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The Contrast

2018.10.05

by VOGUE

    The Contrast

    미우치아 프라다의 세상에선 늘 상반된 아이디어가 충돌한다. 전통적 아름다움과 전복적 기괴함, 필수 불가결한 상업성과 지독한 자기 고집, 여성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력과 능동적 연약함. 모순과 역설을 통해 패션이라는 대지의 풍광을 바꾸는 패션 여제와 <보그 코리아>의 9년 만의 재회.

    미우치아 프라다(Miuccia Prada)와 마주 앉았을 땐 어떤 메뉴를 선택해야 할까. 5월 초 뉴욕 칼라일 호텔의 카페에 앉은 순간 나는 이런 고민에 휩싸였다. ‘미세스 프라다(패션계 모두는 그녀를 이렇게 부른다)’는 지나가던 웨이터를 불러 세워 카모마일 차를 주문한 뒤, 내게 어떤 음료를 마시겠냐고 묻던 참이었다. 혹시 아이스커피는 경박하진 않을까? 똑같이 카모마일 차를 시키면 나른하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2초 정도 뜸을 들인 뒤 ‘글라스 오브 워터’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마시는 물 한 잔마저 고민한 건 내 앞에 앉은 인물이 미우치아 프라다였기 때문이다. 30년간 꾸준히 패션 세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쳐온 거장이자 패션 ‘인사이더’를 위한 디자이너. 값비싼 악어가죽이 아니라 흔하디흔한 나일론도 럭셔리가 될 수 있다는 반전을 선사한 것도, ‘어글리 시크’를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미의 기준을 뒤흔든 것도 모두 미세스 프라다의 아이디어였으니까. 그녀가 컬렉션에서 선보이는 스커트 한 벌, 코트 한 벌은 패션이 향하는 새로운 비전을 가리키는 신호였다. 5월 4일, 우리는 다시 한번 미우치아 프라다의 시선이 향한 약속의 땅을 엿볼 수 있었다. 일명 ‘프라다 프렌즈’들은 그녀의 호출에 허드슨강이 내려다보이는 51번가의 미국 프라다 본사 건물로 헤쳐 모였다. 다코타 패닝과 클로에 세비니 등 할리우드 스타뿐만이 아니었다. 라프 시몬스와 마크 제이콥스를 비롯한 패션계 동료와 바즈 루어만과 데이비드 러셀 등의 영화감독, 올림피아 스캐리 같은 아티스트들도 함께했다. 건축가 헤르조그 & 드 뫼롱이 재해석한 미래적인 공간은 2019 리조트 컬렉션의 훌륭한 배경이 되어주었다. 그 공간에 등장한 옷은 우리가 잘 아는 프라다였지만, 프라다와 달랐다. 90년대 간결한 미니멀 스타일부터 장식적인 수트 등은 앞으로 또 다른 언어로 번역해 전파할 것이 분명했다. 쇼가 끝난 뒤 관객들은 모두 유리 천장이 반짝이는 공간에서 다 함께 만찬을 즐겼다. 밀라노에서 직접 공수한 프라다 개인 소유의 ‘시누아즈리’ 타일 접시에서는 ‘프라다다움’을 느끼는 모든 방식을 컨트롤하는 거장의 치밀함마저 전해졌다. 내가 미세스 프라다를 마주한 건 다음 날이었다. 멧 갈라를 위해 뉴욕으로 모여든 이들 덕분에 전설적인 카페는 이미 들뜬 분위기로 가득했다. 맞은편 테이블에선 마크 제이콥스가 연인과 밀담을 나누었고(“저는 마크와 라프의 팬이에요”), 기둥 뒤에는 에어린 로더가, 그 옆으로는 미국 <보그> 에디터들이 보였다. 그리고 내 앞에 앉은 프라다는 살짝 긴장한 듯했지만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뒤로 깔끔하게 넘긴 머리는 건강한 피부와 잘생긴 코를 더 돋보이게 했다. 산둥 실크의 브라운 셔츠에 심플한 귀고리만 더한 그녀는 테이블 위에 두 팔을 올리고 내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에 빠질 때마다 녹색과 고동색이 묘하게 섞인 그녀의 눈빛이 유난히 반짝였다.

    Vogue 9년 전 프라다 트랜스포머 프로젝트로 서울을 방문한 후 <보그 코리아>와 두 번째 인터뷰다.

    Miuccia Prada 세상에, 그게 벌써 9년 전인가. 시간은 정말 빨리 흐른다. 서울에도 곧 다시 가고 싶다. 모두들 요즘 서울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프라다가 서울을 가장 먼저 발견한 브랜드였다.
    다시 한번 서울에서 뭔가 하고 싶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제대로 된 걸 선보이고 싶기 때문에 시간이 좀더 걸릴지 모르겠다. 게다가 이미 한 걸 다시 하고 싶진 않다. 반복이 싫다.

    이번엔 왜 뉴욕을 선택했나?
    뉴욕에서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선보인 게 꽤 오래전이다. 게다가 뉴욕에 아름다운 집이 생겼으니, 그걸 활용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뉴욕엔 좋은 친구들이 많다. 그 모든 게 어우러진 셈이다.

    어제 쇼에선 내가 자라면서 보던 프라다 90년대 스타일이 등장해 유난히 반가웠다. 특히 초반에 등장한 스타일은 정말 좋았다.
    그 네 가지 룩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파트였다. 심플한 무언가를 완성하기란 가장 어렵다. 스커트와 스웨터만으로도 단순하게 완성하는 것. 그것이 우리 일 중 가장 어려운 작업이다. 모든 것은 비율에 달려 있는데, 어젠 모자 도움이 컸다. 그 모자라면 무엇을 해도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 모자는 어디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나?
    처음엔 존 갈리아노의 모자를 쓴 90년대 케이트 모스의 사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 쇼가 끝난 뒤 누군가 그 모자에 대해 묻자 갑자기 어떤 이미지가 떠올랐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우리 아들이 아주 바짝 조이는 코트를 입고, 러시아 친구가 선물한 커다란 털모자 우샨카(Ushanka)를 쓰고 집에 들어서던 모습이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아주 스키니한 코트 단추를 모두 여미고 그 위에 거대한 모자를 쓰고 커다란 장갑을 낀 아들의 이미지. 그제야 모자에 대한 아이디어가 그 기억에서 탄생했음을 깨달았다.

    그런 일상의 경험이 디자인에 영향을 끼치나?
    매일의 이미지는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인다. 깨닫지 못한 채 그런 아이디어가 어느새 작업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인식하지 못한 채 무엇에 끌리고, 그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의문을 더하는 긴 과정을 거친다. 정작 나는 완성하고 나서야 그 시작을 깨닫게 된다. 예를 들어 멍청한 아이디어에 내가 끌렸다면, 분명 그건 어떤 기억 때문일 확률이 크다.

    어제 쇼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셀러브리티와 인플루언서는 물론이고, 에디터와 바이어 모두가 자신이 가장 아끼는 프라다를 입고 쇼장에 나타난 풍경이었다. 그것이 흔치 않은 일인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만 해도 다른 디자이너 쇼에 갈 때 그 디자이너 옷을 입는 일은 흔치 않다. 하지만 어제만큼은 기꺼이 프라다 옷을 입었다. 모두들 옷장에서 가장 좋아하는 프라다를 찾아 곱게 차려입은 듯했다.
    오늘 약속 장소에도 입고 와줘서 고맙다. 기분 좋은 말이다. 우리를 아끼고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당신을 비롯한 우리 친구들이 우리 옷을 입은 모습만큼 가슴이 따뜻한 풍경은 없다. 그래서 어젯밤이 더욱 기뻤다.

    흔히 말하는 패션 피플뿐만 아니라, 프라다 옷을 입는 여성들은 특별하다. 현실에서 환상을 즐길 수 있는 패션이라 여겨진다. 현실과 환상 속에서 균형을 잡는 비결이 있나?
    더 오랫동안 일할수록, 내 작업이 좀더 현실의 여성을 향해가는 듯하다. 현실의 환상이라고 해도 좋다. 물론 환상은 중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에게 납득이 갈 만한 작업을 하고 싶다. 어떤 순간엔 환상에 빠져들 때가 있고, 때로 현실에 집착할 때도 있다. 즉 환상과 현실은 머릿속에서 순환하듯이 움직인다. 내 상상력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

    작업이 자신의 현실을 반영하나?
    물론이다. 작업의 대부분은 나를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현실의 나를 생각하는 건 재미가 없다. 사실 내 나이가 그럴 정도로 젊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열다섯의 나는 어떤 생각을 할까? 서른의 소년은 어떨까? 이런 옷을 입을까? 저런 옷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고민은 꾸준히 하는 편이다. 그게 시작일 때도 많다.

    상상 속의 미우치아가 결정하는 셈인가?
    스스로 무엇을 좋아하는지 깨닫는 것이야말로 창의적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많은 고민을 할 수도 있고, 중요한 이론이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꾸준히 작업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좋아하고 끌리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고민 끝에 돌아가는 것은 결국 취향인가?
    취향이란 단어는 어렵다. 하지만 확신이 서지 않을 때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돌아가는 셈이다. 그럴 때 답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정답을 찾기 어려울 때도 많나?
    그래서 질문을 많이 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고민을 멈출 수는 없다. 내가 좋아하는 걸 기본으로 한 컬렉션은 좀더 쉽다. 하지만 언제나 내가 좋아하는 걸 할 순 없다. 그건 너무 쉽지 않나. 난 내가 싫어하는 걸 향해 나아가는 편이다.

    흔히 말하는 ‘어글리 시크’도 그렇게 탄생한 것 아닌가?
    예쁘고 좋아하는 것만 바라보는 건 지겹다. 자극이 필요하다. 자극을 찾는 것이 매번 도전이다.

    싫증을 잘 내는 편인가?
    그렇다. 이미 가지고 있고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적당히 반작용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지난밤, 시차 때문인지 잠을 자지 못했다. 새벽 5시에 갑자기 지난 몇 시즌간 함께한 모델들 대신 새 얼굴들과 함께하고 싶어졌다. 한참을 그 생각에 빠져 있었다. 결국 ‘내일 맑은 정신으로 다시 생각하자’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잠자리에 들었다.

    새로운 것을 찾는 것도 자유롭기에 가능한 일 아닌가?
    언제나 자유로웠다. 내겐 뭐든 할 자유가 주어졌다. 무엇이 잘못되더라도, 그건 내 잘못이다.

    그 자유가 일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나?
    자유는 물론 내게 강점이다. 하지만 자유롭다고 해서 좀더 창의적인 건 아니다. 몇 년 전 젊은 사진가 중 한번 일해보고 싶은 친구가 있었다. 그가 하던 작업이 신선하고 흥미롭게 느껴졌기에 그를 선택했다. 하지만 막상 함께 일하기로 했을 때, 그는 매우 괴로워했다. 그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자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옷을 입히지 않아도 되고, 가방을 들지 않아도 되니 새로운 것만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자유가 그를 마비시킨 셈이었다. 그러니 너무 많은 자유가 꼭 이점이 되지는 못한다. 그건 패션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른 분야에서도 한계가 있거나 아주 조금 자유가 주어질 때 좀더 창의적인 결과가 나온다. 어려움이야말로 창의력을 더한다. 달리 말하자면, 난 자유롭고, 뭐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더 어렵다.

    그 자유 속에서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찾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들의 삶에 관심이 많다. 영화처럼 그들의 삶을 상상하고, 그걸 기본으로 일종의 이론을 만들어간다.

    미우치아 프라다를 뛰어난 디자이너로 만드는 한 가지는 변화를 탐지하는 본능과 끊임없이 탐구하는 노력이다. 열네 살 때 학교에서 처음으로 히피 스타일을 입었던 소녀는 일흔을 앞둔 지금도 예민하게 여성의 스타일을 예측한다. 몸을 타고 흐르는 캐시미어 니트를 완성하거나 종잇장처럼 얇은 가죽 코트를 완성하는 일차적 디자인이 목표는 아니다. 사람들과 그 삶 속에서 흥미로운 요소를 찾아 자신의 이야기를 더하는 것. 이미 익숙한 패션 사전에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것. 예를 들어 카멜 코트를 디자인해도, 프라다가 디자인하면 마릴린 먼로가 입을 법한 클래식한 버전이 나오진 않는다. 가장자리를 불에 탄 듯이 그을리기도 하고, 고무를 닮은 소재를 더하기도 한다. 끊임없는 고민은 패션을 시작한 이후 계속 그녀를 따라다닌다. 그건 그녀에게 패션이 차선의 선택이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어릴 때부터 패션을 즐기긴 했지만, 가업을 잇는 건 젊은 미우치아 프라다에게는 동그라미 치기 싫은 정답이었다. 지독한 페미니스트이자 정식 공산당원으로 활동하던 젊은 이상주의자에게 패션 디자이너가 되는 건 스스로에 대한 배반이었을 법하다. 그렇기에 1913년 할아버지인 마리오 프라다가 시작한 여행 가방 브랜드에서 일하는 대신 정치학 박사 학위를 따고, 5년간 마임 배우가 되기 위해 공부했다. 하지만 결국 1978년 그녀는 프라다 하우스에 스스로 들어섰다. 같은 해 그녀는 평생의 파트너이자 남편인 파트리치오 베르텔리(Patrizio Bertelli)를 만났다. 든든한 조력자와 함께 프라다 브랜드는 빠르게 성장했다.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1984년 선보인 나일론 백이었다. 전통적이고 지루한 백 대신 그녀는 산업용 ‘포코노(Pocono)’ 나일론을 백팩 디자인에 사용했다. 럭셔리가 단순히 소재가 아니라 아이디어가 될 수 있음을 상징하던 그 백은 90년대 새로운 세대의 여성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1988년 시작한 기성복 역시 그녀가 원한 건 아니었다. 만약 직접 하지 않으면 다른 이에게 맡기겠다는 남편의 ‘협박’ 때문에 억지로 디자인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곧 사람들은 프라다의 옷에서 ‘어글리 시크’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좋은 취향이나 모두가 원하는 아름다움만큼 지루한 것은 없다는 프라다의 개인적 신념에서 비롯된 다소 낯선 패션이었다. 생소한 디자인은 끊임없는 변화를 목표로 삼은 디자이너에게 효과적인 도구였을지 모른다. 달리 해석하면 그녀는 스스로 어디까지 패션을 밀어붙일 수 있는지 실험을 계속한 셈이다. 현대적인 것이 무엇인지, 변하는 세상이 허락하는 건 무엇인지, 이 모두를 패션이라는 악기로 연주하면 어떤 옷이 탄생할지. 미우치아 프라다는 이런 고민을 지금도 멈추지 않는다.

    NEW NYLON 이번 시즌 미우치아 프라다는 브랜드를 대표하는 포코노 나일론을 의상에도 적극 사용했다. 여기에 90년대 선보인 붉은색 로고의 ‘리네아 로사’ 라인도 부활시켰다. 미카가 입은 코트와 버킷 햇은 프라다(Prada).

    스스로 만족하는 편인가?
    미소가 나오지 않으면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싶은 것을 손에 쥐었을 때 웃게 되지 않나.

    우리에게 쇼핑은 아주 중요한 경험이다. 프라다 옷을 손에 넣었을 때 어떤 기분일지 상상하기도 하나?
    물론 내가 만든 옷을 좋아하고 즐겨주길 바란다. 우리 옷을 손에 넣고 싶어 하길 바란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 옷을 어떻게 경험하길 바란다’고 생각해보진 않았다. 컬렉션을 준비할 때면 여성들을 상상하고 그들의 삶을 그려본다. 하지만 일단 내 손을 떠나면 그 옷을 어떻게 하든 그들 마음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옷을 입는지 신경 쓰는 편은 아닌 듯하다.
    이상하지만 난 사람들의 옷차림을 두고 이렇다, 저렇다 얘기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옷차림으로 누굴 지적하지도 않는다.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이 패션을 두고 각자의 의견을 쏟아내곤 한다. 많은 이들이 패션을 지켜보고 그에 대한 논란도 많아졌다.
    이건 단순히 패션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다른 분야 역시 ‘오디언스’가 늘었다. 70년대와 80년대만 해도 아주 소수의 백인들만 패션에 대해, 옷을 입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이 아이디어는 이제 전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이 나누게 되었다. 당연히 디자이너가 하는 일은 극적으로 변했다. 모두를 염두에 두고 일할 수는 없다. 대신, 주변에서 일어나는 동시대적인 사건을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일하는 방식이 바뀌진 않았나?
    내가 일하는 방식이 달라지진 않았다. 하지만 내가 가진 지식과 정보는 변했다. 그 어느 때보다 정보는 많아졌고 지식도 늘었다. 매일 접하는 뉴스와 정보, 정치와 문화 등에 대해 본능적으로 그 섬세함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문화적, 정치적인 면도 고려하나?
    물론이다. 예를 들어 아주 ‘네이키드’한 무언가를 하고 싶다 하더라도, 많은 문화에선 그런 선택을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창의적인 결정에도 영향을 끼친다.

    전 세계 고객들과 소통해야 한다고 여기나?
    세계에 대해 좀더 폭넓게 이해하려고 한다.

    인터뷰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인터뷰도 쉽지 않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 때로는 검열처럼 느껴질 때도 있으니까. 하지만 피하지 않는다. 말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 동료들과 이 이슈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느끼는 바를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곤 한다. 거짓말하고 싶지 않기에 입을 다물고 만다. 그러면 그곳에 빈 공간이 생기기 마련이다.

    걱정 없이 아이디어를 나누는 대화가 중요하겠다.
    원하는 바를 신경 쓰지 않고 말하는 건 아주 편안한 경험이다. 친구들이나 동료들과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다. 아주 솔직하게 아이디어를 나누어야만 우리의 생각이 진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아니면 아주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작은 모임을 만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패션 일루미나티’가 되겠다. 벽에 숨어서 그 대화를 듣고 싶어질 것 같다.
    아주 괴상한 생각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런 모임이 생긴다면 함께해도 좋다. 미우치아 프라다를 설명하는 단어 중 빠지지 않는 건 ‘지적이다’라는 표현이다. 정작 본인은 매우 싫어하는 단어지만, 그녀의 지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건 1993년 시작한 예술 재단, ‘프라다 폰다치오네(Prada Fondazione)’이다. 이탈리아 조각가이자 화가인 니노 프란키나의 작품으로 시작한 폰다치오네는 이제 800점이 넘는 현대 예술 작품이 모인 예술 허브가 되었다. 그리고 밀라노 외곽에 자리한 프라다 폰다치오네는 프라다가 대변하는 브랜드의 영역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증거다. 건축 그룹인 OMA가 오래된 양조장을 변모시킨 이 공간에서는 현대 예술가, 영화감독, 뮤지션 등의 작업이 프라다의 지휘 아래 공존한다. 프라다의 지적인 호기심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때로는 손수 선택한 전 세계 젊은 일러스트레이터의 작품을 치마 위에 담아내기도 하고, 한국 젊은 감독의 독립 영화 제작을 후원한다. 프라다 저널이라는 이름 아래 문학 콘테스트를 열고, 미우미우를 통해 매년 여성 감독의 작업을 소개한다. 당연히 그녀 곁에는 언제나 시대를 대표하는 아티스트가 가득하다. 프란체스코 베졸리, 신디 셔먼, 바즈 루어만, 웨스 앤더슨, 렘 콜하스, 헤르조그 & 드 뫼롱 등이 대표적이다. 경계를 뛰어넘어 다양한 아티스트를 지지하고 후원하는 건 프라다만의 장점이다.

    프라다 폰다치오네를 통해 일종의 그런 모임을 즐기고 있는 거 아닌가?
    그렇다. 난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한다. 아직 내 직업을 사랑한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패션은 내가 가진 지식을 담아내는 도구와 같다. 폰다치오네는 다른 도구를 사용하는 것뿐이다.

    도구 두 개 중 어떤 것이 더 다루기 어려운가?
    패션은 좀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우리가 사는 사회와 우리가 옷을 팔아야 할 사람들을 생각해야만 한다. 현실에 매인 일인 셈이다. 그렇기에 어렵다. 특히 세상은 놀라운 속도로 변하고, 그것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쉽지가 않다. 반면에 폰다치오네에서 하는 일은 어떤 면에서 더 쉽다. 생각에 집중하면 된다. 그렇기에 흥미롭다.

    밀라노는 사실 우리에게 자극적인 곳은 아니었다. 프라다 폰다치오네는 단번에 밀라노를 흥미로운 곳으로 변모시켰다.
    고맙다. 좋은 결과였다. 이제 타워(Torre)까지 완성되었으니, 더욱 좋아졌다. 사실 밀라노 사람들은 좀 냉소적이다. 그렇기에 처음엔 우리 공간에 대해 의심을 많이 했다. 하지만 이제 시간이 흐르고 나니, 우리를 믿고 만족하는 듯하다.

    프라다 폰다치오네가 무엇을 상징하길 바라는가?
    아이디어를 찾는 곳. 단순히 예술을 위한 곳은 아니다. 그곳은 아이디어를 위해 존재한다. 예술만으로는 그 공간을 채울 수 없다. 난 사람들의 아이디어가 흥미롭다. 예술은 아이디어를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 아이디어는 영화가 될 수도 있고, 과학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창의적인 사고를 위한 공간이길 바란다. 진정으로 창의적인 사고가 흐르는 곳. 이곳에 와서 생각하는 것의 즐거움을 만끽하길 바란다. 또 다양한 대화를 나누는 곳이 되길 바란다

    다양한 아티스트, 건축가, 영화감독 등과 함께 작업하는 이유 역시 아이디어를 찾아 헤매는 여정 중 하나인가?
    그렇다. 난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탐험하고, 그에 대해 토론하는 게 좋다. 난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서로 목소리 높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다. 그 충돌 속에서 새로운 무엇이 탄생한다. 예의를 지키는 건 재미없다. 예술이 요즘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같은 이유인 듯하다. 어느새 돈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버린 것 같다.

    패션 디자이너로서 상업성도 중요하지 않나.
    가끔은 나도 상업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리기 위해 노력할 때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 참지 못한다. 특히 쇼에서 선보이는 옷은 더 잘 팔리기 위한 걸 만들 수는 없다. 글쎄, 상업적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고 해야 할까.

    미우치아 프라다는 인터뷰 내내 자주 웃음을 터뜨리고, 종종 자신의 답이 우습지 않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곤 했다. 결코 스스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 하지만 정확히 자신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부연 설명을 덧붙이기도 하고, 질문의 뜻을 다시 묻기도 하면서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대답을 통해 질문을 유도하는 노련함도 느껴졌다. 정치적이거나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답변 속도가 한 박자 더 느려졌다. 민감한 문제에 관해서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자기 의견을 성실하게 전달했다. 예를 들어 정치적 공정함과 예술의 관계에 대해서는 데미언 허스트와 일화를 들어 한참을 설명했다.(아쉽게도 이 부분은 기사 마감 직전 특정 인물과 예민한 주제 때문인지 프라다 하우스에서 모두 싣지 말아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금세 1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남은 질문은 적지 않았다.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어떤 영화가 좋았는지, 최근 인상적이었던 아티스트가 누구인지도 궁금했고, 집에서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스위스의 별장에서는 어떻게 휴가를 보내는지도 알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녀를 계속 붙잡아둘 수는 없었다. 지난 컬렉션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이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패션을 통해 여성들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성은 스스로 혹은 지식, 아이디어를 통해 힘을 느낄 것이다. 훌륭한 파워 비즈니스 수트를 입는다고 힘이 생기진 않는다. 만약 스스로 당당하다면, 반쯤 벗고 다녀도 괜찮다. 여성의 힘은 패션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옷은 성격과 취향, 아이디어를 보여줄 수는 있다. 하지만 진정한 ‘파워’는 그 사람의 내부에서 드러난다.

    이번 가을 컬렉션에서 밤거리를 마음껏 다니는 여성을 꿈꾸었다고 말한 것이 생각난다.
    ‘여성이 마음껏 차려입고 밤거리를 거닐 수 있다면 멋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떤 방식이든 간에 스스로 섹시하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꾸미고 다녀도 사람들이 이상한 시선을 보내지 않는 그런 날이 오면 좋지 않을까. ‘슈퍼 섹시’하게 꾸미고 다녀도 좋은 시절.

    ‘미투’ 운동이 한창일 때라 그것이 당신의 미투에 대한 해석이라 여기는 사람도 많았다.
    여성의 독립과 자유는 언제나 내 삶과 작업의 주제였다. 이 모든 이야기가 사그라들고 언젠가는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는 때가 오길 바란다.

    여성 디자이너로서 이런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어렵지 않나?
    난 매우 정치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 돈 많은 패션 디자이너가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문제가 된다. 물론 난 정치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고, 의견도 있다.

    YSL 옷을 입고 시위에 나섰다는 당신의 과거는 유명하다.
    난 분명 개인적인 모순을 지니고 있다. 돈 많은 사람들에게 값비싼 옷을 파는 게 직업이다. 작업을 통해 정치적 이슈에 대해 반응하고 싶다. 진짜 정치에 참여하고 싶고, 근본주의자가 되고 싶다면 패션 디자이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 그럴 수 있을지 모른다. 이건 내가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답답하진 않나?
    난 정치적 사안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역할은 폰다치오네에 맡겨둔다.

    그럼에도 낙관적인 편인가?
    흠, 내가 말하는 걸 들으면 비관적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낙관적이다. 그런데 선택적으로 낙관적이다. 즉 스스로 낙관적이길 선택했다. 하지만 이런 건 내게 문제조차 되지 못한다.

      에디터
      손기호
      포토그래퍼
      HYEA W. KANG, JAMIE HAWKESWORTH
      모델
      미카 아르가나라즈(Mica Argañaraz@Viva London)
      헤어
      닐 무디(Neil Moodie@Bryant Artists)
      메이크업
      플로리 화이트(Florrie White@Bryant Artists)
      네일
      아미 스트리츠(Ami Streets@LMC Worldwide)
      캐스팅
      버트 마티로시안(Bert Martirosyan)
      프로덕션
      박인영(Inyoung Park@Visual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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