면, 알렉산더 맥퀸의 꾸뛰르적 의상과 캘빈 클라인의 초간결 의상까지 넘나드는 베테랑 스타일리스트다. 그런 그녀의 도움으로 이든의 첫 쇼가 뉴욕에서 열렸으니, 이든의 ‘생초짜’ 디자이너 다니엘 셔먼은 그야말로 봉 잡은 셈.

또 한 편의 영화에서도 슈퍼 스타일리스트를 찾아볼 수 있다. 마크 제이콥스가 루이 비통과 자신의 브랜드에서 전성기를 누릴 무렵 제작된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 그가 디자인실에서 어느 아티스트와의 콜라보레이션 결과를 놓고 고민할 무렵, ‘루이 황제’의 곁을 지키는 여러 여인 가운데 한 명을 클로즈업해보자. 바로 케이티 그랜드! 제이콥스의 루이 비통을 위해 오랫동안 스타일리스트로 일했고, 현재 1년에 두 번 발행되는 매거진 편집장이다. 그녀는 런던 패션의 실세로 불리며, 자일스와 조나단 선더스, 파리에서 비통, 뉴욕에서는 제이콥스 스타일링을 맡았다. 특히 자일스와 비통 쇼의 공통적인 헤어피스를 보면 과장된 그녀의 취향을 감지할 수 있다. 또 일선에서 뛰는 잡지 편집장답게 사진가 글렌 루치포드가 찍은 케이트 모스, 앰버 발레타 등의 사진을 옷에 인쇄할 수 있도록 연결시켜준 것도 그녀일 확률이 크다.

다시 카린 로이펠트에게 초점을 맞춰보자. 파리 <보그> 편집장 재임 시절 전 세계적으로 프랑스 브랜드 전성기를 다시 불러일으킬 무렵, 그녀는 리카르도 티시의 첫 번째 지방시 쇼를 함께했다(쇼 초대장엔 ‘리카르도 티시’와 ‘카린 로이펠트’의 이름이 똑같이 큼지막한 크기로 인쇄됐다). 티시를 제2의 톰 포드로 키워보겠다는 카린의 의지, 카린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겠다는 티시의 신뢰를 바탕으로 그녀는 이번 시즌에도 지방시를 도왔다. 한때 가장 공평하고 객관성을 지켜야 할 편집장이 몇몇 브랜드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사실이 문제시된 것과 달리, 이제 카린은 자유의 몸이기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일하는 중. <보그>에서 떠난 뒤 막스마라 역시 맘 편하게 작업하는 중이고, 고가 아쉬케나지와 함께 비오네의 부활까지 주도하기 위해 애썼다.




한편, 로이펠트 사단의 참모급이었던 마리 아멜리 소베는 꾸뛰르와 아방가르드를 상업적으로 조율하는 데 성공한 메종 마르탱 마르지엘라 백스테이지에 있었다. 테일러드 수트 위에 빈티지 시장에서 구했을 법한 비즈 장식 쇼걸 조끼를 입힌 발상은 그녀에게서 비롯된 것. 빅터앤롤프가 거품을 빼고 팔리는 옷에 집중하도록 조언하거나, 리드 크라코프에게 90년대식 영감을 전한 것도 그녀다(그렇기에 과연 게스키에르가 비통으로 그녀를 불러들이느냐는 오는 3월 파리 패션 위크 관전 포인트 중 하나). 이렇듯 2000년부터 10년간 파리 <보그> 팀은 구태의연했던 잡지를 정상으로 끌어올렸다. 특히 카린 사단의 기자들은 각각 프렌치 브랜드를 하나씩 맡아 스타일링하며 프랑스 패션 혁명과도 같은 ‘프렌치 시크’의 광풍을 불러일으켰다. 로이펠트와 지방시, 알트와 발맹, 소베와 발렌시아가가 대표적인 예다. 이 흐름 속에 프렌치 스타일리스트들의 몸값이 덩달아 뛰었다. <보그> <셀프 서비스> <아크네 페이퍼> <젠틀 우먼> 등을 위해 일하는 마리 샤익스(Marie Chaix)는 현재 젊은 디자이너들이 함께 일하려고 ‘하트’를 마구 날리는 아가씨.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그녀가 있었기에 겐조의 캣워크와 광고에서 통통 튀는 젊음이 가능했고, 프로엔자 스쿨러 쇼와 광고의 완성도가 높아질 수 있었다. 에르메스, 클로에 등 프랑스의 국보급 패션 가문들 역시 정통 파리지엔인 카미유 비도 와딩턴(Camille Bidault Waddington, 자비스 코커의 아내)의 손을 잡았다. 또 마리 아멜리의 어시스턴트 출신인 바네사 리드는 요즘 가장 잘나가는 브랜드 중 하나인 아크네 스튜디오를 위해 일했다(랙앤본의 스포티즘, 미쏘니의 변화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현대판 알렉세이 브로도비치로 불리는 아트 디렉터 파비언 바론이 편집장 자격으로 만드는 <인터뷰> 매거진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공식 직함인 칼 템플러 역시 카밀라 니커슨 못지않게 빅쇼를 통제하고 조절했다. 그는 <인터뷰> 외에 이태리 <보그>에도 거의 매 달 이름을 올리는가 하면 카트린 드뇌브, 소피아 코폴라, 지젤 번천 등이 등장한 마크 제이콥스의 마지막 루이 비통 광고 작업도 진행했다(캣워크 스타일리스트가 광고 스타일리스트로 반드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이런 칼 템플러의 솜씨는 패션쇼 백스테이지에서도 성공적으로 먹힌다. 알렉산더 왕, 보테가 베네타, 사카이, 발렌티노, 타미 힐피거 등의 쇼가 지극히 동시대적으로 보인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이제는 ‘로고 플레이’를 해도 될 시기라고 알렉스에게 조언하거나, 앞뒤 상하좌우가 다른 사카이 옷을 현실적으로 짝지어 여자들을 홀딱 반하게 만든 것도 그의 몫이다.



그런가 하면 카밀라 니커슨, 칼 템플러, 케이티 그랜드의 윗세대로, 촬영장이나 패션쇼장에서 그레이스 코딩턴 수준으로 대접받는 조 맥케나는 늘 그렇듯 질 샌더를 위해 충성했다(질 샌더가 떠난 뒤 한 시즌 공석일 때, 그에 의해 질 샌더 패션쇼가 열린 적이 있다). 뉴욕에서 빅토리아 베컴은 자신의 컬렉션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도록 조 맥케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덕분에 머리를 반듯하게 정돈해 검정 헤어밴드를 두르거나 흑백 미니멀 터치, 모델 에디 캠벨의 오프닝, 순백의 무대 등 여기저기 질 샌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패션계에서 ‘성’ 구분은 굳이 필요 없지만 맥케나, 템플러에 이어 남자 스타일리스트 계보를 잇자면 제이콥 케이(Jacob K)가 먼저 언급된다. 사진가 팀 워커와 함께 판타지 비주얼을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는 그는 알렉산더 왕의 발렌시아가를 위해 의기투합했다. 또 크리스토퍼 케인의 스트리트 감각에 일조했으며, 베라 왕의 젊은 이미지까지. 그리고 제이콥과 함께 백스테이지에서 자주 호명되는 또 한 명의 남자는 파노스 이야파니스(Panos Yiapanis). 매리 카트란주, 릭 오웬스, 데스켄스 띠어리가 파노스의 시선과 해석을 원했다. 또 랑방과 J.W. 앤더슨이라는 극과 극을 오가며 일한 청년은 로이펠트의 어시스턴트였던 벤자민 브루노다.

이렇듯 디자이너가 스타일리스트 없이 패션쇼를 한다는 건, 직접 드레스를 골라 입고 레드 카펫에 오르는 여배우처럼 촌스럽고 쓸쓸하기 짝이 없는 신세다. 정권이 바뀌며 미국판 <W>에서 물러난 전직 패션 디렉터 알렉스 화이트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뉴욕과 파리를 왕복하며 오스카 드 라 렌타와 니나 리치 컬렉션을 위해 스타일링한 사진을 올렸다. 새 편집장 스테파노 통키 시대를 열며 <W> 패션 디렉터가 된 에드워드 에닌풀은 알레산드로 델라쿠아의 N°21을 도왔다. 델라쿠아의 N°21이 패션계로부터 인정받아 다음 시즌 로샤를 맡게 됐으니, 그도 로샤 쇼에 합류하지 않을까? 어디 그뿐인가. 프라다와 미우미우는 올리비에 리쪼(라프 시몬스와 사진가 윌리 반데페르와 함께 앤트워프 3인조), 돌체앤가바나와 토리 버치는 타비타 시몬스(사진가 크레이그 맥딘의 아내이자 인기 절정의 슈즈 디자이너)와 환상의 팀워크를 자랑했다. 또 제인 하우와 스텔라 맥카트니, 멜라니 워드와 베르사체, 조지 코티나와 에밀리오 푸치, 그리고 오랜 시간 디자이너와 스타일리스트 간의 이상적 협업을 보여주는 마르니의 콘수엘로 카스틸리오니와 영국 <보그> 패션 디렉터 루신다 챔버스 등등. 알투자라와 바네사 트라이, 스노우처럼 패거리 문화나 어릴 때부터 막역한 친구들끼리 작업하는 것도 요즘 경향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셉템버 이슈> 등 패션지 업계를 해부한 영화가 대중에게 공개되고 패션쇼 주변의 멋쟁이들에게 시선이 쏠리자, 이름만 표기되고 말던 패션 에디터와 스타일리스트의 얼굴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촬영장에서는 사진가 뒤에 서 있고, 모델과 유명 인사들에게 옷을 입히는 게 임무이며, 디자이너들이 만든 옷으로 새로운 스타일을 만드는 또 다른 신의 손이다. 패션계는 그들의 공로를 치하하고 길이 보전하기 위해 당대 슈퍼 스타일리스트들의 업적을 집대성한 <Stylist: The Interpreters of Fashion> 같은 사진집을 발간하는가 하면, 미국 <보그>에 신화 같은 비주얼을 남긴 패션 에디터들의 결과물을 모아 <The Editor’s Eye>라는 작품집을 냈다. <보그> <W> <하퍼스 바자> <엘르> 등의 패션지 로고가 아닌, ‘스타일리스트’와 ‘패션 에디터’가 표지에 크게 인쇄된 사진집이다. 또 그레이스 코딩턴, 바베스 디앙, 카린 로이펠트, 사라 제인 호어, 카밀라 니커슨 등은 어빙 펜이나 마리오 테스티노 같은 유명 사진가들처럼 자신만의 불후의 명작들로 레이아웃된 아트북을 갖고 있을 정도다.

디자이너가 옷을 만드는 데 도사라면, 스타일리스트는 옷을 입히는 데 도사다. 그리고 패션의 흐름과 관건이 ‘무엇을 디자인하느냐’에서 ‘어떻게 입히느냐’로 바뀐 지는 꽤 됐다. 게다가 모든 것을 10분도 채 못 되는 패션쇼를 통해 보여줘야 한다면, 디자이너들은 스타일에 관한 한 자신들보다 앞선 전문가의 손길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자, 이제 여러분이 패션쇼를 보게 되면 맨 먼저 옷과 모델이 눈에 띌 것이다. 디자인에 관심이 있거나 기자가 되고 싶다면, 그 옷을 만든 디자이너의 의도를 파악하거나 과거에 비슷한 옷이 없었는지, 영화나 복식사를 파헤치면 된다. 하지만 캣워크와 벽 하나 사이를 두고 백스테이지에서 발휘되는 어떤 힘이 여러분에게 느껴진다면? 패션쇼의 절대 권력으로 떠오를 새로운 힘을 체험하고 싶다면 스타일리스트에 주목하시길! <마드모아젤C>의 포스터에 표기된 카린 로이펠트의 몇 마디 문장에서 흥분이 느껴지지 않나? “나는 옷을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생명력을 얻는지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