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를 넘어선 핑크
핑크만큼 양가적 색깔이 있을까. 여자들이 핑크 공주로 시작해 핑크 혐오기를 거쳐 핑크 해방기를 맞는 과정은 사회적 강요에 대한 저항의 역사이자 성장기다.
작가 윤정미가 10여 년 전 ‘핑크 & 블루 프로젝트’를 처음 공개했을 때 시각적 충격은 대단했다. 여자아이는 핑크색 물건에, 남자아이는 파란색 물건에 가득 둘러싸인 모습은 섬뜩함마저 불러일으켰다. 아이들을 둘러싼 물건이 무언의 언어로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여자는 여자답게, 남자는 남자답게 커야 해”라고.
작가의 고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2009년, 2015년 같은 아이들을 찾아가 그들의 모습과 물건, 공간을 촬영했다. 핑크 나라에 살던 여자아이들은 그대로 핑크색에 머물거나 하늘색, 보라색 혹은 반대급부로 파란색 물건을 소유하는 시기를 거쳐 특정 색깔로는 규정할 수 없는 공간에 도달한다. 한 아이의 변화를 담은 연속적 사진 세 장은 자아를 찾아가는 성장기나 투쟁기처럼 보인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핑크색 물건은 아이들의 삶에 어떻게 스며들었을까. 마지막 사진은 그 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진 않는다.
우리 사회는 핑크색을 여자의 색깔로 규정한다. “남자는 핑크지”라는 말을 하는 이유는 핑크색이 여자의 색깔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여성 전용 주차장 라인 색깔은 핑크이고, 산부인과에서 성별을 알려줄 때 ‘분홍색 내복을 준비하세요’라고 말한다. 아이돌 그룹 에이핑크는 청순하고 가녀린 소녀들이고, 블랙핑크는 예쁘게만 보이길 바라지 않는 소녀들이다. 사회는 핑크색에 귀여운, 부드러운, 수줍은, 상냥한, 순종적인, 고분고분한, 섬세한, 수동적인 이미지를 심었다. 핑크는 여자를 상징하기도 하고, 모성을 대신하기도 하며, 사랑이나 포르노그래피까지 포괄한다. 그러니까 여자들에게 핑크가 애정과 혐오를 동시에 받는 이유는 핑크가 여성을 대표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이미지가 여성을 대표한다는 데 있다.
핑크가 여성의 색깔이 된 배경에는 여러 속설이 있다. 여성의 망막에는 색깔을 감지하는 P세포가 많이 분포해 핑크색에 빠져든다는 생물학적 연구를 근거로 여성은 핑크색을 선호하도록 태어났다는 주장이 있다. 선사시대에 숲에서 채집을 하며 열매 색깔인 붉은색에 더 빨리 반응하도록 진화했다는 가설도 있다. 하지만 사회가 핑크색에 젠더 선입견을 심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는다. 100여 년 전 “힘찬 핑크를 남자아이에게, 앙증맞은 파랑을 여자아이에게 입히라”는 한 잡지의 문구라든지, 벨기에 왕자의 요람이 분홍색으로 꾸며져 있었다는 문헌이 증거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핑크는 전혀 다른 색이 된다. 전쟁에 지친 남성들을 위로해줄 수 있는 가정적 존재로서 여성을 상징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성해방운동이 일어나면서 핑크색은 자취를 감추지만 1980년대 초음파 기술의 발달로 태아의 성별을 미리 알 수 있게 되면서 더 많은 물건을 판매하기 위한 마케팅 전략으로 ‘여자는 핑크, 남자는 블루’ 공식이 생겼다. 미국 <보그>의 전설적인 편집장 다이아나 브릴랜드는 “나는 핑크를 사랑한다. 이 색은 인도의 네이비 블루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핑크가 사회 문화적으로 전혀 다른 색깔로 받아들여짐을 의미한다. 당시 인도에서 핑크는 보수적이고 점잖은 색깔로 여겨졌다.
지금 소녀들만큼 자기만의 물건을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기에 핑크 공주 시절은 경험하지 못했지만 나는 어느 순간 ‘여성용’으로 만들어진 물건의 선택지가 핑크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답답함을 느껴왔다. 여성을 위해 만들었다며 야심 차게 내놓은 휴대폰, 노트북, 자동차는 그저 핑크색으로 바꾼 기존 제품이었고 여자만 사용하는 생리대, 헤어 롤 같은 물건은 응당 핑크색이었다. 핑크색은 여성이라는 카테고리로 구분 짓는 견출지와 비슷했다. 여성 상품을 분홍색으로 만드는 전략은 핑크 기피증으로 이어졌다. 모든 여성이 핑크를 좋아할 거라고 믿는 안일함과 무신경함이 낳은 핑크색 제품은 강요처럼 느껴졌다. 아이를 낳고 2주간 머물렀던 산후조리원에서 핑크색 산모복을 입고 단체 생활을 할 때는 모성의 강요에 질식당할 것 같았다. 성형외과도 산부인과도 모두 핑크색 간판을 달고 있었다.
한동안 이어진 나의 핑크 알레르기는 핑크 갱(Pink Gang)으로도 불리는 인도 여성 단체 굴라비 갱(Gulabi Gang)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핑크색 사리를(Sari)를 입고 핑크색 대나무 막대기를 휘두르며 “여성을 존중하는 나라가 우리의 나라다”라고 외치는 그녀들의 모습에서 기존에 핑크색에 담겨 있다고 생각했던 이미지는 조금도 발견할 수 없었다. 가정 폭력, 아동노동 등 여성 권익을 위해 내는 핑크색 목소리는 결코 나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도에서 숱한 폭력에 시달리는 수십만 명의 여성을 지키는 색깔이었다. 그렇게 시야를 넓히고 나니 핑크색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페미니즘 책을 뒤덮고 있는 핑크색은 여자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핑크색은 여자를 한정 지을 수 없음을 보란 듯이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더 많은 여성들이 이공계 분야에 진출하도록 돕는 캠페인을 하는 걸스로봇 역시 능력과 외모와 취향 사이엔 상관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핑크색을 통해 말한다. 로고에 핑크색을 사용하고 핑크 큐빅이 가득 박힌 로봇을 만드는 이벤트를 연다. 많은 여성 전용 공유 사무실 인테리어가 핑크색인 이유도 동일하다. 사실 핑크는 오랫동안 유방암의 상징이기도 했다. 가슴을 조이던 코르셋 대신 핑크색 끈으로 연결한 브라에서 유래한 ‘핑크 리본’에는 자유, 아름다움, 건강함의 의미가 담겼다. 핑크를 넘어선 핑크는 당당하고 그 자체로 완전하다.
이런 심리를 발 빠르게 트렌드로 제시한 분야는 역시 패션이다. 지난 2년간 런웨이를 덮었던 노골적인 핑크색은 대담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레드와 함께 스타일링해서 강렬함을 배가하기도 했다. 누가 핑크를 모함했냐고 묻듯 리한나가 그래미 어워드 시상식에서 입었던 핑크 프릴 드레스는 어떤가. 이는 리즈 위더스푼이 일찌감치 영화 <금발이 너무해> 속에서 보여준 솔루션이기도 했다. 하버드 법대에서도 법정에서도 그녀의 핑크는 옅어지지도 달라지지도 않았다. 2019년 봄 여자들의 얼굴을 물들일 컬러도 역시 핑크다. <보그> 뷰티 디렉터 이주현은 마젠타 핑크가 레드의 자리를 대신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채도가 높아 형광빛이 도는 마젠타 핑크는 레드만큼 충분히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다.
여성들 사이에 일었던 ‘뉴핑크’ 해시태그 운동은 핑크 해방운동의 최근 기록이다. 플라밍고, 프란시스 하, 핑크 팬더 등 여자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핑크 이미지 사진을 뉴핑크 해시태그를 달아 올렸다. 누가 뭐라고 하건 나는 좋아하는 것을 숨기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어린 시절 수동적으로 주어진 핑크가 아닌, 각자 주체적으로 선택한 첫 핑크였다.
여자아이들의 문화를 탐구해온 호리코시 히데미는 저서 <여자아이는 정말 핑크를 좋아할까>에서 핑크는 모성, 에로, 헌신 등과 같은 이미지가 겹쳐 있지만 결국 ‘객체로 있으라는 요구’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기대가 옅어지는 중년기 이후에는 핑크에 대한 애증이 엷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덧붙인다. 분홍 배냇저고리에서 생을 시작한 여아는 무엇이든 핑크여야 하는 핑크 공주기를 지나 핑크를 좋아하던 자신과 핑크 그 자체를 기피한 후에야 핑크를 순수하게 바라볼 수 있는 객관성을 찾는다. 핑크에 대한 개인의 역사는 곧 여성의 성장기다.
30대 후반이 된 지금 나는 얼굴이 칙칙해 보이는 날은 베이비 핑크 스웨터를 꺼내 입고, 온통 핑크색으로 꾸며진 카페에서 딸기 프라푸치노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기도 한다. 어린 척하고 싶은 것처럼 보일까 봐, 유치해 보일까 봐, 사랑을 갈구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핑크를 피했지만 지금은 핑크가 주는 화사한 기분을 좋아한다. 사회는 여전히 여성스러움을 강요하지만 지금의 나는 휘둘리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사회는 물론 보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양가적인 느낌을 주는 색깔은 핑크뿐이다. 얼마 전부터 핑크색에 꽂혀 있는 여섯 살 아들에게 “핑크색이 왜 좋아?”라고 물었을 때 아이는 “예쁘니까”라는 대답을 돌려줬다.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핑크. 나의 핑크는 먼 길을 돌아왔다.
- 에디터
- 조소현
- 포토그래퍼
- courtesy of 윤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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