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지후는
영화 <벌새>의 열네 살 은희, 박지후가 스무 살이 되었다. 신고식은 좀비가 창궐하는 학교에서 극한을 헤쳐가는 <지금 우리 학교는>이다.
박지후는 지난해 11월에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 합격했다. “아침에 컴퓨터로 확인하는데 얼마나 떨렸는지 몰라요. 믿고 싶으면서도 ‘합격’이란 두 글자가 믿기지 않았어요. 화면을 바로 캡처해서 부모님께 보내드렸죠. 마침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라 선물을 드린 것 같아 더 기뻤어요.” 박지후의 친언니가 범죄심리학을 공부했기에 (현재는 전공이 바뀌었다) 한때 심리학과도 고민했다. “원래 <그것이 알고 싶다>나 <궁금한 이야기 Y> 같은 프로그램을 진짜 좋아해요. 추리하고 심리를 생각해보는 게 재미있어요.그래도 연기 관련 학과를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어요.”
12월, 고등학생으로서 마지막은 친구들과 교실에서 돗자리를 깔고 랜덤 게임을 하며 보냈다. <벌새>에서 조용히 성장통을 앓던 은희의 내성적인 이미지와 달리 실제 박지후는 ‘인싸’ 학생에 가깝다. 그가 없으면 “지후 어디 갔어?”라고 친구들이 찾을 정도. “수능 끝나면 교실에서 공부하기 싫잖아요. 제가 예능 프로그램 MC라도 된 것처럼 ‘이 게임 해보자, 저거 하고 놀자’며 주도했어요. 잊지 못할 고 3의 추억을 만든 것 같아 뿌듯해요. 친구들이 정말 소중하고 고맙거든요. 연기 활동할 때도 응원하고 도와줬어요. 선생님들도 마찬가지고요. 덕분에 일하면서도 재미있게 학교 다닐 수 있었죠. 엄마랑 가끔 ‘감사한 일이 참 많다’는 얘기를 해요. 이런 친구들이 있는 것도 감사하고, 학교 생활도 감사하고.” 박지후는 중학 시절 선생님에게도 종종 문자를 받는다. <벌새>에서 은희에게 힘이 된 영지 선생님 같은 존재다. “참 감사하죠? 사실 저는 평소에도 감사한 일을 계속 찾으려고 해요. 그래야 어제보다 좋은 사람이 될 거 같아서요.”
박지후는 넷플릭스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에서 전혀 다른 고등학교 생활을 보여준다. 웹툰 원작으로, 어느 날 학교에 좀비 바이러스가 생기고 어른들의 무책임 속에 학생들이 극한의 상황에 처한다는 이야기다. “제가 진짜 좀비물을 좋아하거든요. 좀비가 나오는 웹툰, 영화, 드라마는 거의 봤어요. 심지어 실제 10대에 ‘우리 학교에 좀비가 나타나면 어떡하지?’란 상상을 했고 인터뷰에서 말한 적도 있어요.그런데 몇 달 뒤에 이 작품을 만났죠. 신기해서 감독님께 해당 인터뷰 기사를 사진 찍어 보냈어요. 물론 걱정도 됐죠. 재밌게 봤던 좀비물처럼 연기를 잘할 수 있을까… 다행히 이 작품에 좀비 장인들만 모여 저절로 이입이 됐어요. 동료가 분장만 했는데도 옆에 있으면 도망치고 싶었어요(웃음). 다들 열심이어서, 내가 망가지고 꼬질꼬질하게 나오는 건 전혀 상관없다, 오히려 재밌다, 몸을 던져보자 싶었죠.” 작품을 하며 어려웠던 점은 많은 액션으로 인한 체력 부족이다. “제가 뛰기보다 앉아서 랜덤 게임 하는 사람이거든요. 캐스팅되고 액션 스쿨을 다녔는데 첫 3일은 누울 뻔했어요(웃음). 동료들이 ‘액션 스쿨에 밥 먹고 가면 토할 거고 밥을 안 먹고 가도 그럴 거다’라고 했는데 맞더라고요. 이러다 온조 역할을 못해낼까 봐 이 악물고 했어요. 놀이 기구도 잘 타는데 와이어는 해내야지, 진짜 누가 쫓아오듯 뛰어보자면서 임했죠. 이런 경험 하나하나가 값진 추억이에요.”
장르물이라 감정이 격해지기보다는 평범한 고등학생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배역을 준비할 때 저나 주변 인물에서 비슷한 점을 찾아요. 특정 친구가 생각나면 그는 이 대사를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고, 박지후식으로 표현하죠. 다행히 이번 작품의 온조는 저랑 비슷했어요. 거기에 어떻게 하면 더 고등학생 같을지 고민했죠. 사실 밋밋해질까 봐 걱정했지만 감독님께서 잘 잡아주셨어요. 젊은 배우들을 상황에 자유롭게 풀어놓으셨는데, 아직 배워나가는 단계지만 이런 디렉션에서 즉흥적이고 자연스러운 반응이 나온 것 같아요.” <지금 우리 학교는>은 이재규(<베토벤 바이러스> <다모> 등 연출)와 김남수(<성난 변호사> <창궐> 등 제작) 감독이 공동 연출을 맡고, 극본은 천성일(<추노> <도망자 플랜B> 등) 작가가 썼다.
촬영은 안동의 한 고등학교를 비롯해 여러 지방에서 이뤄졌다. 박지후는 주변 사람들 덕분에 지방 촬영이 그리 고되지 않았다. (워낙 낙천적인 성격이기도 하다.) 안동에서 촬영이 끝나면 본가가 있는 대구로 이동해 가족과 시간을 보냈고, 학교에서 그랬듯 또래 배우와 빨리 친해졌다. 작품에는 박지후를 비롯해 윤찬영, 조이현, 로몬, 안승균, 임재혁, 김진영, 김보윤 등 젊은 배우가 주축이다. 그들과 사이가 깊어져 연기할 때도 실제 친구를 잃는 거 같아 절로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한 명이 울면 다 같이 울어줬어요. 서로 시작하는 친구들이니까 연기에 대한 고민도 나누고, 언니들과 오빠들은 인생 조언도 해줬죠. 단톡방은 여전히 활발하고 각자 인스타그램 피드까지 비슷해요. 이번 작품의 티저 영상이나 포스터, 촬영 현장 사진이죠. 서로가 잘되길 기대하고 기도하고 있어요.”
<지금 우리 학교는>이 또래 배우들과 호흡이 돋보인다면 박지후의 다음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이병헌, 박서준, 박보영과 함께한다. 박지후는 선생님께 배우러 가는 마음으로 현장에 갔다. “선배님들은 테이크마다 다른 연기를 하세요. 저는 준비된 하나만 하기도 벅찬데 말이죠. 깨닫고 도전해보는 나날이었어요.” 우연찮게 이 작품도 재난물이다.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서울에서 한 아파트로 생존자들이 모여들게 된다는 내용. “이 작품에선 또 제가 얼마만큼 다급해 보일지 지켜봐주세요(웃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단역 출연을 제외하고 단편 <나만 없는 집> <벌새> <빛과 철>에 이은 네 번째 작품이다. <벌새>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할 때 배종대 감독이 GV까지 보고 <빛과 철>에 박지후를 캐스팅했다. 하나의 사고로 철저히 무너진 두 가족 사이에서 가장 양심적인 소녀 은영을 연기했다. “<벌새>는 현장 용어를 하나도 모를 때 촬영했어요. 그저 은희가 되고자 했죠. 엄청난 평을 받아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지금은 감사한 마음이 커 요. 여전히 좋은 에너지를 받고 있어요. <빛과 철>에서도 부족한 연기지만, 모두를 지키고 싶은 소녀의 마음을 잘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상황마다 연결해 생각하기보다는 지금 이 대사를 하는 이유, 이 장면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죠.”
박지후가 어린 나이에도 연기로 공감을 살 수 있었던 건 글쓰기의 힘도 있다. 그는 오래 다이어리를 써왔다. “인상적인 풍경을 봤을 때, 엄마와 싸웠을 때, 연기가 잘 안됐을 때 다이어리에 털어놓죠. 그마저도 부족해 휴대폰에 글쓰기 앱을 깔았어요. 매일 하나씩 질문이 던져지고 제가 답을 입력하는 거죠. 미처 생각 못한 주제를 깊이 생각해볼 수 있어요. 시집도 많이 읽고요.” 박지후는 초등학교 때 대구시가 주최하는 백일장에서 2등을 했다. 할머니에 대한 글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께 제 작품을 보여드리는 것이 큰 기쁨이에요. 저도 사랑하지만 가족을 더 사랑해요. 온 마음을 다해 저를 아껴주는 가족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사실 부모님 덕에 제가 건강한 마음으로 연기할 수 있어요. 나중에 인지도가 더 높아지면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많은 분께 영향을 끼칠 수 있잖아요. 그렇기에 깊이 생각하고, 책도 많이 읽고, 더 성숙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렇다면 박지후가 당장 목표로 하는 것은? “운전면허를 따서 여행을 떠나고 싶어요.”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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