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속 문화적 전유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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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속 문화적 전유 논란

2018-04-03T18:38:08+00:00 2018.04.03|

세상 모든 것에서 영감을 얻는 패션. 때로 그 영감의 원천이 문제가 된다. 패션 속 ‘문화적 전유’를 둘러싼 논란.

초승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토끼가 노니는 동화적 상상? 가냘픈 실루엣에서 느껴지는 시적 풍경? 패션 운동가이자 아랍계 여성인 셀린 세만(Céline Semaan)에게 초승달은 아랍 문화를 상징한다. 그렇기에 2월 27일 파리에서 열린 디자이너 마린 세르(Marine Serre) 컬렉션을 본 세만의 머릿속은 물음표가 가득했다. 벨기에 출신의 디자이너가 선보인 컬렉션에는 초승달 프린트의 보디수트가 가득 등장했기 때문이다.

백인 모델이 아랍 문화를 상징하는 초승달 프린트가 가득한 보디수트로 얼굴과 온몸을 가린 채 등장하는 모습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 세만은 곧 <뉴욕 매거진>을 통해 파리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인 디자이너 세르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밝은 피부의 모델이 히잡을 착용한 건 충격적이었습니다. 많은 무슬림 여성들은 히잡을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문화에선 중요한 상징성을 지닌 패션 아이템을 백인 여성이 선택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놀라운 일이었다.

“제게 있어 그건 히잡이 아니라 스포츠웨어와 같은 후드였습니다. 마르지엘라도 예전에 여성의 얼굴을 감춘 채 쇼를 선보인 적 있죠. 여기에 스키와 스케이트 그리고 이슬람 레퍼런스도 더했습니다.” 의문을 제기한 세만과 직접 통화에 나선 세르는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밝혔다. “파란 눈의 백인 여성에게 그 룩을 입히면서 이렇게 말하고자 했습니다. ‘왜 히잡을 쓰는 걸 두려워해야 하지?’” 초승달을 자신의 브랜드 로고로도 사용하는 세르는 결코 부정적 의미가 아니었다고 자신을 변호했다.
세르의 초승달과 히잡처럼 자신이 속하지 않은 문화의 상징 혹은 스타일을 차용하는 것을 누군가는 ‘문화적 전유(Cultural Appropriation)’라 말할지 모른다. 패션을 비롯한 대중문화 수용자들이 원류의 내용이나 이미지 등을 차용해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임의대로 사용하는 행위 말이다. 구글에서 이미지를 검색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케이티 페리가 흑인들의 헤어스타일인 ‘콘로(Cornrow)’를 한 모습, 리한나가 이집트 여왕인 네페르티티를 ‘코스프레’한 이미지 등. 다양한 결이 담긴 타인의 문화를 단순히 이미지를 위해 차용하는 것이 문화적 전유다.

패션계의 문화적 전유에 대한 의심은 끊이지 않는다. 2016년 9월 마크 제이콥스의 2017년 봄 컬렉션이 끝나자마자 인터넷은 이 주제로 들끓었다. 색색의 드레드록(Dreadlock) 헤어스타일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보이 조지 등 클럽 키즈에게 영감을 얻었지만, 흑인 문화에서 드레드록은 특별한 의미를 지녀서다. 인스타그램에서 ‘댓글부대’와 싸우던 제이콥스는 결국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이 외에도 아프리카에서 영감을 얻은 발렌티노, 캐나다 원주민에게서 아이디어를 차용한 디스퀘어드2도 문화적 전유라는 명목하에 비판을 받았다. 지난 1월 미국 원주민 문화를 바탕으로 컬렉션을 완성한 꾸뛰르 디자이너 주하이르 무라드(Zuhair Murad) 역시 비난의 대상이었다. 미국 <보그> 역시 이 점을 꼬집었다. “‘인디언 서머’라는 쇼의 주제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미국 원주민을 ‘환상적 시선에서 바라보았다’는 보도자료 역시 떳떳하진 못했다.”
돌이켜 보면, 80~90년대 우리를 감동시킨 패션 모먼트에는 문화적 전유의 기운이 가득했다. 존 갈리아노는 아프리카, 아시아, 인디언 등에서 얻은 영감을 거르지 않고 맘껏 사용했다. ‘에스닉’이라는 명목 아래 소수민족의 스타일을 사용하던 알렉산더 맥퀸의 컬렉션도 떠오른다. <보그>를 비롯한 패션지 역시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반면, 문화적 전유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시선도 존재한다. <비즈니스 오브 패션>의 기자 오스만 아메드는 패션에서는 다양한 문화가 필요하다고 남겼다. “환상과 호기심, 재해석을 받아들이는 자유를 차단한 채, 경계를 닫아버리는 것만큼 퇴보적인 것이 어디 있나!”

그렇다면 문화적 전유라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선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모든 낯선 여행지에서의 영감을 컬렉션에 활용하는 건 피해야 할까? 예를 들어 이번 가을 컬렉션에서 마라케시에서 영감을 얻은 자크무스는 그곳의 전통이나 문화 대신 컬러와 분위기를 흙빛 드레스에 녹여냈다. 인도와 발리 등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로에베의 조나단 앤더슨은 실제로 그곳에서 구한 소재를 컬렉션에 소개했다. 영감을 얻은 문화의 개성은 그대로 살린 채 자신만의 감각을 더하는 것이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아울러 예민한 주제는 진지한 숙고를 거듭해야 한다. 가령 드리스 반 노튼이 인도의 자수 공장과 함께 완성한 옷은 여전히 찬양받기에 마땅하다. 그 옷엔 낯선 문화의 빛나는 기술과 아름다움이 그대로 담겨 있으니 말이다. 다만, 누구도 그 옷에 ‘에스닉’ 혹은 ‘오리엔탈’ 같은 시대착오적 표현을 하지 않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