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을 감싸는 터전으로 오세요
세상 모든 존재에겐 발 디딜 땅이 필요하다. 환아, 발달장애인, 연약한 식물을 위해 세 여성이 꾸린 안식처에 꾸준한 온기가 피어난다. 손을 내밀고, 그 손을 잡는 존재가 있는 한 희망은 지켜질 것이다.
아픔을 감싸는 터전, RMHC 코리아 고가영 부회장
맥도날드에서 해피밀 메뉴를 주문한 적 있다면 당신은 누군가를 도운 것이다. 맥도날드 해피밀과 행운버거 판매 금액 일부가 RMHC(Ronald McDonald House Charities) 하우스를 짓는 데 쓰이니 말이다. 첫 맥도날드 하우스가 지어진 것은 1974년. 백혈병을 앓는 딸을 위해 미국 미식축구 선수 프레드 힐(Fred Hill)은 필라델피아 지역의 맥도날드와 함께 모금 운동을 벌였다. 아픈 아이와 부모를 위한 안식처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작은 쉼터에서 출발한 자선사업은 1984년 재단법인 RMHC로 발전했고, 지금까지 전 세계 65개국에 RMHC를 세웠다.
2020년 한국에도 RMHC 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푸른 눈의 한국인’이라 불리는 제프리 존스 회장을 도와 2017년부터 실무를 담당한 고가영 부회장은 맥도날드의 기적을 한국으로 견인한 주인공이다. 전시 기획자와 기업 이미지 컨설턴트로 활약하며 한편으로는 아내와 엄마로 충만한 삶을 누리던 때였다. “제프리 존스 회장님과 처음 인연을 맺은 건 20대 때였어요. 아주 유창한 한국말로 저에게 꿈이 뭐냐고 물으셨죠. 성인이 되어 그런 질문을 받은 건 놀랍게도 처음이었어요.”
아픈 아이를 돕고 싶다는 것. 그것이 그녀의 답이었다. “국민학교 4학년 때 가장 친했던 친구가 소아암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아픈 와중에도 친구와 계속 손 편지를 주고받으며 위안을 삼았죠. 그때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성인이 되어서도 당시 저와 제 친구 또래의 아픈 아이들을 보면 뭔가 기여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일었죠.” 꾸준히 우정을 쌓아가던 제프리 존스 회장은 시간이 한참 지난 어느 날, 다시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며 고가영 부회장을 소환했다. “그때 전화로 하신 말씀이 여전히 생생해요. “아내와 엄마로서 많은 경험을 해보았으니 오래전에 나에게 터놓았던 그 꿈을 같이 펼쳐보지 않겠느냐고 하셨죠.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고민할 것 없이 재단에 합류했어요.” 그로부터 3년 뒤, 양산부산대학교병원에 국내 1호 RMHC 하우스가 탄생했다.
0.3평. 병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간이침대의 크기다. 병원에서 밀착 관리가 필요한 환자의 보호자들은 이곳에서 눈물을 삼키며 기약 없는 밤을 버텨내야 한다. 그러나 RMHC 하우스가 생긴 후 이제까지 210여 가족이 이곳에서 온전히 휴식을 취했다. 욕실이 딸린 10개의 방과 60명이 한꺼번에 드나들 수 있는 부엌, 도서관과 놀이방으로 구성된 안락한 쉼터에 입성한 가족들이 환하게 미소 지을 때 고가영 부회장은 어느 때보다 큰 보람을 느낀다. “첫 의료 쉼터가 완성되기까지 정말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의료진을 꾸리고, 온기가 느껴지는 인테리어를 설계하는 모든 면면에 이르기까지요. 제 역할은 단순했어요. 아픈 아이와 보호자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길 원하는 사람들의 손길을 하나로 모은 것이죠.”
국내 1호 하우스가 개관한 후 인터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더 많은 이들이 머물 수 있는 ‘2호 하우스’가 수도권에 건립되기를 소망한 그는 그 꿈을 목전에 두고 있다. “오랫동안 적당한 부지를 알아보다 어느 대학 병원을 증축하는 방향으로 목표를 이루게 됐죠. 부산보다 훨씬 더 많은 지원 대상 가족이 있는 수도권에 하우스가 탄생한다면 더 많은 가족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정말 기대돼요.”
2호 하우스가 문을 열기까지 고가영 부회장의 시간은 계속 바쁘게 흘렀다. 장기 입원 중인 아이들이 배움의 기쁨을 잃지 않도록 병원 학교와 교육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중증 장애 아동을 위한 치과 교실을 열기도 했다. 병의 그늘에 잠식되지 않도록 가족 캠프와 어린이날 잔치, 힐링 콘서트 등을 열며 꼭 필요한 곳에 꾸준히 빛을 공급했음은 물론이다. 예상보다 뜨거운 열정을 북돋운 ‘울림 백일장’은 올해 벌써 9회를 맞이했다. ‘엄마 대표’들이 만든 패션, 뷰티, 아동, 아웃도어, 리빙 및 푸드 브랜드를 초대해 함께 팔을 걷어붙이고 준비하는 ‘올리비아 바자회’는 환우만큼 보호자도 돌봐야 한다는 그의 확신을 증명하는 연례행사다.
유난히 긍정적인 남편과 축구를 사랑하는 아홉 살 아들은 적시에 격려와 위로를 건네는 든든한 지원군이다. “아픈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며 저도 엄마로서 점점 더 성장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아이가 아프면 엄마도 아프죠. 대신 아프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요. 돌이켜보면 어머니도 저를 키우기까지 삶의 많은 부분을 포기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세상의 모든 엄마는 위대합니다. 재단 일을 하면서 점점 책임감이 커지는데 그래서인지 제 아이에게도 건강한 책임감을 가지라는 이야기를 자주 해요. 뭐든 진심을 다한다면 그 마음은 어떻게든 가닿을 거라고요.”
고가영 부회장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 있는 행동이라 믿는다. 대기업 맥도날드가 아픈 딸을 위해 미식축구에 전념하는 한 사람의 마음에 깊이 공감한 것처럼 말이다. 제프리 존스 회장 또한 과거 SBS 예능 프로그램 <집사부일체>에 출연해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것이 RMHC 하우스의 유일한 비전이다. 그리고 고가영 부회장은 기꺼이 그 비전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제가 생각하는 쓸모 있는 사람 역시 주위를 둘러보고, 작은 것 하나라도 나누려는 사람입니다. 그런 시간이야말로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죠.” 류가영 <보그> 피처 에디터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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