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셀과 팬톤

미술 시간에나 들었던 이름들이 패션 예술주의를 배후에 둔 채 새록새록 떠오르고 있다. 그야말로 하늘 아래 모든 색채가 당신이 입은 옷 한 벌에 있다!



패션이 미술책과 화랑에 이토록 집착한 때가 또 있었나. 지금까지는 유명 예술가의 이름을 몇 개쯤 능숙하게 발음하는 게 패션 인텔리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번 시즌만큼은 아니다. 그건 기본 중의 기본이 됐다. 떠오르는 동구권 신인 모델들의 이름을 외우기보다 이국적인 예술가 이름들을 빨리 꿰뚫어야 한다며 정신 바짝 차리는 패션 기자들이 있을 정도다. 또 프라다, 샤넬, 셀린, 질 샌더 매장 직원이라면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솔깃한 정보(이번 시즌 그 쇼들이 죄다 예술에서 영감을 얻었기에)를 제공하겠다는 사명감에 불타 예술가의 이름을 달달 외울 것이다. 여러분도 이번 시즌 패션을 즐기는 데 일말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초 미술사 공부부터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그러기에 앞서 퀴즈부터 풀어보시라. 첫 번째 퀴즈(엄격한 듯 친절하고, 침착한 듯 똑 부러진 성우의 내레이션으로 생각하며 읽어보시라)! 1858년부터 1918년까지 살았던 미국의 화가이자 색채 연구가. 색의 삼속성을 척도로 체계화시킨 채 자신의 이름을 따 ‘땡땡 표색계’나 ‘땡땡 색상환’을 만들었다. 누구일까? (이쯤에서 효과음으로 째깍째깍 시계 초침 소리) 인터넷 검색 찬스? OK! 정답은? “먼셀!” 딩동댕! 두 번째 문제. 1963년 로렌스 허버트가 창립한 미국의 세계적인 색채 연구소이자 색상 회사. 수많은 색에 고유 번호를 붙여 만든 컬러 매칭 시스템으로 명성을 날렸다. 세상에서 가장 과학적인 색채 언어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각종 시각 예술 분야뿐 아니라 디지털 기술, 건축, 패션, 도료 등 산업 전반에서 표준 색채 언어로 쓰인다. 어느 회사일까? “정답, 패턴!” 땡! 마지막 힌트. 2000년부터는 ‘올해의 색’을 발표하고 있다. “음, 팬톤?” 정답!

패션 하우스가 어느 한 시즌을 위해 생산하는 고급 옷의 대다수는 ‘프리미에르 비종’이라는 소재 박람회에서 시작된다. 이번 시즌 멀티컬러 의상들도 방금 전 여러분이 맞춘 먼셀 색상환이나 팬톤 컬러칩에서 비롯됐다고 보면 된다. 포스트잇만 한 팬톤 컬러칩들을 하나둘 떼서 이 옷감 저 옷감과 맞춰보는 순간, 갑자기 아이디어가 생각났다는 듯 후세인 샬라얀은 다섯 벌의 컬러칩 의상으로 올봄 컬렉션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질 샌더는 팬톤 칩으로 이런저런 작업을 하다 뭔가 못마땅한 나머지 자잘한 칩들을 마구 구겨버린 듯 살짝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디올 화원에 등장한 가느다란 멀티컬러의 가로줄 무늬는 한복의 색동과 영락없이 닮았다(알베르타 페레티도 비슷하다). 눈에 팍팍 튀는 원색의 배치가 있는가 하면, 블루와 그린, 바이올렛을 넘나들며 그 사이사이에 낀 미묘한 색을 뽑아낸 두 종류의 봉긋한 드레스는 가로로 쌓아놓은 팬톤 컬러칩 뭉텅이가 걸어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19세기 로얄 탈렌스의 비비드 색조와 은은한 그러데이션이 돋보인 샤넬은 어떤가! 라거펠트가 아이디어를 얻은 로얄 탈렌스는 전문가용 유성물감을 생산하는 회사로, 내친김에 그는 이번 시즌을 위해 무려 550가지 톤을 사용해 프린트를 개발했다. 현대 포토 프린트 기술로만 가능한 색감이기에 올봄 샤넬 의상으로 빼입고 다닌다면 색채의 화신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질 듯. 후세인 샬라얀도 프리폴 컬렉션에 컬러 팔레트를 사용했다. 샤넬이 화가의 아틀리에나 물감 회사의 팔레트에서 시작됐다면, 샬라얀은 메이크업룸에서 출발한 셈. 백스테이지 화장대 위에 널려 있던 색색의 메이크업 팔레트들을 실사 촬영해 프린트로 완성했으니 말이다. 올봄을 위한 수백 벌의 옷 가운데 먼셀과 팬톤에서 비롯된 옷을 찾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삼류 나이트클럽 천장에서 어지럽게 회전하는 디스코 볼처럼 무지갯빛을 발하며 나타난 푸치의 멀티컬러 미니 드레스는 먼셀 색상환의 여체 버전. 지방시 쇼에서 플리츠 스커트가 길게 휘날릴 때 부챗살처럼 사이사이에 낀 색색의 스팽글은 어두침침한 무대에서 눈부신 조명을 대신할 만했다. 또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 드리스 반 노튼 등은 그러데이션 프린트 기법을 독특한 문양에 적용해 장관을 선사했다. 미니 드레스 한 벌 위에 일곱 빛깔 무지개를 띄운 프라다, 만화경이나 프리즘처럼 몽환적인 프린트로 깊은 인상을 남긴 프린 등도 마찬가지다. 이 상황을 만화로 묘사한다면, 모기향 기호가 눈동자에서 뱅글뱅글 돌 것 같지 않나? 먼셀과 팬톤! 학창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추억의 이름들이 이번 시즌 유행의 배후에 있다. 그러니 10대들의 미술 교재를 펴본다면 깨알 같은 스타일 재미를 다시 찾을 수 있겠다. 이런 총천연색 옷들은 디자이너들의 봄맞이 컬렉션에 등장해 패션 예술주의를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자, 550개 빛깔로 도배된 샤넬 원피스나 후세인 샬라얀의 컬러칩 드레스 차림으로 외출했다고 치자. 당신을 향한 주위의 감탄사는? “뷰리풀, 원더풀, 컬러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