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위한 균형추를 만드는 여자
세상 모든 존재에겐 발 디딜 땅이 필요하다. 환아, 발달장애인, 연약한 식물을 위해 세 여성이 꾸린 안식처에 꾸준한 온기가 피어난다. 손을 내밀고, 그 손을 잡는 존재가 있는 한 희망은 지켜질 것이다.
지구를 위한 푸른 균형추, 국립생태원 김유진 과장
기후 위기는 일상의 문제다. 폭우, 산불 같은 재난은 지금 이 순간에도 생태계 시스템을 야금야금 무너뜨린다. 생계와 생존이 모두 걸려 있다. 귀여운 북극곰이나 희귀 동물의 멸종에 가려 있지만, 전문가들은 사라져가는 식물종이야말로 훨씬 위험한 징후라 외친다. 전 세계 30만 종이 넘는 식물 가운데 약 10%인 3만여 종의 식물이 이미 멸종 위기에 처했다. 21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무려 3분의 1에 달하는 10만여 종이 사라질 것이다.
올해 10주년을 맞은 국립생태원은 설립 목적 자체가 기후변화에 따른 생태계를 지키고 복원할 방안을 찾는 연구를 하기 위한 곳이다. 다양한 식물종을 보존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생태원에서는 해외에서 다양한 식물을 들여오는 온실식물부를 따로 운영한다. 어김없이 식물을 매만지다 <보그> 카메라에 포착된 김유진 과장이 식물원 내부와 자신의 일상을 소개했다. “온실식물부는 해외에서 들여온 식물을 보존하고 전시하는 부서예요. 5대 기후관을 갖춘 에코리움에서 전시를 하고, 보전온실에서는 전시되지 않은 식물을 관리하죠.” 그의 인도를 따라 에코리움을 방문했다. 제주 곶자왈을 재현한 듯한 온대관을 지나자 거대한 올리브나무와 식충식물이 늘어선 지중해관, 수백여 종의 선인장과 용설란이 있는 사막관, 열대 밀림을 그대로 재현한 열대관으로 이어졌다. 흥미로운 사실은 뱀이나 곤충, 거북 등의 동물도 함께 서식한다는 것. 야외 중정엔 실내관의 거북이 이따금 햇볕을 쐬고 야외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거북이 산책로’가 놓여 있었다. “에코리움은 최대한 생태계의 모습을 그대로 옮기고자 했어요. 동물도 함께 있다 보니 아무래도 식물을 관리할 때 제약이 많죠.” 물을 주고 잎을 따고 가지를 치는 모든 일은 그와 팀원들의 손을 거친다.
김유진 과장이 특히 애정을 쏟는 대상은 지중해 식물이다. 매일 아침 지중해 식물의 안녕을 확인하기 위해 규칙적으로 방문하는 곳은 세 군데. 넓이 2만㎡ 규모의 전시장 에코리움과 식물을 관리하고 연구하는 보전온실, 각종 행정 업무를 수행하는 사무실이다. “다른 식물원에 비해 생태원이 하는 역할이 훨씬 많아요. 종의 수집과 보전, 관리, 연구는 물론 교육과 출판, 이벤트, 전시를 아우르니까요.”
다음으로 향한 보전온실은 해외 식물의 보존과 수집을 전담한다. 먼 땅에서 온 식물이 무사히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적절한 적응 환경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어린 식물일수록 관리가 특히 어렵다. 보존 가치가 있는 식물을 잘 찾아서 수집하는 것도 중요한 업무다. 해외에서 식물을 들이는 일은 1년에 한 번 정도인데 매번 조마조마한 경험이다. “‘웰위치아’라고 살아 있는 화석이라 불리는 식물이 있어요. 6개월간 고생해서 베를린 식물원에서 어렵게 들여왔지만 파종한 후 죽었죠. 관리를 잘못했다며 자책했는데, 나중에 전문가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동 과정에서 뿌리를 털면서 이미 상한 상태였다고 하더군요.” 보존 가치에 대한 충분한 논의, 해당 식물을 보유한 기관과의 협상, 까다로운 국제 통관절차를 모두 잘 거쳤음에도 식물 서식지를 옮긴다는 것은 사람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그는 겸허히 인정한다. “미국 샌디에이고의 식물보전센터에서 보존 중인 야생 선인장 중에 독특하게도 그 안에 집을 짓고 사는 선인장굴뚝새가 있어요. 선인장굴뚝새와 함께 군락을 이루는 여러 관목을 데려와서 현재 보전온실에서 함께 잘 키우고 있습니다. 조만간 지중해관에서 이들이 흥미롭게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현재 국립생태원에 보존된 4,000종의 식물종 가운데 35%가 멸종 위기종이다. “가장 많은 게 선인장과 다육식물류고요, 그다음이 난초와 소철, 사이카스(Cycas) 등이죠.” 역설적이게도 ‘플랜테리어’나 ‘식테크’ 키워드의 인기와 더불어 뜨거운 관심의 한가운데 있는 종이다. “관상용으로 찾는 사람이 많다는 건 그만큼 비싸게 거래되고, 불법 채취가 많다는 걸 의미해요.” 없애는 사람 따로, 살리는 사람 따로 있는 쳇바퀴 현실이다. 국가 간 멸종 위기종을 관리하는 CITES 협약이 탄생한 계기다. 국가 간에 식물을 거래할 때 야생에서 채집되지 않은 생물만 거래한다는 조건에 많은 이들이 동의했다.
국립생태원 창립 멤버인 김유진 과장은 커가는 식물을 보며 때때로 남다른 감회에 젖는다. 아무리 애를 써도 온실에 뿌리 내리지 못해 듬성듬성하던 식물이 이제 울창한 숲을 이뤘고 나비와 벌의 보금자리가 되어주고 있다. “10대 때 애리조나 여행에서 본 선인장에 매료된 뒤부터 제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은 언제나 식물 곁에서 내려졌어요. 제가 식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식물이 이제껏 저를 지켜줬다는 생각이 들어요.” 받은 것에 대한 감사함으로 사랑을 흘려보내는 것. 그렇게 지구의 수명이 조금씩 연장된다. (VK)
추천기사
인기기사
지금 인기 있는 뷰티 기사
PEOPLE NOW
지금, 보그가 주목하는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