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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 제인’ 비록 세상이 다시 물러선다 하더라도

2023.03.11

by 민용준

    ‘콜 제인’ 비록 세상이 다시 물러선다 하더라도

    한번 나아간 세상은 결국 다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의 영화, <콜 제인>에 관하여.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에서는 낙태하는 여성과 의료진을 처벌하도록 규정한 형법 ‘낙태죄’ 조항이 헌법에 불합치라고 결정했다. “임신한 여성이 임신을 유지 또는 종결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스스로 선택한 인생관·사회관을 바탕으로 깊은 고민을 한 결과를 반영하는 전인적 결정”이며 “태아가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점인 임신 22주 내외에 도달하기 전이면서 동시에 임신 유지와 출산 여부에 관한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보장되는 시기까지의 낙태에 대해서는 국가가 생명 보호의 수단 및 정도를 달리 정할 수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라는 것이 판단의 근거임을 밝혔다. 이 판결을 근거로 대한민국에서는 2021년 1월 1일부터 부녀 및 타인에 대한 낙태죄 조항의 효력이 상실된 상황이다.

    ‘태아가 달이 차기 전에 죽어서 나옴’ 혹은 ‘자연 분만 시기 이전에 태아를 모체에서 분리하는 일’, 낙태의 사전적 정의란 이렇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형법에서 낙태죄라는 조항이 존재했던 건 잉태한 태아의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전제 덕분일 것이다. 생명이란 삶의 기반이다. 고로 생명이 소중하다면 삶도 소중한 것이다. 태아의 생명이 소중하다는 주장은 장차 그 태아가 자라 맞이할 삶의 소중함을 인식해야 한다는 믿음을 근거로 둔 것이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만약 태아의 삶이 산모의 삶을 희생해야만 하는 것이라면, 어느 삶을 선택해야 할까? 그리고 누가 그 선택의 주체여야 할까? 태어나지 않은 태아보다도 일찍이 존재했던 자기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산모의 입장은 이상한 걸까? 국가나 사회가 일방적으로 선택을 강요해도 되는 걸까?

    <캐롤>로 아카데미 각색상 후보에 오른 작가 필리스 나지의 감독 데뷔작 <콜 제인>은 그런 물음에 일찍이 답했던 어떤 여성들에 대한 영화다. 시카고의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던 조이(엘리자베스 뱅크스)는 임신 3개월 차에 갑작스럽게 졸도하는 증상을 겪은 뒤 병원에서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게 된다. 임신 상태를 유지하면 울혈성 심부전으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막기 위해서는 임신 중절 수술을 받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문제는 1968년 당시에는 임신 중절 수술이 불법이라 긴급 임신 중절 수술 위원회에서 승인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이는 남성으로만 구성된 긴급 임신 중절 수술 위원회에 참석한다. 그리고 “이 병원에서는 지난 10년간 중절 수술을 단 한 차례 승인했다”는 위원회는 만장일치로 중절 수술에 반대한다.

    속이 부글부글하는 조이에게 의사는 대안을 알려준다. 정신과 의사 두 명에게 자살 위험 진단을 받으면 병원도 어쩔 수 없이 임신 중절 수술을 허락할 거라는 것. 정말 죽거나 미치지 않고 살 수 없는 상황에서 조이는 홀로 전전긍긍하다 우연히 벽에 붙은 종이를 보게 된다. “임신으로 불안하신가요? 제인에게 전화하세요(Pregnant? Anxious? Get help! Call Jane).”

    그렇게 망설이던 끝에 전화를 걸게 된 조이는 제인의 도움으로 임신 중절 수술을 받게 된다. 여기서 제인은 특정 인물의 이름이 아니라 ‘임신한 여성들을 위한 서비스’ 자체를 의미하며 그 서비스의 운영 주체이자 일원인 여성 멤버들을 지칭하는 일종의 상징적 가명이다. 제인스를 이끄는 리더 버지니아(시고니 위버)는 과거 친구의 임신 중절 수술을 지원하기 위해 안전한 의사를 구했던 경험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도움이 필요한 여성들의 요청으로 이어졌고 오늘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경험은 조이의 삶도 바꿔버린다.

    “대본을 받고 나서 제인 콜렉티브를 몰랐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여성과 소수자들이 그들의 영웅에 대해 배우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가르치지 않은 교훈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필리스 나지가 말하는 제인스는 1969년부터 1973년까지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를 중심으로 활동한 여성 주도 네트워크 ‘제인 콜렉티브(Jane Collective)’의 또 다른 별칭으로 이들의 공식적인 명칭은 ‘여성해방임신중지상담서비스(Abortion Counseling Service of Women’s Liberation)’였다.

    이들은 임신 중절 수술이 불법인 일리노이주에서 이를 필요로 하는 여성을 위해 음성적인 도움을 주는, 일종의 여성 비밀 단체였다. 이들의 활동이 1973년에 중단된 건 1972년 역사적인 ‘로 대 웨이드’ 판결로 인해 여성의 자발적인 임신 중지 결정이 헌법에서 보장되는 권리로 인정받게 된 덕분이었다.

    필리스 나지는 <콜 제인> 대본을 읽고 두 가지 이유에 마음을 사로잡혔다. 하나는 ‘패배하거나 트라우마에 시달리거나 살해당하는 대신 문제를 해결하는 여성 집단에 관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라는 것. 다른 하나는 ‘매우 진지한 주제를 가벼운 터치로 다룰 수 있는 기회’라는 것.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임신 중단 수술의 필요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것이 건강을 지키기 위한 정상적인 의료 절차로서 필요한 여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예술가나 미디어는 종종 공포스러운 감정이나 규칙에서 벗어난 예외적 상황을 다루는 데 관심이 많다는 걸 잘 알지만 나는 그런 비유적인 세계를 그리는 데 관심이 없었다.” 필리스 나지는 <콜 제인>이 여성의 고통스럽던 현실을 직면하게 만드는 데서 멈추는 영화가 아니라 성장과 쟁취의 서사를 스스로 개척한 여성의 면모를 더 주목하게 만들고 싶었다.

    실제로 <콜 제인>은 다소 답답하게 억눌린 여성성의 시대상에 주목하기도 하지만 시대의 그림자 속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찾아간 여성의 면모를 발굴하고 조명하는 데 주력하는 작품처럼 보인다. 제인 콜렉티브를 찾아가 임신 중절 수술을 받게 된 조이는 새로운 현실에 눈을 뜨고 제인스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처음부터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은 아니다. 임신 중절 수술 이후로 다시 주부로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조이는 버지니아의 부탁으로 수술을 희망하는 여성을 제인스의 아지트로 데려가는 일을 하게 된다. 탐탁지 않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아지트로 데려간 여성은 피임도 하지 않고, 임신 중절 수술비를 대주는 유부남과 잠자리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조이에게 버지니아는 이렇게 답한다. “우리는 도울 뿐이에요. 질문은 하지 않죠. 사람을 외면으로만 판단하면 당신은 쿠키나 굽고 오후에 술만 마시는 별 볼 일 없는 주부로 보일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콜 제인>은 새로운 시각으로 눈을 뜨는 여성을 통해 모두가 좀처럼 들여다보지 않았던 여성의 그림자 속에서 활동했던 여성을 발견하는 이야기다. 일종의 성장물 서사나 히어로물 서사에서 볼 수 있는 스승과 제자 같은 관계로서 버지니아와 조이가 아이코닉하게 자리하고 있지만 두 사람 외에도 제인을 자처하는 수많은 여성이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 영화로서 더 유효한 관점을 제시한다.

    특히 제인스가 한 방에 모여 임신 중절 수술을 지원하는 방안을 논의하는 장면은 여성의 임신 중절 수술을 만장일치로 반대하는 병원의 긴급 임신 중절 수술 위원회의 남성들이 모여 앉은 테이블의 분위기와 완벽하게 대비되는 장면으로서 그 자체로 상징적인 이미지로 다가온다. 남성이 양지에서 편안하게 여성의 육체를 제한하는 권리를 부릴 때 여성은 음지에 모여 자신들의 권리를 스스로 타파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남성으로 점철된 시대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나름대로 자신의 시대를 확보하려는 여성이 자리한 시대였다는 것을 단 한 컷의 이미지로 설득한다.

    무엇보다도 <콜 제인>은 제인 콜렉티브를 묘사하는 방식에서 시대에 저항하는 투사적 면모를 덧씌울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점에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조이는 제인스의 일원이 된 후로 수술을 희망하는 여성을 안내하거나 수술을 보조하는 역할을 도맡기도 하고, 그렇게 관객을 그 모든 이와 대면하게 만드는 중개자 역할을 해낸다. 동시에 관객은 제인스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여성들 역시 조이를 통해 한 명 한 명 마주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그들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이는 제인스라는 집단화된 명칭 아래 자리한 여성 개개인의 얼굴을 마주할 기회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그들 모두가 특별한 사명감을 갖고 여성을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지만 결국 그들 모두가 남다른 사람이라서 그런 활동을 해내는 건 아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만든다. 우연한 계기로 제인스를 찾아가게 된 조이처럼 자신 같은 상황에 직면할 수 있는 여성이 있다는 공감대가 결국 그들을 하나로 결속하게 만든다.

    <콜 제인>은 역사적으로 특별한 일을 해냈다고 평가받아야 마땅한 영웅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그런 영웅적 면모를 추앙하기 이전에 평범한 얼굴과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보여주는 영화처럼 보인다. ‘불합리한 시대가 평범한 사람을 어떻게 투사로 만드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처럼 보인다. 그리고 불합리한 시대에 맞서는 여성 서사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쉽게 예상되는 방식으로, 심각하게 인상을 쓴 얼굴이나 무겁게 내려앉은 심리 묘사에 집중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려지지 않는 여성 서사를 만들어냈다는 건 분명 <콜 제인>이 거둔 새로운 여성 서사의 성취처럼 보인다.

    이는 이 영화가 제인 콜렉티브와 제인스가 해낸 일을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가 되길 바란다는 의지가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자기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여성의 투쟁을 넘어 당연한 권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대 안에서 가능한 연대로 서로를 보호한 여성의 삶을 담아낸 이야기가 된 셈이다.

    물론 <콜 제인>의 배경이 되는 시대상이 마냥 낙천적이고 원만한 분위기로만 점철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인 콜렉티브 역시 늘 원만한 합의와 일치한 의견으로 편안하게 활동을 이어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불법으로 규정된 임신 중절 수술을 비밀리에 서비스하는 여성 단체가 필연적으로 은둔하는 조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영화가 직접적으로 그런 긴장감을 연출하지 않는다 해도 기본적으로 그들의 활동을 보는 관객은 보이지 않는 긴장감의 줄기를 인지하며 관람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콜 제인>이 그리는 주요한 갈등은 불합리한 시대와 제인 콜렉티브로 대변되는 여성이라는 대서사보다도 제인 콜렉티브를 구성하는 제인스 사이에서 그려진다는 점에서 한층 특별한 관점을 확보한다.

    제인스의 유일한 흑인 여성 멤버 그웬(운미 모사쿠)은 돈이 없는 흑인 여성의 임신 중절 수술을 지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두고 버지니아와 격렬한 토론을 벌인다. 비밀리에 운영하는 단체에 제대로 된 후원이란 게 있을 리 만무하다. 불법으로 얻을 수 있는 기회도 가난한 자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불법이기 때문에 값비싼 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맹점도 있다. 일주일에 두 명씩 돈이 없는 사람을 무료로 지원해주고 있지만 시간도, 자원도 한정돼 있다.

    저마다 도와줘야 할 이유는 분명하지만 모두를 선택할 수는 없다. 강간을 당해서 임신했거나, 열한 살 아이인데 임신했거나, 집에서 쫓겨난 8남매 엄마인데 임신했거나, 암에 걸렸지만 임신 중에는 치료할 수 없다는 사정이 있거나, 심지어 미국의 노숙 실태에 대한 논문을 쓰는 여성으로서 남길 수 있는 좋은 영향력이 임신으로 인해 중단될 수 있거나, 모두 다 들어주고 싶지만 그 모든 사정의 우열을 가릴 수는 없는 일이다. 몇 사람의 의지만으로는 시대의 한계를 온전히 메울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무엇이든 시작해야 어딘가 다다를 수 있는 법이다. 제인 콜렉티브의 활동이 1973년에 중단된 건 비로소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1972년 역사적인 ‘로 대 웨이드’ 판결로 인해 여성의 임신 중지 결정이 헌법에서 보장하는 권리가 됐다. 덕분에 1972년 시카고의 한 아파트를 급습해 체포된 제인 콜렉티브 활동가 여성 7인에 대한 고소도 취하됐다.

    만약 로 대 웨이드 판결로 여성의 임신 중지가 헌법이 보장하는 여성의 권리로 인정받지 못했다면 11건의 죄목으로 기소된 활동가 7인은 자신들에게 선고된 110년의 징역을 살아야 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들이 체포되고 6개월 뒤, 로 대 웨이드 판결로 여성의 임신 중지 권한이 인정된 덕분에 그들도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미국 연방 대법원의 대법관 9명 중 7명이 임신 중지의 권리를 ‘사생활의 권리’로 인정한 덕분이었다.

    <콜 제인>에서 버지니아는 석방된 뒤 제인 콜렉티브의 활동가들이 모여서 해산을 선언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7명의 남자에게 고마워할 줄 알았겠어?” 그러니까 이 영화는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스스로 움직인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결국 선의를 믿는 사람들이 지향하는 구별 없는 세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성별도, 인종도, 빈부도 상관없이 선의를 믿는 이들이 연대하고 함께 이뤄낸 세계의 가능성을 다시 한번 복기하길 권하는 영화인 셈이다. 그리고 현시대에서 제인 콜렉티브의 활동과 여성이 임신 중지 권한을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과거형으로 구술되는 진보의 역사를 다시 한번 목격하고 확인하는 것 이상의 의미처럼 보인다.

    지난 2022년 미국 연방 대법원은 ‘돕스 대 잭슨여성보건기구’ 판결에서 49년 전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고 임신 중지 수술에 대한 헌법상 권리를 폐기했다. 덕분에 몇몇 주에서는 다시 임신 중지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콜 제인>은 다시 한번 다짐이 필요한 시대를 위해 찾아온 영화처럼 보인다. 언제든 나아갈 수도 있지만 언제든 물러날 수도 있다. 하지만 한번 나아간 시대는 물러서더라도 다시 한번 나아갈 수 있다는 경험과 지혜를 기억하는 시대일 것이다. 비록 지금은 다시 후퇴했다 해도 예전처럼 다시 전진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가 어제보다 나은 오늘로 당도한 건 이상한 것을 이상하다고, 불편한 것을 불편하다고 따져 묻는 언어와 행위로 시대의 벽 앞에서 소리를 내고 적극적으로 움직인 이들이 벽 너머의 세상을 꿈꾼 덕분이었다. 그러므로 기억할 것은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맞이한 오늘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난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에 개봉한 <콜 제인>은 바로 그런 기억과 믿음을 되새기길 권하는 영화적 제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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