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가장 동시대적 한복이란

2022.11.20

by 조소현

    가장 동시대적 한복이란

    지금은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코리아니즘(Koreanism)’으로 한복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1996년 8월호로 <보그 코리아>가 처음 한국에 창간하며 내세운 표지는 진태옥의 한복 드레스를 입은 슈퍼모델 린다 에반젤리스타(Linda Evangelista)였습니다. 검은색과 빨간색이 대조를 이루는 깨끼 드레스 사이로 기녀도를 프린트한 플리츠 스커트가 쏟아지듯 늘어져 있었죠. 도포 허리에 두르는 술띠를 가슴 아래 바짝 묶은 드레스 아래로는 버선코를 연상시키는 신발이 봉긋 솟아 있었습니다. 린다 에반젤리스타는 한복 치마를 응용해 디자인한 이영희의 양단 드레스도 입었습니다. 앞을 여미는 치맛말기에는 손으로 직접 수놓은 꽃이 은은하게 빛났고 여러 겹의 페티코트를 덧입어 넓게 부풀린 은색 양단 드레스는 우아했지요. 당시 린다는 촬영할 드레스를 직접 골랐습니다. 패션계를 종횡무진하며 자신만의 미감을 쌓아온 린다가 직감에 따라 고른 드레스가 한복에서 영감을 얻은 꾸뛰르 드레스라니. 한복이 과연 긴 세월 사람들이 공감해온 절대적 아름다움을 따라왔던 옷임을 확인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아름다움은 생각하는 게 아니라 느끼는 것이니까요.

    1990년대 성행하던 재패니즘, 차이니즘, 즉 큰 범주의 오리엔탈리즘에는 서구에서 아시아를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발원한 하이패션 잡지의 한국판을 시작하며 <보그 코리아>는 한국의 패션을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발간되는 <보그>에는 각 나라만의 색깔이 예술적으로 펼쳐졌거든요. 한국 패션의 대표가 된 듯한 그 마음을 시작으로 <보그 코리아>는 동시대에 유효한 한복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 매 순간 고민해왔습니다. 그랬기에 한복은 전래 동화 삽화에서 보던 모습으로만 등장하지는 않았습니다. 도포를 집채만 한 오뜨 꾸뛰르 드레스와 결합하기도 했고, 정갈한 전통 한복에 알록달록한 가발을 쓰기도 했습니다. 꽃신 대신 뮬이나 부츠를 신기도 하고, 성별 구분 없이 남자 한복을 여자 모델이 입기도 했습니다. 한복, 넓게는 전통에서 영감을 받아 온갖 모험심을 발휘하는 동안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화보도 등장했지요. 1999년 눈 덮인 금강산에서 배우 이영애와 찍었던 설빔 화보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습니다. 태고의 산수와 한복의 조화는 조선 시대 그림을 보는 것만 같았거든요. 두루마기에 아얌을 쓴 이영애의 모습은 눈의 결정체처럼 청아했지요. 틸다 스윈튼과 함께 한 작업도 특별했습니다. 시민문화유산 1호인 최순우 옛집에서 한복의 멋을 더한 샤넬 화보를 찍었죠. 가죽 패치워크 팬츠부터 실크 패딩 점퍼, 투톤 앵클 스트랩 슈즈까지 소색 모본단 두루마기에 어울리지 않는 아이템은 없었어요. 사진가 정용선의 한복 화보도 소위 ‘레전드’로 꼽을 만합니다. <보그 코리아> 신광호 편집장은 화보를 본 알렉산더 맥퀸이 “세상에 어떻게 이런 옷이 있냐!”고 감탄을 아끼지 않으며 한걸음에 한복을 사러 간 일화를 들려주었습니다. 최근에는 순창, 구례, 곡성, 담양에 사시는 100세 전후 할머니들과 함께 찍은 곱디고운 한복 화보도 있었어요. 할머니가 입은 꽃무늬 저고리와 모시 치마, 함께 신은 꽃신이 눈물이 날 정도로 따뜻했던 기억이 납니다.

    한복은 어떤 옷일까요. 한복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전통과 문화가 담긴 우리 옷의 총칭”이라는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이 내린 정의는 2022년의 한복을 설명하고 있을까요. <보그 코리아>에 한국적인 것을 독창적으로 풀어내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서영희는 열린 시각으로 한복을 바라봅니다. 20여 년 전 서영희의 작업 노트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해외 스타일리스트들이 서양 옷의 크리에이티브한 표현을 위해 지극정성을 다하는 것처럼 나는 우리 옷 한복의 창의적 표현에 목숨 걸고 싶었다. (중략) 속옷 없이 소매가 펄럭이게 활옷도 입고 남자 옷 앞 고름을 풀어 헐렁하게 걸치기도 하며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한복을 새롭게 표현해보려고 노력했다.” 한복의 정의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한복 스타일링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언젠가 어머니 결혼사진으로부터 출발했던 화보도 기억납니다. 사진 속 어머니는 발목이 보이는 하얀 한복에 서양식 화관과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하객도 쪽머리 대신 단발 길이의 파마머리를 하고 가슴엔 브로치를 달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영감을 얻은 서영희는 미우미우 드레스에 한복 족두리를, 버선에 꽃신 대신 펌프스를 매치한 웨딩 화보를 완성했죠. 실제로 서양의 질 좋은 원단으로 한복을 해 입던 시기도 있었고 한복과 면사포를 동시에 매치하던 시기도 있었으니 한복과 서양 복식의 믹스 매치는 사진을 위한 스타일링이 아니라 실제에서 비롯한 복식이었다고도 볼 수 있겠군요. 하이패션 브랜드 화보를 수없이 진행하면서 도리어 한국인으로서 자기 패션의 색깔과 뿌리를 찾는 가운데 ‘한복’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말하는 서영희는 여전히 우리 것에 대한 애착과 자긍심으로 한국적인 것을 서정적이면서도 현대적으로 풀어냅니다. 언젠가 서영희는 버선에 하이힐을 신고 싶은데 그 스타일링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이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어요. 오늘날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좀 더 간편하고 가볍게 우리 옷을 입으면 좋겠다고요. 버선에 하이힐을 신은 한복은 조선 시대의 한복과는 다릅니다. 동시대와 호흡하는 한복은 전통에서 나아간 ‘新한복’으로 불러야 마땅하다는 데 우리는 열렬히 동의했습니다.

    한복 디자이너들에게 ‘지금의 한복’은 더 본질적인 고민입니다. 이외희는 이달 <보그> 인터뷰에서 ‘한복은 우아하고 점잖아야 한다’는 인식에서 벗어나고자 레이싱 모델을 위해 디자인한 한복으로 비난을 받은 과거를 들려주기도 했어요. 서울새남굿 예능 보유자를 위해 10년 이상 한복을 만들었을 정도로 전통 한복에 깊은 지식과 기술이 있지만 “한복을 알리고 패션화하려면 젊은 세대의 시각으로 한복을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철학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철릭 드레스의 창시자 김영진은 “샤넬 재킷을 열망하듯 한복 그 자체로 사람들이 입고 싶어 하는 옷이어야 한다”는 핵심을 관통하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지요. 그 철학에 따른 김영진의 한복은 전통 한복의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 있지만 지극히 동시대적이며 질적으로도 세계적인 명품과 비등합니다. 철릭 드레스는 한복계가 꿈처럼 품었던 ‘MZ세대가 일상에서도 입고 싶은 한복’이 됐고 ‘나를 표현하는 디자인’으로 한복의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이렇듯 ‘新한복’은 전통 한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통 한복을 이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기반이 됩니다. 아무도 입지 않는 옷은 박제된 과거일 뿐이니까요. 2016년에 <보그>는 한국적인 것을 모아 ‘K 인스피레이션’이라는 키워드로 아카이빙한 책을 펴낸 적이 있습니다. ‘한국적인 것’이란 더 이상 애지중지 지켜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마음껏 즐겨도 되는 시점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당시 우리는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지금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가능케 한 모든 것이라고 답했어요. <보그>의 ‘新한복’은 동시대 패션이라는 필터를 거쳐 재해석한 한복입니다. 그리고 한복이 어디까지 미학적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벌여온 실험이자 도전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보그> 지면의 한복을 말씀드렸습니다만, 사실 책 밖으로 나오면 한복은 일을 하고 밥을 먹고 거리를 활보할 때 입는 의복이고 생활 관습입니다. 지난 7월 신규 국가무형문화재로 ‘한복’이 아니라 ‘한복 생활’을 지정한 건 ‘가족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고, 예(禮)를 갖추는 중요한 매개체’라는 점에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서양 복식이 일상화되고 나서도 우리가 명절이나 결혼, 돌잔치 등 격식을 갖추는 자리에서 한복을 입었던 건 삶에 복을 기원하는 마음 때문일 겁니다.

    한복 특집을 준비하며 실로 오랜만에 결혼식 때 입었던 한복을 꺼내보았습니다. 진달래색 치마와 파스텔 톤 색동저고리가 곱게 접혀 상자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색동저고리를 입을 마지막 기회라며 색동저고리를 고집하던 엄마가 생각났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아이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오방색 천을 이어 붙인 색동저고리를 입혔잖아요. 결혼식 전에 한복을 맞췄으니 엄마의 아이로서 마지막 순간이기도 했던 겁니다. 당시 찍은 스냅사진도 상자에서 툭 떨어졌습니다. 결혼식 때 모든 것이 불편했는데 튜브 톱 드레스에서 한복으로 갈아입고 나서 느끼던 해방감도 기억났습니다. 빈틈없이 몸통에 밀착되던 튜브 톱 드레스는 지금 내 몸의 상태를 끊임없이 상기시켰지만, 옷과 몸 사이 여백이 있던 한복은 그런 시간을 ‘힘들었지’ 보듬기라도 하듯 넉넉하게 껴안아줬어요. 그래서인지 드레스를 입은 사진에서는 묘한 어색함이, 한복을 입고 있는 얼굴에서는 장난기가 뚝뚝 떨어집니다. 그러고 보면 드레스, 치파오 등과 달리 한복은 움직임을 제약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옷이 한복이라고 했던가요. 평면 재단은 마법을 부려 어떤 몸에든 옷이 알아서 맞춘다고요. 분명 결혼사진 촬영 날 한복을 처음 입었는데도 전날 나들이 때 입었던 것처럼 익숙해 보인 건 한복이 우리 조상이 매일같이 입던 일상복임을 드러내는 증거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장점에도 단 한 벌뿐인 한복이 지금까지 나의 일상이 된 적은 없습니다. 한복 특집을 준비하며 오늘의 한복을 고민하던 결정적 이유이기도 합니다.

    2022년 봄이 저물 무렵부터 여름과 가을에 걸쳐 한복 기사를 준비했습니다. 우리 조상의 염원과 철학이 담긴 색동 한복 화보, 한복 연구가이자 인형 작가 허영의 인형 화보에서는 담담한 아름다움을 봤습니다. 정호연과 바람 부는 스코틀랜드 언덕에 올라 한복을 담으며 주체적인 여성의 서사를 떠올렸고 스니커즈, 캐츠아이 선글라스 등 스트리트 룩과 어우러진 한복을 보며 이런 옷차림의 Z세대가 활보하는 골목은 좀 더 흥미진진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한국 홍보 전문가 서경덕 교수에게 한복을 둘러싼 쟁점을 문의했고, 실제로 한복을 창조해내는 디자이너들로부터 최전선의 이야기를 들었으며, 런던에 있는 뮤지엄 큐레이터와 함께 한류 속에서 한복을 살펴봤습니다. 한복에 얽힌 자신만의 추억을 털어놓은 에세이에서는 팔꿈치를 쿡쿡 찌르며 웃을, 우리끼리만 느낄 수 있는 공감대를 봤습니다. 모습을 달리하고 빈도가 줄어도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우리 옷 한복은 성실하게 자리했습니다. 우리가 만난 한복에는 아름답다고 느끼고 필요하다고 여기는 면모가 가득했습니다. 신광호 편집장은 수개월에 걸친 한복 특집을 마무리하며 말했습니다. 물론 상박하후 비율과 긴장감과 느슨함이 공존하는 한복의 실루엣이 시각적으로 매우 아름답다고 찬사한 뒤였습니다. “성격은 바뀌어도 타고난 기질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복도 그 기질을 그대로 간직한 채 시대에 따라 가감해야 계속 살아 있는 패션이 됩니다.” 그러므로 ‘新한복’은 정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라이프스타일, 유행, 환경 등에 따라 끊임없이 바뀌리라는 것뿐입니다.

    10월 21일은 한복의 날입니다. 한복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한복의 우수성과 산업적, 문화적 가치를 세계에 알리고자 정부에서 지정한 날입니다. 공교롭게도 <보그 코리아>가 창간한 1996년과 같은 해에 지정되었으니 한복을 오늘의 옷으로 통용하기 위해 일심동체로 달려온 셈입니다. 국경일도, 휴일도 아니지만 10월 21일에는 내 눈에 예쁜 대로 한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해볼 생각입니다. 스타일을 아직 결정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쇼핑몰 장바구니에 예쁜 꽃신은 몇 켤레 담아두었습니다. 주목받으면 받는 대로, 스치듯 지나가면 또 그대로 즐겁겠죠. 선선한 가을바람은 저고리 소매와 치맛단 사이로 기분 좋게 불어올 것입니다. (VK)

    피처 디렉터
    조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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