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3000년의 기다림’ 믿느냐, 믿지 않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2023.01.06

by 민용준

    ‘3000년의 기다림’ 믿느냐, 믿지 않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야기의 신비가 희소한 세상에서 오래 살아남은 이야기로 물을 수 있는 믿음에 관하여.

    뉴 밀레니엄이 오기 전, 이른바 지난 세기말에 조지 밀러 감독은 <뉴욕 타임스>에서 흥미로운 칼럼을 읽었다. ‘이야기하느냐, 죽느냐(Narrate or Die)’라는, <햄릿>의 유명한 대사를 연상시키는 제목의 칼럼은 부커상 수상 경력의 작가 A.S. 바이엇이 쓴 것으로 세계적인 설화 <아라비안나이트>, 즉 <천일야화>가 지난 밀레니엄 시대에 가장 중요한 이야기였다고 주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지난 수백 년간 아시아에서 스페인까지, 무역로를 거쳐 다양한 문화권에 전파되고 각기 다른 양상으로 진화했다는 것이 주된 논지였다. 그리고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던 이야기꾼들이 그 역할을 도맡아왔고 그들의 화술은 나날이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매일 밤 샤리아르 왕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내일 밤을 기약하게 만들어야 하는 세헤라자데처럼, 목숨까진 아니라 해도 자존심을 걸고 청중의 흥미를 이끌어낸 이야기꾼들이 발전시킨 이야기가 결국 오늘까지 온 것이라는 의미다.

    “우리가 빈지 워칭(Binge Watching) 할 때처럼, 관객이 계속 돌아오게 만드는 것이 스토리텔러의 기술이다. 바이엇은 그걸 지적했다.” 조지 밀러 감독은 A.S. 바이엇의 관점에 감탄했고, 그녀가 1994년에 발표한 단편소설집 <나이팅게일의 눈 속의 정령>의 영화화 판권마저 구입했다. 그것이 뉴 밀레니엄 시대에 어울리는 이야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바로 그 <나이팅게일의 눈 속의 정령>을 원작으로 둔 영화 <3000년의 기다림> 역시 그 제목처럼 한 세기를 기다리듯 완성됐다.

    예상 밖의 변수도 있었다. 조지 밀러는 자신이 연출한 <로렌조 오일>의 시나리오를 공동 집필했던 각본가 닉 엔라이트와 함께 새로운 시나리오를 집필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닉 엔라이트가 2003년 악성 흑색종으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그런데 죽음을 직감한 닉은 뜻밖의 제안을 남겼다. 자신의 빈자리를 조지 밀러의 딸 어거스타 고어로 채워보라는 것이었다. 마냥 빈말은 아니었다. 국립 드라마 스쿨의 지도 교수로서 어거스타 고어를 지도한 경험이 있는 닉 엔라이트는 배우 지망생인 그녀가 작품을 이해하는 눈높이가 상당하다고 느꼈고 이야기를 쓸 재능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인 조지 밀러는 딸과 함께 긴 시간 이야기를 준비해나갔다.

    “이 이야기는 실화다. 하지만 동화라고 해야 믿을 법한 이야기다.” <3000년의 기다림>은 누군가의 내레이션과 함께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비추며 시작되는 영화다. 시각적으로는 동시대를 반영한 현대 배경의 영화처럼 보이는데 내레이션의 시제가 기이하다. 영화의 풍경을 육성으로 묘사하는 내레이션은 동시대 풍경을 ‘옛날 옛적’이라 언급하며 거듭 과거형으로 설명한다. 그러니까 <3000년의 기다림>은 현대를 살아가는 존재의 시점이 반영된 영화가 아니다. 지금을 옛날 옛적으로 인식하는 먼 미래의 어떤 존재로부터 구술되는 이야기다.

    실화에서 비롯된 것일지라도 언젠가는 동화처럼 믿어야 하는, 이미 화자에게는 옛날 옛적이 된 지금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을 과거의 관객을 위해 시간을 뛰어넘듯 찾아온 이야기라고 주문을 외우듯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시간으로부터 빚어지고 숙성되는 이야기의 연금술을 은근히 주지하며 시작되는 이야기인 셈이다. 심지어 ‘세헤라자데’ 항공의 비행기를 타고 이스탄불 공항에서 내린 주인공이 묵게 되는 방은 아가사 크리스티가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집필한 곳이라고 한다. 고전적인 이야기꾼 여성과 현대적인 이야기꾼 여성이 같은 시간대에 마주하는 것만 같다.

    A.S. 바이엇의 단편소설집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 중 하나이자 단편집의 제목과 동일한 중편소설 <나이팅게일의 눈 속의 정령>을 원작으로 삼아 만든 <3000년의 기다림>은 기본적으로 <천일야화>에 등장하는 ‘알라딘의 요술 램프’에 등장하는 가상의 캐릭터 ‘지니’를 직접적으로 인용하며 주요 화자의 위치에 두고 오래된 역사를 신화적으로 구술한다. 그리고 지니(이드리스 엘바)의 주된 청자는 이성적인 태도로 이야기를 탐구하는 서사학자 알리테아(틸다 스윈튼)인데 두 사람의 관계는 전복된 ‘천일야화’의 관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태도는 처음으로 병에 갇히게 된 사연을 고백하는 지니의 이야기를 통해 더 확실하게 확인된다. 지니는 시바 여왕과 솔로몬 왕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는 잘 알려진 것처럼 시바 여왕이 솔로몬 왕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솔로몬 왕이 시바 여왕을 찾아가 구애한 것으로 구술한다. 구전으로 전해진 오래된 설화와 신화화된 역사를 여성의 선택이 주요한, 보다 현대적인 이야기로 변환하는 각색을 시도한다.

    그 후로 이어지는 이야기에서도 지니에게 세 가지 소원을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을 얻는 건 모두 다 여성이다. 지니는 자신을 병에서 풀어준 이들에게 매번 세 가지 소원을 말하면 들어주겠다고 하는데 대신 그 소원은 자신의 갈망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3000년의 기다림>은 3000년의 세월을 건너오는 과정에서 지니가 목격하고 들었던 여성들의 갈망에 관한 이야기라 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3000년의 기다림>이 여성 캐릭터로만 점철된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그 긴 세월 지니에게 갈망을 털어놓는 대상을 늘 여성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건 일찍이 남성의 갈망은 지니의 도움 없이도 해소될 수 있는 영역이었을 것이라는 은유의 반영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동시에 3000년이라는 긴 시간 만난 여성들이 끝내 자신의 갈망을 해소해줄 세 가지 소원을 모두 말하지 못했다는 사실 또한 그렇다. <3000년의 기다림>은 어떤 면에서는 결코 해소할 수 없었던 여성들의 갈망이 전전하던 세월에 관한 우화처럼 보인다.

    본질적으로 보자면 <3000년의 기다림>은 이야기라는 형식 그 자체에 관한 은유적 서사에 가깝다. 3000년 동안 우여곡절의 여정을 건너온 지니가 이야기에 대한 흥미가 가장 대단한 현대인 중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알리테아를 만나게 된 건 그 자체로 천일야화의 인용에 가깝다. 이야기 덕후가 이야기꾼을 만난 이야기랄까. 동시에 입과 귀를 통해 거듭된 구전에 덧입힌 신비의 장막을 벗겨내고자 하는 알리테아의 눈앞에 있는 그대로 등장해버린 정령은 그 자태만으로 이성적인 믿음을 박살 내거나 혹은 그 기준을 조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실존적 증명이다.

    게다가 알리테아는 이야기에 깃든 신비를 온전히 부정하는 사람이 아니기도 하다. 다만 허깨비처럼 찾아와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불가한 존재들을 거듭 대면하던 경험이 반복되면서 그 운명에 저항할 가능성을 탐색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일을 겪는다는 건 결국 믿을 수 없는 일이 실존한다는 새로운 가설을 생성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고, 그런 알리테아 앞에 지니가 나타난다. 그렇게 고대의 신비와 혼연일체인 이야기 중의 이야기, 지니의 주인이 된다.

    <3000년의 기다림>은 결국 긴 세월을 떠돌다 비로소 적임자를 만난 이야기에 관한 우화처럼 보인다. 마법의 신비를 대체한 첨단 과학기술의 시대에서 이성적인 이야기 학자는 비이성적인 이야기의 현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역설적이지만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알리테아는 동시대에서 결코 먹히지 않을 것 같은 초현실적인 현상에 크게 놀라지도 않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납득한다.

    일찍이 유년 시절부터 친구가 없어서 가상의 소년을 그리고 상상해 써 내려가며 외로움을 달랜 경험이 있었던 알리테아에게 지니는 그리 이상한 존재만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자신이 상상하고 구현하다 포기했던 비이성적 관점을 대체하는, 거짓말 같은 진짜다. 덕분에 지니는 알리테아가 과학적 견해로 다다를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서 그녀를 사로잡는다.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는 과거형의 신화로서 구전되는 이야기가 아닌 동시대에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의 화신으로 찾아온 정령을 끝내 사랑하고 만다. 필멸의 유한한 관계에 회의감을 느낀 알리테아는 영원불멸한 이야기와 사랑에 빠진다. 초현실적인 이야기의 세계로 나아가고 편입된다.

    은유적으로든, 직설적으로든, <3000년의 기다림>은 그렇게 긴 세월을 인내한 사랑에 관한 영화로 나아간다. 현대와 조우한 오래된 고전적 신화처럼 정령과 인간이 감정적으로 맞물린 영화의 후반부는 어쩌면 이 영화가 제작된 이유이자 이 영화를 제작하고자 한 갈망의 본체처럼 보인다. 영화의 절반이 정령의 입을 빌려 오래된 고전 신화를 변주하며 3000년이라는 세월의 신비를 보증하는 이야기꾼의 여정을 체험하길 제안한다면 나머지 절반은 동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갈망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이라는 신화적 감정의 신비를 재현하고 공감하길 권하는 시간에 가깝다.

    결국 오래된 이야기를 보존하는 건 사랑 같은 진실한 감정일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갈망에 가까운 인상이 전해진다는 점에서 이는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의 신실함을 격려하고 염원하는 이야기꾼의 갈망이 일종의 호소력을 발휘하듯 반영된 대목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만큼 전후반부의 화술 방식이 판이하기에 작품의 의도를 얼마나 존중하는가에 따라 감상의 격차가 발생할 가능성도 다분해 보인다.

    신화적인 역사를 거듭 나열하고 돌파하는 지니의 구술로 진전되는 전반부의 서사는 그만큼 다채로운 볼거리의 미장센으로 가득한 어드벤처 판타지의 흥미로 홀리듯 휘황찬란하다면 알리테아와 지니의 신실한 사랑을 그린 후반부의 서사는 감정적인 로맨스에 교감하길 권하고 설득하듯 조곤조곤하다. 결국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이야기의 신비를 거듭 구술하고 재현하는 전반부와 그로부터 발전된 비현실적인 감정을 낭만적인 사랑과 고독의 신화로 새롭게 조성하는 후반부에 다다르면 그 자체로 뜻밖의 시험을 통과한 것 같다는 기분이 체감된다.

    신비란 결국 그것을 믿는 자의 마음에만 깃드는 법이며 동시에 애초에 가까운 곳에 자리하지만 기꺼이 느끼고자 하는 이에게만 허락된다는 것을, 끝내 이야기의 신비를 잃어버린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전언처럼 전하는 듯한 엔딩 시퀀스 이후의 여운은 그 자체로 비장한 약속 같다. 이것은 끝내 영원을 살아가는 이야기가 인간의 유한한 삶을 돌보는 이야기이자 고독하게 남겨질지라도 거듭 갈망하는 인간으로부터 태어난 이야기의 운명에 관한 신비로운 고찰인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믿느냐, 믿지 않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민용준(영화 저널리스트 &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사진
    Courtesy Photos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