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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과 ‘다시’ 함께 산다는 것, 그리고 따가운 시선들

2024.01.01

by 이소미

  • Kitty Grady

부모님과 ‘다시’ 함께 산다는 것, 그리고 따가운 시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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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 초, 나는 몇 달 동안 부모님과 다시 함께 살아야 했다. 지난여름 내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이 사정과 이유에 대해 구구절절 털어놓았다. 이곳에도 풀어놓고 싶지만 명예훼손이라는 새로운 갈등을 겪고 싶지 않으므로 자세한 내용은 쓰지 않기로 한다. 집주인과 세입자의 이해관계가 충돌해서 일어난 일이라고만 정리하겠다. 다행히 친구네 집에 몇 주간 빈방이 생긴다는 소식을 들었고, 나는 무작정 캐리어 2개에 옷가지와 책을 챙겨 집을 나왔다.

처음에는 내 결정에 일종의 희열을 느꼈다. 인생의 새로운 챕터가 열린 셈이니까. 우버를 타고 런던을 가로지를 땐 가뿐해진 마음과 함께 자유를 느꼈다. 하지만 이 아드레날린은 금세 얼어붙었다. 홀가분한 만큼 막막했다. 그곳엔 내가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모든 주변 환경이 불확실했다. 운동을 하거나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정서적 여유도 없었다. 대영 도서관에서 비참한 하루를 보낸 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에 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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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집에 도착했을 땐 안도감부터 들었다. 선선해진 날씨를 만끽하며 엄마와 나는 정원에서 차를 마셨다. 그와 동시에 극심한 수치심이 느껴졌다. 나는 왜 항상 이 모양일까? 왜 나 스스로 모든 걸 하지 못할까? 왜 늘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헤쳐나가지 못하고, 온전히 내 두 발로 서지 못하는 걸까? 온 세상 사람들이 어른의 삶을 살고 있을 때 28세의 나는 모든 것이 너무 버겁다고 느끼며 집으로 가는 기차에 올라탔다. 이후 두 달간 나는 키가 너무 훌쩍 커버려 맞지도 않는 공주풍의 핑크 침대에서 잠을 자야 했다.

하지만 올여름엔 이 상황을 좀 더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변화는 레이철 코놀리(Rachel Connolly)의 <게으른 도시(Lazy City)>를 읽으며 시작됐다. 소설 속 주인공 에린은 절친한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감당할 수 없어 런던에서 고향 벨파스트로 돌아온다. 하지만 에린의 엄마는 슬픔에 잠긴 그녀에게 따뜻한 환경을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불편한 환경을 만든다(‘엄마를 따라 계단을 오르다 울퉁불퉁한 카펫에 걸려 넘어졌다. 10년도 넘게 우리가 계속 걸려 넘어지던, 그 위치였다’라고 쓰여 있다). 에린은 인조 잔디가 깔린 부잣집의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그 집은 멋지지만 에린의 진짜 집은 아니었다. 에린은 자신이 길 잃은 고양이와 다를 바 없다고 느낀다.

에린에게 안정적인 집을 제공하지 않은 것에 대해 작가 코놀리는 ‘부모님 집에 다시 들어가 사는 것’이 너무 당연시된 ‘특권’이라 이를 특권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로 입을 뗐다. “거의 유행이 됐죠. 특정 계층과도 관련이 없어요. 그저 가족에게 의지할 수 있다는 기대만 있을 뿐이죠”라고 말한다. “일이 잘못되어도, 무언가에 실패해도 다시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과 살 수 있다는 기대요. 하지만 제 소설 속 주인공 에린은 그런 기대를 아예 할 수 없습니다. 도망갈 수 있는 피난처가 없는 거예요. 본인의 집을 떠나 6개월 동안 다른 곳에 가서 자거나 할 수 없었던 거죠.” 에린을 오테사 모시페그(Ottessa Moshfegh)가 쓴 <내 휴식과 이완의 해(My Year of Rest and Relaxation)>의 부자지만 고아인 주인공과 비교해보자. 이 소설 속 주인공은 삶을 망쳤을 때 소유하고 있던 어퍼 이스트 사이드의 아파트로 은둔해버린다. 실업수당과 유산, 많은 약의 도움을 받아 12개월 동안 말 그대로 ‘동면’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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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가진 것, 즉 물질적인 안전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하지만 모시페그의 이름 없는 여자 주인공은 엄청난 부자임에도 정서적인 공간을 내주는 부모님이라는 존재가 없다. 카렌 게일 루이스 박사는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단지 관점의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루이스 박사는 뉴욕에서 가족과 형제에 관련한 관계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정신 건강 전문가다. 그는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느끼고, 다른 곳에서 성공할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그건 좋은 이유가 아닙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든든한 지지를 받으며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 위한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관점에 따라 큰 차이가 생깁니다”라고 이야기한다.

나이가 상대적으로 어린 경우 집에 돌아가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만 해도 직업 불안, 주택 문제를 겪거나 추가적인 정서적 지원이 필요할 때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수치심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루이스 박사는 “이는 ‘성인이 되면 독립해야 한다’는 1970년대의 생각에서 비롯된 겁니다”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독립’에는 몇 가지 오류가 숨어 있다. 철저한 개인주의는 마거릿 대처가 외친 가치다. 그는 시장 규제를 완화하고, 공공주택 입주자가 자신이 살고 있는 공공주택을 싼 가격으로 매입할 수 있게 하는 ‘구매권’ 제도를 통해 공공 지원 주택의 개념을 약화시켰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이 저렴한 공공 지원 주택을 이용할 수 없는 상황, 부모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2008년, 시장이 폭락했을 때도 같은 인터뷰를 했어요”라고 루이스 박사는 이야기한다. “사람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직장이 없었거든요.” 오늘날은 어떨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영국 젊은이 중 17%가 부모님 집으로 돌아가거나 돌아갈 계획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모님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거나 이미 돌아간 젊은이들의 수가 이렇게나 많다는 건 ‘문제’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전반에 있음을 시사한다(최근에 읽은 스웨덴의 한 ‘슬픈 여자’에 대한 책인 <고의적인 무시(Willful Disregard)>에서는 남자 친구와 헤어진 여주인공이 주택부를 통해 정원이 보이는 귀여운 원룸을 제공받는다. 런던에 사는 젊은이들에게는 얼마나 꿈같은 이야기인가!). ‘부메랑 세대’에 대한 담론은 우리가 베이비부머인 부모 세대보다 훨씬 더 미성숙하며, 정착에 실패해 부모의 ‘등골’만 빼 먹는다는 문화적인 우려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상황에 맞추어 대응하는 것뿐이다. 우리 부모님 세대가 저렴한 주택을 구입하는 방식으로 현실을 받아들였듯이 말이다. 멈춤을 허용하지 않는 무자비한 경제 환경 속에서, (할 수 있다면) 부모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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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자 D. W. 위니콧(D. W. Winnicott)은 <집은 우리의 출발점(Home is Where We Start From)>이라는 책에서 ‘아기를 충분히 잘 보듬어줄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 그래야 존재감과 자아감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자율성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한다. 미성숙한 우리 20, 30대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현실’ 세계가 너무 힘들 때, 사랑과 정신적 도움이 넘치는 집으로 돌아가는 행위는 우리를 또 다른 성숙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돈 절약과 관련이 있을 경우 더더욱 그렇다. 루이스 박사는 “매우 어른스럽고 미래 지향적인 사고방식이 될 수 있어요. 독립을 향한 첫걸음인 셈이죠”라는 말과 함께 여기에 동의했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건 풀리지 않는 문제를 ‘감정적으로 정리’할 기회가 되기도 한다. 쌍둥이이자 4남매 중 막내인 나는 그토록 갈망하던 ‘외동’의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결핍을 회복할 수 있는 경험이 되어준 것이다. 부모님과의 유대도 더 강해졌다. 런던으로 다시 돌아온 지금, 나는 삶에 한층 더 자신감이 생겼다. 불안도 잦아들었다. 심리학자 존 볼비(John Bowlby)가 ‘의존의 역설’이라 부르던 이론과 비슷하다. 우리의 기반이 안정적이고, 여기에 충분히 의지할 수 있다고 느끼면 삶을 더욱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다. 나는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을 위해 집에 돌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이제 삶을 다시 살아갈 준비가 되었다.

Kitty Gra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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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www.vogu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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