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가 된 플로리스트 5인의 정원
꽃과 친구가 되기로 맹세하자 선물처럼 피어난 예술혼. 서울과 베를린, 로스앤젤레스와 샌안토니오에 자리한 비밀 정원에서 예술가로 거듭난 플로리스트 5인을 만났다.
아름다움은 모든 순간에, 안아랑
자연을 모방하다 자연 상태에서 꽃이 피고, 지고, 씨앗이 떨어지면 같은 종류의 식물 군집이 형성된다. 종종 바람에 날아오거나 동물이 퍼뜨린 씨앗 덕분에 그 군집 안에 새로운 식물이 자라기도 한다. 작은 부케에서 대규모 설치 작업에 이르기까지 이런 자연의 질서를 적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새로운 터전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의 새집에 작은 뒷마당이 있어 지난해부터 가드닝을 시작했다. 나만의 작은 정원에서 자연을 만나는 순간마다 무한한 영감을 얻는다. 얼마 전 산책하다 우연히 만난 나팔꽃 덩굴이 신기해 매일 사진을 찍어가며 구조를 관찰했다. 잎사귀가 공기가 통하면서도 광합성이 가능할 만큼 공간을 남기며 계단식으로 자라는 모습이 경이로웠다. 그 후 꽃을 배치할 때 서로 짓누르거나 해하지 않으면서, 각각의 아름다움이 잘 드러나도록 형태를 잡는 데 신경을 쏟고 있다.
<보그>와의 만남을 반기며 평소 잡지를 상업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나 같은 창작자를 위한 터전이라고 여겨왔다. <보그>를 부드럽고 푹신한 잔디가 깔린, 시원한 바람이 불고 해가 잘 드는 드넓은 초원으로 상상하며 최근 애정을 쏟고 있는 두 식물을 조합해봤다. 지난겨울부터 텃밭에서 직접 키운 케일을 안정감 있게 배치하고, 꽃망울을 터뜨린 순간부터 함께해온 덴드로븀 난초를 중앙에 배치해 아티스트를 빗댔다.
LEFTOVER FLOWERS 인스타그램 게시물로 꾸준히 선보이는 시리즈로, 의뢰받은 작업을 마친 뒤 남은 꽃으로 만든 작품을 아우른다. 어떤 재료를 얼마만큼 쓸지 처음부터 가늠할 수 없어 도전이 필요하지만 그래서 더 재미있는 작업이다. 얼마 전 단골 꽃 가게에서 버리기 직전의 양귀비 150송이를 받아온 적이 있다. 배송 과정에서 습기에 노출됐는지 짓물러 손님에게 보이지도 못한 채 버려질 운명에 처한 꽃이었다. 한 송이 한 송이 살펴보며 짓무른 꽃잎을 떼어냈더니 또 다른 멋이 느껴졌다. 요즘 시들어가거나 버려지는 꽃에 시선이 자꾸 머문다.
어빙 펜의 <FLOWERS> <보그> 커버 이미지를 오랫동안 작업한 어빙 펜의 사진집. 서문에 나온 말이 어느 순간부터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피어난 순간이 아니기에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 상처 없이 완벽하게 피어난 순간은 감동적이지만 꽃은 피기 전이나 피어나는 순간에도, 작은 흠이 있거나 시들고 있는 순간에도 충분히 아름답다. 아름다움의 순간은 모든 곳에 도사리고 있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메마름을 포용하다, 정보영
대지예술 베를린에 정착한 이유다. 대지예술이란 대량 생산된 물품을 쓰지 않고 자연을 배경과 주재료로 삼은 미술 작업을 통칭하는 말이다. 더 배워야 할 부분이 많지만 자연 그대로 사용하고, 버려지는 것은 다시 활용하는 방식으로 지향하는 가치를 보여주고 싶다. 내후년쯤에는 베를린에서 만난 새로운 친구들과 함께 스튜디오를 열 생각이다.
시들어간다는 것 3개월 남짓한 여름을 제외하면 모든 계절이 흐린 베를린에 1년 정도 머물면서 가을부터 초겨울까지 단풍이 들고 말라가고 시들어가는 과정을 느리게 지켜봤다. 시들고 마르는 과정에서 탄생하는 고유의 색이 아름답게 느껴졌고, 푸릇푸릇한 생명력만이 식물이 지닌 매력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보그> 촬영을 함께 한 새 작업을 통해 마른 재료가 가진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뭇가지와 줄기를 개성대로 꽂아봤고, 꽃을 빛내기 위한 조연에 그치던 열매나 버섯, 이끼, 연꽃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지속 가능한 아카이브 사실 상업적인 작업을 위해 스튜디오를 식물로 채우는 과정에서 조화를 쓰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조화로 가득 찬 공간이 아름답지도 않을뿐더러 모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프로젝트나 전시를 마치면 버려지는 꽃이 한가득인데 언젠가부터 남은 재료로 조그마한 오브제라도 만들어야겠다고 여겼고 그걸 아카이빙하기 시작했다. 작업의 지속 가능성도 많이 고려한다. 어릴 때부터 엄마와 함께 맨발로 등산을 다니며 나무와 숲, 생태계에 대해 나눈 이야기에 큰 영향을 받은 듯하다.
나만의 비밀 정원 베를린 브뢰한 뮤지엄 뒤편에 있는 숲은 나만의 보물 창고다. 그곳에 떨어진 열매 가운데 재미있는 형태를 발견하면 그 자리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보곤 한다. 즉흥적인 작업을 사진으로 찍은 다음엔 다른 사람이 발견한 순간을 상상하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린다. 바람 때문에 머지않아 쓰러져버릴지도 모르지만 자연에서 온 것을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니 전혀 아쉽지 않다. 해변에 모래성을 쌓고 돌아가는 느낌이랄까.
뜨겁게 타오르는 생명력, 박소희
엘 트라바이 ‘Elle Travaillé.’ 프랑스어로 ‘그녀는 일한다’는 뜻이다. 작업실은 나에게 쇼룸보다는 작업장에 가깝다. 꽃과 식물을 다룬다는 것이 언뜻 우아해 보이지만 사실 우리가 하는 일은 꽃과 함께 하는 치열한 노동과 다름없다.
순간적인 아름다움 유한성은 꽃이 지닌 가장 큰 매력이자 가장 까다로운 특성이다. 작업 시간도 한정적이고, 오늘 피어난 꽃을 내일이면 만날 수 없을 때가 많기에 플라워 스타일링은 계획한 대로 완벽하게 실행하는 데 늘 한계가 따른다. 그래서 대형 설치 작업을 할 땐 밑그림 정도만 미리 그려놓고, 현장에서 즉흥 페인팅을 하듯 유연하고 속도감 있게 작업한다.
보이지 않는 노력 짧은 시간에 창의력을 최대한 쏟아내기 위해서는 손과 몸을 움직인 경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매일같이 꽃 시장을 찾아 새로운 정보와 트렌드를 흡수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신기한 식물이 보이면 깊이 관찰하고, 팀원과 새롭게 활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궁리한다.
NATURE’S CORE <보그>에서 연락을 받고 만든 작품이다. 칡을 활용해 뿌리를 만들었고, 줄기는 10여종의 식물로 덮고 휘감았다. 거대하게 뭉친 초록색 덩어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커튼처럼 축 처져 내려오는 꽃송이와 팝콘처럼 튀어 오르는 꽃망울, 깃털처럼 하늘하늘한 들풀과 위협적일 만큼 뾰족한 잎사귀가 경쟁하듯 빽빽하게 들어찬 모습을 볼 수 있다. 패션, 대중문화, 아트, 라이프스타일 등 수많은 분야를 아우르는 구심점 역할을 하는 <보그>처럼 이질적인 존재가 충돌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담았다.
꽃봉오리부터 만개한 순간까지 지난 10여 년간 꾸준히 전시를 했다. 2022년 금호 알베르에서 선보인 <There be>는 식물이 봉오리에서부터 만개한 순간을 지나 서서히 자연으로 다시 돌아가는 마지막 과정까지 모두 보여주는 전시였다. 지난해 경동시장에 있는 더 윌로에서 연 개인전 <Complex>에서는 시각적 자극을 덜어내고 자연 그대로의 형태에 집중했다. 칡뿌리를 얽히고설키게 설치했고, 나머지 여백은 음악과 조명으로만 채운 것처럼. 올해 눈여겨보는 새로운 공간에서는 꽃에 초점을 맞춘 전시를 열 생각이다. 아직 장소는 공개할 수 없지만 조만간 온갖 색깔이 폭발하는 꽃의 에너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한 아름 건네고 싶은 행복, 이승연
꼬네띠 직접 창조한 말로, ‘공주’라는 단어를 발음하기 어렵던 어린 시절 내가 만들어 아름다운 대상을 지칭할 때 사용해온 말이다. 커서는 작업실 이름으로 쓰고 있다.
베스트 프렌드 꽃을 가장 가까운 친구라 여기며 작업한다. 그런데 가만히 돌아보면 꽃은 플로리스트뿐 아니라 모든 이의 삶의 중요한 페이지마다 같이하는 존재다. 그 소중한 순간을 함께 나누고 축복하는 일이 직업이라니, 정말 행복하다. 꽃을 다룬다는 것은 다양한 행복의 감정을 색상과 형태, 향기를 동원해 즉각적으로 전달하는 일이다. 최근에는 더 세밀한 감정을 꽃으로 표현하기 위한 방법에 골몰하고 있다
최근 작업 타협하지 않고 고유의 스타일을 선보이는 <보그>처럼 이참에 내 고집을 담아 작업을 완성했다. 밝음과 어둠, 여림과 강함 등 상반된 이미지를 동시에 사용하는 것이 내 스타일이다. 들판에서 자란 싱그러운 풀과 바짝 마른 나뭇가지를 함께 배치했고, 알리움의 구불구불한 줄기와 블랙 칼라 꽃잎의 무게감이 공존하도록 완성했다
꽃의 위로 프리랜서를 선언하고 혼자 뉴욕 여행을 떠났다. 마주친 꽃 가게에서 꽃을 한 아름 사 들고 무작정 돌아다니다 거리에서 방치된 폐차를 봤다. 앞 유리가 다 깨지고 문이 떨어져 나간 차는 사고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문득 품 안에 있던 꽃으로 그 차의 끔찍한 흔적을 지워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라와 핑크, 옐로 등 갖고 있던 꽃 색깔이 너무 화려해서 위로와 애도의 뉘앙스가 잘 전해지지 않을까 봐 걱정했다. 그런데 다행히 지나가던 사람들이 사진을 찍으며 “고맙다” “예쁘다”는 말을 건네왔다. 순간 ‘과연 꽃이 놓이지 말아야 할 곳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피어나면서 그동안 갖고 있던 작업에 대한 편견이 사라졌다. 꽃에 담긴 진심은 반드시 전해진다는 믿음도 생겼다.
끊이지 않는 이야기, 김태희
설레는 손님맞이 로스앤젤레스의 새로운 작업실에서 <보그>를 맞이하게 되니 마음이 분주했다.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작업실에 꽃을 오래 두는 편도 아니기에 촬영을 위해 남편과 함께 쓰는 작업실 곳곳을 새로운 꽃으로 채워 연출했다.
클래식 최신 유행과 젊은 감각을 대표하면서도 오랜 시간 쌓아 올린 기본을 잘 지켜오는 <보그>를 떠올리며 완성한 작품은 ‘클래식’을 키워드로 작업했다. 플라워 어레인지의 클래식 컬러로 간주되는 화이트와 그린을 베이스로 숲을 형상화했다. 강렬한 에너지를 표현하기 위해 작업 공간에 식물이 풍성하게 들어차도록 규모를 정했고, 그 안에서 저마다 개성을 뽐내는 식물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도록 마무리했다. 아티초크나 아스파라거스류의 식물, 헬레보루스와 목수국까지 잎이 넓은 소재부터 잔잔한 소재까지 다양한 텍스처를 매치해 깊이를 더했다.
꽃으로 표현한 음악 빌리 아일리시의 ‘idontwannabeyouanymore(azit live session)’와 NCT U의 ‘텐데…(Timeless)’의 라이브 영상은 모두 실내에서 촬영했다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야외 환경을 구현해낸 것이었다. 이처럼 내 작업은 보통 아무것도 없는 커다란 세트장에 숲과 꽃밭을 생겨나게 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평소 강박적으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탐구하고 그 광경에 푹 빠져 지내는 편이다.
다채로운 영감 리스트 회화, 조각, 미디어 아트 등 평소 모든 문화를 가리지 않고 즐기면서 작업 아이디어를 다양하게 확장한다. 장-미셸 오토니엘의 작품에 감명받아 길게 늘어진 진주 구슬을 활용한 적도 있다.
영화미술 로스앤젤레스로 작업 환경을 옮기게 된 가장 큰 이유다. 영화미술은 짧은 순간 선보여야 하는 기존 세트 스타일링 작업과 달라 공부할 것이 많지만 언젠가 내 작업으로 스크린을 꽉 채우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이를 준비하며 구상한 작업이 다양한 공간과 식탁을 연출하는 ‘breakfast*lunch*dinner’ 시리즈다. 단순히 예쁜 연출에 그치지 않고 한 편의 영화처럼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는 이미지를 구상하고 있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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