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이 일본으로 간 까닭

중국 성장이 주춤한 사이, 일본으로 패션계 관심이 다시 쏠리고 있다.
도쿄에서의 의미심장한 기획을 마련하고 현지 미학에 매료돼 영감을 얻는 그들.
패션이 일본으로 간 까닭은?



12 월 11일 밤, 도쿄. 현대적이고 우아한 전 세계 디올 숙녀들이 그 유명한 료고쿠 국기관으로 초대됐다. 육중한 스모 경기 대신 디올 역사상 첫 프리폴 패션쇼를 관람하기 위해서다. 쇼에 앞서 디올 회장은 끈질긴 경제 불황에도 디올이 최근 몇 주간 일본에서 놀랄 만한 판매 성장을 보였다고 기자들에게 전했다. 물론 디올과 도쿄의 인연은 톨레다노 회장의 말처럼 ‘최근 몇 주간’만 이뤄진 건 아니다. 무슈 디올은 이미 50년대에 교토 명물인 타츠무라 공방의 직물을 썼고, 다이마루 백화점에서 꾸뛰르 의상도 팔았다. 또 미치코 공주는 황실 혼례를 위해 드레스 세 벌을 맞췄다.

이쯤에서 21세기 무슈 디올, 라프 시몬스로부터 일본에 ‘꽂힌’ 이유를 들어보자. “1995년 첫 도쿄 여행부터 남성복 브랜드로 데뷔한 2005년까지 이 도시의 재미있고 컬러풀한 스트리트 패션과 절충적 스타일 감각에 끌렸어요.” 그는 일본 패션과 도쿄의 미래적 이미지의 충돌에서 이번 컬렉션의 영감을 얻었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일본 거물 디자이너들의 건축적 접근에서도 영향을 받았노라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도쿄에는 패션과 관련해 건축적이고 미래적인 뭔가가 늘 도사리고 있어요. 게다가 도쿄에 가지 않고 카와쿠보, 야마모토, 미야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혁신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이 늘 흥미로웠죠.”



도쿄의 그 유명한 스모 경기장이 디올 패션쇼장으로 변신했다! 이곳을 찾은 일본 현지 셀러브리티들과 해외 패션 스타들. 그리고 보테가 베네타의 토마스 마이어는 일본 근대 건축물을 보존하기 위해 도쿄 오쿠라 호텔에 들렀다.

일본 디자이너들의 건축적 접근이 아닌, 일본 건축 그 자체는 보테가 베네타의 토마스 마이어의 마음마저 들었다 놨다 하는 중이다. 건축가의 아들인 마이어는 오래전부터 일본 근대식 건물에 감탄해왔다.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꼽는 건물은 오쿠라 호텔(파리 <보그> 편집장 엠마뉴엘 알트도 얼마 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이 호텔 로비 사진을 올렸다). “50년대 이후 지은 일본 근대 건축물 중 가장 뛰어납니다.” 50~60년대에 지은 근대 건축물 중 몇몇이 2020 도쿄올림픽 준비 일환으로 허물어질 위험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득달같이 도쿄로 날아왔을 정도. 내친김에 마이어는 일본의 역사적 랜드마크들을 보존하자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보테가 홈페이지에 오쿠라 호텔을 대학살로부터 구원하자는 취지의 영상과 사진, 다이어리를 게재한 것.

 

또 가나자와 21세기 현대 미술관 심포지엄(위기에 처한 일본 근대 건축에 대해 논의)도 후원했다. “일본 근대 건축의 유산을 기리고 인식을 높이기 위한 일입니다”라고 보테가 하우스는 전한다. “일본 건축과 인테리어 디자인 매거진 와 파트너십으로 특별 기획도 진행할 겁니다.” 이를 진두지휘한 마이어는 “훌륭한 디자인은 유행을 타지 않는다고 믿습니다”라고 덧붙인다. “미래 문화유산의 일부라는 관점에서 다음 세대가 이런 상징성을 띤 건축미학을 직접 느낄 수 없다면 큰 손실이죠.”

보시다시피 유럽 최대 패션 가문이 지구 반대편 열도에서 첫 프리폴쇼를 개최했다. 옆 동네 패션 가문의 수장 역시 현지 건축물 보존을 위해 공들이는 중. 이런 분위기 속에 일본 문화 흔적이 역력한 봄옷의 존재감은 강렬할 수밖에. 먼저 사라 버튼은 최상급 기모노 옷감에 사무라이 복장을 혼합해 알렉산더 맥퀸식 드라마를 완성했다. 올봄 트렌드 다트판에서 70년대 히피라는 정중앙에 화살을 꽂은 구찌는 어떤가. 프리다 지아니니의 화살촉엔 저패니즘 꼬리표가 함께 나부꼈다. 기모노 프린트는 물론 유카타 입는 방식까지 차용한 것. 또 마르니 20주년 기념 컬렉션에는 늘 그렇듯 추상적 꽃무늬 옷 사이에 가라데 유니폼을 응용한 소박하고 넉넉한 마르니즘이 존재했다. 그런가 하면 기욤 앙리 같은 젊은이가 상표 ‘까르벵’을 가타카나로 표기하자 일본 관객들은 특유의 호들갑스러운 반응으로 “가와이!”를 연발했다. 이 외에도 오비 벨트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생로랑과 토즈, 파우스토 푸글리지, 모스키노, 아이스버그, 페이 등이 선보인 하라주쿠 스타일 등등.

2011년 이 열도에 재난과 악재가 엎친 데 덮쳤던 시절을 기억하는지. 현지인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자존감을 회복시키기 위해 일본 국내외 패션계가 힐링 프로젝트들을 기획한 이후 다시 일본으로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리하여 한동안 붉은 대륙으로 비행기를 예약하던 패션 디자이너와 대형 하우스들이 아시아 패션 성지인 도쿄 나리타 공항으로 목적지를 변경하는 분위기. 3년 만에 도쿄에 착륙한 라프 시몬스는 일본에 푹 빠진 눈치다. “사람들이 패션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데 아주 자유롭다는 사실이 무척 맘에 들어요. 물론 다른 도시에서도 20년간 패션이 발전했지만, 제가 처음 도쿄에 왔던 때를 떠올리면 이만한 곳은 없었죠. 완전히 <블레이드 러너> 같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