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시대의 우아한 고독
패자 없는 한국 극장가에서도 가장 막강한 승자로 점쳐지고 있는 영화 〈밀정〉에서 정작 궁금한 건 스코어가 아니다. 절망의 시대를 산 사람들의 감정과 관계는 어떻게 그려질까? 김지운 감독의 취향, 감성 그리고 사상이 어떻게 대중적이고도 기품 있는 스파이 영화로 직조될까? 그는 평온한 목소리로〈밀정〉을 관통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몇 년에 한 번씩은 김지운 감독을 만날 일이 생기지만, 옷을 직접 준비해달라 요청한 건 처음이다. 대한민국의 영화감독 중 옷장에서 꺼내온 옷을 믿을 수 있는 사람도, 슬리퍼를 신고 운동화를 따로 챙겨 오는 사람도 김지운이 유일할 것이다. 그에게 옷이란 취향의 지도에서 한 뼘 정도 되는 상징적인 땅이다. 이번에 새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김지운은 몇 시에 일어나든 음악을 틀고 커피를 내린다. “늘 우울한 기분이 잠깐 좋아지거든요.” 폭염 특보가 뜬 날에도 따뜻한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한 것보다야 찬 게 낫지만, 아이스커피에는 향이 없으니까요.”
김지운의 영화는 보는 재미뿐 아니라 기다리는 재미가 있다. 그의 영화는 매번 빼어나거나 크게 흥행하진 못했을지언정 매번 달랐고 한 번도 흥미롭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양한 감성과 취향이 정교하게 영화의 뉘앙스를 직조했기 때문에, 좋거나 혹은 나쁘거나 식의 호오로 뭉뚱그려 설명하기에는 할 말이 너무 많았다. 김지운이 종종 스‘ 타일리스트’라 불리는 건 영상미에 몰두하거나 영화언어의 관습을 비틀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인생을 두고 축적된 사적인 감성, 세포 깊숙이 각인된 취향이 대중을 만나는 접점에서 증폭, 곡해, 변주되는 흔치 않은 상황에 대한 낯섦(혹은 신선함)의 표시일 것이다.
김지운식 ‘장르의 여정’은 이윽고 영화 <밀정>에 이르렀다. 귀신같이 연기 잘하는 송강호, 한결 근사해진 공유, 언제나 든든한 한지민 그리고 특별 출연한 이병헌의 존재만으로도 화제가 될 뿐 아니라 극장가의 막강한 승자로 점쳐지고 있다. <밀정>은 일제강점기의 의열단과 밀정을 둘러싼 사건을 그린 영화다. 솔직히 나는 만약 김지운이 끝까지 다루지 않을 소재가 있다면 바로 이 시기라고 생각했다. 픽션과 논픽션으로 수없이 되풀이되고 있는 데다 격양된 지지의 감정이 꽉 들어차 있어 주목받긴 쉬워도 새롭긴 어려울 거라 여겼다. 그러나 김지운은 존재와 관계의 역학에 감성과 취향, 시각을 관통시키며 절망으로 폭발할 듯하지만 텅 비어 있는 역설의 시대를 그린다.
요즘 기분이 어떤가요? 무덤덤해요.(웃음) 이 작업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 배우들이 좋아하면 잘됐나 보다, 아쉬워하면 좀 그랬나 보다, 이런 식으로 사람 표정을 더 많이 읽는 것 같아요. 옛날처럼 눈치 보는 게 아니고. 나는 이래도 저래도 되는데, 당신들은 어떤가요? 뭐, 괜찮나 보네, 생각보다 덜 나왔나? 하는 거죠. 나는 망해도 괜찮아.(웃음)
늘 흥행에 대해서는 해탈의 경지에 있었죠. 네, 그 벽이 더 두꺼워진 거죠. 제스처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지난 연말, 영화 전문지 인터뷰에서 “흥이 안 난다”고 했어요. 그 흥은 언제쯤 찾아왔나요?(웃음) 영화감독은 미리, 앞서서 걱정하는 직업인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대체로 침울하고 흥이 안 나죠. 그러다 현장에서 반짝반짝 올 때가 있어요. 생각해둔 대로 나왔거나, 그 이상으로 나왔거나. 감독은 나만 혼자 이런 생각하나, 싶을 때가 많은데, 스태프나 배우들과 같은 질량으로 고민하고 있구나, 모두 애쓰고 있구나, 응원 받고 있거나 연대하고 있다는 걸 느낄 때 또 약간 기분 좋아질 때가 있죠. 전체를 봐야 하기 때문에 그때그때 느껴야 할 기쁜 감정은 계속 유보하는 반면, 반대로 좌절은 바로바로 와요. 지인들, 영화 관계자들, 평론가들 그리고 관객들을 만났을 때, 비로소 내 감정이 완성되는 것 같아요.
관객과 만나면서 본인이 생각한 것이 크게 어긋날 때도 있나요? 대체로 많이 어긋나죠.(웃음) 그래서 괴로움도 오고. 내가 가진 게 내 눈높이를 따라오지 못한다는 생각이 드니 흥이 안나는 거고… 사실 <악마를 보았다>까지 하고 나서 뭔가를 매듭 짓는 느낌이 들었어요. 영화 인생으로 본다면, 그때까지가 청년기였다면, 탄식도, 환희도 청년처럼 받아들이고 표현했다면 이젠 똑같이 희열과 좌절이 와도 체감이 덜한 것 같아요.
애초에는 <밀정>을 두고 ‘콜드 누아르’라는 단어를 종종 사용했는데, 어느 순간 빠져 있더군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아무래도 목조 건물, 일본식 건물 때문에 브라운 톤이 많아요. 일반적인 색감에서 벗어나고 싶어 처음부터 브라운 톤을 빼고 차가운 채로 가고 싶었어요. 스파이 세계의 비장함과 비정함을 드러내고 싶은 데다 영화 속 계절도 가을과 겨울 사이였고요. 그런 것을 다 뭉뚱그려 콜드 누아르라고 표방하고 상하이에 갔는데… 날씨가 너무 따뜻한 거예요.(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성질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블루, 블랙, 화이트, 그린 같은 색감이 많이 돌게 했어요. 실내에서 대사할 때 입김도 많이 나오는데, 일부러 안 없애고 놔뒀어요.
‘콜드 누아르’는 색감뿐 아니라 그 시대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다른 일제강점기를 다룬 영화와 다를 거라 기대하게 해요. 스파이, 밀정이라는 역할을 가진 인물이 다양한 경계, 즉 사상의 국경, 생존의 국경, 생활의 국경에 서서 흔들리는 그 아슬아슬함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어느 쪽으로 발을 내디뎠을 때 삶의 큰 변곡점이 생기며 파동이 치는 상황, 인물의 선택 그리고 선택까지의 과정에 대해서요. 인물의 내적 변화와 행로가 흥미로웠기 때문에 그를 쫓아갔죠. 어떤 확실한 의도로 차별화했다기보다는 그저 다르지 않을까, 달랐으면 좋겠다 기대감을 갖고 있는 거죠.
그 시대는 허구든 픽션이든, 어떤 매체를 통해 선보이든 감정을 일단 격앙시키고 보는 뜨거운 시절이에요. 그것이 특유의 차가움과 만났을 때 어떤 시너지를 낼 것인지도 궁금해요. 당연히 구국의 움직임이 있었으니 뜨거운 시대였겠죠. 말씀대로 저라는 사람 자체가 일상에서 그런 뜨거움을 느낄 때도 한 번씩 차갑게 응고시키고, 다시 응시하거나 조망하는 편인데, 그런 태도를 영화의 어떤 스타일로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거죠. 활활 불타는 시대의 어떤 프로세스, 감정을 순환하는 방식이 내가 살아가고 느끼는 방식으로 수렴되고 표현된다는 것이 아주 미묘한 차이겠죠?
밀정이라는 단어부터 왠지 섹시하게 다가와요. 은밀하고 고독하죠. 과거에 존재했다고는 하는데,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유령 같은 중첩된 이미지도 있어요. 존재도, 관계도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슬아슬해요. 네, 충분히 비밀이 많고 그래서 더 고독하고. 그래서 자기에게 닥칠 운명의 파동, 그 스케일에 비해 더 신중해야 하고 섬세해야 하고. 그러면서 행동에 옮겼을 때는 과감해야 하고, 빈틈없어야 하고. 어두운 열정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복잡한 것이 있어요. 유령처럼 안 보이게, 그 결과에 대해서도 어둠 속에서, 멀리서 느껴야 하는 거니까 그런 면에서 섹시하다는 말이 좋은 말 같군요. 밀정이어서 에로 영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웃음)
제목의 타이포그래피가 손에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은밀함을 시사하네요. 포스터나 홍보물 같은 것을 가급적이면 우리 영화와 비슷하게 가지고 가자고 하면서도 어쨌든 포장하게 되잖아요. 그래서 ‘이게 우리 영화 같냐’고 끊임없이 물어보고, 100억 이상 투자한 작품이니 예고편에 액션도 되도록 돋보이게 해야 하고.
액션을 내세우는 게 부담스러운가요? 한동안 스케일 큰 액션 영화를 찍다 보니 상대적으로 이번 영화는 액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사실 외국 영화제 프로그래머들이 <밀정>을 두고 스파이 액션물이라고 얘기하긴 하더라고요. 어쨌든 중요한 건 이번 액션의 컨셉은 간결하고, 정확하게 그러나 임팩트 있게 가자는 거였어요. 합 맞추는 액션이 아니라 휘발성 있는 액션을 강조했어요. 우리가 실제 현실에서 느끼는 폭력적인 상황, 사고가 영화처럼 길게 느껴지진 않잖아요. 길다 해도 생물학적 감성은 섬광처럼 지나가곤 하잖아요. 순식간에 ‘파바박’ 하고 적막해지는 그 느낌인 거죠.
아무래도 액션이 대중적인 영화로 인식시키기엔 가장 합리적으로 손쉬운 방법이죠. <밀정>은 내가 만든 영화 중 가장 대중적인 영화예요.(웃음)
대중적이지 않다는 게 아니라, 대중적인 액션이 아니라고 말을 바꿀게요.(웃음) 관계의 미묘한 느낌이 중요해요. 배우들에게 스몰 액팅에 대해 얘기를 많이 했어요. 이를테면 <마진 콜> <모스트 바이어런트> <다우트> 같은, 연기를 굉장히 작게, 미묘하게 하는 영화를 추천했죠. 스파이 영화이니까 모든 상황에 ‘이 안에 밀정이 있다’는 걸 전제해요. 눈빛 교환 같은 것. 세 사람이 모여 있다 치면 어떤 은밀한 시선을 교환하는가. 그래서 시선이 부딪치고, 피하고, 또 눈 마주치려고 하는 시선의 액션이 진짜 많아요. 음… 그러고 보니 제 영화 중에서 시선의 액션, 시선의 감정, 시선의 연기가 가장 많은 것 같군요.
그래서 전혀 다른 영화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달콤한 인생>과 약간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렇죠. 로직에 따라서 움직이는 인물이라기보다 우연치 않거나 또는 적합하지 않은 상태인데 뭔가 자신을 흔드는 것에서 질적 변화를 일으키거나, 돌파력을 갖는다거나, 변곡점을 찾는 그런 부분에서는 분명 비슷한 지점이 있어요. 다만 <달콤한 인생>은 한 나르시스트가 자기 안의 흔들림의 조각, 균열을 찾아가며 파장이 커지는 얘기라면, <밀정>은 시대가 인물을 밀고 가는, 그래서 어디에 서라고 추궁하는 시대 공기의 압박이 작용한다는 것이 다른 점이겠죠.
공간이 많은 걸 말하고 있어요. 특히 첫 번째 예고편에서 이정출(송강호 분)의 의미심장한 대사, “다음에 만나면 내가 어떻게 변해 있을지 몰라”가 깔리는 골목이나 포스터 속 계단 같은 공간이오. 상하이라는 도시부터 세부적인 공간까지, 어떻게 활용했나요? 의열단 이야기를 하면서 상하이나 만주, 중국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죠. 보통 스파이 영화를 보면 공간이 매우 멋있어요. 로케이션이 주제를 고스란히 표할 때도 있고요. 상하이라는 곳이 그랬어요. 실제 배경이 되는 곳이기도 하지만, 지금도 100년이 넘는 동서양의 이국적인 건물, 포스트모던한 공간이 많아요. 상하이의 그런 느낌이 스파이 영화 특유의 신중함, 은밀함과 합쳐졌을 때 기품 있는 미장센을 만들 수 있겠다 싶었어요.
이런 좁고 은밀한 골목이나 바닥의 느낌이 영화의 뉘앙스를 결정할 테니까요. 처음 외국에 갔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바로 돌바닥이었거든요. 차가 지나갈 때 ‘다다다다다’ 하는, 좀처럼 듣지 못한 사운드가 너무 신선해서 처음 유럽 나갔을 때는 계속 듣고, 만져보고 그랬어요. 그 돌 사이의 홈에 빗물이 고일 때 비치는 빛깔, 네온사인의 흩어지는 파문, 물의 파장 같은 그림이 정서적으로 매우 좋았거든요.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더욱 통렬하게 느껴졌겠지만. 어쨌든 그때 느낀 정취를 재현하고 싶었어요. 런던, 프라하, 부다페스트 같은 데서 스파이 영화 찍으면 정말 최고겠다, 그런 꿈을 꾸곤 했어요.
한국판 스파이 영화를 찍으려면 일제강점기밖에 없을 테고, 그러면 상하이에 반드시 가야겠죠? 근현대로 오면 간첩 얘기가 되는 거니까요.(웃음) 간첩과 밀정은 전혀 다르죠. 정체성도 더 모호하고… 냉전 시대 서구의 스파이 영화 중에서도 걸작이 많지만, 어쩔수 없이 이분법적이잖아요. 그래서 혼동, 혼란, 내면의 갈등도 덜해요. <밀정>은 그에 비해 훨씬 의뭉스럽고, 모호하죠. 어제는 적이었지만 오늘은 우리 편이 될 수 있는 예측불허의 느낌이 한국적인 뉘앙스가 아닐까 해요.
일제강점기, 밀정, 의열단, 구국 같은 소재가 주는 클리셰가 있어요. 이들을 취사선택하거나 활용하거나, 어쨌든 클리셰를 잘 활용하는 것이 관건이었을 것 같은데요. 소재나 주제가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신파도 있을 거고… 하지만 ‘그것’이지만 ‘그것’을 내 방식대로 푼 거죠. 악이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는 것이 중요했어요. 뭔가 좀더 간단하지 않고, 복잡한 상태를 이야기하고 싶었죠. 사실 악인이 확고해야 상업적으로 안전하지만, 악인이라도 기능적이지 않았으면, 위악적인 것이 아니었으면 했어요. 그런 토대에서 자기가 맡은 역할을 철저하게 수행하는 사람들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물론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합니다만.(웃음)
인물들의 스타일이 매우 좋아요. 역시 아수라장이 된 싸움터에서도, 죽기 일보 직전에도 스타일을 포기하지 않은 감독답다 했죠.(웃음) 그런데 어느 인터뷰에서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청춘들이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즐겼다”라는 식의 문장을 보고 무릎을 쳤어요. 의열단 사진을 보면 다 그래요. 당시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고, 풍류도 즐길 줄 알고, 술도 잘 마시고, 잘 놀고 그랬대요. 시대의 멋쟁이들이었죠.
1920~30년대면 서구 문물이 대거 유입된 시기이기도 하잖아요? 피지배자인 ‘이등 시민’으로서 그걸 받아들여야 하는 청춘들의 굴절감 같은 것이 분명 있었을 거예요. 그 에너지가 어느 쪽으로든 발생할 거라 생각한 거죠. 한편 그런 그들이 왜 그렇게 자기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을까 생각하면 그 이외의 것이 온전하게 기쁘지 않았기 때문일 거예요. 영화 <아리랑>을 보면 강제 한일합방 때 집집마다 대성통곡이 들려왔다고 나와요. 그 마을을 지나가는 주인공 김산의 마음의 파동은 엄청났을 거예요.
<달콤한 인생> 때는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은 멜로 영화, <장화, 홍련> 때는 죄의식을 이야기하지 않고 죄의식을 다루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한 적이 있어요. 이렇게 반어적인 화법이 전매특허라 보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청년기부터 유럽에 무전여행 다니면서 느낀 건데, 아무리 포용력 있고 자유로운 문화를 가진 곳이라 해도, 이방인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제2, 제3세계 사람으로서의 낭패감, 결박감 같은 걸 느끼곤 했죠. 그 느낌이 아예 고착화되어버린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 혈기 왕성한 청춘들의 생각은 어떤 것인가, 맹목적으로 나라를 되찾고 싶지 않았을까, 그래서 더 흔들리지 않았을까, 그렇게 아주 복잡한 상태에 빠져버리지 않았을까 싶었어요. 그런 면에서 그 시대의 감정을 다루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의 진퇴양난, 딜레마, 피지배 계급이라 불리던 이들이 느꼈을 감정 말이에요.
해외용 포스터에 송강호 씨 뒷모습이 나와요. 그 구부정한 어깨가 그의 연기만큼 절묘하더군요. “송강호가 너무 송강호 같았다”고 했는데, 어떤 의미였나요? 그에 대한 신뢰 부분에서 ‘송강호스럽다’라고 얘기했을 거예요. 항상 기대 이상이고, 작업에 대한 태도나 마인드도 깊어지고 확장되어, 아티스트로 존경하지 않을 수 없어요. 나는 계속 영화를 만들면서 한계에 부딪히는데 저 사람에게 대체 한계가 뭘까 싶어요. 재미있는 게, 보통은 첫 테이크를 찍고 점차적으로 테이크를 반복하며 완성해가는데, 송강호 씨 같은 경우에는 첫 번째 테이크부터 오케이한 장면까지 너무 달라요.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여기서 저기까지 갈 수 있는지… 엄청난 스펙트럼이죠. 그게 저와의 호흡일 수도 있고요.
박찬호, 봉준호 감독과는 다른, 송강호라는 배우를 활용하는 본인만의 스타일이 있나요? 송강호를 처음 봤을 때, 좀 께름칙한 느낌이 들었어요. 연기를 잘한다, 못한다를 떠나 매우 본능적, 동물적인 느낌인 거죠. 전 배우를 많이 타는 편이에요. 무슨 말이냐면, 우발적으로 나오는 것도 그 사람의 총합이잖아요. 그가 주는 일종의 긴장감, 그 속에서 우연하게 발생하는 파열음을 찾아요. 그러면서 특유의 콜라보레이션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거죠. 두 감독님들 같은 경우에는 워낙 강철 콘티에다가…(웃음) 인물에 대한 확고함이 있잖아요. 그걸 계속 진정성 있게 표현했다면, 나는 박진감을 찾는다고 할까?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 사람의 캐릭터를 더 풍요롭게 한다고 생각해요. 좀더 살아 있게 만드는, 날것 같은 느낌, 이미지를 많이 찾는 편이에요.
장르를 탐색하는 방식과도 비슷한 맥락인 것 같아요. 차기작을 결정할 때도 전작과 다른 방향, 해보지 못한 것, 부족한 것을 찾아 해결하는 식이었죠. 이번에는 어땠나요? <악마를 보았다> 때 너무 침울해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쾌감을 줄 정도로 어두워서 <라스트 스탠드>는 정말 가볍고 따뜻한 오락 영화를 만들어보자 했죠. 사실 <라스트 스탠드>는 대체적으로 내 필모그래피에서 좀 다른 영화로 여겨지곤 해요. 그건 <악마를 보았다>를 끝내고 나서의 심리 상태와 초반 할리우드 시스템과의 부조화가 결합해서 만든 헐거움 때문일 거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또 순수하게 영화적이다라고 받아들이기도 해요. 어쨌든 그래서 이번에는 좀더 진중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라스트 스탠드> 개봉 즈음 인터뷰할 때 뭐랄까, 해탈한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그 때보다도 지금이 더 여유로워 보여요. 할리우드에 가게 된 것도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편하지 않은 상황에 놓아두고 싶었기 때문이라 했던 게 기억나요. 그 얘기는 ‘흥이 안 난다’는 것의 다른 버전인 것 같아요. 재미가 없었어요. 전투력이 생기려면 나를 어려운 상태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런 힘든 상황을 일종의 통과의례라 생각하고 적당히 즐기면서 한 것 같아요. 할리우드에서 데뷔하는 익히 알고 있는 감독들이 겪는 패턴과 시기가 있잖아요. 내가 알고 있던 그걸 지금 내가 하고 있네? 이렇게 분리시키면서요.
당시의 시간이 다음 영화를 찍을 때 빛을 발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때가 왔는데, 어떤 식의 변화가 있다고 생각하나요? 이를테면 다시 영화 만드는 재미를 찾았다던가.(웃음) 글쎄요, 흥미는 많이 떨어졌지만…(웃음) 뭔가 내 영화는 좋아지지 않을까? 어쨌든 내게 결핍돼 있던 거, 안 되던 것이 풀리지 않을까? 뭔지 잘 모르겠지만, 결과물로 나올 테고 그런 것을 누군가 발견해줄 테고, 내가 깨달을 수도 있을 거고. 그런 시간을 기다리고 있어요. 이 영화가 잘되면 좋지만, 그에 대한 압박과 강박보다는 분명히 뭔가가 있을 거야, 흔적이나 기미가 있겠지, 그 변화가 기분 좋았으면 좋겠다, 이런 거죠. 내게 영화를 만드는 새로운 메소드와 태도가 생기는 건데, 이걸 지금 모르는 상태에서 만든 게 <밀정>이라면, 새롭게 생긴 시스템 때문에 다음 영화는 좀 다르지 않을까 궁금해지는 거죠. 좋은 의미에서, 스스로.
‘뭔가가 있을 거야’라는 기대는 백수 시절부터 하신 걸로 압니다만.(웃음) 막연하게는 있었죠. 데이비드 보위가 한 말 같은데, 아티스트들은 고여 있으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데뷔 때부터 나를 신선한 상태로 두기 위해 계속 장르와 소재, 패턴을 바꾸어온 건지도 몰라요. 지금은 표피적인 것보다는 영화의 분위기나 아우라의 변화가 발견되었으면 좋겠다 싶어요. 그마저 없다면 개봉 직전까지 세심하게 뭔가를 만들고 있진 않을 거예요.
어쩔 수 없이 <암살>과 비교될 것 같은데요. <암살>은 내가 영화 팬으로서 굉장히 좋아하는 영화고, 배우들의 기교도 아주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감탄하면서 봤어요. 하지만 직접적인 비교는 어려워요. 음… <암살>보다 덜 웃긴가? 더 목소리를 깐다? 더 은밀하다? 더 낮은 리듬에서 움직인다?(웃음) 진중하고 묵직하다는 것이 장점이 아니라 다른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머도 있을 거예요. 어쨌든 송강호라는 인물이 가진 기질적인 특성도 있고. 모르겠어요. 내 영화는 항상 약간 낮고 차가워요. 그래서 스태프들과 예고편을 보면서, 제가 그랬던 것 같아요. 외국 영화 같지 않냐?(일동 웃음)
그래서 예전에 “본인 영화 같지 않다”고 한 거로군요. 그러면 주변 스태프들은 뭐라고 하나요? 그냥 웃던데요.(웃음) 보통 한국 영화에서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나는 그런 걸 잘 못하니까… 그런 데서 생기는 무드나 아우라가 한국 영화 같지 않다는 의미로 외국 영화 같다고 돌려 얘기하는 거겠죠.
그게 김지운 감독의 영화를 매우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이유가 되기도 해요. 그래서 스타일리시하다, 폼생폼사라고 하는 것도 같아요. 뭐, 내가 그렇게 생겨먹어서 나오는 것이니까요.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걸 부끄러워해서, 아니 어색해해서요. <달콤한 인생> 땐가, <악마를 보았다> 땐가 하여간 어느 외국 평론가가 “역시 분위기의 대가처럼”이라는 문장을 썼는데, 그 말이 매우 마음에 들었어요.
<밀정>이 여러모로 김지운이라는 감독의 필모그래피에 전환점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태껏 만든 영화 중 가장 편하게 했어요. 일단 배우 의존도가 컸고요. 그동안 하고 싶은 것, 이를테면 어떤 인상을 보여주고자 나머지를 맞춰갔다면 <밀정>은 인물을 자연스럽게 따라간 영화예요. 무리하거나 욕심내지 않고, 영화와 인물이 가는 방향을 쫓아갔죠. 일정을 좀 널널하게 잡긴 했지만 최초로 촬영 일수를 오버하지도 않았고요. 뭔가 강박 같은 게 없었어요. 그런 강박은 <놈놈놈>과 <악마를 보았다>까지 하면서 해소된 부분이 있어요. <반칙왕>을 만들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고나 할까요?
그건 영화적 야심이 없다는 것과 다른 말이죠? 저는 원래 영화적 야심이 없어요.
잘 알죠.(웃음) 하지만 개인적 동기는 있겠죠. 사소한 이유죠. 창피하고 싶지 않다, 부끄러운 짓은 하지 말아야겠다, 같은.(웃음) 편해진 부분도 있을 거예요. 나의 완결성보다는 영화의 완결성, 완전한 구조를 생각하다 보니 나를 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할까요. 사실 영화의 내적 리듬감을 찾은 영화가 <악마를 보았다>거든요. 이 영화를 만들고 나서 내 직업이 영화감독이구나, 실감하게 됐고, 그때 딱 편해진 게 있어요.
재미있는 의외인데요. <악마를 보았다>가 뭔가를 끝까지 밀어붙인다는 느낌이었거든요. 사실 예전부터도 너무 애쓴다는 느낌은 별로 어울리지 않는 분이었지만요.(웃음) 재단사 이야기를 종종 하곤 해요. 재단사 혹은 그 옷을 디스플레이하는 사람이 영화감독으로서, 대중 예술가로서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에요. 나는 그런 재단사 같은 감독이 되고 싶어요. 이들은 딱 필요한 것만 생각하잖아요. 자신이 잰 정확한 수치에 의해서 가장 추상적인 지점과 조우하는 것, 그걸 입는 사람을 상상했을 거 아니에요? 기술, 미술적 고려, 미학적인 지식과 영향, 테크닉을 통해서 고객이 입었을 때 가장 쾌적한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아티스트로서의 욕망이 잘 결합된 바로 그 상태처럼, 나도 나의 어떤 사적 욕망이 덜 개입된 상태에서 그런 기능을 하다 보면 이 작업을 내가 잘하고 있구나 하는, 거기서 오는 만족감이 있어요.
<밀정>을 보면서 김지운이라는 감독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도 관전 포인트가 되겠군요. 영화 재미있게 보겠습니다. 혹시 이 말이 인사처럼 들리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의례적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의 인터뷰가 있는데, 만약 깊이 대화할 기회가 있다면 오늘 한 얘기와 비슷할 것 같아요. 그 정도로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가장 솔직한 얘기였다는 걸 강조하고 싶군요.
- 에디터
- 윤혜정
- 포토그래퍼
- KIM BO SUNG
- 헤어&메이크업
- 설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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