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패션사 수업: 디스코, 디자이너 데님, 여성해방
여성의 시대였다. 여성해방운동이 진행되는 가운데(1970년 뉴욕에서 열린 최초의 여성 평등 행진 ‘평등을 위한 여성 파업’에는 5만여 명이 참여했다), 옷차림 또한 대담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1970년대 패션은 이전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여성의 신체를 과시했다. 자연스러운 모습을 찬양했으며, 옷은 부드럽게 몸에 밀착되었지만 속옷은 거의, 아니 전혀 필요하지 않은 옷이 많았다. 해방이었다! 여성들은 팬츠와 수트 등 문자 그대로 ‘바지’를 입었다.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청바지가 언제 어디서나 충분히 괜찮은 옷으로 인식된다. 또한 1970년대 패션은 대담하면서도 깃털처럼 가벼운 감성도 지녔다. 메탈릭이 주를 이뤘지만, 구릿빛이 부드럽게 반사되는 루렉스도 인기였다. 컬러는 뽀얀 셔벗에 가까웠고, 아직 네온 컬러가 등장하지 않은 때였다.
디스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초대형 여객기(점보 제트기)를 타기 위해 입고 벗기 편한 옷이 사랑받는 시대였다. 향후 10년의 패션을 전망한 1970년 1월 <보그> 기사에는 “숄, 망토, 판초처럼 몸에 두르거나 스트랩으로 묶거나 돌돌 감싸 연출하는 모든 스타일은 언제나 환영받을 것이다”라는 일종의 자유 선언문도 등장한다. 1974년 8월 비벌리 존슨은 흑인 여성 최초로 <보그> 커버를 장식하며 새 역사가 시작된다. 이는 <보그>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1970년대 여성 트렌드
뉴 로맨티시즘: 몽환
1970년대 초반까지도 히피 룩이 강세였다. 빈티지 아이템과 에스닉 스타일로 포크 정신을 받아들인 디자이너가 있는 반면, 소박한 히피보다는 대초원의 목가적 느낌을 살린 하이패션의 길을 택한 이들도 있었다. 반항적 무드는 옅어지고, 로맨틱한 감성이 진하게 느껴지는 스타일로 런던 기반의 잔드라 로즈(Zandra Rhodes), 오시 클락(Ossie Clark), 로라 애슐리(Laura Ashley)를 비롯해 샌프란시스코의 제시카 맥클린탁(Jessica McClintock)이 이끄는 거니 삭(Gunne Sax), 뉴욕의 조르지오 디 산탄젤로(Giorgio di Sant’Angelo) 등의 브랜드가 트렌드를 주도했다.
새로운 10년의 시작인 1970년 1월 1일 <보그>는 “나른하게 떨어지는 모든 것, 그 나른함이 오래도록 남을 수 있도록 길게 늘어진 프린지… 자신에 대해 조금이라도 꿈꾸게 하는 모든 것”이라며 독자에게 관능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가 될 것을 권유한다. 영화배우 나탈리 우드가 잔드라 로즈의 룩을 입은 화보에는 “가장 순수한 판타지로 가득한 러시아 동화와 영국 동화책 판토마임의 세계가 떠오르는 디자인”이라는 묘사를 덧붙였다.
스포츠웨어 전성시대 그리고 부드러운 테일러링
1970년대 패션을 한 가지 느낌으로 요약한다면, 그건 ‘부드러움’이다. 소니아 리키엘과 미쏘니는 참신하고 고급스러운 니트웨어를 선보였고, 홀스턴은 울트라 스웨이드 소재의 투피스와 몸에 딱 붙는 저지, 캘빈 클라인은 속삭이는 듯한 얇은 새틴 슬립과 더블 니트 저지 수트, 피오루치(Fiorucci)는 스트레치 데님,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는 더없이 편안한 랩 드레스를 출시했다. 모두 유연한 소재를 사용했으며, 보디라인을 따라 관능적으로 흐르는 디자인이 여성의 몸매를 매력적으로 드러냈다. 1977년 8월 <보그>에선 이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표현했다. “스포츠웨어 드레스: 핵심은 부드러움이다.”
스포츠웨어는 운동 경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편안하고 느긋한 감성을 중심으로 급성장한 카테고리로 ‘부드러움’이 키워드였다. 특히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면서 스마트하면서도 실용적인 패션이 필요했기에 무엇보다 편안함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폴리에스테르, 1970년대 생활 원단이 되다
폴리에스테르의 전성기! 1970년대를 대표하는 패브릭을 꼽으라면 단연 폴리에스테르다. 이는 양면 니트(더블 페이스 니트)의 포인트 칼라, 스웨터 스타일 수트, 몸에 딱 붙는 옷 등 당시 유행하는 실루엣에 생명을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생산 비용이 저렴한 패브릭의 부상은 꾸뛰르의 쇠퇴와 맞물린다. 1968년 발렌시아가는 꾸뛰르의 추락한 위상을 한탄하며 파리 매장을 완전히 폐업했고, 같은 시대 활동하던 피에르 가르뎅, 앙드레 꾸레주, 이브 생 로랑, 엠마뉴엘 웅가로 같은 디자이너들은 레디 투 웨어, 즉 기성복 사업에 힘을 쏟는다.
물론 폴리에스테르 덕분에 런웨이에서 볼 수 있는 세련된 수트와 미니 드레스를 저렴한 가격에 만들어 팔 수 있게 되었다. 통기성이 부족하고 플라스틱 냄새가 난다는 단점도 있었지만, 구김이 잘 가지 않고 관리가 쉬워 많은 사랑을 받았다.
폴리에스테르가 여성해방에 공헌한 것이라면 여성을 다리미로부터 해방시켰다는 거다. 덤으로 사무실에서 입을 수 있는 관리하기 쉬운 정장 한 벌도 갖게 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 말, 소비자들은 폴리에스테르에 대한 감흥을 잃기 시작한다. 찬사를 끌어내던 합성섬유란 사실이 폄하 요소로 작용했다.
디자이너 데님: 패션, 청바지를 입다
1973년 미국 고급 백화점 체인 니만 마커스는 청바지 개발자이자 리바이스 설립자 리바이 스트라우스(Levi Strauss)를 ‘전 세계 패션에 가장 중요하게 기여한 미국인’으로 칭했다. 과장일 수는 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누구든, 몸이 어떻든 데님을 입었다. 1950년대 이후 트윌 원단이 워크 웨어에서 스트리트 웨어로 넘어가면서 청바지는 꾸준히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하이패션계에서도 입성한다.
리바이스, 리, 랭글러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뒤따라 캘빈 클라인과 글로리아 밴더빌트(Gloria Vanderbilt), 피터 골딩(Peter Golding), 피오루치 등이 합류한다. 디자이너 데님 시대가 열린 것이다. 1978년 <보그>는 데님의 역사를 추적하는 기사에서 “하찮은 청바지는 디자이너의 로고를 붙일 만한 가치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회의론자들이 청바지 시장이 포화 상태라며 데님의 종말을 이야기할 때, 리바이스의 매출이 떨어지고 많은 매장에서 청바지 가격을 인하할 때, 캘빈 클라인과 제프리 빈(Geoffrey Beene), 랄프 로렌, 오스카 드 라 렌타는 청바지에 멋진 이름과 이니셜을 새겨 브랜딩을 시작했다”고 적었다.
향수나 립스틱처럼 저렴한 비용으로 디자이너 브랜드를 손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기사는 이어진다. “올 초 처음으로 청바지를 선보인 캘빈 클라인은 ‘청바지는 죽지 않았으며 섹시하고 여전히 멋지다’고 단언했다. 그는 합리적인 가격으로 청바지를 만들 수 있는 라이선스 업체를 확보할 때까지 청바지 시장에 뛰어들기를 기다려왔다며 ‘캘빈 클라인 옷을 선망하던 젊은 여성들이 내 청바지를 입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1977년 오픈한 ‘스튜디오 54(미국 뉴욕의 전설적인 나이트클럽으로 캘빈 클라인을 비롯해 유명 셀럽과 아티스트의 명소였으며, 최고급으로 드레스업하지 않으면 입성조차 불가능했다)’는 2년 만에 천재적인 마케팅으로 청바지 시장에 뛰어든다. 그들의 멋진 슬로건은 이랬다. “이제 누구나 스튜디오 54에 들어올 수 있어요(Now everybody can get into Studio 54).”
미국 디자이너의 승리: 베르사유 전투로 새로운 정권이 탄생하다
꾸뛰르 황금기를 이끈 파리풍 유행이 지나간 후, 1960년대에는 ‘런던’이 본격적으로 패션계에 등장한다. 이제 ‘뉴욕’의 차례였다. 맨해튼은 패션을 탄생시키고 방향을 제시하는 디자이너의 안식처였다. 캘빈 클라인, 랄프 로렌, 빌 블라스, 스티븐 버로우즈(Stephen Burrows), 오스카 드 라 렌타, 홀스턴, 앤 클라인이 그들이었다. 고유의 독특한 스타일을 지녔으며, 각각의 레이블은 파리의 패션 규칙을 버리고 자신만의 리듬으로 나아갔다.
멧 갈라, 패션 위크, 국제 베스트 드레서 리스트(International Best Dressed List)를 탄생시킨 천재 홍보 전문가 엘리노어 램버트(Eleanor Lambert)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며, 미국 패션계에 다시없을 근사한 순간을 만들어낸다. 1973년 파리와 베르사유에서는 역사적인 궁전 복원을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 프랑스 디자이너 5인(크리스챤 디올의 마르크 보앙, 피에르 가르뎅, 위베르 드 지방시, 이브 생 로랑, 엠마뉴엘 웅가로)과 미국 디자이너 5인(빌 블라스, 스티븐 버로우즈, 오스카 드 라 렌타, 홀스턴, 앤 클라인)의 패션쇼와 일련의 행사를 구상한 것이다. 오늘날 이 패션쇼는 ‘베르사유의 전투’로 불리지만, 당시 파리의 시선에서 보자면 이들 사이에 경쟁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패션쇼는 두 파트로 나누어 진행했다. 보도에 따르면 나른한 파리지엔 파트에 이어 타이트하게 구성된 미국의 경쾌한 패션쇼가 펼쳐졌으며, 라이자 미넬리가 영화 <화니 페이스>의 OST ‘봉주르, 파리(Bonjour, Paris)’를 부르며 피날레를 장식했다. 1973년 11월 30일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 실린 헤베 도르시(Hebe Dorsey)의 기사는 “미국, 베르사유 갈라 쇼를 훔치다”라는 표현으로 그날 밤의 감동을 요약했으며,“정말 놀라운 건 미국 패션이 이제 성숙해졌다는 사실이다. 프랑스인들은 더 이상 이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고 평했다.
1970년대, 1940년대를 그리워하다
1960년대가 우주 시대를 내다봤다면, 1970년대 패션은 심각한 향수병에 시달렸다. 1972년 개봉한 영화 <대부>나 1940년대 전시 패션과 벼룩시장에서 구한 옷을 입었던 팔로마 피카소에게서 영감을 받은 ‘리베라시옹(Libération)’ 또는 ‘카랑트(Quarante)’라 불리는 1971년 이브 생 로랑의 컬렉션 때문일지도 모른다. (패션을 위해 전쟁의 기억을 찾아낸다는 발상은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의 취향은 전반적으로 1930~1940년대를 레퍼런스로 삼았다. 실루엣은 디올 뉴 룩 이전의 구조적인 어깨 라인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여성들은 기하학적인 프린트의 셔츠 웨이스트 드레스를 입었다.
당시 <보그>의 패션 캡션을 살펴보면 ‘1940년대에서 모티브를 얻다’ 같은 표현이 등장한 예를 여러 차례 찾을 수 있다. 뷰티 카테고리 역시 향수에 젖었다. 1972년 6월호 ‘다크 네일의 대대적인 컴백’ 기사에서는 “1940년대의 또 다른 클래식 컬러, 울트라 바이올렛이 1970년대 네일과 더없이 잘 어울린다”고 단언했다.
음악이 깃든 패션: 디스코 열풍과 펑크의 부상
1977년 존 트라볼타가 막 개봉한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에서 춤을 췄고, 그해 봄엔 스튜디오 54가 환대 속에서 문을 열었다. 디스코가 세상을 지배했다. 사람들은 멋을 내야 했고, 여성들 사이에선 모든 곡선을 감싸는 스판덱스와 몸에 꼭 붙는 저지, 홀터넥 톱과 핫팬츠(1970년대 첫 등장), 플리츠 미니 드레스 등이 유행했다. 디스코 볼의 불빛에 반짝반짝 빛날 수 있으면 더 좋았으며, 루렉스는 메탈릭 소재로 사랑받는다. 또한 플랫폼 힐과 페더드 플립 아웃(날아가는 새의 깃털처럼 풍성하고 가벼운 느낌의 헤어) 헤어스타일이 1980년대 초까지 유행한다. (남성들 사이에서는 디스코 플레어와 과장되고 뾰족한 라펠이 유행했다.)
하이패션도 이 열풍에 동참했다. 홀스턴과 스티븐 버로우즈는 글램 디스코의 제왕이었으며, 노먼 노렐(Norman Norell)의 스트레치 시퀸 드레스는 여성들을 끝없이 매혹했다.
1976년 런던에서는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말콤 맥라렌이 운영한 부티크 숍 ‘세디셔너리즈(Seditionaries, 1974년에는 Sex라는 이름이었다)’를 통해 펑크 패션이 탄생한다. 더 반항적인 음악에서 영감을 받은 이 룩은 정치적 분위기, 지속되는 경기 침체, 자본주의적 삶에 대한 환멸 등 현 상황에 대한 거부를 의미했다. 로맨틱하고 포크적인 시폰 드레스를 선보였던 잔드라 로즈 또한 1977년 ‘컨셉추얼 시크(Conceptual Chic)’ 컬렉션을 통해 너덜너덜하게 표현한 드레스를 안전핀으로 여미고, 구멍 디테일을 고의적으로 뚫음으로써 펑크로 무드를 완전히 바꾼다.
#1970년대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 앙드레 꾸레주, 올렉 카시니(Oleg Cassini), 루디 건릭(Rudi Gernreich), 노먼 노렐, 에밀리오 푸치, 피에르 가르뎅, 엠마뉴엘 웅가로, 제프리 빈, 랄프 로렌, 빌 블라스, 스티븐 버로우즈, 오스카 드 라 렌타, 홀스턴, 앤 클라인, 소니아 리키엘, 미쏘니, 끌로에, 겐조, 이세이 미야케, 조르지오 아르마니, 발렌티노, 벳시 존슨, 메리 맥패든(Mary McFadden), 크리스챤 디올의 마르크 보앙, 토미 너터(Tommy Nutter), 오시 클락, 잔드라 로즈, 진 뮈어(Jean Muir), 빌 깁(Bill Gibb), 비비안 웨스트우드, 제임스 갈라노스(James Galanos), 밥 맥키(Bob Mackie), 조르지오 디 산탄젤로 그리고 노마 카말리(Norma Kamali).
#1970년대 남성 트렌드
제임스 본드부터 믹 재거, 조니 로튼(Johnny Rotten), 밥 말리, 데이비드 보위,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까지, 1970년대는 어느 때보다 남성 패션의 뮤즈로 가득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룩을 꼽으라면 바로 투 버튼 블레이저와 슬랙스로 구성된 폴리에스테르 레저 수트였다. 부담 없고 입기 편하며 관리가 쉬운 것이 마케팅 포인트였다. 타이트한 셔츠, 플레어 팬츠, 와이드 라펠 스타일이 유행했다. 제임스 본드가 로저 무어의 사파리 수트 열풍을 일으켰다. 데이비드 보위는 지기 스타더스트 시절의 깃털 목도리로 글램 록 스타일을 선보였으며(야마모토 간사이(Kansai Yamamoto)가 지기 스타더스트 투어 의상을 디자인했다), 믹 재거는 여성스러운 프릴이 달린 해적 블라우스로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75년에는 레이블을 설립한 이탈리아 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이후 10년의 방향을 제시했다.
#1970년대 문화적 배경
1970년 1월 12일 보잉 747이 런던 히스로 공항에 착륙했다. 민간 비행기 최초로 대서양을 가로지른 순간이었다. 제트기 시대가 열렸고, 패션계는 구김 없는 옷을 선보이며 시대의 변화에 응답했다.
평등을 외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아진 시기이기도 했다. 1970년 여름에는 전미 여성 기구(NOW, 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가 전국 총파업에 들어갔고, 평등을 요구하는 시위의 일환으로 행진을 했으며, 글로리아 스타이넘과 시몬 드 보부아르 같은 인물들이 행동을 촉구했다. 1973년에는 ‘남녀 대결 테니스 매치’가 많은 화제를 모으며 빌리 진 킹(Billie Jean King)이 바비 릭스(Bobby Riggs)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1975년 베트남전쟁이 종식될 때까지 미국 전역에 정치적 불안이 스며들었다. 1972년 닉슨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했다. 영국에선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스펜서의 교제를 공식 발표했으며, 마가렛 대처의 권세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연예계에서는 소니 보노와 셰어가 1971년 첫 방송된 버라이어티 쇼로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다이애나 로스는 1970년 솔로 활동을 시작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1976년 시작한 TV 시리즈 <미녀 삼총사>가 여성들에게 영감을 주며, 파라 포셋이 페더드 플립 아웃 헤어스타일을 유행시킨다. 우디 앨런의 영화 <애니 홀>에서는 다이안 키튼이 입은 랄프 로렌의 옷이 보이 수트를 입고 싶어 하는 여성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패션사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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