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석과 문채원이 들려주는 핑크빛 가득한 연기
영화 〈그날의 분위기〉에서 유연석과 문채원은 우연히 기차 옆자리에 앉아 하룻밤을 두고 밀당을 벌인다. 두 배우가 들려주는 핑크빛 가득한 연기 스캔들이 한 번 더 해피 엔딩을 꿈꾸게 한다.
<그날의 분위기> 예고편은 ‘삐’투성이다. KTX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남녀. 남자는 말한다. “저 오늘 웬만하면 그쪽이랑 삐~삐~삐~” 상업적인 광고도 아니고 더티한 욕설도 아니다.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 ‘잔다’가 어떤 뜻으로 사용되었는지 몸소 보여주고 있을 뿐. <그날의 분위기>는 KTX에서 처음 만난 남녀가 하룻밤을 걸고 벌이는 밀당 연애담을 그린 영화다. 우리가 평소 꿈꾸는 지상 최대 로맨틱 스캔들, ‘우연’히 ‘인연’을 만나는 이야기. 하지만 KTX에서 또래의 남녀가 옆자리에 앉을 확률, 이상형은 아니더라도 객관적으로 훈훈한 비주얼일 확률, 그런 상대방에게 ‘이름이 뭐예요’도 ‘커피 한잔해요’도 아닌 ‘자자’는 말을 들을 확률은 얼마일까? 로맨틱 코미디는 현실의 탈을 쓴 판타지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지만 그래도 기대하게 되는 설렘. 2016년 새해를 여는 로코의 주인공은 유연석, 그리고 문채원이다. 조규장 감독은 “둘의 외모가 굉장히 잘 어울리는 동시에 일반인들에게 친근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캐스팅 이유를 밝혔다.
유쾌 경쾌 알콩달콩 흘러가는 로맨틱 코미디답게 두 배우의 캐릭터는 명확하다. 문채원은 최연소 코스메틱 마케팅팀장이자 안 하는 거 참 많은 ‘철벽녀’ 수정, 유연석은 유능한 스포츠 에이전트이자 작업 성공률 100%을 자랑하는 ‘맹공남’ 재현이다. 연애 캐릭터를 10가지로 나눴을 때 1과 10에 각각 세워놓아야 할 정도로 정반대 성향을 가진 인물들이다. 하지만 두 배우 모두 시나리오를 읽고 끌린 지점은 ‘편안함’이었다. “개인적으로 장르와 상관없이 보면서 웃을 수 있는 요소가 있는 작품이 좋더라고요. 해보지 않은 바람둥이 캐릭터에 대한 시도도 있었고요.(유연석)” “자연스러움에 끌렸어요. 너무 드라마틱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연기와 자연스러운 작품을 해보고 싶었죠.(문채원)” 캐스팅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시나리오를 읽어 내려간 유연석은 시나리오를 덮자마자 문채원을 떠올렸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만난 적도 없거든요. 그런데 누구 캐스팅했느냐고 물었더니 채원 씨가 됐다는 거예요. 신기했고 재미있을 거 같았죠. 그래서 바로 하겠다고 했어요.” 재미있는 ‘로코 한 편’ 보고 싶던 신의 계시가 유연석의 직감으로 발현된 것인지도 모른다.
두 배우의 운명적 첫 만남은 ‘중국집’에서 이뤄졌다. 문채원의 첫인상은 유연석의 생각보다 여성스러웠고, 유연석의 첫인상은 문채원의 예상보다 섬세했다. 딤섬이 테이블에 올랐다. 서로를 파악한 두 배우는 곧바로 ‘이따만한’ 시나리오를 꺼내 들고 각자 연구한 캐릭터에 대한 얘길 시작했다. ‘100분 토론’을 방불케 하는 이 캐릭터 토크는 촬영 현장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둘이 따로 밥도 먹고 맥주도 마셨다. 친해져야 연기가 편해지는 차원의 노력은 아니었다. ‘수정’과 ‘재현’ 각자 입장에서 할 얘기가 많았다.
세 달 가까이 이어진 <그날의 분위기> 지방 촬영은 워크숍이자 회식이기도 했다. 유난히 고된 촬영이 있던 날이면 유연석은 맛집 리스트를 뽑았다. <꽃보다 청춘>에서 식당을 선별해내는 놀라운 능력을 이미 선보인 바 있던 그다. “리스트를 보여주고 ‘뭐 먹을래?’ 하면 채원이가 꽂히는 게 있어요. 바로 예약하는 거죠. 장흥에서는 한우삼합을 먹었고, 여수에 갔을 때는 장어 샤부샤부를 먹었어요. 감독님이랑 채원이랑 맛있는 음식 먹고 술 한잔하는 시간이 가장 즐거웠던 거 같아요.(유연석)” “맞아요! 한우삼합 진짜 맛있었는데…” 문채원은 한우삼합의 세 가지 구성 요소를 기억해내느라 한참을 골몰했다. 술과 맛과 멋과 함께 시나리오는 다듬고 또 다듬어졌다. 조규장 감독은 마지막 대본의 클라이맥스를 비워놨다. 빈칸을 채운 건 결국 유연석과 문채원이었다. “이 정도로 시나리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건 처음이었어요. 오빠처럼 의견을 많이 내는 배우도 만나본 적 없었고요. 굉장히 주체적인 작업이었어요.(문채원)” 문채원은 연기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한 시간이자 배운 게 정말 많은 기간이었다고 말했다.
<굿 닥터>에 함께 출연한 주원의 증언에 따르면 문채원은 대본에 메모가 빼곡한 ‘학구파’다. 유연석은 문채원이 ‘장면 구성을 잘해온다’고 말했다. “그냥 습관이에요. 처음 대본을 보면서 ‘이건 표현해야 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적어둬요. 동물적인 감각으로 연기하는 배우들도 있지만 저는 재능이 많지도 않고 현장에서 그 느낌을 놓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메모만 봐도 제가 뭘 하려고 하는지 보일 수 있도록 데뷔 초에 이런 습관을 들였어요.” 역시 ‘연구파’에 속하는 유연석은 이번 영화에서만큼은 낯선 시도를 했다. 시나리오의 날것 같고 정제되지 않은 느낌이 좋았고 이를 살려보고자 즉흥적인 상황에 자신을 놓아본 것.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재현’처럼 유연석은 현장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보려고 했고, 정형화된 삶을 사는 ‘수정’처럼 문채원은 평소대로 꼼꼼하게 준비를 해갔다. 그리고 이 작업 과정은 캐릭터적으로 대단히 ‘잘 붙었다’. 덕분에 <그날의 분위기>는 평소 유연석에게서 상상할 수 있는 뻔뻔함보다 더 빤질거리고, 보통의 문채원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귀여움보다 더 사랑스럽게 나왔다.
사실 <그날의 분위기>를 만나기 전 유연석은 로맨틱한 사랑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건축학개론> 압서방 재욱 선배, 삐뚤어진 사랑을 하는 <늑대소년> 지태는 주인공들의 순수한 사랑을 제대로 방해하는 ‘국민 나쁜 놈’이었다. <응답하라 1994> 칠봉이는 짝사랑이었고, <은밀한 유혹> 성열은 여주인공의 호감을 이용하는 악행의 절정을 선보였다. <상의원>에서조차 왕비의 옷고름 한번 잡지 않는 열등감으로 가득 찬 왕이었다. 하지만 그의 사랑이 이해 가지 않을 감정은 아니었다. 항상 이유가 있어서 어긋났고 상대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선한 얼굴과 날 선 얼굴 사이를 오가며 선보이는 유연석의 사랑은 늘 변방에 머물렀다. 전작에서 보여준 그의 사랑에 응원을 보내진 못해도 고개는 끄덕여졌다. 유연석은 이번 영화에서 비로소 본격 ‘로맨틱’에 나서지만 큰 의미를 두고 있지는 않은 듯 보였다. 그에겐 사랑 역시 사람이 느끼는 무수한 감정 중 하나이다. “감독님은 ‘그냥 쿨하게’ 하자고 하셨는데, 그게 제일 힘들었어요. 사실 전 그렇게 쿨하지 못하거든요.” 이 얘길 하면 저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고민하는 A형 남자 유연석은 ‘재현’처럼 가벼운 연애를 즐기려면 뭔가 상처가 있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시나리오에 그런 내용은 없었지만 사랑에 진정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가 ‘재현’을 이해한 방식이다. 모든 일에는 그 일이 일어나는 이유가 있다. 문채원은 유연석이 연기한 ‘재현’을 두고 “어휴, 현실에 이런 남자 있으면… 어휴” 탄식을 내뱉었다. 사랑에 쿨하지 못한 남자 유연석은 촬영 현장에서 여자 스태프들의 사진을 손수 찍어주거나(그의 가장 큰 취미는 사진이다. 항상 차에 카메라를 가지고 다닌다) 11월 11일에는 빼빼로를 선물하며 ‘다 같이’ 한 번이라도 웃을 수 있는 기분 좋은 하루를 만들어갔다.
고백하지 못하고 후회할 바에야 고백하고 차이는 길을 선택할 남자 유연석은 요즘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에 출연 중이다. 그동안 그는 여러 인터뷰에서 ‘후회하지 말자’가 좌우명이라고 말해왔다. 10년에 가까운 무명 시절에도 좌우명에 충실하게 지내온 그는 서른 살이 되던 해, 20대를 돌아봤을 때도 후회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 가치관은 작품 선택도, 배우가 아닌 ‘안연석(유연석의 본명)’의 삶도 지배하고 있다. “확실히 잘할 수 있는 캐릭터보다 해보지 않은 캐릭터, 조금 다른 장르를 고르는 것도 그 이유인 것 같아요. 안 어울리면 어쩌지 걱정하기보다 작품과 상황이 좋으면 한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뮤지컬도 마찬가지였다. 노래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뮤지컬 출연 경력도 없지만 학창 시절 무대에서 느낀 감동과 짜릿함을 다시 느껴보고 싶은 마음 하나로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안정된 연기를 선보여 까다로운 뮤지컬 팬들로부터 ‘합격점’을 받았다. 커튼콜에서 “성공이야, 오 멋지게 해낸 거야”라고 노래 부르며 등장하는 듀티율 유연석의 얼굴은 요즘 그 어느 때보다 후련하다.
‘수정’ 캐릭터 역시 문채원 실제 성격에는 맞지 않았다. “저는 이런 캐릭터 답답해요. 제가 대범하다는 건 아니지만요. 여성스럽고 소심한 고등학교 친구 한 명이 떠오르더라고요. 마음속에서는 새로운 걸 꿈꾸는데 막상 그런 기회가 오면 소심해지는 친구가 있거든요. 연기할 때 그 친구를 많이 참고했어요. 친구는 몰라요. 시사회 때 오면 알려줘야죠. 헤헤.” 문채원은 어떤 캐릭터든 마음이 갔으면 한다. 연기하면서 주야장천 질문을 던진 건 조규장 감독이 말한 ‘사랑스러움이란 뭘까’였다. ‘수정’이 측은하고 청승맞아 보일 수 있지만 답답한 여자도 눈에 밟히는 여자로 만들고 싶었다. 수정을 빛나는 수정으로.
한동안 문채원은 능동적인 캐릭터에 끌렸다. <최종병기 활>에서는 직접 활시위를 당기는 조선의 여인이었고, <바람의 화원>에서는 남장 여자를 사랑하는 주체였다. <굿 닥터>는 또 어떤가. 수술을 집도하며, 서번트 증후군을 앓는 후배를 따뜻이 끌어안았고, <오늘의 연애>에서는 모든 사건의 중심에 서서 이야기를 끌고 나갔다. 단아함, 여성스러움, 조신함 같은 단어가 떠오르는 선이 고운 얼굴과 얼기설기해서 현실감 있는 목소리.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아 오는 배신감이 문채원을 좀더 비범하게 만들어왔다. 능동성에 움직이던 문채원은 단편영화 <민우씨 오는 날>을 만나고 수동적인 캐릭터는 재미없다는 편견을 내려놨다. <민우씨 오는 날> ‘연희’는 누군가가 계속해서 그녀를 끌어줘야 했지만 그녀의 연기는 보는 이의 마음을 천천히, 그리고 뜨겁게 움직였다. 배우가 가진 본래 이미지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사실 문채원은 연기를 쉽게 하는 타입이 못 된다. 일을 일로 못한다. 역할의 성격이나 중요도와는 상관없다. “<오늘의 연애>에서 까부는 역할도 그냥 편하게 하면 되었을 텐데 그게 안 되었어요. 목숨 걸고, 사활 걸고 하지 않으면 이마저도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어요. 앞으로 이 중압감을 내려놓는 게 목표예요. 늘 생각하는 건 관객들이 저희 영화에서 다른 배우를 안 떠올렸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저는 왜 그게 그렇게 싫을까요. 항상 그 마음으로 작품에 들어가고 인물을 대해요.” <민우씨 오는 날> 강제규 감독은 문채원을 두고 자신이 생각한 접점을 찾아들어온 ‘참 좋은 배우’라고 평했다. <오늘의 연애> 박진표 감독은 문채원 안에는 끄집어낼 괴물이 몇 마리 더 살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전 사실 연기할 때 카타르시스 그런 거 모르겠어요. 아직도 연기할 때보다 관객으로 영화 볼 때가 더 편해요. 다른 배우들은 이제 일로 느껴진다는데, 너무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해서 그런가 봐요.” 문채원은 여전히 하루에 서너 편씩 영화를 보는 시네마 키드다.
유연석과 문채원은 로맨틱 코미디를 판타지적인 로망이면서 현실적인 공감이 담긴 영화라고 말한다. “〈그날의 분위기〉를 보고 지하철, 버스에서 인연을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한 번이라도 품었으면 좋겠어요. 누구나 꿈꾸는 인생의 로맨스일 테니까요.”
<그날의 분위기>는 장르 특성상 ‘그 이후로 둘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혹은 10년 후 여주인공의 흔적을 찾아 발걸음을 옮기는 남자 주인공의 뒷모습을 비추며 끝날 것이다. 아무리 뻔해도 해피 엔딩은 로코물이 이루어줘야 할 필수 엔딩이다. 유연석과 문채원 역시 보통 사람들처럼 우연이 모여 인연이 되길, 그리고 인생이 해피 엔딩으로 끝나길 꿈꾼다. “눈 감을 때 후회하지 않으면 그게 제겐 해피 엔딩이에요(유연석).” “가족끼리 크게 틀어지지 않고 지금처럼만 같이 늙어갔으면 좋겠어요. 지금보다 연기를 더 좋아하고 잘하고 있다면 좋을 것 같고요(문채원).” 그런데 ‘수정’과 ‘재현’은 그날 밤 자긴 잤을까. 그날의 분위기에 달렸다.
- 에디터
- 조소현
- 포토그래퍼
- MOKE NA JUNG
- 스타일리스트
- 이혜영(유연석), 이윤미(문채원)
- 헤어
- 하나(유연석), 수화(문채원)
- 메이크업
- 성혜(유연석), 오윤희(문채원)
- 세트 스타일링
- 박주영(메이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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