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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의 품격

2023.05.07

by 김나랑

  • 이숙명

‘욕’의 품격

Carlos Pun, ‘Fuck You ft. Mickey Mouse’, 2021.

독한 약은 아껴 써야 잘 듣는다. 도 그렇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참 끊었던 욕의 매력을 다시 발견한 건 20대 후반이었다. 외국 출장을 가서 당시로선 아득한 거리감이 있던 거래처 높은 분과 한방을 쓰게 되었다. 여러 회사가 같이 간 출장이었는데 나는 룸메이트 운이 좋은 편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자기 룸메이트와 싸우고 탈출한 사람들이 내 방으로 피신 오는 바람에 그분이 관람하는 가운데 한바탕 업계 성토대회가 벌어졌다. 그걸 듣던 나의 룸메이트, 지적이고 우아한 중년 여성이자 우리 모두에게 어려운 위치에 있던 분, 예술을 사랑하는 대중에게 영어와 한국어 두 가지 버전으로 공식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업이던 그분이 조용히 입을 뗐다. “망할 새X들.” 그 우아한 입에서 터져 나온 한마디는 몇몇의 입에서 맥주를 뿜게 만들었고, 분석이나 조언과는 비할 수 없는 힘으로 좌중을 위로했으며, 우리 사이에 존재하던 지위와 나이의 벽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나는 그분과 15년 넘게 친구로 지내고 있다. 그분이 욕을 하는 건 그 뒤로 다시 듣지 못했다.

세상에는 욕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그것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 있다. 그것의 도움이라도 필요한 절박한 일들이 있다. 관계의 벽 사이에 오로지 그것만이 통과할 수 있는 가느다란 틈새들이 있다. 그러니 욕도 세상살이의 좋은 전략이 될 수 있다. 제대로 쓰기만 한다면 말이다. 요즘 벌어진 몇 가지 논란은 ‘제대로’ 욕을 쓰는 방법이 뭔지 고민하게 만든다.

<피지컬: 100>과 <더 글로리>는 높은 언어 수위로 논란이 됐다. 한국 영화를 많이 본 외국인들에겐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내가 문짝에 발가락이라도 찧어서 두 자리 숫자로 된 한국 욕을 자동 발사하면 ‘이걸 실제로 듣다니!’ 하는 표정으로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다만 TV는 좀 다른 문제라, 한국 검열을 벗어난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이 해방감에 차서 쏟아내는 욕설이 한국인인 내게는 새롭기는 했다. 나는 그걸 문제라 보는 입장은 아니다. 이 작품들에서 비속어가 사용된 맥락 때문이다.

<더 글로리>에서 악당 일행이 사용하는 수준 낮은 언어는 말초적 쾌락에 중독되어 퇴화해버린 그들의 지력과 미숙함, 공허함, 객기 따위를 드러내는 도구다. 현실에서 욕하는 사람이 대개 그래 보이듯 말이다. 남녀노소 모두 작가의 입이 되어 달변을 쏟아내는 드라마보다야 인물 수준에 따라 언어를 달리한 <더 글로리>가 기술적으로 한 수 위다. 연진이 궁지에 몰렸을 때 “야, 이 미친 새X야”라고 냅다 사자후를 지르는 대신 “너의 이런 행동은 일종의 광증일 수 있으니 가까운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보렴. 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는 1577-1000번이란다” 하는 성격이면 작품의 장르가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동은의 복수는 100도쯤 차가워졌을 것이다.

<피지컬: 100>은 참가자들이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한계를 돌파하는 상황이라 이해가 갔다. 심지어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이런 응원도 터져 나왔다. “욕하면서 해! 욕하면서!” 욕을 하면 순간 초능력이 생긴다는 건 과학적으로 검증된 사실이다. 2009년 영국 킬대학 심리학과 리처드 스티븐스 박사는 <뉴로리포트(NeuroReport)> 저널에 흥미로운 보고서를 게재했다. 실험 팀은 학생 67명에게 얼음물에 손을 담그게 하고 한 그룹은 자기가 좋아하는 욕을 계속하도록 했고, 한 그룹은 욕을 전혀 할 수 없도록 했다. 그 결과 마음껏 욕을 한 그룹이 평균 155초 동안 버텨서 비교 그룹보다 40초나 우세했다. 욕을 한 그룹은 심박수가 더 높았고 고통은 덜 느꼈다. 이 실험은 니콜라스 케이지가 해설을 맡아 인기를 끈 넷플릭스 시리즈 <욕의 품격>에도 소개될 정도로 비속어 사용자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과학 저술가 엠마 번은 <욕은 몸에 좋다(Swearing is Good for You)>라는 책에서 비속어의 원리를 파헤친다. 그에 따르면 욕설은 감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일반적인 언어보다 뇌 깊숙이 저장된다. 그래서 뇌의 좌반구가 손상되어 언어 능력 대부분을 상실한 사람도 욕은 할 수 있다고. 심리 상담가 라파엘 안토니오는 욕설이 감정 조절 도구로 유용하다는 이론을 설파해 유명해졌다. 그에 따르면 욕설이 실질적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지만 정서 불균형을 해소하고 감정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고.

그렇다고 ‘시X 괜히 X나 X신처럼 참고 살았네’라고 후회할 필요는 없다. 킬대학 연구 팀은 2011년 앞서의 얼음물 실험을 보완하는 자료를 발표했다. 이번에는 욕설 그룹을 평소 욕을 안 쓰는 그룹과 하루 60번 이상 쓴 욕쟁이 그룹으로 분류했다. 욕쟁이들은 욕을 하거나 말거나 별 진통 효과를 얻지 못했다. 이것이 비속어 사용에 신중해야 하는 이유다.

앞서의 논란으로 돌아가보자. <피지컬: 100> 참가자들이 극한 상황에서 안간힘을 짜내기 위해 욕을 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평상시에 욕을 하는 것, 이걸 자막 처리 없이 내보내는 것, 이런 작품이 성공해서 언어 발달이 완성되지 않은 연령층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 이 작품이 방송 언어 수위의 새로운 기준점이 되어 맥락 없는 욕설마저 일반화할 수 있다는 점은 마뜩잖다. 과거에도 욕의 수요는 존재했고, 그 해방감을 오락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김수미의 욕쟁이 할머니, 김영옥의 할미넴 캐릭터는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하지만 김수미나 김영옥은 사회적 제약에서 자유를 얻은 베테랑이었고, 대놓고 X발을 외치는 게 아니라 비속어 한마디 없이 위협적인 문장을 완성하는 언어유희로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미디어 환경이 달라지면서 관계자들의 조급증이 자꾸 화를 부른다. 전문 방송인들이 유튜버와 경쟁하는 시대, 언론사에서 인터넷 게시판을 중계방송하는 시대, 예능과 드라마에 이어 시사 교양마저 한국 검열을 벗어나 해외 OTT로 향하는 시대가 되면서 공론장에 노출되는 언어가 험해졌다는 인상이다. 그 인상을 엄연한 현상으로 만든 게 쇼 호스트 욕설 사건이다.

몇 달 전 홈쇼핑 채널에서 화장품을 팔던 쇼 호스트가 상품이 매진됐음에도 방송을 조기 종료할 수 없는 상황을 전하며 ‘X발’이라는 비속어를 써서 화제가 됐다. 사과 요구가 빗발치자 그는 “예능처럼 봐주세요. 홈쇼핑도 예능 시대가 오면 안 되나”라고 했다가 비난을 곱절로 샀다. 지상파든 종편이든 TV에서는 여전히 욕설을 비음 처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경쟁자로 여기는 ‘예능’이 인터넷 방송이라는 건 자명했다. 그를 향한 시청자의 비판은 전문 방송인이라면 세태를 따를 게 아니라 건전한 선을 제시하고 지켜주기를 바라는 입장을 드러낸다. 대충 ‘대중’이니 ‘시청자’니 하고 뭉뚱그리지만 그 안에는 여러 종류의 인간이 있다. 예컨대 나는 정원에서 엉덩방아 찧을 각오를 하고 억센 잡초를 잡아당길 때 ‘영차’ 대신 ‘쌰앙!’이니 ‘X발!’이니 소리를 지른다. 조금 힘이 된다. 하지만 ‘니X’나 ‘Mother FxxKer’처럼 당사자가 아니라 가족을 욕보이는 말은 싫고, ‘X신’이나 ‘바X’처럼 장애와 연관된 욕도 삼간다. 내 감정을 표현할 때 ‘킹받는다’ 같은 단순한 어휘밖에 떠오르지 않으면 자괴감이 들고, ‘눈다’ 대신 ‘싼다’, ‘원하다’ 대신 ‘마렵다’를 쓰는 사람들이 한심하고, 정치인에게 유치한 별명을 붙이는 사람과는 상종하기 싫고, 센 척하려고 말끝마다 ‘X발’ 붙이는 인간들은 그저 피곤하다. <비밀보장> 382회에서 황수경 아나운서는 비속어 대신 욕의 뉘앙스를 살리되 “야, 진짜 대단하다 너. 훌륭하다, 훌륭해” 식의 반어를 쓴다고 했는데, 그라면 내가 잡초에게 욕을 퍼붓는 모습도 경멸할지 모른다. 그래서 개인 채널이 아니라 공적 방송을 진행하는 사람은 모두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안전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예능이 홈쇼핑보다 재미있는 건 방송 목적의 차이 때문이지 욕 때문이 아니다. 무엇보다, 독한 약은 꼭 필요한 순간을 위해 아껴두는 게 몸에 이롭다. 욕도 마찬가지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자전적 영화 <파벨만스>는 여러모로 놀라운 엔딩을 담고 있다. 살아 있는 거장 데이비드 린치가 죽은 거장 존 포드로 출연해 미래의 거장 스필버그를 재연한 캐릭터에게 의미심장한 조언을 남긴다. “지평선이 아래에 있으면 흥미롭다. 지평선이 위에 있어도 흥미롭지. 지평선이 중간에 있으면 ‘X같이’ 지루해. 이제 행운을 빈다. 내 사무실에서 썩 꺼지렴.” 전설의 명감독다운 무시무시한 카리스마, 그를 보는 풋내기의 경외심을 담은 카메라 워크, 으르렁대는 목소리, 거기에 섞여드는 ‘SxxT’과 ‘FxxK’은 이 문장들에 완벽한 리듬감을 부여함으로써 포드의 말을 관객의 뇌리에 깊숙이 꽂아 넣는다. 이게 욕의 바른 쓰임새다. 20년 전 나의 출장 룸메이트가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었다면 그의 “망할 새X들”이 그렇게 인상적이지도 않았을 거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욕이 언어를 받쳐줄 때는 흥미롭다. 욕이 언어를 강조할 때도 흥미롭다. 욕이 언어의 중심이 되면 X같이 지루하다. (VK)

이숙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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