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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파도를 타며

2021.10.12

역사의 파도를 타며

도산 안창호 선생의 외손자는 로스앤젤레스의 박물관 같은 집에 머문다. 필립 안 커디는 가문에서 비롯된 역사를 연구할 뿐 아니라 유명 서퍼로서 한국 서핑 문화를 돕는다. 그의 삶은 우리가 잊은 무언가를 상기시킨다.

보라색 스웨트셔츠는 구찌(Guc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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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 곳곳에 역사적 기록물과 유품이 가득해 박물관 같아요. 이곳에서 어떻게 지내나요?

역사에 둘러싸여 살아요. 매일 집을 누비며 도산 안창호 선생, 할머니, 어머니, 필립 외삼촌을 만나죠. 물론 아버지도요. 어머니처럼 해군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혁혁한 공을 세웠죠. 학자들의 역사 연구도 돕고 있어요. 우리 가문과 한국사의 가슴 아픈 오류를 바로잡는 것이 제 운명이죠! 그 외에는 매일이 달라져요. 서핑이 일상이니까요. 하하! 파도 예보, 날씨, 물때표를 확인해 일정을 세워요. 50년간 서핑으로 멋진 추억을 쌓았고 여전히 희열을 느낍니다. 요즘엔 한국 서핑 세계에게 서핑 비즈니스 경험을 공유하고, 시흥 웨이브파크에서 김은아 박사의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서핑 테라피 개발에 참여하고 있어요. 여유가 생기면 말리부 목공소에서 장인 메이스 스탠리(Mace Stanley)와 일하죠. 제가 지은 말리부 해변가의 한 주택은 1990년 5월호 <AD> 표지에 실렸어요. 때론 예술품도 만듭니다. 어머니가 소장한 골동품 관음보살 두상을 활용한 작품도 있죠.

도산 안창호 선생이 여성 인권에 관심이 높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인권 운동가로서 모두 존중받아야 마땅하다는 생각에 존댓말의 개념을 허물고 싶어 하셨고요.

도산은 한국어 존댓말을 철폐하고 싶어 했어요. 그는 사람들이 성(姓, Family Name)이 아니라 훌륭한 행동에 따라 존경받아야 한다고 여겼죠. 도산의 여성 인권에 대한 견해는 진정성과 분별력이 있습니다. 이는 서재필 선생의 영향을 받았어요. 서재필 선생은 1884년 갑신정변 실패로 도미한 후 조선으로 돌아와 1896년 독립협회를 창설했습니다. 도산도 그 단체의 회원이었죠. 자유로운 사상가들이 모인 이 단체는 여성 역할의 변화를 토론했죠. 사회 속 여성의 위치에 대한 도산의 시각에 영향을 준 세 가지가 있습니다. 도산이 열 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1800년대에 어머니 홀로 네 자녀를 키우셨어요. 하지만 그녀는 남성 중심의 세상에서 애국심 넘치는 훌륭한 가문을 일궈냈어요. 도산의 여동생 안신호 선생 역시 일본에 맞서 투쟁한 독립운동가입니다. 도산은 어머니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 또 다른 영향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입니다. 1894년 청일전쟁 중 일본과 청나라 군인이 조선 여성에게 가한 가혹함이 명성황후 시해로 재발한 거죠. 당시 구세학당 학생이던 도산은 여성이 얼마나 부당한 대우를 받는지 인지했어요. 마지막 영향으로, 도산은 영어를 가르쳐준 선교사들과 교류하면서 마음을 넓혔습니다. 도산이 진료 보조원으로 일한 제중원에서 만난 외국인 간호사와 조선인 간호조무사도 영향을 줬죠. 이들을 보며 조선의 안녕에 여성의 중요성을 깨달았어요. 도산은 독립된 국가를 건설하려면 남성과 여성이 뭉쳐야 한다며 남녀공학인 점진학교(나날이 조금씩 배워가는 학교)를 열었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부당하게 점령했을 때, 도산은 여성의 역할을 더욱 중시했어요. 1907년 신민회를 설립하고, 여성들이 지하 정보 조직의 요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이 비밀 저항 단체 소속인 차경신 선생과 김마리아 열사가 3·1 만세 운동을 위해 동경에서 한양으로 독립선언서를 운반했죠. 1913년 여성들은 흥사단의 의결 회원이 되었고요. 미국 여성이 투표권을 얻은 1920년보다 7년이 앞섰습니다.

도산의 딸이자 당신의 어머니 안수산(Susan Ahn Cuddy)은 시대를 앞선 여성이었어요. 아시아계 여성 최초의 미 해군 장교이자 국가안전보장국(NSA) 분석가였죠. 그녀의 가장 큰 유산은 무엇인가요?

어머니의 삶은 많은 영감을 줍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도산 안창호)를 잃고 나서부터 힘든 삶을 살았어요. 그러나 부당한 사회 기준, 인종차별에 맞서 끈기 있게 투쟁했죠. 미 해군과 국가안전보장국에서 어머니의 직책이 꽤 높았기에 자신을 드러낼 순 없었지만, 업무에서나 지역사회에서 훌륭한 리더였죠. 어머니를 다룬 책 <버드나무 그늘 아래(Willow Tree Shade)>를 더 많은 이들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어머니는 남성 중심의 세상에서 성공한 리더이자 개척자거든요.

안수산 여사는 2015년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젊은이를 위해 강연을 할 정도로 의욕이 넘치셨죠. 샌디에이고주립대학에서 사회학 학위를 따기 위해 아동심리학을 공부했고, 훗날 아동 관련 한국 책을 쓰셨어요.

그 책을 여러 번 읽었죠. 집에도 한 권 있어요. 한국 전래 동화와 미국 고전 시를 수록한 책이죠. 한국과 미국의 문학을 통해 삶의 교훈을 전하고 있어요. 초창기 재미 교포들이 좋은 인품으로 자라길 바라며 집필하셨죠.

지금도 생생한 어머니와의 일화가 있나요?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이 생생합니다. 저는 보조기를 짚고 걷는 어머니를 욕실에서 침실로 모셨고 평소처럼 대화했어요. 다음 날 아침 좋아하는 의자에 앉으신 어머니가 저를 빤히 보시더니 “뭐 하고 있어? 날씨 좋은데. 서핑 가야지?”라고 하셨죠. 6월이었어요. 어머니도 서핑 시즌임을 아셨어요. 어머니는 “나중에 보자!”며 손을 흔드셨어요. 눈을 감으시려고 제가 집을 비우길 바라신 거예요. 지금도 어머니의 미소에 담긴 온기가 너무 그리워요. 어머니가 옳았죠… 그날 파도가 정말 좋았거든요.

어린 시절 한동안 외할머니와 사셨죠. 이혜련 여사께서는 1902년 미국으로 가 남편 안창호와 재미 한인 사회의 계몽에 힘썼고, 1919년 8월엔 흩어졌던 한인 여성 애국 단체를 통합해 대한여자애국단을 창단하고 독립 자금을 지원하셨어요. 농장과 병원 노동자 등으로 일하며 3남 2녀도 훌륭히 키워내셨죠. 어머니 안수산의 강인함은 외할머니 이혜련에게 물려받은 것이군요.

할머니의 삶은 공부할수록 놀라요. 할머니가 없었다면, 도산은 조선 해방을 위한 업적을 마음껏 일구지 못했을 거예요. 할머니는 18세에 도산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어요. 중매가 아니었죠. 그녀는 고되게 번 돈을 도산의 업적에 보탰어요. 그들이 함께 보낸 세월은 13년에 불과합니다. 도산이 늘 타지에서 활동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어머니는 할머니가 우는 것을 딱 한 번 보셨대요. 도산이 가혹한 고문으로 돌아가신 바로 그날이었죠. 할머니는 여생을 꿋꿋하게 살아갔어요. 어린 나는 할머니의 억척스러움, 현실 대처 능력, 소박함과 따뜻한 마음을 보았죠. 할머니는 제가 혼혈이라 시련을 겪을 거라며 저를 보호해주셨죠. 그리고 할아버지 도산이 어떤 인물인지 알려주셨어요.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5,000여 장의 역사적인 사진, 서신 등 각종 기록물을 보관하셨어요. 깜짝 놀랐죠. 현재는 천안 독립기념관에 보관 중입니다. 할머니는 그중 도산이 쓰던 여행 가방과 굉장히 오래된 깃발 세 개를 제게 주셨어요. “진실이 아니면 그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라는 할머니의 가르침은 제 마음에 살아 있어요.

60여 차례 방한했어요. 첫 방문은 1973년 ‘도산공원’ 개장식이었죠. 현재 도산공원은 화려한 동네 가운데 자리하지만 이전에는 황량한 지역이었죠.

저는 어머니, 누나, 필립 외삼촌과 함께 도산공원 준공식에 참석하려고 1973년 처음 한국을 찾았죠. 그 당시 압구정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누에와 과일밭뿐. 현재 도산공원은 서울의 북적이는 빌딩 숲에 있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더 많은 이들이 그곳에 들렀으면 좋겠어요. 또 당시 서울 전역에 있는 가시철망, 군인들과 기관총 포탑을 보며 너무 안타까웠어요. 한국에서 또 한 번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은 천안 독립기념관 개관식이었습니다. 저와 어머니가 수년 동안 준비한 소장품을 기증하기로 한 날이죠. 웅장한 시설도 놀라웠고, 도산이 어떻게 역사로 남았는지 살펴보니 경이로웠죠.

후손으로서 도산의 유산을 지켜나가는 데 어떤 어려움이 있나요?

아쉽게도 역사를 잘 모르는 이들이 많아요. 제가 <무한도전>에 출연했을 때 방송국 관계자나 출연진은 도산에 대해 잘 알지 못했죠. 많은 외국인이 잘못된 정보를 믿었고요. 일본군 위안부에 말도 안 되는 논문을 발표한 마크 램지어 하버드 교수 같은 학자들은 사실보다 재정적 지원에 편향되어 있죠. 일을 잘못하는 한국 역사 단체도 많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서핑으로 날려버립니다. 그렇게라도 정화시킬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죠.

태극기가 그려진 보드를 갖고 있는데, 가장 아끼는 서핑용품은 뭔가요?

보물 중 하나가 1978년형 배리 카나야푸니(Barry Kanaiaupuni) 라이트닝 볼트서핑 보드입니다. 이 보드에 올라 하루에 오프 더 월(Off the Wall)과 백도어 파이프라인(Backdoor Pipeline)을 탔죠. 이제껏 가장 큰 파도였죠. 이 서핑 보드를 들면 그날의 오싹함이 전해져요. 한국과 관련된 두 개의 서핑 보드도 중요하죠. 얼마 전 그것들을 시흥 웨이브파크에 기증했어요. 그중 하나는 1991년 5월 제주도에서 탄 보드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맨 먼저 서핑한 사람일 거예요. 또 다른 하나는 태극기를 부착한 서핑 보드로, 1995년 코스타리카 롱보드 챔피언십에서 탔던 거예요. 참가 종목에서 2위를 했죠. 그 외 서핑 보드에 대부분 한국적인 뭔가가 부착되어 있어요. 한동안 빨강과 파랑 보드복을 입기도 했죠.

열네 살 때 서핑을 시작했어요. 1969년 가족이 하와이로 가면서 어머니가 와이키키 서핑학교에 꼬마 필립을 데려갔습니다. 스스로 첫 파도를 잡은 순간을 기억하나요?

와이키키에서 처음 서핑하던 날이 떠올라요. ‘신난다’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죠. 하와이안 선생님에게 강습을 받았어요. 뜨겁고 화창한 어느 여름날 파풀라(Popular)라 불리는 인기 서핑 스폿에서, 불과 몇 번 만에 보드에 섰죠.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나는 것 같았죠. 멈추고 싶지 않았어요. 일요일마다 어머니는 직접 운전해 샌타모니카 해변으로 저를 데려다줬어요. 그곳에서 혼자 서핑을 시작했죠. 열다섯 살이었어요. 그해부터 1988년까지 매년 여름이 되면 하와이로 돌아갔습니다. 하와이는 두 번째 고향입니다. 저는 행운아예요. 파도를 향한 열정이 와이키키에서 싹텄으니까요.

1970년대에 서핑은 주류 문화가 아니어서 서퍼의 긴 머리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었죠. 하지만 요즘 서핑은 세계인이 사랑하는 문화이자 액티비티죠. 긴 세월 서핑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바뀌었나요?

당시 사회는 서퍼를 쉽게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서핑은 반체제 문화였으니까요. 서퍼를 다른 종자로 취급했죠. 우리는 바다와 연결되었고, 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다른 시선으로 봤죠. 제가 자라는 동안 서핑 보드와 문화가 엄청나게 변했죠. 저는 변화를 수긍해요. 현대 서퍼들이 나와 다르다는 사실도 받아들입니다. 오늘날 서핑은 라이프스타일을 넘어 액티비티가 되었죠. 그들은 우리처럼 파도와 함께 어울리기보다는 파도를 탑니다. 요즘 서퍼들은 멋진 물건을 구매하고 더 많은 기술을 익혀야 하죠. 제가 한창 서핑하던 시절에는 사회와 사람들로부터 벗어나는 데 의미가 있었죠. 현대 서퍼들은 그때와 다른 희열을 느낍니다. 소셜 미디어가 그것을 보여주죠. 그래도 서핑은 여전히 가장 멋진 경험이고 앞으로도 늘 그럴 겁니다.

1987년 독립기념관에서 개최한 8·15 기념식 영상에서 제주의 바다를 보고 한국에서 서핑을 꿈꿨죠. 드디어 1991년 서핑 보드를 들고 입국했으나 공항 세관에서 “돛이 없다”며 보드를 빼앗았어요. 달라진 한국 서핑 문화를 체감하나요?

1987년 천안은 불가마처럼 뜨거웠어요. 정장에 넥타이까지 매고 독립 유공자 유가족들과 있었죠. 마지막 전시관에서 영화를 상영했어요. 처음엔 그저 태양을 벗어날 수 있어서 좋았죠. 영상에서 제주 중문에서 한라산으로 뻗은 전경을 봤어요. 그 뒤로 완벽히 부서지는 파도도요. 그때부터 한국은 또 다른 매력을 가진 나라가 되었죠. 1990년 마침내 그곳이 어디인지 알아내 다음 해 5월 제주도에서 서핑을 했답니다. 당시는 한국에 서핑 문화가 없었어요. 뛰어난 윈드서퍼였던 서미희 선수가 1996년 서핑을 시작했죠. 저는 2000년과 2001년에 여성 프로 롱보드 서핑을 홍보했지만, 적절한 경기가 없었어요. 요즘 한국에 뛰어난 여성 서퍼가 많아져서 즐거워요. 한국은 서핑 보드도 잘 만들고 전역에 서핑 강습소가 자리하며 인공 파도를 갖춘 시흥 웨이브파크도 있죠. 서핑 문화도 무르익었죠.

“도산이 서핑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분명히 하셨을 거다”라고 말했죠. 도산은 평안남도 대동강 하류의 도롱섬에서 태어나 물과 친근하셨고, 그렇기에 독립운동하던 시절 다른 이들이 육로를 선택할 때 황해를 항해해 상하이로 가셨죠. 도산도 섬산(Island+Mountain)을 의미해요. 1902년 미국을 항해하던 중 바다에서 솟아오른 하와이를 보고 ‘도산’이라는 호를 지으셨죠. 도산과 서핑 정신이 맞닿은 부분은 뭔가요?

도산은 여러 운동에 관심이 많았어요. 야구와 공동체 정신에 대한 노래도 썼죠. 또 어릴 적부터 물과 친근하게 자랐고, 많은 날을 바닷길로 이동했어요. 파도타기는 선한 인품과 사랑을 품게 하고 바다는 진실을 가르쳐요. 인품, 사랑, 진실은 도산 철학의 기반이죠. 도산의 사상은 하와이 문화인 알로하(Aloha) 정신과도 닮았죠. 알로하는 ‘Hello’ 또는 ‘Goodbye’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하와이 말 ‘Alo’는 ‘존재’ 또는 ‘공유’이고 ‘Ha’는 ‘삶의 호흡’ 또는 ‘삶의 본질’이죠. 알로하는 또한 사랑을 뜻합니다. 단순한 인사를 넘어 알로하는 정신과 마음의 조화죠. 다시 말해 당신 안에 존재하는 기쁨과 열정이고, 이를 타인과 공유해야 합니다. 이기적인 일이나 거짓말을 한다면 알로하는 상실됩니다. 도산의 유명한 글귀 중 하나가 “나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라”입니다. 알로하 정신과 닮았죠. 서핑 정신 또한 알로하와 연결되고요.

올해에 무슨 계획이 남아 있나요?

하와이로 돌아가 와이키키에서 서핑할 거예요. 한국의 서핑 잡지 <스톤드>에 글을 기고했는데 곧 발행돼요. 독자들이 내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더 많은 글을 쓰게 되겠죠. 지켜봅시다! 물론 한국 역사에 관한 임무도 있어요. 지난 4월과 5월 미국과 한국에서 역사 프로젝트 12개를 진행했습니다. 무지한 실수를 바로잡는 것들이죠. 젊은 디자이너와 세 권의 책 출판도 준비하고 있어요. 도산 선생과 할머니, 어머니, 필립 삼촌에 관한 거죠. 이 책은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상세히 설명할 거예요.

책을 준비하면서 새삼 느낀 점이 있나요?

집안의 유산이 자랑스럽죠. 가끔 눈물이 나요. 삶은 희미해지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가족의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게 할 책임이 있어요. 역사를 제대로 알리는 데 이 책이 그 역할을 하길 바랍니다.

‘헬조선’이라는 한국어를 알 정도로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에도 관심이 많죠. 팬데믹으로 젊은이들이 벼랑으로 더 내몰리는데요.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을까요?

미국에 온 한국 유학생을 통해 ‘헬조선’을 처음 접했죠. 한국에서 많은 젊은이가 좌절하고 있어요. 마음이 아파요. 도산이 말했어요. “젊은이의 좌절은 국가의 사망과도 같다.” 도산은 젊은이의 성취감 넘치는 미래를 건설하는 데 일생을 바쳤어요. 하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요? 젊은이들이 비판적, 독립적으로 사고하도록 통제하기보다는 자유로워지도록 도와야 해요.

환경오염, 코로나 등 여러 문제를 후손에게 떠맡기고 있어요. 우리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어떤 정신을 새겨야 할까요?

세계적으로 환경오염이 심각해요. 도산이 보여준 사랑의 철학은 사람을 초월해 땅과 바다에까지 적용되죠. 우리 삶이 변화하지 않으면 세상은 살기 힘든 곳이 돼요. 바다에서 서핑도 못하겠죠. 하지만 희망은 있어요. 한국의 ‘바다 환경 지킴이’와 ‘세이브제주바다’ 등의 단체가 바다 쓰레기를 치우더군요. 그들은 정말 진지하고 한결같아요. 저도 말리부에서 비슷한 프로그램을 운영했죠. 도산은 해변을 청소하는 이들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할 거예요. 도산이 말했죠. “사람들로 이루어진 국가의 일원으로서 삶에 더 많은 사랑을 불어넣어야 한다. 부모와 자식 간 사랑, 부부간 사랑, 동료 간 사랑, 일을 향한 사랑, 우리 조직을 향한 사랑, 모든 인류를 향한 사랑을 더 키우자… 우리가 뭉치기 힘든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사랑의 부족이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자… 동포들을 사랑하자. 잘못을 용서하고, 서로의 선행을 칭찬하자.” (VK)

어머니 안수산 여사의 흉상.

캘리포니아 과수원에 선 안창호 선생의 초상화 등 역사가 흐르는 필립 안 커디의 자택.

안창호 선생의 가족사진.

“나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라”는 안창호 선생의 애기애타 정신.

    사진
    곽기곤
    피처 에디터
    김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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