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아이, 이유미
수상하게 보일 만큼 사랑스럽다. 호기심을 자아낼 만큼 오묘하다. 선명하게 아른거리는 이유미의 면면.
아까 찍은 화보를 보고는 “수상한 아이 같다” 이랬죠. 그래서 궁금했어요. 이런 고택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스럽게 꾸민 그 아이에겐 어떤 사연이 있을지.
고택에 묘한 호기심과 환상을 가진 아이가 있는데요. 최고로 예쁘게 차려입고 몰래 들어와서 홀로 지내는 그런 이야기가 떠올라요. 그런데 그런 거 있죠? 원래 이 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아요. 수상한 것투성이죠.
예상치 못한 전개군요. 그 이야기 속 첫 대사는 뭘까요?
‘안녕’, 그냥 이렇게 말할 것 같아요. 허락 없이 들어섰음에도 인사를 했으니까 스스로는 괜찮다고 여기는 거죠. 또 아무도 없는 곳에 인사를 건네는 장면이 좀 기묘해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안녕. 첫 대사로 그럴듯해요.
최근 신기했거나 신났거나 새로웠던, 이유미의 사연을 하나 들려준다면요?
찰나였지만 아름답다는 말을 붙이고 싶은 순간이 있었어요. 요즘 지방 촬영이 잦아 차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요. 휴대폰을 보거나 자거나 반복하다가, 지루해서 문득 창밖을 내다봤더니 하늘이 아주 아름다운 거예요. 참 많이 봐온 하늘인데 그날따라 신기했어요.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소소한 것들에 시야가 트이는 거 같아요.
필름 카메라를 늘 지니고 다닌다면서요. 이곳에서 찍은 거 있어요?
이것도 사소해요. 온종일 비가 오락가락하는데, 처마에서 떨어지는 큰 빗방울을 담으려다 끝내 실패했어요. 기다렸다가 떨어지는 찰나에 셔터를 눌러도 늦더라고요. 속상했어요.
사연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드라마 <힘쎈여자 강남순>에서 맡은 ‘강남순’ 하면 어떤 얘기를 가장 먼저 들려주고 싶나요?
우리 남순이는 어린 시절 아빠를 따라간 몽골에서 미아가 돼요. 하지만 다행히 유목민 가족의 손에 너무너무 잘 자라요. 나중에 가족을 찾아 한국으로 오게 되는데, 그런 남순이는 씩씩한 데다 할 말은 바로바로 하고 꿍하지도 않아요. 첫인상을 딱 잘라 말하면 건강한 순수함. 남순이를 연기하면서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제목 그대로 놀라운 괴력을 타고난 캐릭터라 그 이야기를 할 줄 알았는데 의외군요. 그만큼 연기하는 게 즐거웠다는 의미겠죠? 그렇지 않아도 지금껏 속앓이하는 애들을 주로 연기하다가 처음으로 ‘속앓이 없는 친구’를 만났다면서요.
드라마 <멘탈코치 제갈길> 촬영을 마치고 얼마 안 됐을 때 <힘쎈여자 강남순>을 찍기 시작했어요. 직전에 연기한 차가을도 속앓이를 했던 친구라 그런 여운이 남아 있었어요. 그런데 남순이를 연기하면서 웃음이 많아지고 기분도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알고, 뭐랄까, 마음이 건강해졌어요. 촬영 막바지에는 세상 누구보다 밝은 사람이 되어 있더라고요. 주변에서도 제가 달라졌다고 그러고. 평소 무기력한 건 절대 아니지만, 남들이 느낄 수 있을 만큼 에너지가 충만해졌어요.
확실히 그래 보여요. 지난해 이맘때도 <보그>와 만나 촬영 중인 <힘쎈여자 강남순>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작품이라고 말했죠. 어떤 점이 그렇게 도전이었던 거예요?
남순이의 괴력을 연기하는 게 도전이었어요. 남순이는 체구가 작고 가냘퍼 보이지만 힘이 어마어마하게 세요. 그러다 보니 힘을 쓰는 제스처가 여태 봐온 히어로들처럼 폼 나지는 않아요.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여러 가지로 생각을 많이 했어요. 또 와이어 액션이 많은데 줄을 당겨주는 분들과 합을 맞추는 것도 새로운 연기 경험이었어요. 상대 배우와의 호흡에만 익숙했지, 이런 식으로 합을 맞춰 연기하는 게 처음이라 쉽지 않았죠. 나중에 ‘와이어 천재’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요.
와이어 천재? 고소공포증이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죠?
맞아요. 고소공포증이 있었죠. 하지만 계속 무서워해봤자 이득이 되는 게 없잖아요. 어떻게든 꾹 참고 몇 번 탔더니 조금씩 괜찮아졌어요. ‘설마 떨어지겠어?’ ‘만에 하나 떨어지면 운명이라고 받아들이지, 뭐?’ 마음을 내려놓은 뒤로는 정말 신기하게도 와이어 액션에 재미가 들렸어요. 어찌나 많이 했던지, 촬영장 밖에서도 힘을 주면 훌쩍 뛰어오를 것 같았다니까요.
뭔가 작정하고 도전할 때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를 높이나요, 그 반대인가요?
너무 높이지도, 많이 낮추지도 않죠.
그럼 중간쯤일까요?
잘 모르겠어요. 왜냐면 제 인생에서 도전은 하나의 리듬처럼 이어졌거든요. 계속해왔던 거죠. 그래서 그런지 새로운 것을 시작하거나 도전을 맞닥뜨렸을 때 두려움이나 망설이는 것 없이 원래 리듬대로, 해온 대로 그냥 하게 돼요.
준비가 돼 있다는 얘기로 들리는군요. 그런 마음가짐의 타율은 어때요?
대체로 좋았다고 봐요. 그랬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겠죠.
지금 절실하게 깨고 싶은 게 있을까요?
깨고 싶다, 깨고 싶다… 딱히 그런 건 없어요. 뭐든 잘 극복하거나 받아들이는 편이고, 굳이 허들 같은 벽을 만들지 않으려고 해요. 깨야 한다는 부담이 앞서거나, 그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 뭔가 실패한 기분이 들 것 같아서.
그럴 수 있겠군요. 연기 말고 이유미가 가진 특별한 능력이 있을까요?
그런 거 있어요. 공감 능력이랄까, 얘기를 잘 들어주는데 그것 이상으로 공감하고 이해할 줄 알더라고요. 말하는 상대뿐 아니라 이야기 속 다른 사람의 사연이 편견 없이 이해가 되는 거예요. ‘이런 상황이니 그랬을 거야’ ‘내가 당사자라면 어떤 심정일까?’ 하면서. 그러다 보니 친구들 사이에서 중재를 전담하기도 해요.
연기에 도움이 되나요?
책을 읽거나 뉴스를 볼 때도 여러 상황과 감정에 깊이 몰입하곤 해요. 그게 되게 좋더라고요. 한 번이라도 헤아려본 감정과 그렇지 않은 감정을 연기하는 건 굉장히 다르거든요. 제 나름대로 이렇게 다양한 감정을 경험해보는 게 도움이 돼요.
묻지 않을 수 없군요. 요즘 빠져 있는 감정이 있나요?
촬영 중인 <Mr. 플랑크톤>의 영향인지 사랑에 대해 고려하게 되더라고요. 많은 내용을 들려줄 수 없지만 제 기준에서 이 작품은 사랑 이야기예요. 진짜 사랑이란 뭐고, 내가 연기하는 사랑은 어떤 사랑이며, 내 인생의 사랑은 또 무엇인지, 요즘 들어 그런 고민을 해요. 하지만 깊이 들어갈수록 사랑은 정의 내리기가 더 어려워요.
태권도 부원과 소년원 출신 아이의 사랑을 그린 영화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가 번뜩 떠올랐어요. 갑작스러운 질문이지만 천국과 사랑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요?
사랑을 골라야죠, 당연히. 저한테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하고 제일 중요해요. 죽고 나서 가는 천국은 나중 일이고요.
<Mr. 플랑크톤>에 대해서도 궁금해요. 결혼식을 앞둔 예비 신부가 느닷없이 낯선 남자의 여행길에 함께하는 이야기 정도만 알려져 있어요. 어떤 얼굴의 이유미를 볼 수 있을까요?
스물여덟 살의 이유미요. 저와 나이가 비슷한 캐릭터를 연기한 적이 거의 없어요. 어린 역할을 주로 맡았죠. <Mr. 플랑크톤>에서 맡은 ‘조재미’라는 캐릭터는 저와 동갑이에요. 그런 역할이 처음이라 기분이 좀 묘하기도 했는데 모니터링해보니까 딱 지금의 제가 보이는 거예요. 그게 또 기분 좋더라고요.
호기심 많고 직업병이라 할 정도로 사람들을 열심히 관찰한다면서요. 만약 이유미 관찰지를 작성한다면 무어라 쓰겠어요?
으음, ‘요주의 인물’이요. 생각이 많은 편인데 그래서인지 다양한 면모가 저를 이루고 있어요. 일 때문일 수도 있고, 기분 탓일 수도 있는데, 그날그날 다른 제가 튀어나와요. 그냥 느끼는 것들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게 아닐까 해요. 그러니까, 그냥 봐서는 저라는 사람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으니 요주의 대상처럼 관심과 관찰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예요.
요주의 인물이라니, 말하면서 자신에 대해 더 알아가고 싶어 하는 표정이에요.
굉장히요. 오래전부터 고민했지만 아직 뭔지 모르겠어요. 어떤 날은 내가 참으로 강하구나 싶다가도, 어느 날은 반대로 되게 나약한 사람이라는 걸 몸소 느껴요. 그게 이상하거나 답답하진 않아요. 오히려 가장 인간적인 면모라고 생각해요. 매일 똑같은 하루를 보내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사람이 한결같을 수 있겠어요. 여러 면모가 있기 마련이죠. 스스로를 딱 잘라 정의하는 건 그다지 재미없어요.
그렇다면 자기 안에서 어떤 면을 특히 좋아해요?
최근 변화가 있었어요. 전에는 아무리 힘들어도 티를 내지 않았어요. 그냥 속에 담아두면 언젠가 괜찮아지겠지, 여겼어요. 그런데 요즘은 제법 얘기해요. 말함으로써 풀리는 것들이 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조금씩 속내를 비치다 보니 관계가 더 가까워지고 건강해지는 기분이 들어요. 마음의 문을 여는 척했다면 지금은 시원하게 열려 있달까요? 뭐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상태라고 해둘게요.
<오징어 게임> 이후 안정 궤도에 오르면서 일어난 자연스러운 변화일까요?
그보다는 나이 영향이 큰 것 같아요. 어린 나이에 지금과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면 이런 변화는 없지 않을까 싶어요. 나이를 먹으니까 제 자신은 물론이고 주위 사람들을 건강하게 지킬 수 있는 최적의 상태를 만들려고 노력하게 돼요. 물론 좋은 일이 많이 생기면서 그런 마음이 더 강해졌고요.
내 사람들을 지킨다는, 그 말이 듣기 좋군요. 어떤 사람과 코드가 잘 맞는 것 같아요?
저 엄청 잘 웃어요. 재밌는 사람 진짜 좋아하고요. 친구들이 대개 그래요. 같이 있으면 빵빵 터져요.
듣다 보니 유튜브 예능 ‘조현아의 목요일 밤’에서 보여준 찐친 케미가 그거였군요. 거기서 팬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드물어 아쉽다고 했죠. 팬 미팅 초대장을 만든다면 어떤 문구가 좋겠어요?
‘안 오면 후회할걸.’
지금 말투를 잘 옮겨 적어야겠어요.
이게 마지막일 수 있어, 두 번 다시 이런 자리는 없을지도 몰라, 그러니 어찌 안 올 수 있겠어? 사실 진짜 속마음은 ‘제발, 와주세요. 제발요!’인데 오히려 센 척하며 으름장을 놓는 거예요.
635만이라는 인스타그램 팔로워 숫자가 대체 어떤 느낌인지 궁금해요.
신기하고 감사하죠. 정말 익숙해지지가 않아요. 여전히 그 숫자가 안 믿기고 볼 때마다 어떡하나 싶기도 해요. 인스타그램 피드의 이유미는 별개의 존재 같아요. 진짜 이유미는 여기 있고.
패션 아이콘의 면모가 두드러져 더 그렇게 느낄지도 몰라요. 글로벌 패션 브랜드의 앰배서더로 활동하며 만나고 관찰한 패션 피플들의 특징이라면요?
자신감의 결정체 같아요. 일단 눈을 안 피해요. 컬렉션에서 눈을 피하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저는 그러질 못해요. 연기할 때는 어렵지 않은데 사람 눈을 계속 쳐다본다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혼자 이렇게 가만히 멍때리고 있어요.
지금껏 연기한 캐릭터 중 누구에게 오늘 입은 의상을 선물하고 싶어요?
예전 같으면 영화 <어른들은 몰라요>의 세진이라고 말했겠지만, <멘탈코치 제갈길>의 가을이가 떠올라요. 쇼트트랙 선수라 지겹도록 운동복만 입거든요. 가을이도 예쁜 옷 입으면 좋겠어요.
<멘탈코치 제갈길>은 가르침이 아니라 응원으로 와닿는 대사가 특히 좋았죠. 예전 인터뷰에서 어떤 대사 때문에 이 작품을 하고 싶었다고 얘기했는데, 기억나요?
외우고 있지 않은데 이래도 저래도 괜찮다는 의미의 대사였어요. 그 당시 저한테 필요한 말이었던 것 같아요.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는 계속 맴돌았거든요.
어떤 마음이었길래 그랬을까요?
생각해보면 어떤 특별한 계기나 상황 같은 게 있진 않았어요. ‘괜찮아’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누구에게나 힘이 되어주잖아요. 아까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매일매일 다르다고 했잖아요. 그 말이 시나리오를 읽던 날의 저와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건데, 오늘은 어떤 이유미인지 궁금해요.
비가 추적추적 내리니까, 빗물 같은 이유미. 무슨 느낌인지 잘 모르겠죠? 그냥 이것도 이유미예요. 그만큼 저는 다양한 면모가 혼재되어 있어요. 저도 가끔 신기해요, 이런 제 자신이.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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