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시즌 2는 명불허전이다
2022년 세계 평단의 뜨거운 찬사를 받은 <파친코>(애플 TV+)가 시즌 2로 돌아왔다. 한국인으로서 <파친코>는 작품보다 기획에서 먼저 놀란 드라마다. 여느 OTT에 비해 아시아 시장 공략에 소극적인 애플 TV+가 재일 한국인 가문 4대의 서사를 내놓은 게 우선 놀라웠다. 더구나 <파친코>는 한국어, 일본어, 영어 대사가 혼재하고, 윤여정을 제외하면 서구에 내세울 스타도 없는 드라마였다. 사무라이와 게이샤가 나오는 일본 시대극이나 <오징어 게임>(넷플릭스)처럼 북미권이 열광하는 코스튬 플레이 요소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인의 끈질긴 생명력을 찬양하는 민족주의 감성도 숨기지 않는다. 이걸 이 막대한 물량으로 이토록 고급스럽게 찍어내다니, 대체 수요가 어디서 발생하는 걸까 의문이 든 게 솔직한 심정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의문 자체가 한국이 주요 세계의 관심에서 소외된 국가라는 오랜 콤플렉스에서 비롯한 것이고, 극 중 일본에서 태어나 미국 명문대를 다녔으나 어느 나라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교포 3세 솔로몬(진 하)과 한국 시청자들의 강한 연결 고리였다. 솔로몬이 1980년대 말 꿈꾸었던 과거와의 단절, 식민지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이 이제 실현된 건가? <파친코> 시즌 2가 여전히 장중하고 멋진 연출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적어도 이 시대가 1980년대보다는 솔로몬의 이상에 가까워졌음을 뜻한다.
<파친코> 시즌 1은 두 가지 타임라인으로 전개되었다. 1910년대 부산 영도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김선자(김민하, 윤여정)는 어릴 때부터 셈이 바르고 생활력이 강했다. 소녀 시절 선자는 어판장 관리인 고한수(이민호)와 눈이 맞지만 현지처가 되어달라는 한수의 제안을 거부하고 병약한 목사 이삭(노상현)과 결혼해 오사카로 간다. 이 타임라인에서는 일제의 공포정치와 수탈에 시달리는 한반도 및 오사카 조선인 정착지가 실감 나게 그려진다. 간토 대학살, 공산주의 도래, 원폭 투하, 한국전쟁 등 이 시기 역사를 아는 한국인들은 선자, 한수, 이삭이 고비를 넘길 때마다 안도하긴커녕 불안과 서글픔이 커진다.
또 다른 타임라인은 선자의 후손인 솔로몬을 따른다. 미국 펀드 회사에 다니다가 실직 위기에 처한 그는 회사 측에 제안한다. 도쿄에 가서 그들이 실패한 호텔 부지 매입을 성사시킬 테니 승진을 시켜달라는 것이다. 솔로몬은 땅 주인이 자이니치라서 자기와는 말이 통할 거라 믿었다. 하지만 거래는 녹록지 않다. 땅 주인 노파는 “늙은이들이 왜 고생한 얘기를 늘어놓는지 아느냐”고 묻는다. 솔로몬이 “부담을 가지라는 거 아닌가요”라고 답하자 노파는 그를 쫓아낸다.
노파의 질문은 인물들의 개인사를 통해 역사를 반추하는 <파친코> 같은 콘텐츠의 존재 이유와도 직결된다. 우리가 <파친코>를 통해 찾아내야 할 궁극의 답과 별개로 그 시대, 그 인물에 해당하는 정답도 있다. 노파가 땅을 팔겠다며 회의실에 사인을 하러 오자 미국인, 일본인 임원들은 줄지어 공손하게 명함을 내밀며 고개를 조아린다. 솔로몬은 의기양양하게 “할머니가 이겼어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노파가 사인을 주저하는 것처럼 보이자 임원들의 태도가 돌변한다. 어쩌면 노파는 ‘봐라, 세상이 아직 이렇단다’라고 솔로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건지 모른다. 결국 계약은 파기되고 솔로몬은 회사에서 쫓겨난다. 솔로몬으로선 과거의 역사가 현실의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 만년 ‘2등 시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위치 따위를 자각하는 계기였을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와 식민지, 세대와 세대의 충돌 못지않게 이 드라마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갈등은 성별 간의 그것이다. 아니, 갈등의 양상조차 띠지 못하는 공고한 여성 억압이라는 게 맞겠다.
선자는 “여자가 배워서 뭐하냐”는 어머니(정인지)의 반대로 학교를 가지 못했다. 정작 그를 학교에 보내고자 한 건 아버지인데, 선자의 아버지는 장애 때문에 멸시받는 존재라는 점에서 조선의 ‘정상적인’ 남성성을 대변하는 인물은 아니다. 일본어 한 마디 못하는 선자가 부랴부랴 결혼을 하고 오사카로 건너간 건 처녀가 애를 가졌다는 지역사회의 시선이 두려워서다. 선자가 떠날 때 어머니는 “목사도 남자다”라며 남편의 성욕을 잘 풀어주라고 당부한다. 이후 선자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불굴의 생활력을 발휘하는데, 남편 이삭의 형 요셉(한준우)은 그것을 가부장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선자는 요셉의 대책 없는 어깃장을 반박하는 대신 일을 하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반면 요셉의 아내이자 부잣집에서 하인 수발 받으며 자랐다는 경희(정은채)는 자기 처지를 제대로 인식하고 어떻게든 선자를 도우려 한다.
선자가 이웃집 여자의 도움을 받아 출산을 하는 동안 요셉은 양반이던 자기 신세가 몰락한 것을 한탄하며 술을 퍼마시고, 이삭은 그와 대작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밖에서 좌절하고 집에 와서 아내 패는 조선인 남자가 흔하다는 언급도 있다. 외부의 수탈자에게 저항하는 대신 아내를 식민지 삼아 또 다른 수탈을 자행하는 ‘식민지 남성성’의 전형이다.
한편 이민호가 연기하는 고한수는 그 식민지 남성들의 이상향 같은 인물이다. 그는 돈과 힘을 갖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첩살이를 제안할 정도로 부도덕한 성 관념을 가졌지만 그 여자와 아들을 몰래 후원하는 가부장적 낭만도 있다. 제국주의자들의 도구로서 착취와 전쟁에 가담하지만 피착취민에게 덜 가혹하다는 이유로 약간의 신망도 얻는다. 수많은 모순과 변명으로 점철된 그의 조건부 윤리의식이 현대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여성 억압은 물론 식민지 내부에서만 벌어지는 문제는 아니다. 1980년대 타임라인에서 “이 회사의 일본 지사는 밀려난 자들의 무덤이다”라고 냉소하는 나오미(안나 사웨이)에게 이삭이 묻는다. 그럼 집안 좋고 학벌 좋고 야망 있는 너는 왜 여기 있냐고. 나오미는 자기가 여자라서 밀려난 자들과 경쟁하는 편이 전망이 좋다고 답한다. 나오미는 이삭을 경계하는 동시에 비주류로서 동질감도 보인다. 올해 <쇼군>(디즈니+)으로 명성이 훌쩍 높아진 안나 사웨이가 시즌 2에도 나오미로 복귀하는 게 반갑다.
<파친코> 시즌 1은 이삭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감옥에 가면서 마무리되었다. 이삭은 이 드라마에서 드물게 좋은 남자지만 한수의 말마따나 이상주의자다. 시즌 2 초반, 선자는 투옥된 이삭과 나가사키 군수 공장에 일하러 간 요셉을 대신해 가장 역할을 맡는다. 1945년, 세계대전 말미다. 나가사키에 곧 원자폭탄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극 중 인물들은 모른다. 오사카도 분위기가 흉흉하다. 미군기가 날아다니며 삐라를 뿌리고, 선자 가족도 전쟁 훈련에 동원된다. 굶주림은 일상이다. 여자들은 여전히 끈질기다. 선자는 친구 지윤(정소리)의 제안으로 밀주를 만들어 팔다가 경찰에 잡혀간다. 지윤은 시즌 1 초반 부산 장면에서 양장을 입고 등장한 부잣집 철부지다. 그런 그가 이제는 오사카에서 남편한테 매 맞으며 궁핍하고 억척스럽게 산다. 한수는 감옥에 갇힌 선자를 빼내고는 곧 미군 공습이 시작되니 대피하라고 경고한다. 선자는 이삭을 기다려야 한다고 거부한다. 선자와 한수가 부딪치는 장면은 섹시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집착광공’의 순애보를 좋아하는 시청자라면 이들의 화학작용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로맨스, 전쟁, 강렬한 캐릭터로 시선을 사로잡는 1945년에 비해 1989년 파트는 극적 재미가 떨어진다. 하지만 의미는 풍성하다. 시즌 1에서 시대가 달라졌다며 자신만만하던 솔로몬은 자기 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여파는 세다. 회사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비자가 만료되어 미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동종 업계에 재취업할 가망도 없다. 결국 도쿄에 남아 펀드를 모집하려 애쓰지만 전 회사 임원들의 방해로 그마저 쉽지 않다. 어느 날 솔로몬은 선자의 일본어가 어설프다고 구박하는 점원에게 무르익은 분노를 터뜨린다. “나는 예일대를 나왔고 돈도 잘 번다. 너 따위가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솔로몬의 발악은 오히려 그의 좌절감을 드러낸다. 그는 기어이 선자에게도 쏘아댄다. “언제까지나 할매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살 순 없어요.” ‘부모보다 성공해야 한다’는 건 전후 세대 한국인의 보편적인 목표이자 의무였다. 그래서 솔로몬의 중압감, 좌절감은 한국인에게 낯설지 않다.
선자의 아들이자 솔로몬의 아버지 모자수(소지 아라이)는 빚을 내서 파친코를 확장했다. 곧 일본 경제 버블이 붕괴되고 이들에게 포화가 닥쳐오리라는 걸 아는 2024년의 시청자들은 내내 불안하다. 이 가족의 생존 투쟁은 아직 끝났지 않았다.
시즌 2에서는 선자와 솔로몬 사이 세대, 즉 선자의 두 아들 이야기도 전면에 부각된다. 1945년, 선자의 첫아들 노아(김강훈)는 똑똑하지만 의욕 없는 고등학생이다. 교사가 와세다 진학을 권해도 시큰둥하던 노아는 그 교사도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알자 수험서에 관심을 보인다. 시즌 1에서 선자는 자기가 노아를 지키지 못했다고 자책하는데, 그 복선 때문에 노아의 행보에 더 시선이 간다.
올해 한국에서는 정부와 독립운동 단체들이 따로 광복절 행사를 여는 사태가 벌어졌다. 역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끝없이 해석, 재구성되는 것임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그래서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기록하고 4대에 걸친 영향을 해부하면서 역사와 현실의 관계를 묻는 <파친코>가 더욱 뜻깊게 다가온다. 이것은 학술서가 아니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서사극이다. 하지만 가족, 민족, 역사 등 소위 우리의 ‘뿌리’가 부인한다고 쉽게 벗어던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이것들을 다루는 데 더 신중해져야 한다는 인식을 되새기기엔 충분하다.
<파친코> 시즌 2는 총 8부작이며, 8월 23일부터 애플 TV+에서 매주 금요일 한 편씩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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