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의 주연을 차지한 채소

테이블의 주연이 바뀌었다. 두툼한 몸집 속 냇물처럼 소 완전체 흐르는 소고기 육즙과 딱딱한 갑옷 속 새하얀 랍스터 살은 여전히 아름답지만, 지금 테이블 상석에 앉아 있는 건 변방에 머물던 채소다.

테이블의 주연이 바뀌었다. 두툼한 몸집 속 냇물처럼 소 완전체 흐르는 소고기 육즙과 딱딱한 갑옷 속 새하얀 랍스터 살은 여전히 아름답지만, 지금 테이블 상석에 앉아 있는 건 변방에 머물던 채소다.

<보그> 편집장은 지난 루이 비통 리조트 컬렉션 출장에서 자신이 채식주의자라고 밝힌 적이 있는지 잠시 고민했다. 시즌마다 런웨이에 쏟아지는 새로운 룩처럼, 날마다 만찬 테이블에 새로운 채소가 올라왔던 것. 채소와 다른 식재료의 비율을 따지자면 9:1 정도. 줄줄이 채소 요리 서빙이 이어졌고, 마지막 접시에서 약간의 고기가 얼굴을 내밀었다. 접시 가장자리에 머물며 시각적으로나 건강학적으로 고기를 서포트했던 채소의 반란과 다름 아니었다. 매일매일 채소로 배를 채우던 에디터들은 식탁에서 뱀 나오겠다고 농담을 했지만 캘리포니아 햇살을 듬뿍 받고 자란 제철 채소의 맛은 세계 그 어떤 진미보다 훌륭했다. 심지어 채소는 소화되면서 체내 불순물을 껴안고 나가는 듯했고 가느다란 <보그> 편집장의 몸은 더 가뿐해졌다.

지난해 말 미국레스토랑협회가 전망했듯 2016년 미식 트렌드 루키는 채소다. 접시에서 고기와 채소의 비중이 역전되었다는 것. 양상추를 넘어선 다양한 채소의 출현, 메뉴판 샐러드군에 갇혀 있던 채소의 탈출. 이 모든 변화보다 놀라운 건 채소가 그 자체로 너무 맛있어졌다는 사실이다. 건강에 대한 염려나 다이어트 욕구, 육류를 바라보는 윤리적인 시선 때문이 아니라, 정말 맛있기 때문에 하는 당연한 선택. 사실 채소는 일상적으로 먹던 식재료이니 ‘재발견’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얼마 전부터 사람들의 레스토랑 추천사도 달라졌다. “서래마을 르 쁘엥 가보세요. 그릴 가지 진짜 맛있어요. 와인이 술술 넘어가요.” “스와니예는 채소가 진짜 강한 듯. 음식이 하나같이 너무 예뻐요.” 채소는 어떻게 이렇게 예뻐진, 아니 맛있어진 걸까.

이 변화의 서막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미슐랭 스타 도합 33개에 빛나는 셰프 알랭 뒤카스가 있다. 2년 전 그는 자신의 레스토랑 ‘호텔 플라자 아테네’에서 고기 메뉴를 줄이고 채소, 곡물, 해산물을 늘리겠다고 선언했다. 지구의 자원은 줄어들고 있고 좀더 윤리적이고 공정한 소비를 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좀더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메뉴의 필요성도 덧붙였다. 이는 오뜨 퀴진이 채소를 달리 보기 시작한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하지만 뒤카스의 선언은 채식주의 외골수로 가는 변화는 아니었다. 전 세계 그의 레스토랑은 여전히 끝내주게 맛있는 고기 요리를 내놓는다. 다만 더 많은 종류의 채소를 더 다양한 방식으로 요리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채소는 날것으로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어요. 신선해야 한다는 어떤 고정관념 때문이었죠. 하지만 축 처진 상태에서 가장 맛있는 채소라면 그 상태로 먹어야 해요.” 모던 브리티시 레스토랑 우물우물의 윤영섭 셰프는 식재료에 대해 높아진 관심이 자연스럽게 채소를 제대로 요리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우물우물 접시에서도 갑오징어와 엔다이브, 돼지고기와 비트는 마치 파트너처럼 서로의 부족한 면을 채우는 동시에 독립적이다. 쌉쌀한 풍미의 엔다이브, 적당히 익혀 탄력 있는 비트는 마치 향수의 3단계 노트처럼 입안에서 단계별로 다른 맛을 낸다. 윤영섭 셰프는 여기에 또 하나의 고정관념을 깨는 중이다. 채소를 먹었다고 해서 허기를 느껴서는 안 된다고 본 것. 감자를 으깨 올리고 버섯으로 속을 꽉 채운 셰퍼드 파이는 일상을 살아가는 충분한 에너지원이 된다. 채소는 조리 방법에 따라 충분히 포만감을 줄 수 있는 재료다.

직접 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오키친 스스무 요나구니 셰프는 셰프들의 채소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 그리고 건강에 대한 관심이 어우러져 채소가 테이블의 주연이 되었다고 말한다. 채소를 셰프들의 영감의 원천으로도 꼽는다. “음식을 처음 대하는 태도는 남자와 여자의 만남과 똑같아요. 일단 눈으로 보고 향기도 맡아봐야 먹어보고 싶다, 대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잖아요. 고기 종류가 아무리 다양해도 색깔, 향기, 맛에 있어 채소의 스펙트럼을 따라갈 순 없어요. 본질은 그대로 두고 형태만 바꿀 수 있는 식재료도 채소가 유일해요.” 채소는 차갑게도 뜨겁게도 먹을 수 있고, 거품이나 스노우로 만들거나 젤라틴으로 굳힐 수도 있다. 60년대 프랑스 고전 요리에서 70년대 누벨 퀴진으로 변화를 주도했던 것도 변신의 귀재 채소였다. 고기가 일관성 있는 굵직한 맛을 전해준다면 채소는 자극에 따라 매번 다른 매력을 선보인다.

셰프들이 채소를 재료로 벌이는 경계 없는 실험은 테이블의 주연이 당분간 채소임을 증명해 보일 것이다. 다른 맛과 가장 잘 어우러지는 맛으로 꼽히는 쓴맛에 쏠리는 관심도 채소의 인기를 이어나갈 것으로 보인다. 즉각적인 단맛이 주는 부작용을 우리는 충분히 경험했다. 채소라는 미식 트렌드 한가운데는 결국 ‘식재료 본연의 맛’이라는 키워드가 있다. 한동안 우리는 입속에 들어오는 음식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출발점을 잊고 살았다. 셰프들은 자신들의 본분이 ‘뿌리에서 줄기까지’ 식재료 본연의 맛을 표현해내는 것이라는 걸 환기하기 시작했다. 그 맛있는 초록빛 여정을 맛보며 우리는 앞으로 연신 말하게 될 것이다. “와, 지금까지 살면서 먹어본 당근 중에 제일 맛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