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라는 기후 위기 비상 행동_2024 유행 통신
재난과 위기가 계속 발생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불확실한 시대지만, 일상은 계속된다. 우리는 여전히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향유하고 나눈다. 건축, 출판, 영화, 연극, 여행, 미술, 사회운동, 스포츠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업계의 흐름 혹은 작지만 확실한 변화를 이야기한다. 삶을 즐기고 더 낫게 바꾸려는 의지가 구현한 판에서 함께 놀고 싶어진다. 이 기사는 유행을 따르자는 의미가 아니다.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가볍게 관찰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취향 혹은 재밋거리를 발견할 수 있길 바란다.
도심으로부터 다소 떨어진 농장에서 감자를 캐고 수확한 채소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함께 먹는다. 어느 주말 오후의 풍경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공중제B’라는 이름의 퍼포먼스다. 지난해 7월 변방의 시선으로 독창적인 작품과 사회적 맥락을 포착하는 공연 예술 축제인 서울변방연극제에서 상연했다. 관객은 창작자가 공연 3개월 전부터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일군 텃밭에 굳이 찾아가서 흙을 만지고 온전한 형태의 작물을 보고 음식을 만들었다. 왜 이런 형식이어야 했을까. 창작자의 주제 의식이 ‘기후 위기’를 향했기 때문이다. 특히 코로나19를 기점으로 전통적인 극장에서 ‘기후 위기’를 주제로 한 작품이 다수 생겨났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 드라마 안에서 오랜 경고에도 위기를 인지하지 못해 (혹은 하지 않아) 멸망 직전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인간이 시선의 중심에 놓였다.
잦은 화재와 때 이른 폭염, 홍수와 가뭄, 자취를 감춘 벌, 그로 인해 치솟는 채소·과일 가격에도 기후 위기를 내 문제로 자각하는 이는 여전히 드물다. 내 삶과 환경 사이의 직접적인 연결 고리가 없으며 기후 위기가 당사자성이 중요한 정체성에 직결되는 개념이 아니라서다. 텀블러 사용과 같은 실천에도 현실적 효능감을 느끼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환경 변화로 인한 재난을 직접 겪기 전까지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까? 당연히 아니다. 그래서 미약하게나마 변화를 감지해 기후 위기를 실체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과 사람의 대면을 기본으로 하는 공연 예술은 무뎌진 감각을 깨우는 데 탁월한 매체다. 그중 연극은 전통적으로 그리고 상대적으로 동시대의 화두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소수자의 목소리를 담아왔다. 기후 변화로 제일 먼저 피해를 보는 집단이 가장 낮은 곳의 존재라는 것을 떠올려봤을 때, 연극이 ‘기후 위기’에 대처하는 실천적 방법을 고민하는 것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실제로 기후 위기 시대에 지속 가능한 공연 예술 제작을 위한 가이드북도 존재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영국 런던의 ‘시어터 그린 북(Theatre Green Book)’이다. 극장과 예술 현장 전문가 중심으로 제작한 것으로, 기획 단계부터 작품 속 디자인 영역의 제작과 무대 철수, 극장 운영과 관객 이동에 관한 구체적이고 섬세한 지침이 모두 담겨 있다. ‘문화예술부문의 지속가능 가이드북’은 국내 창작·제작 현실을 반영한 버전이다. 해당 가이드북이 제안하는 내용은 공연 물품 리스트 정리, 재사용과 재활용, 이동의 최소화와 지역 자원의 활용, 모듈형 세트 제작, 종이 사용 최소화를 위한 다양한 방식의 인쇄 등이다. 프로덕션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단연 재사용과 재활용이다. 국내에서는 국립극단의 ‘빨간지붕 나눔장터’와 서울문화재단의 온라인 플랫폼 ‘리스테이지 서울’이 공연 물품의 공유와 재사용을 돕는다. 352억원의 사업비가 쓰인 ‘무대공연종합아트센터’(8월 개관)는 국립 공연 예술 단체의 물품 보관을 비롯해 복합 문화 공간으로도 사용된다.
넷제로(탄소중립)를 겨냥하는 연극계의 논의는 지구에서 살아가는 동료 시민으로서의 활동이거니와 동시에 관습에서 벗어난 창작 방법론으로 연극의 새로운 미학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흐름이다. 제작 가이드에 충실할 때, 예술가들은 더하기보다는 빼기를 고민하고 물품의 쓰임을 다르게 발견하기를 요구받는다. 예술가의 상상력과 독창성이 더 많이 필요하며 이런 미션은 연극의 확장성으로 이어진다. 재현이 필수인 영상 매체와 달리, 연극은 연극적 약속과 관객의 적극적 상상이 만나 무대 위에 현실을 표현하는 예술이다. 하나의 작품에서 나무판자는 어머니의 유품이 놓인 테이블이 되었다가, 인물의 미래를 가로막는 거대한 문이 되기도 한다. 수시로 변화하는 오브제의 상징이 작품의 입체적 해석을 돕고, 연극에서만 느낄 수 있는 희열을 만들어낸다.
자연에 대한 인식은 인간 중심의 서사에서 탈피해 동물권과 비인간 존재에 대한 화두로 연결되기도 한다. 팬데믹 시기에 상연한 국립극단의 연극 <로드킬 인 더 씨어터>(2021)는 로드킬과 동물실험을 동물의 관점에서 서술했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의 배리어프리 연극 <펄프픽션>(2023)은 강제로 가지가 잘려나간 은행나무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극장 밖에서 자연의 타임라인을 감각한 예술가들이 토종 씨앗과 균사체, 박쥐를 극장으로 가져와 극장 안에 펼쳐진 자연을 마주하는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의 <기후 프로젝트>(2024)도 있었다.
유의미한 시도에도 여전히 한계가 더 많다. 지속 가능한 창작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과 인력, 이를 뒷받침해줄 예산이 필수적이다. 극장이라는 하드웨어의 성장과 관객의 동참도 필요하다. 개별 작품을 넘어 예술계 차원의 접근이 중요하지만, 여전히 개인의 선의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도 연극은 지속적으로 기후 위기에 주목한다. 과학적 사실과 숫자를 넘어서는 기후 위기에서 파생하는 다양한 감정이 있어서다. 슬픔과 분노, 불안과 죄책감, 절망과 상실 그리고 희망과 사랑. 예술은 기후 위기 속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마음을 꺼내놓고 어루만지고 나눔으로써 전진의 추진력을 얻는다. 여전히 잘 모르겠다면 먼저 간 이들의 손이 이끄는 대로 움직여보자. 중요한 것은 문제를 마주하겠다는 태도이니 말이다.(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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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장경진(공연 칼럼니스트)
- 사진
-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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