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빙

프로방스의 긍정적인 집이란

2022.11.25

by 김나랑

    프로방스의 긍정적인 집이란

    뷰티계의 전설 테리 드 군즈버그의 집은 예술 작품이 어떻게 일상과 어우러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오렌지빛 햇살이 내리쬐는 프랑스 남부의 집에는 여러 문화권에서 쌓인 미적 안목과 긍정주의로 가득하다.

    테리 드 군즈버그(Terry de Gunzburg)는 프로방스에 있는 집을 소개하던 중, 청소와 요리를 너무 좋아해서 다음 직업으로 ‘하우스키퍼’를 하고 싶을 정도라고 말했다. 그녀의 수백억 파운드짜리 메이크업 & 스킨케어 브랜드 바이테리(By Terry)를 가사 실력 때문에 포기하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나는 ‘탁월한 하우스키퍼, 프로방스식 채식주의 요리 전문가, 더불어 메이크업 전문성까지 겸비했습니다!’라고 적힌 그녀의 광고를 상상해보았다. “물론 저는 굉장히 비싼 인력이 되겠죠.”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레시피대로 요리할 순 없어요. 제가 더 나은 요리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를테면 레시피에 ‘달걀 다섯 개’라 적혀 있으면 ‘세 개 가지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하죠.” 우리는 침실 위쪽 아치형 중이층(Mezzanine)에 마련된 그녀의 남편 장(Jean)의 사무실을 돌아본 후 화장실로 내려갔다. “세상에, 화장실 청소를 안 했군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모습 그대로 아주 깔끔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다른 부업 경력을 갖고 있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 직업이 더 잘 맞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특히 인테리어 디자인은 분명히 또 다른 직업적 선택지로 보였다. 옆쪽으로 플라타너스와 사이프러스 나무를 심어놓은 넓은 잔디밭에서 바라본 테리의 프로방스 집 정면은 얼핏 심플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굉장히 정교하기도 했다. “이 집은 컨트리 하우스이고 패밀리 하우스죠. 여생을 이곳에서 보낼 수 있어요.” 저명한 암 연구가인 남편 장과 함께 소유한 주택 네 채 중 한 채인 이 17세기 농가에 대해 테리가 말했다. 한때 쌀 저장고였고 2010년 불어닥친 폭풍우로 파손되자 5년 뒤 올드 스톤으로 재건한 건물을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

    캐롤 벤자켄(Carole Benzaken)의 ‘사우스 라 브레아 Ⅱ(South La Brea Ⅱ)’(2002),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의 ‘아프리칸 마스크(African Mask)’(1970)뿐 아니라 마티아 보네티(Mattia Bonetti)의 테이블, 브루노 감본(Bruno Gambone)의 도예 작품과 클로드 라란(Claude Lalanne)의 데스크가 ‘도원경’이라고 테리가 칭하는 벽난로의 분위기를 보완한다.

    테리의 집 정원 곳곳에는 예술 작품과 도예 작품, 장미가 있었다. 한편 층고가 두 배가량 높은 아치형 천장의 널찍한 거실에는 거대한 벽난로가 자리한다. “이것을 ‘재너두(Xanadu)’, 즉 도원경이라고 불러요. 아시아계 미국인 아티스트의 희미하게 빛나는 그린 타일로 마무리했죠.” 테리의 파리, 런던, 뉴욕 집의 인테리어를 맡은 유명 인테리어 디자이너 자크 그랑주(Jacques Grange)는 타일 사이사이에 아주 작은 갭을 두기로 결정했다. 연결 부분이 불완전해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지 않았다면 부엌 타일처럼 보였을 거예요. 저는 예술이나 인테리어 혹은 가구에 대해 배워본 적이 없어요. 완전히 직감으로 한 거죠.” 그녀가 말했다. “제 스타일은 18세기 프랑스 스타일이 아니에요. 그렇기는 하지만 이 집을 관통하는 중심 테마가 있어요. 그래서 집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예술적이어야 했죠. 암체어나 천장 램프가 필요해도 그냥 매장에 가서 사지 않았어요. 아티스트의 작품이어야 했죠. 그리고 그것을 찾아다니지 않았어요. 미리 계획도 짜지 않았죠. 그것은 그냥 벌어졌을 뿐이에요. 그렇지만 제게도 18세기 프랑스에서 만든 아름다운 거울 몇 점이 있고 그 거울은 뱀부 침실에 걸려 있어요. 그야말로 ‘믹스 매치 스타일’이죠.”

    그녀의 세심하게 계획하지 않는 접근 방법은 보람이 있었다. “장과 저는 파티를 여는 대신 예술 작품을 구매했다는 걸 굉장히 만족스러워하고 있어요.”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귀중한 작품을 전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편안한 집 같은 느낌을 주었다. “28년 전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과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의 작품을 구매할 당시에도 굉장히 고가였어요. 그렇지만 수긍할 만한 가격대였죠.” 그리고 수년에 걸쳐 신진 아티스트를 지원해온 그녀는 특히 도예 작품에 관심이 많다. “제 딸 엘로이즈 마르골린(Eloise Margoline)은 10년 넘게 저를 위해 예술품을 구매하고 있죠. 그 아이가 예술 자문 기업과 갤러리 분야에서 커리어를 쌓도록 지원하는 제 나름의 방식이었어요.” 특히 그녀는 프랑스 도예가 스테파니 라렌(Stéphanie Larène)과 넬리 보낭(Nelly Bonnand)을 좋아한다. 테리는 스테파니 라렌의 작품으로 테이블 세팅을 했고 이 아티스트와 다른 프로젝트도 협업했다. 그리고 넬리 보낭은 현재 70대 아티스트이다. “저는 언젠가 도예 박물관을 개관하고 싶어요. 피카소와 마티스의 오래된 고가 작품부터 젊은 아티스트의 작품까지 폭넓게 아우르는 그런 곳 말이죠. 저는 그것을 기획하는 데 제 시간의 70% 정도를 할애하고 있어요.”

    집 안 곳곳에 자리한 예술 작품.

    그린 컬러 타일로 꾸민 바가 산뜻한 느낌을 더한다.

    예술 작품으로 가득하지만 그녀의 집은 전혀 박물관 같은 분위기를 풍기지 않는다. “손주들은 두 살에서 열세 살까지 열네 명이에요. 그리고 그 아이들은 눈으로만 물건을 봐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이를테면 아이들이 있을 때 T.H. 롭스존-기빙스(T.H. Robsjohn-Gibbings) 소파에 면 담요를 덮어두죠. ‘이거 만지지 마, 저거 만지지 마’라고 말하면서 발을 동동거리고 싶지 않거든요. 벌벌 떨면서 사는 것도 싫고요.” 그녀는 예술 작품을 향한 애정을 공유하고 싶어 했던 부모님처럼 손주들과 아름다운 것을 공유하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라고 말했다. “부모님이 프랑스로 이주했을 때 가진 돈이 없었어요. 그렇지만 매주 부모님과 함께 루브르 박물관을 비롯해 여러 식물원을 돌아보았어요. 심지어 우리를 소형 르노 자동차 뒷좌석에 태우고 암스테르담까지 가서 작품을 보여주기도 했죠.”

    그녀의 가족은 1956년에 이집트를 떠나야 했다.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가 대통령이 되었고 프랑스인, 영국인, 유대인의 거의 절반을 추방시키던 시절이었다. 테리가 한 살 때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장미와 재스민 꽃밭 사이에서 ‘공주처럼’ 살아왔지만 아무것도 없이 프랑스에서 새로 시작해야 했다. “할아버지는 파리에 있는 방 한 칸짜리 아파트에 사는 자신의 신세를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하지만 할머니는 자신의 찻잔을 그대로 보관하고 카이로로 돌아간 것처럼 매일 차를 마셨죠. 빨간 립스틱도 바르고, 손톱 정리도 완벽히 하고, 캐시미어 옷도 차려입으면서 말이죠. 할머니는 매일 자신의 베갯잇에 향수를 뿌리곤 했죠. 저는 꼭 많은 돈을 들여야 좋은 매너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님을 할머니로부터 배웠어요.” 테리는 할머니로부터 스타일뿐 아니라 긍정주의까지 물려받았다. “저는 근사한 테이블을 세팅하기로 정평이 나 있어요. 반면에 할머니는 ‘테이블 세팅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쓰는 거 아니니? 그 시간에 책 한 장 더 읽어’라고 말했어요. 그러면 저는 ‘책도 읽어요!’라고 말하곤 했죠.” 아마도 본질적으로는 프랑스인이면서도 아웃사이더의 관점을 가지고 있는 배경, 10대에 가족이 알제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브 생 로랑과 강한 유대 관계를 맺은 배경에는 이런 과거가 작용했을 것이다. 테리는 1985년 이브 생 로랑을 만났고, 그는 화장품 론칭을 위해 그녀를 채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뷰티 산업의 가장 상징적인 제품 중 하나인 ‘뚜쉬 에끌라(Touche Éclat)’를 고안하기에 이르렀다. “전에는 생각해본 적 없지만, 제 DNA에 동양 정신이 깃들어 있는 게 사실이죠”라고 그녀가 말했다.

    아나클레토 스파차판(Anacleto Spazzapan)의 카나페(소파) ‘보카(Bocca)’(1975)와 앤드류 우드(Andrew Wood)의 도예 작품이 복도를 장식한다.

    알렉산더 칼더의 태피스트리와 T.H. 롭스존-기빙스의 소파가 조화를 이루는 거실.

    테리는 지금 런던의 사우스 켄싱턴(South Kensington)에 살고 있다. 그곳에서 영위하는 삶이 그녀의 스타일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었을까? “영국인은 교양 있고, 정중하고, 더 세련되었죠.”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그들의 독특한 면을 사랑합니다. 상류층 결혼식에 참석하고 비닐 신발을 사는 여성을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아요. 사우스 켄싱턴에서는 스트로베리색 코듀로이를 입은 성인 남자를 흔히 볼 수 있어요. 그런 것이 ‘일은 진지하게 하자. 그렇지만 스스로를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말자’는 제 삶의 철학과 꼭 맞아떨어져요.” 그것은 또한 프로방스에서 살아가는 방식일 수도 있다. 테리는 아침 6시에 9마일씩 걸으며 시작하는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에 대해 얘기했다. “햇살이 근사하게 비칠 때, 하늘은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아름다운 오렌지빛을 띠죠. 그리고 가장 창의적인 순간에 놓입니다. 이곳에서는 풍경이 아티스트를 미치게 하는 게 결코 우연이 아니에요.”

    줌을 통해 런던 본사와 연락하는 것이 항상 쉽지는 않다. “프랑스 치즈와 와인은 정말 환상적이죠. 그렇지만 프로방스의 와이파이는 정말 꽝이에요.” 그렇지만 결국 그녀는 이곳의 삶이 ‘큰 특권’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테리는 남편과의 소박한 저녁 식사 또는 가족 방문 등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특별한 모임에서 그녀의 테이블 세팅 솜씨가 드러난다. “제 친구들에게 롱 드레스를 입고 오라고 요구하고 캔들 수천 개에 불을 붙이겠죠.” 그녀의 직무 기술서에 그 점도 덧붙이는 게 좋을 듯하다. (VK)

    KATHLEEN BAIRD-MURRAY
    사진
    MATTHIEU SALVAING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