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로마의 패션과 예술
왕과 귀족, 공화정과 정복 전쟁… 로마가 매혹적인 건 역사 덕분이다.
21세기 로마는 또 다른 방식으로 패션과 예술을 정복한다.
도시의 기원이 시작된 거대한 고대 문명의 도시 로마에 대해 우린 얼마나 알고 있을까? 콜로세움, 판테온, 포로 로마노 등 관광 필수 코스인 유적지를 제외하면 아득한 로마 역사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로마는 지금 패션 신에서 주목받고 있다. 로마에 근간을 둔 패션 하우스부터 명망 있는 프렌치 주얼리 하우스까지 앞다퉈 로마에서 이벤트를 선보이는 중이다. 특히 로마에 뿌리를 둔 펜디는 지난 5월부터 대대적인 예술 전시를 시작했다. 유수의 패션 하우스가 세계 곳곳을 유랑하며 굵직굵직한 패션 이벤트를 선보이는 이때 로마 한가운데서 일어난 ‘아트 사건’은 ‘배낭여행지’ 말고도 로마를 설명할 다른 단어가 필요한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이미 펜디는 에도아르도 펜디와 아델레 펜디가 로마에 메종을 연 1925년부터 문화 예술계와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혁신, 전통, 기교, 창의력, 이탈리아 정신 같은 중요한 가치로 이루어진 유대 관계는 펜디의 헌신과 이탈리아의 예술 및 문화를 후원하는 파트너십을 통해 더 견고해졌다. 2013년 로마 트레비 분수 복원 사업 후원, 2015년에는 고향인 로마로 돌아와, 팔라초 델라 치빌타 이탈리아나를 새로운 본사 건물로 선택, 완공된 지 70년이 지난 이 건물 1층을 최초로 대중에 공개해 전시 및 설치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아티스트 주세페 페노네(Giuseppe Penone) 개인전 후원, 베니스 비엔날레 이탈리아관과 조르조 안드레오타 칼로(Giorgio Andreotta Calò), 로베르토 쿠오기(Roberto Cuoghi), 아델리타 우스니베이(Adelita Husni-Bey) 등 아티스트 후원, 2017년 보르게세 미술관과 3년간의 협력 관계 등등. 그뿐 아니라 디자인 마이애미와 밀라노 디자인 위크를 통해 공예 및 예술계와 창조적 교감을 나누며 받은 풍성하고 다채로운 영감은 꾸준히 장인 정신으로 발현했다. 올해 펜디의 아트 프로젝트는 아르날도 포모도로 재단(Fondazione Arnaldo Pomodoro)과 협력, 조각가 아르날도 포모도로에게 바치는 대규모 전시로 이어졌다. 펜디와 재단의 협업은 역사적 유산을 존중하는 행보로서 예술에 대한 찬사, 예술 언어의 확산과 조명, 지속 가능성과 혁신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협업 추구라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목표와 비전을 가지고 추진하는 전략적인 파트너십의 예를 보여준다.
로마 여행의 출발점은 에우르 지역에 있는 펜디 본사 ‘팔라초 델라 치빌타 이탈리아나’. 펜디는 2013년 7월 에우르(EUR) S.p.A와 팔라초 델라 치빌타 이탈리아나에 대한 15년 임대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역사적 유산에 가치를 부여하고 지원하고자 하는 펜디의 의지이며 로마 패션 하우스의 새로운 근본을 정립하는 것에 대한 협정이기도 하다. 1,000㎡의 전시 공간을 확보한 1층은 대중에게 공개했다. 팔라초 델라 치빌타 이탈리아나 또는 콜로세움 광장으로 불리는 이 기념비적 건물은 1930년 말 건축가 지오반니 궤리니(Giovanni Guerrini), 에르네스토 브루노 라 파둘라(Ernesto Bruno La Padula), 마리오 로마노(Mario Romano)가 세웠다(1935년 엑스포에 대비해 무솔리니가 건설하기 시작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미완성 건물로 남아 있었다).
팔라초에 도착하면 먼저 장애물 없이 뻥 뚫린 로마의 파란 하늘 아래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백색 건축물과 건물을 지키고 있는 여러 개의 웅장한 동상이 한눈에 들어온다(복잡하고 미묘한 신화 속 주인공들). 규칙적으로 배열된 아치형 창이 인상적인 건축물이 바로 펜디 팔라초. 네모난 콜로세움을 연상시키는 건물 외관에는 이탈리아의 예술과 공예를 대표하는 28개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장인 정신, 일, 철학, 상업, 산업, 고고학, 역사, 발명가 천재, 건축, 법률, 조각, 연극, 언론, 의학, 지리의 천재, 시의 천재와 그림 등을 각각 나타낸다. 여기에는 “Un popolo di poeti di artisti di eroi / di santi di pensatori di scienziati / di navigatori di trasmigratori(시인, 예술, 영웅, 성도, 사상가, 과학자, 항해사, 이민자들이 가득한 나라)”와 같은 유명 문구 또한 새겨져 있는데, 이 모든 요소가 펜디가 콜로세움 광장을 본사로 정한 이유다. 바로 이 기념비적 건물을 대중에게 다시 소개함으로써 창조성, 디자인, 예술과 이탈리아 장인 정신에 경의를 표한 것이다. 펜디 본사는 로마를 기반으로 한 브랜드의 뿌리, 이탈리아의 근간, 문화와 현대성의 지속적인 대화, 펜디의 특성을 만들어내는 요소를 모두 상징한다. 펜디가 5월 12일부터 선보이는 전시 <문명의 대극장(Il Grande Teatro delle Civiltà)>은 바로 이런 취지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펜디 본사 실내외 공간을 모두 아우르며 기획한 전시에서는 70년에 걸친 아티스트의 실험적인 작품을 공개했다.
실제적이고도 정신적이며, 역사와 상상력이 어우러지는 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극장’의 형태로 구성된 이곳에는 1950년대 후반부터 2021년 사이에 작가가 제작한 약 30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이전에는 한 번도 공개된 적 없는 사진, 문서, 스케치, 드로잉 같은 자료를 통해 아티스트의 스튜디오 및 아카이브 특유의 정신과 분위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전시는 건물 외부의 네 개 코너에 배치된 네 개의 조각 작품, ‘Forme del Mito’(1983)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는 Il potere(Agamennone), L’ambizione(Clitennestra), La macchina(Egisto), e La profezia(Cassandra)로 구성된 작품으로, 아티스트 에밀리오 이스그로(Emilio Isgrò)가 아에스킬루스(Aeschylus)의 오레스테스(Orestes)에서 영감을 받아, 벨리체 지진으로 파괴되기 전 지벨리나 메인 광장의 폐허에서 선보인 연극의 무대장치에서 차용한 것이다. 팔라초와 자연 풍경, 주변 도시의 배경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든 네 개의 조각 ‘Forme del Mito’는 이 건물을 새로 그려내고 색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모더니즘과 이탈리아의 합리주의를 구현하는 건축적 상징과 같은 콜로세오 콰드라토(Colosseo Quadrato)를 재해석, 결코 하나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작업 대상으로 변모시킨 것이다. 황홀하면서도 미래적인 분위기를 뿜어내는 다양한 형태의 금빛 아우라는 거대한 백색 팔라초를 더욱 신비롭게 감싸고 있었다.
팔라초 델라 치빌타 이탈리아나 입구를 지나면 아티스트가 두 편의 연극 공연을 위해 제작한 두 점의 의상 작품이 등장한다(이 두 작품을 통과해 펜디 본사로 진입할 수 있다). 바로 1986년 지벨리나에서 상연된 크리스토퍼 말로(Christopher Marlowe)의 <디도, 카르타고의 여왕(Dido, Queen of Carthage)>을 위한 무대의상, 그리고 1988년 시에나에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가 선보인 <오이디푸스 왕(Oedipus Rex)>을 위한 무대의상이다. 조각적인 소재와 함께 라피아나 패브릭처럼 덧없이 가벼운 소재로 만든 의상은 고대 그리스의 도상학과 극작법, 아프리카와 아시아 예술 작품의 고대 도상학과 전통 기법을 연상시키며 디도와 오이디푸스의 전설적인 이야기를 생생하게 되살린다.
“전시 <문명의 대극장>은 포모도로의 작품 중에서도 비주얼과 풍경, 예술의 관계를 탐구하며 작품의 기획 요소와 창작의 관계를 강조합니다. 이를 통해 포모도로의 작품에 담긴 과거, 현재, 심지어 그저 환상 속에만 존재하는 ‘문명’에서 떠올릴 수 있는 다양한 의미를 찾아볼 수 있어요.” 큐레이터의 설명처럼 그는 과거의 추억이자 미래를 향한 비전이기도 한 형태와 소재를 만들어내고, 지식과 상상력, 시간과 공간, 역사와 신화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재구성한다. 전시는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는 두 개의 전시관과 이를 연결하는 공간을 아우르며 이어지고, 이는 연극의 두 막과 그 사이의 인테르메조(Intermezzo)를 떠올린다.
로프, 웨지, 볼트 같은 다양한 소재와 각지고 날렵하며 뾰족한 형태가 어우러진 첫 번째 작품은 르네상스 시기의 걸작인 파올로 우첼로(Paolo Uccello)의 ‘산 로마노 전투(The Battle of San Romano)’를 연상시킨다. 이들과 함께 포모도로의 탐구 정신을 더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는 두 작품이 추가로 등장한다. 두 번째 전시 공간에서는 광활한 천체와 지상 공간을 두 개의 곡선으로 표현한 ‘Movimento in piena aria e nel profondo’가 등장해, 조각이라는 행위를 ‘사물의 복잡성을 파고들고’ ‘시간과 공간을 비틀 수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Grande tavola della memoria’(1959~1965)는 오징어 뼈를 활용한 고대 주물 기법과 얕은 돋을새김에 대한 고찰을 담아냈고, ‘Il Cubo’(1961~1962)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핵심적 형태에 대한 새로운 탐구를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오징어 뼈를 활용한 아이디어가 기발하고 창의적이다.
전시를 통해 본 포모도로의 권위와 규모는 주눅 들 만큼 압도적이고, 상상력이 넘치며, SF 영화 세트처럼 미래적인 데다, 현대적이다(몇몇 작품을 감상하는 내내 SF 영화의 세트나 소재로 ‘딱’이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리고 펜디의 로마 아트 페어는 도심의 전시장으로 이어졌다. 로마 시내 공원, 대통령궁 한편, 5성급 호텔 로비, 도시 순환도로 한가운데… 일찍이 포모도로가 로마 시내 곳곳에 설치한 작품이 스펙터클한 메시지와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팔라초 두 전시 공간에서 블랙과 화이트의 상반되는 컬러를 입은 두 개의 작품이 대칭적으로 배치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듯이 날것 가운데 정제된 예술품이 일상의 한 부분처럼 도시 곳곳에 녹아든 모습은 독창적인 시적 형상과 상상을 일깨웠다. 본사 전시장의 컨셉처럼 도시와 예술, 인류와 역사의 유기적 관계를 보여주고 영속적 연결성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다.
펜디가 기획한 전시 <문명의 대극장>은 로마를 비롯해 전 세계에 전시된 포모도로의 다른 작품을 발견할 수 있는 시작점이자 아티스트의 실험 정신과 로마의 관계를 더 심도 있게 살펴보는 기회였다. 역사적이지만 때론 더없이 아기자기한 동네 곳곳에서 좀 더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작품을 접하는가 하면, 그 옆 노천카페에서 색색의 젤라토를 먹으며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작가의 예술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었던 로마 여행. 또 수천 년의 세월을 버텨온 상징적인 건축물과 스토리텔링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 경관… 괴테가 로마 여행을 통해 내밀한 문학적 세계를 얻었듯 상상을 뛰어넘는 이곳의 웅장함은 예술적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탈리아의 창의성, 장인 정신을 지켜볼 수 있었던 영원의 도시 로마에는 열망 그리고 영감이 있었다. (VK)
-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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