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케시

Fashion

마라케시

2018-05-29T17:32:24+00:00 2018.06.01|

핑크, 메디나, 낙타, 리야드, 자르댕 마조렐, 그리고 젤리즈.

“마라케시를 방문한 건 쇼크였습니다. 이 도시는 저에게 컬러를 가르쳐주었습니다. 마라케시를 알기 전에는 모든 게 블랙이었죠.” 패션 골수팬이라면 마라케시를 북아프리카 어느 도시가 아니라 이브 생 로랑이 생전에 사랑하던 곳으로 기억할 것이다. 마라케시 공항을 빠져나오자마자 생 로랑이 말하는 ‘컬러’가 무엇인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라케시를 ‘La Ville Rouge’, 즉 붉은 도시라고도 해요.” 매캐한 연기가 차창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밴 안에서 우리와 함께한 프로듀서가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점토를 빚어놓은 듯 네모반듯한 핑크빛 건물이 야자수와 함께 눈앞을 휙휙 지나갔다. 마라케시의 중심, 구 시가지 메디나(Medina)로 들어갈수록 그 색채의 스펙트럼이 다양해졌다. 메디나 중앙에 자리한 거대한 제마 엘프나 광장에서는 총천연색 향신료가 우리를 반겼다. 또 미로처럼 끝을 알 수 없는 재래시장 수크(Souk)에서는 더 다채로운 컬러 세상을 만날 수 있었다. 모로코 전통 찜 요리 타진(Tajine)이나 쿠스쿠스(Couscous)를 담아내는 독특한 모양의 도기, 발뒤축을 접어 신는 신발 바부슈, 색색의 실로 짠 울 모자, 폼폼 장식이 달린 라탄 백이 색깔별로 우리 눈을 황홀하게 했다.

마라케시를 알아갈수록 생 로랑이 이곳을 영감의 원천이라고 부른 이유를 깨닫기 시작했다. 모로코 옆에 자리한 프랑스령 알제리에서 태어난 그가 이국적인 요소를 놓치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그는 아라비아인이 착용하는 두건이 달린 겉옷 버누스와 모로코의 컬러풀한 스트라이프 울 원단을 컬렉션에 녹여내곤 했다. 마라케시를 화려하게 수놓은 꽃 부겐빌레아에서 영감을 얻은 꽃 자수 판초를 선보이는가 하면, 본인 스스로는 모로코의 전통 의상인 젤라바(아래위가 붙은 판초 스타일 가운)를 입고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이곳의 향취에 매혹된 그처럼 <보그> 팀도 저렴하고 질 좋은 물건이 가득한 시장에서 젤라바와 바부슈를 잔뜩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마라케시에 도착하자마자 생 로랑의 마조렐 정원부터 들렀어요.” 런던에서 날아온 모델은 짐을 풀기도 전에 푸른색 ‘마조렐 블루’로 가득한 마라케시의 명소로 달려갔다고 고백했다. 생 로랑의 파트너 피에르 베르제는 1980년 프랑스 아티스트 자크 마조렐이 설계한 집이 허물어지기 전에 이곳을 구입했다. 그리고 둘이서 이곳을 아름답게 가꿔 별장으로 사용했다. “생 로랑과 제가 마라케시를 방문하기 전에는, 이곳이 우리에게 두 번째 집이 될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베르제는 무슈 생 로랑의 재를 이곳에 뿌리기도 했다(생 로랑의 장례식에서 자신 또한 모로코 야자수 아래 같이 묻히겠다고 한 베르제의 약속은 지켜졌을까?). 이곳과 더불어 근처에 작년 10월 개관한 이브 생 로랑 뮤지엄도 이제 마라케시에 갈 때 꼭 방문해야 하는 명소가 되었다. 생 로랑이 디자인을 시작한 1962년부터 은퇴를 선언한 2002년까지 40년에 가까운 디자인 인생을 총망라한 아이템 1,000여 점이 이곳에 있다. 그 유명한 몬드리안 프린트 등은 세계 어느 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진귀한 컬렉션이다. 빼놓을 수 없는 건 유명 건축가 Studio KO가 만든 박물관 그 자체이다. 테라코타로 덮인 외관을, 잔잔한 흙빛으로 덮인 마라케시 건물과 잘 어울리도록 한 배려가 돋보인다.

마라케시에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리자, 우리 팀은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뚫고 메디나 근처의 전통 식당인 다르 에스살람(Dar Essalam)으로 향했다. 이곳은 모로코를 배경으로 한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에서 제임스 스튜어트와 도리스 데이가 화려한 타일 벽을 배경으로 식사를 한 곳이다. 어둑어둑한 테이블에서 모로코식 민트 티를 마실 때쯤, 한 남자가 태슬이 달린 모자를 상모돌리기 하듯 힘차게 돌리며 다가와 캐스터네츠 모양의 전통 악기 크라켑을 연주했다. 흥겨운 박자에 전 세계 각지에서 온 스태프들도 몸을 흔들 수밖에. 모로코의 마지막 밤, 전통 가옥 리야드(Riad) 호텔을 사랑방 삼아 다시 모인 스태프들은 사진가가 파리에서 가져온 샴페인, ‘루이 로드레 크리스탈’을 홀짝이며 여행의 아쉬움을 달랬다. 사막에서 낙타를 탄 이야기, 차가 들어오지 않는 좁은 골목을 리어카로 수십 개의 트렁크를 옮긴 이야기, 민트 티에 각설탕이 손가락 두 마디 정도는 들어가야 맛이 난다는 이야기, 낙타 고기로도 타진을 만들어 먹는다는 이야기 등등… 마라케시에서의 매 순간은 모두에게 진한 핑크빛 추억이 되었음은 물론. 그리고 우리는 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공항으로 향했다. 엄청나게 길게 늘어선 줄을 지나 간신히 도착한 수하물 검색대에서 마라케시의 마지막 빛깔을 만났다. “왜 표정이 슬퍼 보이나요? 웃어봐요. 이렇게요!” 지친 여정의 끝에서도 피식 웃음 짓게 하는 모로코 사람들의 경쾌한 유머. 그 친절하고 생생한 마음의 컬러를 가슴에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이 매력적인 도시의 컬러가 내 가슴 깊이 칠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