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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육아 프로그램을 보며 ‘정상성’에 안녕을 고하다

2021.08.24

by 김나랑

    달라진 육아 프로그램을 보며 ‘정상성’에 안녕을 고하다

    가부장제에 충실하던 육아 프로그램이 달라지고 있다. 우리가 믿던 ‘정상성’에 안녕을 고할 시간이다.

    Delphine Desane ‘Motherhood During a Pandemic’, 2021, Acrylic on Paper, 30×22in.

    나는 프랑스 남자와 산다. 결혼은 하지 않았다. 그가 동거인이 생겼다고 통보하자 가족들은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나를 만나러 왔다. 애인 자신조차 7년째 만나지 않은 가족이고 그중엔 거동이 불편한 분도 있었다. 새삼스러운 고난의 행군에는 중요한 동기가 있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고모님이 기회를 놓칠세라 황급히 말을 꺼냈다.

    “저 녀석이 알면 난리를 칠 거야. 하지만 이걸 물어보려고 비행기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여길 왔단다. 혹시 출산 계획이 있니? 낳기만 하면 우리가 키워줄 수도 있어!”

    화법은 단도직입이나 내용은 간청이었다. 결혼도 안 했는데 출산이라니. 한국 동거남의 가족이 물었다면 황당했을 거다. 하지만 상대는 프랑스인. 그들에게 혼인은 출산의 필수 조건이 아니다. 출산은 여성이 결정할 문제라 믿고, 이혼을 하면 엄마가 양육권을 가질 확률이 높은 나라다. 가뜩이나 양육하면서 회사 다니기 힘든데 국가의 지원도 미미해서 고단한 한국 싱글 맘과 달리 프랑스는 육아 보조금도 잘 나온다. 사회의 인식 차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애인 있는 비혼 여성이 출산을 고려하는 건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의 ‘너 애 낳고 싶니?’는 말 그대로 ‘너 애 낳고 싶니?’다. ‘너는 우리 집안 며느리가 되어 커리어는 잊고 대를 이으면서 여필종부하겠느냐’가 아니고. 안타깝게도 나는 그들에게 한국 여성이 출산을 하려면 어떤 필사의 각오가 필요한지 설명해야 했다.

    “나는 이미 가임기 막바지다. 그것과 별개로 한국 사회 통념상 싱글 맘과 혼혈 아이가 겪을 고초를 생각하면 당장 이 사람이 좋고, 내가 애를 갖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 나는 만약의 경우 혼자 아이 키우고 교육시킬 만큼 경제력이 있지도 않다. 한국의 사회보장은 그리 미덥지 않다. 그러니 이번 생에 내가 아이를 낳는 일은 없지 싶다.” 그들은 다시 묻지 않았다.

    후지타 사유리 씨가 출연한 <슈퍼맨이 돌아왔다>(KBS2)를 보면서 몇 년간 잊고 지낸 그 일이 떠올랐다. 아기가 얼마나 예쁜지, 나도 모르게 옆에 있는 남자 친구를 보며 ‘우리 유전자를 합하면 혹시 저런…’ 상상하다가 도리질을 쳤다. 10년만 젊었어도 깜빡 넘어갈 뻔했다. 비록 나는 아이를 낳지 않겠지만 <슈돌>의 사유리와 젠을 지켜보는 건 즐겁다. 그들이 정상성을 강요하는 한국 사회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사유리는 비혼이고, 정자은행을 이용했으며, 아이는 혼혈이다. 동아시아의 이상적인 가족상에 하나도 부합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유리 특유의 천연덕스럽고 유머러스한 태도는 시청자들이 이 파격을 파격이라 인지할 겨를도 없이 수용하게 만든다. ‘비혼 여성의 정자은행 이용 찬반’이란 주제로 100분 토론을 벌였으면 싸움만 하다 끝났을 텐데 그저 현실을 들이미는 것으로 벽 하나가 무너졌다.

    출생률 저하가 심각하단 얘기는 오래전 나왔지만 여태 백약이 무효였다. 2020년 한국 합계 출산률은 0.84명으로 사상 최저이며 G20 국가 가운데 가장 낮았다. 2015년에는 생산 인구 세 명이 아동이나 노인 등 피부양 인구 한 명을 먹여 살렸는데 2055년에는 생산 인구 한 명당 피부양 인구 한 명을 부양해야 한다. 우리는 더 많은 아이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인 남녀끼리 결혼해서 만든 이른바 ‘정상 가정’에서 태어난 건강한 아이가 아니고는 환영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비혼 출산, 이혼 가정 자녀들, 입양, 국제 이주민 등에 대해 만연한 편견과 차별을 생각해보라. 2017년에는 특수학교 설립에 반대하는 주민들 앞에 발달 장애아 엄마들이 무릎 꿇은 사진이 공개돼 공분을 산 적 있다. 최근 그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학교 가는 길>을 개봉했는데 주민 중 한 명이 상영 중단 가처분 신청을 냈다. 평범하지 않으면 이토록 죄인 취급, 비정상 취급 받는 나라에서 아이를 낳는 건 너무 큰 모험이다.

    최근 기획재정부 의뢰로 미국 싱크 탱크가 진행한 연구 보고서(<코로나19 대유행의 광범위한 영향: 한국의 재정 전망 및 출산율 전망’,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에도 이 같은 내용이 담겼다. 보고서는 고학력 여성의 결혼 기피, 여성의 과도한 가사 부담, 상대적으로 높은 교육비, 사회 안전망과 양육 지원 미비 외에 ‘다양성’에도 주목했다. 한국은 혼외 출산이 2.3%에 불과해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독일은 혼외 출산이 30%가 넘고 미국은 40%, 덴마크와 스웨덴은 50%가 넘는다. 이들 나라의 높은 출생률이 여기에 기반한다. 보고서는 비혼인 관계에서 출생한 자녀, 편부모, 동성 부부 등 비정형 가정에서 양육하는 아이들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사회 인식을 개선하라고 제안한다. 또한 외국인 남성과 고학력 한국 여성의 결혼을 포함한 결혼 이민 장려, 국내 장기 체류 외국인 자녀에게 실질적 시민권 부여 등도 언급했다.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은 이 보고서를 인용하며 “정부는 출산율 반등을 목표로 혼인을 장려해온 정책 기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2017년 한국 여성들에게 큰 웃음을 안겨준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논문(<제13차 인구포럼: 주요 저출산 대책의 성과와 향후 발전 방향> 중 원종욱 선임연구위원의 ‘결혼 시장 측면에서 살펴본 연령·계층별 결혼 결정 요인 분석’)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해당 논문에는 ‘혼인율 하락이 출산율 하락에 크게 기여한다.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서 고학력, 고소득 여성의 배우자 하향 선택을 은밀히 유도하자’는 요지의 분석이 있었다. 최근 유력 대선 주자가 ‘페미니즘이 저출생 원인’이라 발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들의 자그마한 세계에서 출산은 결혼의 부산물일 뿐이고, 젊은이들이 결혼을 못하는 건 여자들이 콧대가 높아서 남자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그간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고도 출생률 개선에 실패하고 새로운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시점에 대형 방송국 예능 프로그램이 변화하는 건 의미심장하다. 7월에는 <용감한 솔로 육아-내가 키운다>(JTBC)가 방영을 시작했다. 김현숙, 김나영, 조윤희, 채림 등 연예계 싱글 맘들이 출연한다. 만일 컨셉이 ‘싱글 대디의 좌충우돌 육아 일기’이고 살림과 육아에 서툰 남자들이 성장하는 내용이었다면 가부장제 옹호자들의 사랑은 듬뿍 받았을지언정 지금처럼 여운이 남지는 않았을 거다. 김현숙과 채림은 아이에게 엄마 성을 물려주기도 했다. 아빠들에겐 너무나 쉽고 당연한 일이 엄마들에겐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프로그램을 둘러싼 반응도 흥미롭다.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사유리가 출연하기로 한 3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방송을 금지시켜달라는 청원이 올라왔다. 동의는 4,119명으로 많지 않았다. 하지만 내용은 기억해둘 만하다. “이럴 때일수록 공영방송이라도 올바른 가족관을 제시하고 결혼을 장려하며 정상적인 출산을 장려하는 시스템과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건만 (중략) ‘비혼모’를 등장시켜서 청소년들이나 청년들에게 비혼 출산이라는 비정상적인 방식이 마치 정상처럼 여겨질 수 있는 (중략)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문장마다 ‘올바른, 바람직한, 정상, 비정상’ 등 규범을 가르는 용어가 등장한다.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가 한국 출생률 폭망의 한 원인으로 꼽은 혼외 출산 차별이 고스란히 담긴 그림 같은 예시다. 하지만 방송이 시작되고 주인공들의 자연스러운 일상이 공개되자 호의적인 반응이 대세를 이루었다. 사유리는 “아이를 낳으면 즉각 사랑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사랑하게 되더라. 만약 내가 낳은 아이가 아니고 병원에서 바뀌었다고 해도 이 아이를 선택할 것이다”라는 탈혈연주의 발언으로 입양 가정에도 희망을 주었다.

    <용감한 솔로 육아-내가 키운다>도 마찬가지다. 방송 초기 유튜브 클립에는 “이혼했으면 조용히 살 것이지”라는 댓글도 있었다. 한국 사회는 이런 유의 무가치한 소수 의견이나 혐오 발언을 너무 쉽게 여론이라고 인정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논란 따위 싹틀 틈도 없이 긍정 반응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자신을 유치원 교사라고 밝힌 유튜브 이용자(대화명 으라차)는 이런 댓글을 남겼다.

    “요즘 정말 한 부모 가정이 많아요. 제가 만나는 분들은 이혼하신 지 얼마 안 된 분들이 많아 학부모님들이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많이 봤어요. 이 프로가 많은 한 부모 가정의 학부모님들에게 공감과 위로로 다가왔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프로그램에 출연한 엄마들은 아직 이혼의 상처를 이겨내는 중인 것처럼 보이지만 아이들은 천진하다. 이혼 가정 아이들은 이러저러할 거라는 편견에 이들의 모습이 좋은 치료제가 될 것이다.

    이런 프로그램은 너무 시의적절해서 정부의 프로파간다가 아닐까 의심마저 든다. 음모론이 넘쳐나서 피곤한 세상에 굳이 보탤 필요 없으니 하늘이 내린 기회라 해두자. 대중은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익숙한 것에 동조하는 경향이 있다. 미디어가 다양한 가정을 보여주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가정은 삶의 형태이고 삶은 존재의 방식이다. 만인이 따라야 하고, 누구나 따를 수 있는 정답이란 없다. 사회가 다양한 가정을 포용하고 지원할수록 출산의 공포는 줄어들 것이다. ‘한국 여자와 한국 남자가 결혼해서 장애 없는 이성애자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아 함께 기르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 ‘올바른, 바람직한, 정상’이라고 불릴 일이다. 꽉 막힌 세상에 숨구멍 하나가 생긴 기분. 육아 프로그램이 그걸 해낼 줄은 몰랐다. (VK)

    피처 에디터
    김나랑
    이숙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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