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구름산책자’, 아시아의 예술이 내는 목소리 #친절한도슨트

2022.12.20

by 정윤원

    ‘구름산책자’, 아시아의 예술이 내는 목소리 #친절한도슨트

    기회가 닿을 때마다 저는 미술에는 현답은 있되 정답은 없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물론 당연한 소리겠죠. 하지만 목적의식으로 움직이는 게 몸에 밴 저로서는 이 주관적인 진리를 온전히 깨닫는 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미술은 목적지를 향해 직진하는 게 아니라 배회 혹은 산책하는 행위임을 말이죠. 그 길에서 숱한 불확정성과 불명확성을 풍경처럼 대면하고, 어디로 혹은 어떻게 갈까 고심하며 한발 내딛는 시간 자체에 의미가 있습니다. 비단 이것이 관객에게만 적용되는 걸까요. 예술가야말로 모르는 길에서 끊임없이 산책하고, 공상하고, 실천하는 주체라 생각합니다. 제가 세상 모든 예술가를 존중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리움미술관이 올가을 내내 선보인 <구름산책자>를 놓치지 않길 바라는 것 역시 아마 이들을 직접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름산책자(Cloud Walkers)’ 전경, 2022, 사진: 김상태, 리움미술관 제공

    <구름산책자>는 리움미술관이 기획한 첫 번째 아시아 전시입니다. 즉 미술, 건축, 디자인, 음악, 문학 등 다양한 예술가 24명 혹은 팀 중 어쩌면 모르는 이름이 더 많을 거라는 뜻이죠. 그래서일까요, 제목인구름(클라우드)’이 내포한유무형의 총체로서의 의미가 더 배가됩니다. 여기서구름은 기후적, 공상적, 하이퍼링크적 의미를 두루 함의하는 21세기의 새로운 사회·문화적 환경에 대한 은유이자, 지정학적 경계를 횡단하는 가상의 플랫폼입니다. 클라우드의 세계를 자유롭게 활보하다 보면, 21세기의 슬로건으로 자리매김한지속 가능한 공존미래적 상상등의 실체가 어렴풋이 그려집니다. 지역과 국경을 가로질러 확장된 시각, 문화적 연대에 대한 진일보한 통찰 등이 이 잡히지 않는 구름 아래 단단히 전제되어 있으니까요. 이들의 예술적 성찰이 유사 이래 현재와 미래를 읽어내고자 한 인류의 눈물겨운 분투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켄고 쿠마 어소시에이츠(Kengo Kuma and Associates), ‘SU:M’, 2022, 패브릭: theBreath® (Anemotech S.r.l.), 가이드 와이어, 패브릭 서스펜더, 스틸 클립, 그리드 구조, 120(H) x 8,400(L)cm, 디자인: 쿠마 켄고, 원성연, 김정원, 코즈키 타쿠미

    카타기리 카즈야(Kazuya Katagiri, 1981~), ‘종이 사구(砂丘)’, 2022, 종이, LED 조명,
    780 x 760 x 400cm

    미술관 초입의 슬로프에 설치된 작품 ‘SU:M’. 일본 건축가 켄고 쿠마의 철학이 반영된 부드럽고 지속 가능한 이 조각은 전시를 직관적으로 안내합니다. 카타기리 카즈야가 종이를 원기둥 형태로 접어 만든 일종의 라운지 공간 ‘종이 사구(砂丘)’에 앉아 쉬거나, 문경원이 건축가 김지우와 함께 만든 ‘프라미스파크_용산: 플레이스 케이프’가 만들어내는 공론의 장을 경험하거나, 펠트의 건축적 가능성을 탐구한 구조물 ‘고요의 틈’(에스티피엠제이 건축사사무소) 안에서 소설가 김초엽의 SF 단편을 읽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A. A. 무라카미가 고안한 기계장치가 안개 고리를 뿜어내고 이를 통해 고대부터 이어져온지구의 향을 맡을 수 있는 몰입적 공간 설치 작품 ‘영원의 집 문턱에서’ 앞에서는 아이처럼 한참 서 있게 됩니다.

    에스티피엠제이 건축사사무소(stpmj Architecture), ‘고요의 틈’, 2022, 3D 펠트 블록, 철골 보강재, 300 x 300 x 450cm, 디자인: 이승택, 임미정

    김초엽(金草葉, 1993~), 사모나 연작 ‘석상공원’, ‘기록자를 위한 매뉴얼’, ‘유리병 구조 일지’, 2022, SF 단편

    산책자, 실천자, 공상가의 서로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건 이들이 바로 아시아 작가들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몇 년 사이에 이루어진 거대한 변화 후 문명 전환의 핵심으로 주목받고 있는 아시아는 사실 현대미술사에서도, 미술 밖에서도 주류인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아시아 작가들의 시선은 공감과 연대에 더욱 열려 있고,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개인 차원에 머물지 않죠. 지속 가능한 공존을 위해 다양한 재료를 연구하는 작품군, 불가능을 상상하는 예술의 힘을 낯설고도 신선하게 풀어내는 작품군, 현실과 가상이 뒤섞인 인지와 감각을 다룬 작품군 등 세 가지 주제가 충돌하는 전시장에서, 관객들도 구름산책자로 변모하는 거죠. 산책자들이 하나의 명확한 정답이 아니라 여러 가지 가능성을 발견하게 될 즈음, 물리적 경계를 초월한 아시아적 발상은 더욱 빛을 발합니다. 지속 가능성이 지구 생태계만을 위한 슬로건이 아닌 것처럼 말이죠. 

    로렌스 렉(Lawrence Lek, 1982~), ‘네펜테 존(Leeum)’,
    2022, 멀티미디어 설치: 4K 영상 2개, 윈도우 PC용 오픈 월드 비디오게임 1개

    돈 탄 하(Đoàn Thanh Hà, 1979~), ‘물 위의 대나무집’, 2022, 대나무, 구오트 풀, 플라스틱 병, 철, 600 x 600 x 535cm

    돈 탄 하(Đoàn Thanh Hà, 1979- ), ‘물 위의 대나무집’, 2022, 대나무, 구오트 풀, 플라스틱 병, 철, 600 x 600 x 535cm

    그중 저는 레트로 팝적인 느낌을 물씬 살린 홍콩 작가 웡 핑의 애니메이션 <우화 2>를 참 재미있게 봤습니다. 영상 작품의 중요한 미덕 중 하나가 어쨌든 끝까지 보게 만드는 흡입력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작품이 그렇습니다. 2020년 선댄스 영화제 단편 최고상을 수상한 이 영상은 정치성과 인간성, 욕망과 도덕성 등을 다루고 현대사회와 인간 본성의 이면을 파헤치기 위해 궤변과 상상력을 번갈아 활용합니다. 특히 현대적 우화가 주는 적나라한 교훈을 잊을 수가 없더군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가족들과 함께 고통받는 것보다 낫다는 문장은 꽤 섬뜩하죠. ‘슈퍼 리치 소판사 토끼의 웃지 못할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나요. 늘 비슷한 연말연시의 일상에 작은 균열을 낼 흥미로운 경험을 원하는 분들에게는 내년 1 8일까지 시간이 있습니다. 

    정윤원(미술애호가)
    이미지
    리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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