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파벨만스’ 빛에게서 영화에게, 꿈에게서 소년에게

2023.03.29

by 민용준

    ‘파벨만스’ 빛에게서 영화에게, 꿈에게서 소년에게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소년의 시간과 영화라는 운명, <파벨만스>에 관하여.

    ‘빛이 있으라.’ 성경 창세기 1장 3절에 나오는 이 구절은 영화의 기원을 말하는 데도 어울릴 것이다. 영화는 빛을 포착하고, 담아내고, 통제하기 위한 기술과 예술의 협연으로 이어진 역사다. 비추고 드리우는 형상과 명암을 표현의 양식으로 삼아 거듭 발전하고 발견하는 유희와 사유의 용도로서 세상을 설득하고 매혹했다. 그리고 오늘날 영화가 만인에게 손쉽게 통용되는 대중문화로서 너른 저변과 지평을 확보할 수 있었던 건 다양한 예술적 영감과 기술적 시도를 거듭해온 창작자들 덕분이다.

    불과 한 세기가 조금 넘는 시간을 거쳐 영화가 인류의 삶에 깊숙이 자리 잡게 된 건 그 역사 안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을 만들어내고, 감정적 울림을 선사해온 어떤 이름들 덕분일 것이다. 이를테면 마틴 스코세이지나 쿠엔틴 타란티노처럼 거장의 지위를 넘어 영화의 유의어나 다름없는 이름들. 이들은 언젠가 영화가 돼서 세상에 다시 찾아올 것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역시 그만한 자격이 있는 이름이다.

    Splash News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이름은 한때 할리우드라는 정체성을 대변하는 고유명사처럼 여겨졌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죠스>를 통해 블록버스터라는 언어가 통용되는 첫 번째 계기를 만든 주인공이기도 하고, <인디아나 존스> 같은 프랜차이즈 영화의 성공 사례를 선도했으며, <쥬라기 공원>으로 굴뚝 없는 공장이라 불리는 할리우드를 전 세계적인 영화 중심지로 각인시킨, 한 시대를 대표하는 흥행술사였다. 그리고 그의 이름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전쟁과 이념의 폭력성에 갇힌 휴머니즘을 발굴해내는 심도 깊은 수작을 적지 않게 만들어왔는데 <태양의 제국>, <컬러 퍼플>, <쉰들러 리스트>, <라이언 일병 구하기>, <뮌헨>, <워 호스>, <링컨>, <스파이 브릿지>, <더 포스트>까지, 전후 세대 유대인이라는 정체성 안에서 거듭 품어온 의문을 시대에 걸맞게 제시하는 거장의 면모를 발휘해왔다.

    동시에 <A.I.>, <마이너리티 리포트>, <우주 전쟁> 같은 SF 대작을 비롯해 <캐치 미 이프 유 캔>, <터미널> 같은 실화 배경의 시대극 코미디 드라마 연출에도 능했으며 <틴틴: 유니콘호의 비밀>이나 <마이 리틀 자이언트>, <레디 플레이어 원>,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등 애니메이션과 판타지, 사이버펑크, 뮤지컬까지, 다방면의 장르적 연출을 시도하고 실험해왔다. 그중에서도 동화적 낭만이 깃든 <E.T.>는 SF의 외피를 두른 가족 영화이자 성장 영화로서 스티븐 스필버그의 경력에서 중요한 원형이자 인장 같은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팬데믹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지 못했다.” 팬데믹과 함께 시작된 단절의 일상화는 스티븐 스필버그에게도 생경하고 어색한 일이었지만, 역설적인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경험이기도 했다. 아내와 함께하는 2인 가족의 삶에 익숙했던 스티븐 스필버그는 팬데믹으로 인해 가족을 돌려받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각기 떨어져 지내던 자녀 중 몇몇이 집으로 돌아와 예전에 자신들이 쓰던 침실을 하나씩 차지하고 생활하는 것을 보며 가족의 울타리를 새삼 각성하게 됐다.

    한편 수많은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교류하는 것이 일상이던 거장 감독의 생활이 작은 모니터에 갇힌 비대면 화상 대화로 규격화되는 과정은 낯설고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직업적 삶이 갑작스럽게 멈춘 덕분에 남아도는 시간은 그가 한동안 돌아보지 않았던 어떤 세계를 들여다보게 했다. 차를 타고 운전하며 평소 가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곳에 다다르며 생각을 거듭했다. ‘말하지 않는다면 나 자신에게 화가 날 것 같은 이야기란 무엇일까?’ 이 물음표는 매번 같은 곳을 향해 수렴하고 있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파벨만스>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유년 시절이 반영된 자전적 영화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오랫동안 품어온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할수록 ‘왜 스스로 이 대화를 반복하고 있는 걸까?’라고 생각하게 됐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마음속에서 거듭 떠오른 답은 자신이 지나온 유년 시절에 있었다. 보다 정확하게는 7세에서 18세 사이에 겪은 어떤 경험들이 거듭 상영되고 있었다. 이는 지금까지 그가 공개한 바 없는 비밀 상자 같은 시간이었다. 사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지난 영화들을 통해 봉인된 비밀 상자에 보관된 시간을 살짝 꺼내 은근히 비추고 있었다.

    그 사실을 잘 아는 건 스티븐 스필버그보다도 그의 부모님이었다. 특히 아들의 재능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한 어머니 레아는 언젠가부터 아들이 직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예언해왔다. “네가 만든 영화마다 우리 이야기가 조금씩 들어가 있다는 걸 느꼈지. 다만 항상 은유적이었고, 그래야만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 같았어. 그걸 실제로 만들어내는 걸 두려워하는 듯 보였지. 하지만 만약 만들어야 한다고 느낀다면 결국 그렇게 될 거야.”

    1952년 1월 10일, 뉴저지의 한 극장 앞에 늘어선 긴 줄 옆에 한 가족이 서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설득하고 있다. 어두운 공간에서 거대한 사람이 등장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레 겁을 먹은 아이는 극장에 들어가길 꺼린다. 그런 아이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프로젝터로 사진을 투사해 만들어낸 거짓말일 뿐이며 사물이나 사람의 연속적 움직임을 담은 24장의 사진을 1초 안에 움직이게 만들어서 15분의 1초 동안 뇌에 머무는 잔상보다 빠르게 시각을 압도하는 활동사진에 불과하다고.

    한편 어머니는 영화가 절대 잊히지 않는 꿈이 될 거라 말하며 아이를 극장 안으로 이끈다. 컴퓨터 공학자 아버지 버트(폴 다노)와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미치(미셸 윌리엄스)는 어린 아들 샘(마테오 조리안)에게 영화의 양가적 속성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안내자 같다. 공학자인 아버지는 영화의 기술적 속성을 설명하며 물리적 속임수의 매체임을 설명한다면 예술가인 어머니는 꿈이라는 낭만적 단어로 영화의 허구적 특징을 설득하며 감정을 고양하는 예술적 면모를 주목하도록 권한다.

    <파벨만스>의 오프닝 시퀀스는 두 가지 목적을 관철하고자 하는 구술 같다.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대가가 기술과 예술의 양가적 안목으로 영화를 바라보며 영화적 경험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만드는 동시에 기술과 예술의 양면성을 토대로 움직이는 영화적 지론을 관객들에게 주지시키는 것. <파벨만스>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자전적 고백이 투영된 영화지만, 이 영화는 결코 사적인 경험을 투영한 활동사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결국 영화의 유구함과 영속성을 돌아보고 살피고 있다는 것을 관객에게 알리듯 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스티븐 스필버그가 유년 시절에 생애 처음으로 극장에서 봤다고 알려진 영화 <지상 최대의 쇼>를 보는 당대의 관객들을 재현한 풍경과 마주할 현재의 관객들에게 자신이 처음 경험한 영화 관람의 체험에 동참하는 듯한 경험을 제시함으로써 영화의 시작부터 캐릭터의 감정에 온전히 이입하길 권한다. 그럼으로써 한 사람의 인생을 관통해 만인의 세계로 확장되는 영화로서 관객에게 다가간다. 영화라는 세계의 고유성과 보편성이 영화의 시작부터 관객의 의식과 사고 위로 자연스럽게 주행한다.

    세실 B. 드밀의 <지상 최대의 쇼>에서 기차 충돌 장면에 압도된 샘은 유대인 명절인 하누카 선물로 장난감 모형 기차를 받는다. 버튼을 켜면 레일 위를 자동으로 움직이는 모형 기차는 샘 입장에서 안전하게 구경할 기념품이 아니었다. 샘은 자신이 본 장면을 진짜처럼 재현하고자 한다. 레일을 달리는 모형 기차를 가로막는 장난감 자동차를 고의로 설치하고 그것이 날아가는 것을 거듭 살펴보고자 한다. 그 때문에 나름대로 섬세하게 제작한 모형 기차가 망가지기 십상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왜 자꾸 모형 기차로 무언가를 들이받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단박에 알아낸다. “자기만의 세상을 통제해보려는 거야.” 단순히 관객 입장에서 받은 충격을 넘어 그 장면을 자신의 입장에서 봐야 직성이 풀리는 아들의 호기심을 이해한 것이다. 그래서 아들에게 기차를 여러 번 박살 낼 필요 없이 단 한 번의 충돌을 연출하고 이를 8mm 카메라로 찍어서 영상으로 보관하며 거듭 돌려보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이 찍은 영화를 작은 옷방에서 영사기로 투사해보던 샘은 손바닥을 펼쳐 자신만의 스크린을 만든다. 영화를 자신의 인생에 담아내듯 소년의 손 위로 영화가 흐른다.

    이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1957년에 처음 만들었다고 알려진 3분짜리 영화 <마지막 기차의 조난>이 완성된 전말이다. 그 뒤로 스티븐 스필버그는 여동생들을 데리고 영화를 찍겠다며 집 안 곳곳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이 집 안 어디서든 영화를 찍도록 허락했다. 어린 영화광에게 걸맞은 사이즈의 스튜디오를 마련해준 셈이었다. <파벨만스>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실제로 겪은 유년 시절의 경험으로 온전히 채워진 영화다. 뉴저지에서 애리조나로, 그리고 캘리포니아로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거처를 옮긴 가족의 여정을 실제 자신의 영화적 풍경으로 삼기도 했던 스티븐 스필버그는 영화로 충만했던 삶 이면에 드리운 가족의 그림자를 온전히 드러낸다.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으나 화목한 가정을 꾸린 어머니와 아버지가 끝내 이혼하고, 영화적 재능이 있는 어린 천재가 누구나 영화를 만든다는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유대인이 겪던 차별을 감내하는 과정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적 특성이 개인적인 내면의 반영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해준다. 소년의 모험담과 가족적인 울타리, 그리고 전쟁과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향한 고찰 등 모든 영화적 관심이 일찍이 그를 사로잡거나 그를 지배하던 환경이자 풍경이었음을 직시하게 만든다.

    <지상 최대의 쇼>의 기차 충돌 신에 사로잡힌 소년 샘의 욕망은 강력한 이미지를 기억하는 것을 넘어 자기 주도적으로 장면을 재현하는 경험을 바탕에 둔 소유의 단계로 나아간다. 타인의 영화를 보고 얻은 강렬한 영감을 직접적으로 연출하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경험을 해낸다. 그 후 거듭 영화를 연출하고 편집하며 영화 제작의 경험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10대 소년으로 성장한 샘(가브리엘 라벨)은 존 포드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가 상영되는 극장에서 또 한번 무언가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이윽고 서부극 영화 <건스모그(Gunsmog)>를 연출하게 되는데 여기서 샘은 가짜 총으로 벌이는 소년 배우들의 총격전을 보고 ‘완전 가짜(Totally Fake)’라며 낙심한다. 그리고 실제 상영본에서는 총을 발사할 때마다 번쩍이는 화면 효과를 만들어내 관객들의 환호성을 부르는 데 성공한다. 비결은 총격 장면이 담긴 필름 부분에 작은 구멍을 뚫어서 그 사이로 잠시 빛이 투과되는 방식을 통해 총격 장면마다 스크린에 번쩍이는 한순간을 연출한 것이었다. 연출 과정만큼이나 편집 과정에서도 번쩍이는 아이디어가 필요하다는 걸 그는 일찍이 알고 있었다.

    연출과 편집이라는 기술적 경험을 통해 영화 세계에 입문한 스티븐 스필버그는 8mm 필름 카메라 볼렉스 H8을 들고 제2차 세계대전을 소재로 한 전쟁 영화 <도피할 수 없는 탈출(Escape to Nowhere)>을 연출한다. 이 과정에서 샘은 주연을 맡은 배우에게 감정적 연기를 주문한다. 자신들의 병사를 이끌고 나치군과 전투를 벌인 미군 장교는 극렬한 백병전 속에서 살아남아 전우들이 모두 쓰러져 죽은 풍경을 목도한다. 샘은 그 모든 풍경을 보여주기 전에 그 풍경을 바라보는 주체인 배우의 얼굴에 깃든 참담한 심경을 먼저 포착할 것이라고 배우에게 설명하며 그 심정을 연기해주길 주문한다.

    그럼으로써 연출과 편집의 기술적 기교를 넘어 배우에게 감정을 주입하고 연기를 주문하는 다음 단계의 감독으로 성장한다. 영화가 박진감 넘치는 장면으로 감각을 압도하는 시각예술을 넘어 감정 깊숙이 파고드는 정신적 교감의 예술이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깨닫는다. 그리고 참혹하게 파괴된 이후의 풍경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참혹한 풍경을 바라보는 인간의 얼굴에 깃든 표정을 통해 보다 감정적으로 주제를 전할 수 있다는 깨달음에 다다른다. 이는 휴머니즘으로 곧잘 압축되는 스필버그 영화에 대한 이해가 표정의 리액션을 중요하게 다루는 양식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한다.

    이렇듯 <파벨만스>는 영화적 여정으로 충만했던 스티븐 스필버그의 유년 시절이 대가의 현재 경력에서도 유효했다고 여길 만한 원형의 시간이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하지만 <파벨만스>가 단지 현존하는 대가의 영화적 세계에서 참고할 만한 영화적 전기의 영역에만 머무르는 건 아니다. <파벨만스>가 성장 영화로서 보편적 공감대를 이끌어내고 탁월한 경지를 선사한다고 할 수 있는 기반이 되는 평가도 그런 면모에서 비롯된 것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유년 시절에 8mm 카메라로 20여 편의 영화를 찍었다고 하는데 가족이 등장하는 홈비디오 성격의 영화가 적지 않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파벨만스>는 가족이 등장하는 영화를 통해 일찍이 알게 된 진실로부터 잉태된 영화라 해도 좋을 것이다. <파벨만스>의 샘은 가족과 함께한 캠핑 영화를 촬영하고 아버지의 부탁으로 이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진실과 대면한다. 가족과 가깝게 지낸 덕분에 함께 캠핑 온 아버지의 동료 베니(세스 로건)가 어머니와 감정적으로 가까운 외도 대상이라는 사실을 포착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역시 스티븐 스필버그가 실제로 겪은 경험이다.

    자신이 찍은 영화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된 샘은 큰 충격을 받는다. 그것은 자신의 시선으로 직시하지 못했던 진실을 영화 찍기라는 방식이 포착해냈다는 점에서 기존에 하지 못한 영화 경험으로서의 충격이었다. 가짜를 진짜처럼 연출하고 편집해 생생한 체험으로 대체하는 기술이자 예술이라고 믿었던 영화가 가려진 진실을 드러내며 삶을 뒤흔드는 근간으로 다가오는 첫 번째 혼란이었다.

    그리고 샘은 ‘낙하산을 타고 거인들의 세계에 내려온 것 같았던’ 캘리포니아의 새로운 학교에서 유대인을 차별하는 학우와 갈등을 겪으면서 가족과 뿌리라는 현실적 고민으로 침잠한다. 그 과정에서 부모의 이혼 결정 소식까지 듣게 되지만 그 순간 샘을 구제하듯 그 현실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건 결국 영화다. 졸업을 앞둔 학생들의 자발적 세리머니처럼 보이는 ‘땡땡이의 날’을 촬영한 샘은 아리 플렉스 카메라로 찍은 16mm 필름을 방에 앉아 편집한다. 이를 본 동생 레지(줄리아 버터스)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영화를 만들 수 있냐고 묻자 샘은 말한다. “우리는 다른가 보지.” 그리고 좀처럼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동생에게 자신이 만든 영화를 미리 봐달라 부탁하며 함께 영화를 본다.

    <파벨만스>는 영화를 통해 지난 삶을 극복해온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대가의 회고이자 기꺼이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영화라는 운명에 대한 고백이며 예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란 만인에게 잠시나마 삶을 잊게 만드는 허구의 꿈으로 투사되지만, 스티븐 스필버그에게는 삶을 이겨내게 만드는 진짜 꿈으로서 투신할 수밖에 없는 세계였다. 그런 의미에서 스티븐 스필버그의 현실에서 실존했던 두 사람의 이름을 그대로 반영한 <파벨만스>의 두 인물이 등장하는 순간은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노환으로 죽은 외할머니를 기리기 위해 찾아오는 외할머니의 오빠 보리스(주드 허쉬)는 샘에게 가족과 예술은 결코 함께할 수 없고 그것이 끝내 마음을 찢는 운명이 될 것이라 경고하고 격려한다.

    “사자 입에 머리를 집어넣는 것이 용기이고, 사자가 머리를 잡아먹지 않도록 만드는 게 예술이지!” 당대의 거장 감독 존 포드(데이비드 린치)는 자신의 사무실을 찾아온 샘에게 벽에 걸린 두 그림의 지평선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지평선이 아래에 있으면 흥미롭다. 지평선이 위에 있어도 흥미롭다. 그런데 지평선이 중앙에 있으면 더럽게 재미없지. 그것만 기억해라.” 예술가의 길을 걷는 것이 평범한 안정을 추구할 수 없는 운명에 들어서는 일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자 예술은 결코 평범한 시각으로 완성할 수 없는 독별한 세계라는 선언을 자신이 만난 전혀 다른 두 예술가의 입을 빌려 전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일찍이 그러한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러한 시각을 존중해온 인간이자 예술가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반영된 고백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파벨만스>는 청년에서 노년까지, 20대 초반에서 70대 중반까지,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살아온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대가이기에 자격이 있는 시네마 천국일 것이다. 197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기복 없이 자신의 영화를 만들어온 대가의 삶은 그 자체로 영화와 함께하는 꿈이었다. 영화라는 길을 염원하는 그 누구라도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삶이자 따라가고 싶은 꿈일 것이다.

    그리고 <파벨만스>는 결코 노쇠하지 않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저력을 대변하는 영화로서 만년의 소회가 아닌 여전한 청년의 야심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촬영, 편집, 연출 등 모든 면에서 기술적으로 완전한 기량으로 채워진 <파벨만스>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재량이 그 어느 때보다도 무르익고, 완연하게 깨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방증하는 걸작이라는 점에서, 결코 저물 생각도, 사라질 생각도 없는 노장의 또 다른 전환점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을 안긴다.

    결국 자신의 원점을 조명하고 운명을 되감아본 만년의 걸작은 인생이란 딜레마와 영화라는 아이러니를 모두 포용해낸 대가의 삶이 또 한번 청년의 영화로 걸어나갈 것이라고 말하듯 경쾌한 발걸음으로 나아가고, 시선을 조종한다. “우리는 누군가의 아이디어나 메시지를 경험하기 위해 어두운 공간에 함께 있어야 한다”는 스티븐 스필버그 말처럼, 그는 그렇게 만인의 어둠과 함께 영화라는 꿈을 비추는 감독이자 영화로서 영원할 것만 같다. 빛에게서 영화에게, 꿈에게서 소년에게, 스티븐 스필버그는 그렇게 영화가 되었다.

    포토
    Courtesy Photos, Splash News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