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는 지옥이다
착용감이 느껴지지 않는 편한 브래지어는 없다. 브래지어의 본질은 억압이니까.
원래 이 기사의 주제는 ‘유니클로 브라의 대체품 쇼핑’이었다. 패션지 입장에서 탈브라는 신선한 아이템이 아니었고 나와야 할 담론은 거의 다 나왔다고 여겼다. 매일 대중교통에 몸을 싣고 사무실로 향하는 입장에서 현실적 대안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있었다. 마침 영국 <보그>에서는 거의 착용감이 느껴지지 않는 브라가 출시되는 흐름에 대한 칼럼을 실었다. 네거티브 언더웨어 창업자는 더 로우나 피비 파일로가 디자인을 맡았던 시절의 셀린 같은 미니멀한 스타일을 찾는 여성을 위한 브라가 시중에 없음을 깨닫고 마이크로메시 원단으로 제작한 와이어 프리 브라렛을 내놓았다고 설명했다. 어덤, 로에베, 발렌티노 같은 옷을 입을 때 가슴을 ‘업’시키고 싶은 사람은 없다는 또 다른 인터뷰는 속옷 역시 패션 트렌드의 흐름 속에 있음을 실감케 했다. 3D 실리콘 프린팅 기술을 개발해 겉에서 속옷 라인이 보이지 않게 한 월포드의 3W 브라는 기술이 여성 해방에 일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영국의 경우 속옷 브랜드는 브라를 입었을 때 가슴 모양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으며 타고난 가슴을 그대로 돋보이게 하는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한다. 자,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어떨까. 나는 2주에 걸쳐 편안함을 내세우는 온갖 ‘메이드 인 코리아’ 브라를 사들였다.
일단 지금 우리에겐 다양한 브랜드라는 선택지가 있음을 밝히고 싶다. 불과 지난해까지만 해도 ‘보디 포지티브’를 내세우던 브랜드는 두어 개 정도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소셜 커머스에서도 깃털처럼 가볍고 편안하다고 주장하는 대단히 심플하게 생긴 브라를 찾을 수 있다. 틈날 때마다 브라렛을 검색해본 결과 대한민국 브라의 현주소는 봉제선이 없는 스포츠 브라 타입의 브라렛, 밀착되는 패드를 장착한 심리스 브라, 가느다란 고무 밴드로 속옷과 겉옷의 경계를 무너뜨린 브라렛, 고탄성 레이스 브라렛 4파전 정도로 요약됐다. 그런데 브라 쇼핑몰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익숙한 기시감이 찾아왔다. 포토샵을 하지 않은 일반인 모델 사진으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름답다’는 철학과 제품이 일치하는 브랜드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쇼핑몰 대부분은 봉긋한 가슴을 내밀고 허리를 살짝 뒤튼 채 편안한 브라를 광고했다. 모아주고 올려주는 뽕 브라 광고에서 브라만 갈아입은 모습 그대로 말이다. 하긴 애초에 입지 않은 듯 편안하면서도 처진 가슴과 등살을 보정해주며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실루엣을 살려주는 속옷이 존재할 수 있는 건가. 마음껏 먹고도 살을 뺄 수 있는 다이어트 약처럼 공존할 수 없는 가치 아니던가. 탈착 가능한 패드는? 몸에 닿는 속옷이니 더 신경 써야 한다며 새롭게 등장한 속옷 전용 세제는? 자본주의는 ‘보디 포지티브’를 트렌드로 삼아 끊임없이 여자들의 소비를 조장하고 있었다.
폭풍 같았던 쇼핑 후 매일 새로운 브래지어를 착용하며 장단점을 비교 분석했다. 기존 브래지어 사이즈가 아닌 새로운 사이즈를 알아야 했기에 전문가가 시착해주고 사이즈와 디자인을 컨설팅하는 속옷 매장도 다녀왔다(홍보와 달리 매장에 전문가는 없었다. 아르바이트생은 한번 제품을 개봉하면 교환·환불이 되지 않는다는 경고만 날렸다. 아, ‘페미코인’!!!).
브래지어 착용기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100% 의 브래지어를 만나는 일’을 관뒀다. 어떤 브래지어는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피부처럼 착 감겼고, 어떤 브라렛은 재봉선이 거칠어 하루 종일 온몸을 긁어야 했다. 조금 더 편안하거나 조금 더 불편하거나. 각기 다른 브라가 낳는 차이는 이 정도에 불과했다. 애초에 브래지어를 착용할지 말지 결정조차 하지 않은 브래지어 착용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브래지어의 본질이 ‘억압’임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숱한 브래지어를 착용하기 위해 브래지어를 벗어본 후에야 나는 탈브라를 한 사람들이 주장해온 자유로움이 단순히 불편함으로부터 해방이 아님을 깨달았다. 속옷 라인이 드러나지 않도록 매끈하게 디자인된, 하지만 몸통을 조여오던 브라렛을 입은 채 나는 과거에 건너뛰었던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브래지어를 왜 착용해야 하나. 사실 나는 브래지어에 불만이 없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언젠가부터 브래지어를 해야 한다는 엄마 얘기를 듣고 착용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입고 다녔다. 해야 한다고만 들었을 뿐 풀어야 한다고 말해준 사람이 없어서 잘 때도 브라를 하고 잤다. 브라 끈이 흘러내리거나 갑자기 호크가 풀려 화장실에 가서 낑낑거리며 채울 때도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가슴이 작은 편이라 딱히 출렁이지도 않았고 딱히 답답하지도 않았다. 겨울에 양말도 신고 자는 부류로서 오히려 브라 속으로 들어가면 따뜻했고 안심이 됐다(수십억 명의 전 세계 여자들이 혀를 차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배꼽처럼 겨드랑이 털처럼 브라는 그냥 그 자리에 있었으면 하는 존재였다(나는 겨드랑이 털을 밀고 나면 대단히 허전해한다).
대안 브라로 검색해 찾은 조끼 브라를 테스트하면서 난생처음 노브라 상태가 됐다. 조끼 브라는 유두 근처만 두 겹으로 되어 있을 뿐 길이가 짧은 민소매 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시대에 한복 안에 입었을 법한 디자인으로 가슴을 감싸주지도 올려주지도 않는다. 조끼 브라를 입고 처음으로 내 가슴은 중력을 거스르지 않는 상태가 됐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통증이 찾아왔다. 브라를 벗은 느낌이 낯설어서, 정확하게 말하면 유두가 다른 데 닿는 느낌이 끔찍해서 나도 모르게 몸을 자꾸 뒤로 빼다 보니 어깨와 등이 아파왔다. 긴장해서인지 가슴도 쓰라렸다.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탈브라를 하면 너무 편해서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고 했는데 어째서?
커뮤니티에 사연을 올렸더니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동조의 글이 올라왔다. 브라를 벗은 후 유두가 쓸려서 피가 났거나, 운동할 때 가슴이 뜯기듯 아파서 다시 브래지어를 착용하고 있다고도 했다. 브라를 벗은 상태가 되레 불편할 정도로 브라에 몸을 맞춰왔다니. 도대체 나는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걸까.
모든 건 브래지어를 입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심리적인 강박 때문이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걸 남들이 알까 봐, 스스로도 어색해서 일어난 심리적 위축이 통증까지 이어진 셈이다. 브래지어를 했을 때 느낀 안정감은 익숙함일 뿐 실제로 내 몸이 원하는 편안함이 아니었다. 물방울성형외과의원 이영대 원장은 브래지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했다. “브래지어는 보조 속옷입니다. 브라의 진짜 역할은 가슴을 받쳐주고 잡아주는 겁니다. 가슴이 큰 경우 무게 때문에 잡아줄 필요가 있는 거죠. 하지만 우리나라 여성들 체형상 그런 필요에 의해 브라를 해야 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가슴이 큰 경우를 제외하고는 브래지어를 할 필요가 없어요. 사회 문화적 통념에 따라 필요 없는 속옷을 입고 있는 거죠. 유두는 신경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서 예민한 부위기 때문에 브라를 벗으면 당장 불편할 수는 있어요. 돌출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데 닿기도 하고요. 이런 경우 유두 패치만 해도 충분합니다.” 운동할 때 가슴이 아프다면 브라로 잡아줄 필요가 있고 유두가 쓸린다면 보호해주면 되는 것. 브라는 항상 착용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의 필요에 따라 활용할 수 있는 보조 도구다.
브래지어에 ‘봉긋 솟는 기능’, ‘유두 가리기 기능’ 따위를 부여한 건 사회다. 가슴의 주인이지만 나는 그 기능의 필요성을 따져 묻지 않았고 그 대가로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억압당한 나 스스로를 극복해야 하는 숙제가 생겼다. 탈브라를 향한 타인의 시선과 싸움은 그 이후일 것이다. 브래지어 쇼핑 역시 그다음 단계인 것이다. (어덤, 로에베, 발렌티노 같은 옷을 입을 때 입고 싶은, 더 로우나 피비 파일로가 디자인을 맡았던 시절의 셀린 같은 미니멀한 스타일 말이다.)
리나 에스코의 다큐멘터리 <Free the Nipple>을 보고 울면서도, 여성의 가슴을 성적 대상화하는 사회에 분노를 느끼면서도 정작 내 가슴을 마주하지 않았던 이중생활은 끝났다. 늘 타인에게 몸을 맡기던 내겐 엄청난 성장이자 도약이다(아기를 낳고도 질 속에 생리컵 넣기를 두려워하는 여자들이 존재하는 이유다. 몸가짐이 조신해야 한다는 얘길 들으며 자라면 성적인 용도로 사용되는 부위는 건드리지조차 않게 된다).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유두가 책상에 닿는 느낌이 익숙해지질 않아 쿠션을 안고 있다. 하지만 브라에 적응했듯, 노브라에도 적응할 것이다. 내 가슴은 받쳐주고 잡아줄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여자 스스로 브라의 호크를 채우게 했던 엄청난 위협 ‘브라를 하지 않으면 가슴이 처진다’에 대한 진실은 짚고 넘어가야겠다. 이영대 원장은 말했다. “두 가지 주장이 있어요. 하지만 이 역시 가슴이 큰 경우에만 해당됩니다. 쿠퍼 인대는 가슴을 잡아주는데 브래지어라는 응원군이 같이 잡아주면 가슴이 늘어지는 걸 방지한다는 의견이 있어요. 반대로 브래지어를 하지 않으면 가슴이 알아서 잘 견디고 발달할 텐데 오히려 퇴화시켜서 가슴이 늘어진다는 의견도 있어요. 어느 쪽도 권위 있는 의학 논문에 발표된 바 없기 때문에 그런 얘기가 있다 정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 에디터
- 조소현
- 포토그래퍼
- GettyImages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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